<습지생태보고서> - 자기연민과 자기만족, 그 사이에서 나를 보다

 

최규석, <습지생태보고서>, 거북이북스, 2005 

 


누구나 자신의 크기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성장 배경, 경험, 성격, 가치관, 경제 형편 등, 자신의 현재를 설명하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는 그 크기가 남과 다른 나를 만든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는 건, 그래서 자신의 크기를 확인하는 일인 동시에 그 크기의 가변에 필요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책을 읽는 행위 또한 근본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과 나 사이의 관계를 통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런 후에야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법이니까.

이런 맥락에서, 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는 오늘날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크기를 ‘리얼하게’ 확인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한다. 작가의 실제 대학생활이 녹아있기도 한, <습지생태보고서>는 좁디좁은 반 지하 자취방에 모여 사는 젊은이들의 ‘지지리 궁상맞은’ 일화들을 보여주는데, 일단 아주 웃기고, 그 다음에는 씁쓸해지지만 다시 보면 또 어쩔 수 없이 웃게 만드는, 그런 만화다. 그러나 모든 건 상대적이라고 하지 않던가.

누군가는 월세와 등록금에 허덕이며 학업에 들이는 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알바에 쏟아야 하는 대학생들의 처지에 눈물이 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들의 누추하고 궁상맞은 일상이 그저 재미있는 개그 소재로만 느껴질 테니. 말하자면 ‘# 48: 팔이 잘려 본 사람은 손가락 잘린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 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삶의 어려움에 있어서건 자기연민에 빠져 괴로움을 호소하는 누군가는 그보다 더 비참한 경험의 소유자 앞에서 자기위로와 만족을 느끼는 감정의 전복을 맞게 되지 않던가.

<습지생태보고서>는 바로 이러한 상대적 차이, 자기연민과 자기만족 사이의 길항관계 속으로 독자를 인도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최군’과 냉철한 현실감각을 보여주는 대단히 세속화된 사슴 ‘녹용이’이라는 캐릭터 사이의 대화는 이상(理想)과 현실, 이성과 감성 혹은 욕망을 오가는 우리의 내면을 드러내,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기’에 이른다.

그들의 대화는 가령 이런 식인데, 누추하고 구질거리는 차림으로 짐 보따리 가득 들고 걷는 ‘습지친구’들을 쪽팔려 하는 녹용에게 최군은 말한다.   

 

최군: 돈이 없으니 싸게 사려고 멀리 나왔고, 차가 없으니 걸었고, 가릴 데 다 가렸으니 문제없는데, 도대체 뭐가 쪽팔려? 오히려 너의 그 천박한 속물 근성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 아냐?


녹용이: 속물 근성이라니!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너 혼자만 비켜 서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너도 좋은 집에서 멋진 차 타고, 스타일 죽이게 입고 품 나게 살고 싶잖아!?

 

최군: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따위가 이 시대의 가치라는 것은 나도 안다.


녹용이: ....


최군: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들이 마치 개인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듯하지만 그것들은 인간을 구매자로 만들 뿐이다.


녹용이: 여우는 더 이상 뛰어오르기는커녕 서 있을 힘조차 없었어요..

 

최군: 물론 나에게 그런 삶이 온다 해도 나쁠 건 없겠지만 내 안에 있지 않은 것들이 내 영혼을 살찌우진 못할…


녹용이: 너무나 지치고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여유는 포도를 힐끗 올려 보더니… “저 포도는 분명 지독하게 시고 맛도 없을 거야!”라고 말하고는 황급히 떠나 버렸답니다!

 

혹은 타인의 슬픔이 자신에게 전해질까 두려워, 눈 질끈 감고 지나쳤던 비겁함을 자책하는 최군에게 녹용은 말한다.

 


그들의 대화에서 무엇이 자신을 움찔하게 했는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습지생태보고서>를 보는 모든 독자에게 일단 중요한 것은 한바탕 웃어보는 일이 아닐까. 누구나 때처럼 더러워 드러내기 부끄러운 부분은 있으며, 그렇게 “인간이 가진 때를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어야 그것을 벗겨낼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자기연민과 자기만족이라는 극단을 피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새로운 크기로 열어있는 자신을 만드는 시작이 될 테니까.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2
prev 1 ··· 377 378 379 380 381 382 383 384 385 ··· 50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