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 죽음은 어스름한 저녁 빛을 닮았다

송기원, <저녁>, 실천문학사, 2010 


생(生)과 사(死)를 구분해, 생을 얻은 순간에 ‘시작’을, 잃은 순간에 ‘끝’이라는 말을 덧댄 의식에 ‘내’가 있다. 나 이전에 시작은 없었고, 나 이후에는 끝도 없을 텐데,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나는, 내가 없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에서조차 나를 잃을 줄 모른다. 내가 있고 난 후에 줄곧 나와 함께 했던 생이고, 내 몸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생이다. 애초에 나와 무관하게 주어진 생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잊고 싶은 건 많지만 어느 것도 잃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이, 그 생에 매달려 있는 끈질긴 집착을 낳는다. 그 집착이, '끝'이 지닐 수 있는 가뿐함을 지우고, 그 자리에 아쉬움을 가득 채워 죽음의 무게를 더한다. 그러니 생의 무게 또한 덩달아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몸」

참 오래 몸에 머물렀다.

주인인 듯 내가 머무는 동안에, 몸은
벼라별 모욕을 다 겪고, 몇 군데는
부러지고 꺾이고 곪아서, 끝내
만신창이가 되었을 거다.

귓구멍에 감창이 들어차고
뱃구레 가득히 욕지기가 출렁거려
똥구멍이 미어지는 수모를 견대고야, 비로소
몸이 나를 버렸을 거다.

이제 나는 몸이 없는 곳을 떠난다.

그렇게 몸이 없이 사방을 돌아보면, 아아,
몸 이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몸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없구나.

-66쪽, 「몸」전문

 

“몸이 없이 사방을 돌아보면”이라는 가정으로 죽음을 상상해본다. 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나를 생각하니, 처음에는 이 몸의 허망함이 먼저 찾아오더니, 그 다음에는 무중력의 가뿐함이 서서히 다가오는 듯하다. 잊고 싶었지만 잊히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그 몸에 새겨져 무게를 더했던 모양이다. 더욱이 “몸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니, 생을 잃을 아쉬움뿐 아니라, 나를 고집하는 의식 따위가 머무를 데 없다. “태어나 첫 숨을 들이마실 때에도 첫 숨만큼 나는 죽었”고 “날아라 새들아 푸른…… 일곱 살 푸르른 때도 십 분의 얼마만큼 나는 이미 죽었”으니, 서른 해 가까이 살아온 나는 “참으로 열심히” 죽어, 그 몸의 무게를 덜어온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죽음의 상상력으로 숨 쉬는 生”이 이리도 가벼울 수 있음을 짐작해, 낮 동안 뜨겁게 생을 달구던 빛을 지나 어스름한 저녁 빛처럼 다가오는 죽음 또한 기꺼이 생각해 볼 일이다.

 

「저녁」

새의 그림자가 길게 끌고 가는 것은 누구일까

땅거미가 야금야금 갉아 먹는 것은 무엇일까

붉은 옷의 승려가 사는 서녘에서는

마지막 시체가 연기를 피워 올리고

떠난다거나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이미 먼 세상의 일이다

서른세 번, 망자를 거두는 종이 울리면

어렵사리 네가 붙잡은 나마저 사라진다

-43쪽, 「저녁」전문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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