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칼 세이건,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사이언스북스, 2010  


'신의 존재에 대한 한 과학자의 견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칼 세이건이 1985년 영국 글래스고 대학(애덤 스미스의 모교이자 그가 총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에서 강연한 내용을 그의 미망인인 앤 드루얀이 편집한 유고집이다. 부재에서도 충분히 그 내용을 직감할 수 있듯이 종교와 신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그 오류에 대한 칼 세이건의 견해를 담고 있는 책이다. 

우리에게 <코스모스>라는 책과 TV다큐멘터리로 너무나 익숙한 칼 세이건은 그동안 세인들에게 과학자라는 본업보다는 오히려 방송인이라는 곡해를 더 많이 받아 왔다. 코스모스라는 프로그램의 엄청난 흥행과 그만의 지적인 나레이션은 대중들을 우주라는 바다에 심취하게 만들고 코스모스 신드롬까지 만들어 냈다. 그래서 과학계에서는 그를 보는 시선이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깊이가 없고 대중의 인기에 편승하여 과학을 마치 무슨 엔터테이먼트인 것처럼 전략시켰다는 곱지 않는 평가와 과학자로서의 명확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는 판단에 근거해 그를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정도로 격하시켜 놓기도 했다. 물론 수긍이 가는 평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그의 유고작을 접하게 되면 그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면을 일거에 불식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동안 종교와 과학 그리고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공방은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이제는 창조론이 맞다 진화론이 맞다라는 소모적인 논쟁 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종교와 과학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찰스 다윈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종교의 영역에서 과학을 분리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대중들을 미혹시키는 종교적 장막을 걷어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종교적인 장막에 눈이 가려진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대중들에게 이제 더 이상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의 의미는 많이 희석되어 있다.

칼 세이건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리처드 도킨스'이다. 도킨스는 그야말로 진화론의 투사이다. 종교와 신에 대한 정곡을 보이는 족족 그대로 간파하여 한방에 해체해 버리고 쓰러진 신에 대해서 확인사살까지 하는, 종교계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두렵고 무서운 존재로 비쳐진다. 한편으로 진화론자들의 입장에서 도킨스만큼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학자도 없기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칼 세이건은 왠지 우유부단하면서 조용하다. 속된 말로 뜨뜨미지근하다고 할까 이것 같기도 하면서 확실하게 이것이라고 결론짓지 않는다. 그래서 주위 진화론자를 비롯한 독자들에겐 그 포스가 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그동안 수세에 몰렸던 과학이 대반전을 통해서 종교에 판정승을 거둔 시기에는 맞는 표현이 될 수 있어도 세월을 돌이켜 보면 칼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이건이 보여준 그동안의 성향은 그가 우주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소멸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로서의 사고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40-150억년이라는 천문학적인 개념과 초속 30만 키로라는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바라보는 우주는 종교, 신, 과학, 창조론, 진화론 등의 세세한 다툼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저 우주라는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이고 이에 대한 소소한 편차는 작은 단편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찌보면 무의할 수도, 서두를 필요도 없는 것일 수 있다. 

도킨스가 소를 물가로 끌고 가기 위해 물에 대한 효용과 그 기원 그리고 과학적 증거들을 들이대면서 소를 회유하고 강박하고 질타하면서 이끌어 왔다면 세이건은 소가 저절로 물가로 오기까지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소가 질문하는 말에 끊임 없이 힘든 대답을 하면서 결국 물가로 인도했다고 볼 수 있다. 도킨스가 종교를 한방에 질식사 시켰다면 세이건은 서서히 사형선고를 내린 셈이다. 물론 도킨스를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동안 수십 세기 동안 종교가 자행해왔던 일을 돌이켜 볼 때 종교의 성격상 한방에 그 콧대를 꺽지 못하면 그 엄청난 자생력으로 또다시 대중을 미혹시키는 반동적인 현상을   보일 것이기에 도킨스의 방법론이 전혀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현상과 관련하여, 오늘날 종교의 극단적인 근본주의가 대두하는 것은 현대에 들어서 그만큼 종교의 입지가 좁아져 또 다른 출구를 찾기 때문에 도킨스의 처방이 어쩌면 유효적절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이건의 생각은 다소 다른 부분이 있다. 우주탄생과 성장이라는 경이롭고 거대한 현상 앞에서 그저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인내심을 갖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고집스럽고도 회의적인 접근방식이야 말로, 우리가 지금까지 검증하고 연마한 결과로 오늘날 과학이라 부르는 패러다임이 탄생했듯이, 다소 우직스럽고 더디더라도 종교가 말하는 내용을 들어주고 거기에 대해 요목조목 증거를 제시하고 설득해 나가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그의 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세이건(물론 도킨스를 비롯한 모든 과학자들)은 종교를 과학으로 대체하고자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 위안과 희망을 제시하는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다만 종교가 과학의 영역까지 침범해 대중들을 현혹시키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다. 세이건이 바라보는 종교와 과학의 문제는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과 동일시된다.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 속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하고 그 요소들이 하나하나 서로 연결되어 우주라는 메타포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와 과학이라는 영역은 이런 관점에서 각자의 역활을 수행해 가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영역을 넘어가는 순간 우주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세이건의 과학관과 종교관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정확하게 여기다 저기다 하고 구분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덩샤오핑은 흑묘든 백묘든 쥐만 잘 잡으면 훌륭한 고양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쥐를 잡는 방법과 쥐와 공존하는 방법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듯이 종교적 입지가 좁아들수록 극단적인 근본주의가 창궐하며 이에 대한 과학적 해결방안은 그리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세이건의 종교적 견해는 이런 측면에서 지금의 과학계에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종교와 신에 대한 부정보다는 어린이가 특정한 교리나 음악, 예술이나 제의에 일찌감치 노출되면 성장해서는 그런 것들을 마치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듯이 인내심을 갖고 꾸준하게 그들과 대화하고 설득해 나가는 방법론이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와 과학의 대치와 공존이라는 개념도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에 일부분임을 잊지말야 할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물잡이'님은?
모든 것에 미혹(迷惑)되지 않는 불혹의 뜻만큼 진실한 독서는 40부터라고 생각하기에 요즘 부쩍 책을 더 가까이 하게 되는것 같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느낄 수 없는 소통을 책과의 만남에서 찾고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저 책을 읽어나갈 뿐이다. 행복이 동사이길 바라듯이 독서 또한 타인과의 소통행위로 인식하면서 삶의 새로운 이정표를 향해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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