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그: 서정 소품집> - 그리그의 일기장

 

에밀 길렐스, <그리그: 서정 소품집>, DG THE ORIGINALS, 1996  
 

작은 것이 아름답다 

작곡가들이 곡을 쓰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다른 작업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하나의 작품만을 깊게 파고드는 경우도 있고, 자잘한 작품 여러 편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방법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다소 실험적이어서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거나 음악적 구성이 치밀한 대곡을 쓰기에 좋은 환경이다. 대곡을 써서 발표한 뒤의 작곡가들은 얼마간의 휴식기를 갖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이때 간간히 소품들을 쓰며 감각을 유지하기도 한다. 소품은 이름 그대로 5분 안팎(보통 5분도 되지 않는다)의 짧은 길이와 소박한 악기 편성, 단순한 형식으로 쓰인 작품들을 의미한다. 절제된 음악적 상황 속에서 최대한의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야 하는 이러한 소품들은 교향곡이나 협주곡처럼 큰 스케일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장르에서는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우리에게 들려주며, 언제나 곁에 두고 열어볼 수 있는 사진첩 같은 음악들을 선사한다.

에드바르드 그리그의 일기

래도록 유럽음악계에서 겉절이 신세를 면치 못하던 북유럽의 노르웨이. 그런 가운데 혜성 같이 등장한 에드바르드 그리그(Edvard Grieg,1843~1907)는 그야말로 ‘민족의 재간둥이’였다. 민속적인 색채와 민요 수집을 바탕으로 한 그의 음악생활은 국가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31세부터 연금혜택(사실 요런 게 알짜배기다)을 받게 되었고, 사랑하는 아내 ‘니나’와 함께 바닷가가 보이는 베르겐 외곽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 ‘트롤드하우겐(Troldhaugen)'에 집을 마련해서 작곡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 여유롭고 푸근한 나날들 가운데 그리그가 틈틈이 일기를 쓰듯, 큰 작품들의 사이사이에 작곡한 곡들은 피아노 소품들이었다. 그리그가 평생에 걸쳐 쓴 66개의 소품들은 10권의 악보집에 추려져「서정 소품집(Lyric Piece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읊조리듯 담담하면서도 아련한 애수가 담긴 선율들은 내밀하게, 때로는 천진난만하게 흘러간다. 화려한 기교를 내세운다거나, 장대한 형식미가 돋보이는 것도 아닌 이 자그마한 작품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된 가장 순수한 곳을 건드리며 우리를 추억에 젖게 만든다.


<Troldhaugen>
 

「서정 소품집」의 가장 첫머리를 장식하는 ‘아리에타(Arietta)’는 2/4박자로 된 23마디의 지극히 짧은 곡이다. 그 선율은 오르골을 조심스럽게 열었을 때 ‘스윽’하고 나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멜로디와도 같다.「서정 소품집」안에 있는 작품들 대부분 이런 스타일이며, ‘고독한 방랑자’ ‘향수(鄕愁)’ ‘할머니의 미뉴에트’  ‘옛날 옛적에’ ‘회상’ 처럼 척 보기만 해도 감상적인 각 곡들의 제목과 섬세한 선율들은 마치 동화책을 읽는 듯, 친근하고 소박한 매력이 넘쳐난다. 언제 어디서나 부담 없이 들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도 참 좋은「서정 소품집」(수면유도용으로도 아주 좋다). Op.12-1번 '아리에타'로 시작해서 마지막 10권인 Op.71의 마지막 곡, 7번 ‘회상’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옆에서 피아노를 연주해주고 있는 키 작은 그리그 할아버지(정말 작았다고 한다.160cm가 될까 말까 였다니)의 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 연주를 들을 때는 첫 곡 ‘아리에타’부터 마지막 ‘회상’까지 쭉 이어듣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그가 젊었을 때 작곡한 ‘아리에타’의 2박자 선율은 노년에 작곡한 ‘회상’에서 3박자의 왈츠로 바뀌어 나오는데, 청춘과 노년의 감회가 같고도 다른 음악 위에서 새삼 교차되는, 그 묘한 여운을 느끼기에는 그 방법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내 가슴 두드리던 아득한 그 종소리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Emil Gilels)’는 소위 ‘강철의 타건’으로 유명하다. 다소 험상궂어 보이는 외모와 더불어 자비심 없이 피아노를 내려치는 날렵하고도 옹골찬 그의 타건은 차이콥스키, 베토벤, 브람스 등 격정적이면서도 진중한 음악에서 빛을 발한다. 모노 시절부터 최근까지 미켈란젤리, 기제킹, 리히테르,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등이 주목할 만한「서정 소품집」의 녹음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서 길렐스의 연주가 구하기도 쉽고, 연주의 퀄리티 역시 말할 수 없이 뛰어나다. 이 녹음에서의 길렐스는 앞서 말한 ‘강철 타건’ 대신에 푸근하면서도 또렷한 선율과 과도하게 흐느적대지 않는, 건강한 로맨티시즘으로 채색된 지루하지 않은 연주를 들려준다. 과장되지 않은 왼손의 베이스 라인과 맑고 풍성한 종소리처럼 울리는 화음, 따스하면서도 중심이 잡혀있는 음색의 선율미는, 그가 이 곡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때로는 감성이 충만하게, 때로는 일말의 가식없이 건반을 두드리는 그의 손길을 떠올리면, 어느새 눈앞에 다가올 가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박현준'님은?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있으며 지금은 공익근무요원으로서 어정쩡한 신분의 삶을 살고 있는 남자입니다. 남의 연주에 대해 끼적이는 걸 좋아하면서도 음악을 공부하며 생긴 어정쩡한 동업자 정신 탓에 나쁜 연주를 나쁜 연주라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암튼 정체가 수상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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