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삶> - 일상에 더해진 쉼표 하나, 그리고 생각하는 시간

장 그리니에, <일상적인 삶>, 민음사, 2001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또 어제 같은 날, 그런 날이 지속되는 때면, 그 무엇보다 지나간 어제의 의미가 아쉬워진다. ‘오늘을 살았다’가 아니라 ‘오늘도 살았다’라고 말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치워버리고 마는 어제. 나날의 삶이 무의미한 듯하고, 일상이 별다른 자각도 의식도 없이 애초부터 낯익은 것처럼 느껴지며 지나가는 그런 때. 일상을 의미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한 박자의 휴식, 쉼표 하나의 여유가 간절해진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때.

<일상적인 삶>이라는 책을 펼쳐든다. 일상적인 삶의 무게에 치여 그것의 무게를 덜어내고자 찾아낸 쉼표 하나. 의미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마는 일상적 행동들을 되짚어 보며, 그 행동들이 채워나간 어제와 오늘을 의미로 되살리려는 노력. 책을 펼쳐들고 보니, 그 모든 것이 <일상적인 삶>에 담겨진 듯하다. 그렇게 장 그르니에의 예민한 시선과 생각의 깊이를 따라 일상의 이면과 속내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다.

“우리의 평범한 삶이 별다른 일탈이나 삐걱거림 없이 지금의 모습대로 유지되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톱니바퀴가 분주히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에 조금만 생각을 멈추어보면 이내 수긍이 갈 것이다.”
-김용기, 옮긴이의 말

“우리의 일상과 관련된 행동들, 이 모든 존재 양태들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표면적인 목적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들을 분석해 보면, 일상생활로부터 삶의 결 자체로 넘어가는, 나아가 예술 작품에까지 다다르게 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오솔길이 드러난다.
” -본문 중

그리니에는 여행, 산책, 포도주, 담배,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향수, 정오, 자정이라는 일상의 소주제들에 주목한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부터 출발해, 꼼꼼한 지성의 분석을 거친 그 주제들은 처음의 그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 나에게 다가온다. 하나, 하나 나뉘어져 있는 그 일상에 대한 이야기 중 어느 것을 먼저 꺼내 보아도 좋다. 마치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지나간 시간 중 일부만을 떼어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되새김질 하는 우리의 일상처럼. 

산책을 나가볼까, 여행을 떠나볼까. 아니야. 잠자는 게 제일 좋지. 그래. 수면으로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마무리는 독서로. 혼자서 중얼거리며 그르니에가 찾아내 보여주는 일상적 삶의 결들을 천천히 따라 걷는 마음이 즐겁다. 그가,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공백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할 때,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일상사 가운데 어떤 빈틈이, 그러나 내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어떤 것이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빌어, “우리 유년의 나날들 가운데, 우리가 살지 않고 그냥 비워 보냈다고 생각하는, 그렇지만 좋아하는 책 한 권과 함께 보낸 날들만큼이나 충만하게 살아낸 시간도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 앞에 섰을 때, 지금 장 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을 읽고 있는 내 일상의 시간이 얼마나 충만하게 채워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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