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 관현악곡 전집> - 드뷔시의 바다


뒤트와, 앙세르메, 샤이 등, <드뷔시: 관현악곡 전집>, DECCA COLLECTORS, 2004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어느덧 7월, 여름은 정말 여름이다. 장맛비 소식도 들려오고 찜통 같은 날씨는 사람들의 불쾌지수를 한껏 높인다. 이때쯤 되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휴가를 꿈꾸며 바다나 계곡 같은 시원한 곳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 같아선 ‘배째라’ 정신으로 6,7,8월 세 달 동안 모조리 휴가를 내고 싶지만, 자신의 30년 앞날을 위해서 참아야만 하는 분들을 위해, 이번에는 귀로 들을 수 있는 바다에 대해 써보려 한다.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Achille Claude Debussy)가 1905년에 작곡한「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소묘-바다」는 그 다채로운 관현악법을 통해, 듣는 이들에게 바다의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작품이다. 4명의 지휘자가 각기 다른 스타일로 그려낸 바다는 어떤 느낌들일까?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 사진과 그림
     
 

                  헤베르트 폰 카라얀                VS                  샤를 뒤투와

    


독일의 평론가이자 음악학자인 파울 베커는 프랑스 스타일의 오케스트라를 대략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
독일식의 힘찬 소리가 아닌 가늘고 기름기 없는 금관, 다소 뒤로 밀려난 바이올린군독일식 오케스트라의 크레셴도(점점 크게)와는 다른 데크레셴도(점점 여리게)의 오케스트라드뷔시의 절정은 소멸, 해체, 감소의 이미지이다…”

즉, 프랑스 레퍼토리에 맞는 오케스트라의 스타일은 크고 꽉 찬, 억센 소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악기 각각의 색채를 충분히 살려 여운을 남기듯 아스라이 사라지는 스타일인 것이다.

너무나도 프랑스적인 이 곡을 두고 상반된 해석을 내놓은 두 지휘자가 있다. 독일-오스트리아 계통의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연출력과 기본기에서 쉬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 위력을 보여주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생존한 지휘자들 중에서 프랑스 레퍼토리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샤를 뒤투아가 그들이다.

어떤 곡을 연주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보장하는 카라얀은 과연 ‘능력자’답게 이 까다로운 곡을 전혀 어렵지 않은 듯 요리해나간다. 하지만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조합에서 느껴지는 체취는 매우 강렬해서 이 곡을 드뷔시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거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거대한 교향시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타악기와 금관이 광활한 울림으로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압도적인 음색의 현악기들과 목관이 거대한 독일식의 소노리티로 ‘바다’를 -아마 드뷔시도 상상하지 못했을-그 위에 펼쳐낸다. 하지만 무게감 있는 음악에서 강세를 보이던 오케스트라의 한계인지,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제 2곡 ‘바다의 희롱’에서는 다른 연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민첩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필요한 ‘치고 빠지는 센스’가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반면 뒤투아와 몬트리올 심포니 연주는 앞서 말한 ‘프랑스적 오케스트라’의 미덕을 충분히 살려낸다. 만약 카라얀의 연주를 먼저 듣고 난 뒤 뒤투아의 연주를 듣는다면 그의 포르티시모는 카라얀의 그것보다 싱거운, 불완전 연소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뒤투아의 연주는 청각으로 느낄 수 있는 물결의 희롱과 색채감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1곡의 피날레를 티슈 홑겹이 하늘하늘 떨어지듯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데크레셴도로 마무리하는 뒤투아의 손길은 숱한 지휘자들 중에서 왜 그가 프랑스계 음악의 적자로 인정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음반 재킷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사진으로 바다를 ‘보여주는’ 카라얀과 오묘한 터치의 유화로 바다를 ‘그려낸’ 뒤투아의 대결인 셈이다. 


뜨거운 바다와 에메랄드빛 바다
   

 

                          장 마르티농                  VS            클라우디오 아바도 

    

          
프랑스 레퍼토리 지휘의 계보는 앙세르메-마르티농에서 뒤투아, 아바도 등으로 이어지며, 최근에는 정명훈의 연주도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다. 프랑스의 지휘자 장 마르티농(Jean Martinon,1910~1976)은 작곡과 지휘를 겸했던 사람으로서, 수많은 프랑스 관현악곡들을 녹음으로 남겨 놓았다. 특히 프랑스 국립 방송교향악단(이하 ORTF)과의 연주들이 상당히 뛰어난데, EMI에서 2장의 CD에 드뷔시의 중요 관현악 작품을 모아놓은 '제미니 시리즈‘의 일환으로「바다」역시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르티농의 바다는 뜨겁고 격렬하다. 폭풍우가 몰아치며 뇌성이 울리는 바다를 보는 느낌인데, 뒤투아의 연주와 비교해 들어보면 좋은 비교가 될 듯싶다. 마르티농은 단순한 스코어의 재현에서 그치지 않고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오케스트라에 불어넣으려 노력하며, ORTF 오케스트라 역시 이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습기 찬 여름날처럼 끈적거리는 현과 광폭하게 울리는 타악기의 어택이 상당히 인상적인 연주이다. 특기할 점은 마르티농이 이 녹음에서 사용한 1909년의 개정판 악보이다. 상당수 녹음에서 선택한 1905년판과는 달리 1909년판에서는 작곡가의 지시에 따라 마지막 3번째 곡의 코다 부분에서 트럼펫의 반음계 선율이 제거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발매되었으며 이전 세대의 훌륭한 녹음들의 아성을 깰 수 있는 연주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우리시대의 거장,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 2003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실황음반이다. 세계각지의 정상급 연주자들을 파트별로 모아서 조직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답게 출중한 기본기를 소유한 그들은, 다른 연주에서는 밋밋하게 처리된 솔로 패시지도 매우 아름답게 연주해낸다. 또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 자칫하면 간과될 수 있는 앙상블의 밀도나 정교함 면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에 올라서 있다. 이들을 이끌어가는 백전노장 아바도의 솜씨는 더욱 기막히다. 바닥이 보이는 태평양의 에메랄드빛 바다처럼 악기군의 특성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투명한 사운드와 정교한 밸런스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청각적 호사를 제공한다. 특히 타 녹음에서는 들리지 않던 목관악기의 소리가 상당히 선명하게 들리는 색다름도 만끽할 수 있으며, 이러한 디테일에서의 강점들을 발판삼아 마지막 3곡에서 피날레를 향해 큰 그림을 그리며 달려가는 긴장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박현준'님은?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있으며 지금은 공익근무요원으로서 어정쩡한 신분의 삶을 살고 있는 남자입니다. 남의 연주에 대해 끼적이는 걸 좋아하면서도 음악을 공부하며 생긴 어정쩡한 동업자 정신 탓에 나쁜 연주를 나쁜 연주라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암튼 정체가 수상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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