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우가 연주하는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1번> - 정열과 진지함의 융합

백건우, <백건우가 연주하는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1번>, UNIVERSAL, 2010


지속가능한 우울함

브람스의 고향은 북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다. 어쩐지 축축하고 어두운 잿빛도시의 느낌이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차분하고 알 수 없는 기품이 서려있는 이곳은 브람스의 음악과 그의 성격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음악은 흔히 ‘북독일적’이라고 표현되는 정서로 대변된다. 쉽게 무너지지 않을 듯 튼튼하고 두터우면서도 어슴푸레한 어두움이 깔린, 가을의 정취를 생각나게 하는 그의 음악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돼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브람스 음악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다소간의 우울함과 쌉싸래한 맛이 느껴지지만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우울함이 아닌, 오래 들을수록 깊이가 느껴지고 곁에서 같이 한숨 쉬어주며 울어줄 수 있는 푸근한 친구 같은 음악이 브람스의 음악인 것이다. 함부르크에서 성장한 브람스의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에는 그런 북독일의 정취가 담겨있다. 

열정, 답답함, 방황... 그리고?

브람스는 이곡을 참 오래도록 만지작거렸다. 처음에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로 구성했던 것이, 생각보다 스케일이 커져서 뒤늦게나마 교향곡으로 개작하려고 했지만 ‘쓰다보니 그건 또 영 아닌 듯?’ 싶어서 피아노협주곡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이 곡은 피아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현란한 테크닉과 교향악적 장대함이 함께 살아 숨 쉬는 멋진 곡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이 곡을 쓰던 시기는 슈만에게 발탁되어 대내외적으로 알려지던 시기와 맞물린다. 어정쩡한 위치의 작곡가 지망생에서 벗어나 슈만이라는 당대의 거물이 서포팅해주는 유망주가 된 그는 희망에 찬 삶을 살고 있었고, 그런 길을 열어준 슈만 부부에게 크나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뒤인 1854년에 슈만이 고질적인 정신병의 재발과 그로 인한 자살기도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브람스 역시 몹시 당황스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젊은 브람스의 지원은커녕 슈만 집안 내부의 문제가 더 시급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젊은 브람스의 마음을 더욱 답답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 감정들은 오랫동안 돌고 돌아 한 곡의 피아노 협주곡에 담기게 되었다.

젊은 음악가로서의 열정과 자신감, 보장되어 있는 줄만 알았던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로인한 방황과 혼란스러움 등이 이 한 곡에 거대하게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청년 브람스의 그 포효는 1악장의 서두부터 들을 수 있다. 조금은 거창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팀파니의 울림을 타고 으뜸화음을 격렬하게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총주는 듣는 이를 압도한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 뒤로 전개되는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인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단편적으로 선율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기존의 협주곡의 양상과는 좀 다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음악적 통일성은 유지하면서도 피아노는 피아노만의 어법으로, 관현악은 관현악만의 어법으로 그 음악적 요소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한 악장 내에서 피아노와 관현악은 거대한 대칭쌍곡선을 그리며 어느 한 점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 ‘한 점’에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선율들은 이전 세대작곡가들의 음악보다 더 긴 호흡으로 노래하며 관현악법은 굵은 선으로 채색되어 있다. 또한 젊은이답지 않은 진지한 깊이와 우수가 서려있는 느린 악장의 절제미는 선배 작곡가들이 비슷한 나이에 썼던 협주곡의 명성에 절대 뒤지지 않는 실력을 보여준다.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기

최근 출시된 백건우와 엘리아후 인발의 연주(녹음은 2009년)는 감정과잉으로 치닫지 않으면서도 브람스 음악에 내재된 특유의 폭발력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약간은 미지근한 듯이 느껴지는 온도지만 객관성을 유지하는 그들의 해석에 오히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생각보다 지루하지도 않다. 외려 이런 베테랑다운 모습으로 연주하는 청년 브람스의 음악은 초로의 신사가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는 듯한, 색다른 해석을 들려주고 있다.
인발이 지휘하는 체코필의 연주 역시 백건우 특유의 담백하고 사색적인 성향에 맞춰, 박진감 넘치는 경쟁보다는 독주자가 자신의 음악을 마음껏 그려낼 수 있는, 넉넉하고 편안한 캔버스를 준비해 놓고 있다. 특히 이런 경향은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가 조지 셀의 지휘로 협연한 동곡의 녹음과 비교했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백건우의 피아노 소리는 이전의 녹음에 비해서 보다 밝고 또랑또랑하게 들려오는데, 녹음을 진행하면서 사운드 자체의 퀄리티를 만들어 나가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더불어, 커플링 된 두 개의 변주곡들 역시 또 하나의 보물인데, 쉽게 접하기 힘든 레퍼토리인 만큼 희소성도 있고  변주곡에 필요한 다양한 색채감각을 한껏 느끼게 해주는, 완성도 높은 훌륭한 연주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박현준'님은?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있으며 지금은 공익근무요원으로서 어정쩡한 신분의 삶을 살고 있는 남자입니다. 남의 연주에 대해 끼적이는 걸 좋아하면서도 음악을 공부하며 생긴 어정쩡한 동업자 정신 탓에 나쁜 연주를 나쁜 연주라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암튼 정체가 수상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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