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 자신만의 속도로 걷는 청춘들

박근영,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나무수, 2010


오랜만에 쓰는 북리뷰. 어제부터 내리는(지금은 잠시 소강상태) 비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일 년 중 이맘 때, 날씨만 화창해도 하루 간단없이 행복해지고 신발에 최면이 걸린 사람처럼 밖으로 밖으로만 돌려고 한다. 당연히 책은 뒷전이 되고 심각한 생각도 인생을 다하여 이끌어 갈 주제도 잠시 유보된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 든 감정은 글쎄, 후회였다.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이십 대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걸어보지 못한 곳이 많았다는, 자주 찾아가서 사랑해주고 이름을 알아주었던 곳이 너무 적었다는 후회.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은 잡지사 기자로 일하다 돌연 사표를 내고 한동안 백수로 살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수많은 이들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책으로 펴내고 있는 박근영의 두 번째 인터뷰집인데, 각 인터뷰이들의 의미 있는 공간을 소개하는 란에 (홍대 같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성북동 산동네, 명륜동, 청파동, 와룡 공원, 두무개 다리 등 서울의 속살들-유명한 듯 유명하지 않은 장소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특히 <불을 지펴라>라는 단편 영화 감독 이종필은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서울 시내를 하염없이 걸어 다녔던 주인공이 곧장 생각날 만큼 무턱대고 걷고 달리는 인물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열세 명의 직업은 포토그래퍼, 패션 디자이너, 연극배우, 화가, 영화감독, 인테리어 잡지 에디터, 만화가, 뮤지션, 여행 작가, 건축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시인이다. 제일 유명한 사람을 들라면 건축가 백지원쯤 될까(다 써놓고 보니 허밍어반스트레오의 이지린도 있다, 다만 나는 허밍어반스트레오가 이지린의 원맨프로젝트라는 것을 몰랐을 뿐, 이지린이 남자였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 알고 보니 그는 내가 좋은 장소로 기억하는 가로수길 조그만 북카페 <p532>의 공간을 디자인한 건축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얼마 전에 소개했던 최윤필의 인터뷰집(<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과 마찬가지로 메인스트림이라고 치부하기엔 꽤나 비포장도로를 달려온 청춘들이 대부분. 모범생, 평탄한 학창시절을 보냈기보다 대학에서 막상 전공을 선택하고도 과연 이 공부가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던 삶들이 360여 페이지에 고스란히 펼쳐진다. 배부르고 등따신 것을 선택하는 것 대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오롯이 자신에게 의지해 다소 배고프고 냉랭한 바닥에서 잠을 잘지언정 떠돌고 마침내는 그 유목의 시간에 충실하게 보답해 나가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젊음을 한 장 한 장 읽으며 어쩌면 애초에 느낀 나의 후회는 서울의 가보지 않은 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리란 생각을 뒤늦게 했다.

앞서 읽은 최윤필의 인터뷰집이 신문기자 특유의 산문정신에 입각해 쓰인 책이었던 반면 박근영의 책은 자유로운 청춘, 구속되지 않은 젊음의 감성에 의지해 공감으로 짜내려간 인터뷰집이다. 언뜻 이십 대 초반에 즐겨 읽었던 <페이퍼> 잡지 특유의 친숙한 종이 질감, 그 비슷한 무엇이 손에서 만져질 것 같았다. 같이 작업한 포토그래퍼 하덕현과 인터뷰이 중 한 명이었던 여행 작가 변종모의 아름다운 사진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책의 묘미였다.

무엇보다도 걷고 싶어졌다. 서울이 아니라도 너무 빨리 바뀌지 않는 곳 어디쯤을. 다행히 만화가 김풍이 자신에게 일상의 탄력이 되는 공간으로 소개한 곳 하나가 내가 사는 지역이었다. 대전의 문창동. 일기예보가 틀렸나, 오늘도 비가 많이 올 거라고 했는데 인터미션이 꽤 길다. 하늘이 어둡긴 해도 걷기엔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베짱이세실'은?
독서와 작문, 피아노를 치는 게 ‘진짜 취미’인 베짱이. 베짱이라고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현재 자발적 백조. 덕분에 집중적인 독서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 의향이 (아직까지는)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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