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피> - 돌이킬 수 없는

 

김이설, <나쁜 피>, 민음사, 2009


보통의 경우, 책을 다 읽고 나면 리뷰를 어떻게 쓸지 밑그림이 나온다. 그 밑그림을 바탕으로 며칠 더 씨름하고 채색을 하면 리뷰는 완성된다. 그런데 <나쁜 피>는 책을 덮는 순간은 물론, 일주일이 지나도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밑그림은커녕 ‘아프다’는 막연한 생각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등장인물 화숙과 수연을 생각하면 아픔은 여지없이 찾아왔고, 그들의 현실을 상상하면 답답한 마음만 커졌다.

화숙은 낡은 버스 터미널에서 오락실을 하는 30대 중반의 여인이다. 20대 시절 악을 쓰고 돈을 벌어 가게를 열었지만, ‘유동인구가 많아 장사가 잘 된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이 거짓인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님도 없이 어지러이 반짝이는 오락기만 보다 천변의 집에 돌아가면 할머니는 방구석에 아무렇지 않게 쓰러져있다. “죽었어?”라며 할머니의 옆구리를 차는 화숙. 할머니는 화숙의 행동이 아무렇지 않은 듯 컵에 소주를 따라 마신다. 이 지긋지긋한 삶은 언제 끝날까.

외삼촌은 딸 수연이 집을 나가자 동갑내기 친척인 화숙에게 수연의 딸 혜주를 맡긴다. 어쩌라고. 내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데, 고주망태 할머니에 사촌의 딸까지. 다행이 앞집 진순이 혜주를 맡아줘 벌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돈벌이를 나간다. 수연, 그녀는 화숙에게 한 번도 도움이 된 적이 없다. 외삼촌은 자신의 어미를 매일 두들겨 팼으며, 학창시절 남학생들은 수연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그런 수연이 도박중독에 빠진 남편을 만나 고생하는 건 걱정할 거리조차 안 된다. 그런데 이년은 어디 있는 거야?

화숙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동네 남자들은 정신지체자인 어머니를 쉼 없이 강간했고, 그중에 태어난 게 화숙이다. 이 더러운 운명! 나쁜 피를 타고난 그녀가 행복할 여지는 없다. 세상은 그녀에게 미소 짓지 않는다. 남자들에게 능욕당하는 어미의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던 화숙, 그들의 더러운 농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 화숙은 그저 살아남는 게 최선의 목표였다. 그런 그녀에게 수연은 유일한 출구였다. 외삼촌이 어미를 때리면 화숙은 수연을 팼다. 화숙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수연을 마주할 때마다 증오와 연민을 동시에 느낀다. 병신 같은 년, 나한테만 맞지 남자한테는 왜 맞아.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집안사람들의 비밀이 밝혀지고, 갈등의 근원을 향해 올라간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 피폐해진 삶을 돌이키고 싶어도 그들은 돌아갈 곳을 모른다. 또 개발을 거듭해 바뀌어버린 세상은 이미 그들이 손을 뻗쳐도 닿을 수 없는 곳에 가 있다. 한 때 천변의 상징이던 외삼촌의 고물상도 힘을 잃은 지 오래고, 화숙은 오락실을 처분하고 삶의 방향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된 일상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지저분한 일상이라도 돌지 않으면 죽고 마는 나쁜 피니까. 세상아, 이젠 지겹지도 않다.

<나쁜 피>는 180쪽 분량의 경장편 소설이다. 비밀이 밝혀지는 이야기 전개나 김이설 작가의 말솜씨 덕에 책 읽기는 수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읽는 순간 가슴이 저려오는 건 변하지 않는 인물들 탓이다. 화숙, 수연은 물론이고 외삼촌, 할머니, 진순, 상가 사람들 등은 작품 속에서 성격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빠르게 뜀박질 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인물들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이들을 외면할 수도, 욕할 수도 없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 누군가의 이야기이며, 고통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다. 동정할 거  없어. 우린 오래 전부터 그렇게 살았어!

한 해의 끝자락에서 만난 <나쁜 피>. 새해 희망을 한껏 부풀리려고 할 찰나, 막연한 희망으로 세상의 어둠을 덮으려는(모르는 척 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행위인지 소름끼치게 알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피>와 김이설 작가에게 조심스런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만든 내 가슴 구멍으로 인해 감정의 폭이 5mm는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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