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 - 겨울의 그림자

 




에브게니 스베틀라노프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 | Aulos Media | 2010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으로 음반 녹음 역사에 길이 남게 될 러시아의 지휘자를 꼽으라면 대략 네 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 예프게니 므라빈스키(1903~1988), 겐나지 로제스트벤스키(1931~),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1932~), 그리고 예프게니 스베틀라노프(1928~2002)가 그들이다. 각자 서로 다른 오케스트라를 맡았고, 국제적으로도 조금씩 다른 장소-본국인 러시아는 기본이었고-를 배경으로 활동했다. 므라빈스키는 레닌그라드(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로제스트벤스키는 빈과 런던을 비롯한 서유럽, 스베틀라노프는 유럽은 물론이고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확고한 위치를 점한 쪽은 므라빈스키일 것이다. 그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4, 5&6번 음반(DG)은 두말할 나위 없는 위치에 올라있으며, 네 명 중 나이도 가장 많다. 로제스트벤스키는 냉전 시절부터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를 비롯해 꾸준히 서방세계의 미디어에 얼굴을 비춰왔고, 페도세예프는 80년대 후반의 내한공연과 백건우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녹음의 반주를 맡은 덕분에 국내 애호가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하지만 스베틀라노프의 경우는 국내에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조금은 밀린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었는데, 그가 국내에서 제대로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일본의 포니 캐년에서 발매된 차이콥스키 교향곡(1990년도 녹음)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 그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서유럽, 미국은 물론이고 아시아의 오케스트라들은 흉내조차 내기 힘든 위력적인 포르티시모와 숨 막힐 듯 내달리는 템포를 자랑하는 이 녹음은 ‘러시아적인 힘’을 동경하던 한국과 일본의 애호가들을 단숨에 열광시켰고, 일본 제작반 특유의 훌륭한 음질까지 등에 업고 단숨에 므라빈스키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90년대에 녹음된 이 음반들(4~6번이 낱장으로 담겨 있는 형태도 있고, 함께 묶어 발매된 형태도 있다)이 매우 훌륭한 음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음반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국내 음반사인 아울로스 뮤직에서 기획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여섯 곡 전곡을 리마스터링한 네 장짜리 음반이다. 약 10년 전쯤 발매된 음반이기는 하지만 깔끔한 구성의 패키지에 담긴 훌륭한 연주를 매우 합리적인 가격에 장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한 메리트를 가진 음반임에 틀림없다. 특히 마지막 세 개의 교향곡에 밀려 디스코그래피에서 소외당하기 쉬운 1, 2, 3번 교향곡들의 연주가 상당히 좋은 편이어서, 별생각 없이 ‘한번 들어나 볼까?’ 하는 마음으로 걸어놓으면 평소에는 잘 몰랐던 이 작품들의 매력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음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곡은 교향곡 4번이다. 스베틀라노프의 녹음은 앞서 언급한 므라빈스키의 DG녹음 보다 훨씬 강렬한 파괴력을 뽐내고 있으며, 1악장부터 귀를 찌르는 호른의 자극적인 포르티시모가 압도적이다. 또한 4악장의 종결부에서 들려주는 충격적인 아첼레란도(점점 빠르게)는 이 음악은 오로지 러시아인들에 의해서만 온전하게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소리 높여 강조하고 있다. 5번 교향곡은 음질의 탓인지 파괴력은 다른 연주들보다 덜하게 들리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곡 전체를 뒤덮고 있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더 잘 드러나고 있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은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에 들어도 좋지만, 겨울이 끝나가는 시점에 듣는 것도 나름 잘 어울린다. 그의 어둡고 쓸쓸했던 내면을 가렸던 현악과 금관의 두텁고 쩌렁쩌렁한 소리가 유독 공허하게 느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교향곡을 박력과 웅장함이라는 한정된 키워드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 가면이 벗겨지고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차이콥스키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스베틀라노프의 이 음반은 작품의 이면으로 숨어버린 그를 찾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의 음반을 리뷰한 '박현준'님은?

편견없이 음악을 듣고 편견없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음대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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