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직동》 - 동네 한 바퀴

 

 

한성옥, 김서정 | 《나의 사직동》 | 보림 | 2014

 

누구에게나 소중히 여기는 추억의 장소가 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거나 아련해지는 곳 말이다. 내겐 광화문이 그렇다. 아버지의 사무실이 있었던 광화문 거리를 지금도 나는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나조차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긴 세월이 흘렀건만, 사무실이 있던 건물을 올려다볼 때면 여전히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건물이지만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은 젊은 아버지와 어린 내가 있던 그 시절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 3학년 무렵 아버지의 사무실이 궁금했던 나는 엄마나 고모를 졸라 아버지의 사무실을 간간이 찾았다.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재미가 시들해지면 슬쩍 밖으로 나와 한 바퀴를 돌았다. 사무실이 있던 건물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새문안교회가 있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지만, 이웃집 같은 느낌의 작은 교회가 도심에 있다는 게 어린 마음에도 희한했던 것 같다. 그때 광화문에서 내가 걸었던 거리는 불과 백 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도 아니다. 잠깐씩 놀러 가 구경했을 뿐인데,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한성옥이 그리고 김서정이 쓴 《나의 사직동》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지난 시간을 살갑게 전하는 책이다. 사직동 129번지에서 나고 자란 어린 소녀 한성옥을 주인공으로 한 이 책은, 소녀의 입을 통해 그 시절 그 장소로 우리를 이끈다. 소녀가 제일 먼저 안내하는 곳은 일제시대 때 지어져 칠십 년 넘게 동네 한복판을 지켰다는 그녀의 집이다. 친정엄마가 어릴 적에 이사와 그녀가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는 그 집은, 봄이면 라일락이 피고 가을이면 황금빛 은행나무를 볼 수 있었다. 담쟁이도 무성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유년을 찬란하게 보낸다.

 

 

사직동은 참으로 정겨운 동네였다. 아흔이 넘은 정미네 할머니와 나물 말리는 게 취미인 나물 할머니, 파마 약만 사 가면 공짜로 머리를 해주던 파마 아줌마, 날마다 골목길을 쓸던 스마일 아저씨가 계셨다. 해장국이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가르쳤다며 자신에게는 해장국이 서방이라는 해장국 집 아줌마, 가끔 사탕을 쥐여주던 슈퍼 아저씨, 하나뿐인 팔로 온갖 일을 해냈던 재활용 아저씨와 아줌마가 계셨다. 참으로 소박한 행복이 넘실대던 곳이었다.

 

어느 날, 동네에 '도심재개발 사업시행인가득'이라는 낯선 현수막이 걸리며 사직동이 달라졌다. 부모님은 회의에 간다며 자주 집을 비우기 시작했고, 늘 웃던 슈퍼 아저씨와 말 없던 재활용 아저씨가 소리 높여 말다툼했다. 아이들은 예전처럼 뛰놀았지만, 동네는 전과 같지 않았다. 떡볶이를 팔던 문구점이 문을 닫자 금세 다른 간판이 걸렸고, 꽃집과 치킨 집은 부동산 사무실로 바뀌었다. 반장 할아버지 생일이 온 동네 사람이 함께하는 마지막 날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사가 시작되고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몇 년이 지나 다시 모이는 날이 되었다. 어린 소녀는 청소년이 되었고, 사직동 129번지는 모닝팰리스 103동 801호가 되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눈에 띄지 않았고, 옛날 동네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여기는 사직동이지만, 나의 사직동은 아닙니다. 나의 사직동은 이제는 없습니다."

 

바뀌어 버린 사직동에 소녀는 절망하고 만다. 함께 기뻐하고,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눴던 시절은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그 흔적마저 사라진 곳에서 소녀가 발견한 것은 허탈감뿐이었다. 좋은 시설이 좋은 환경을 만들 거란 어른들의 생각이 틀리진 않았지만, 그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직동은 이미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마음 한구석이 시리다. 추억의 흔적이 사라진 곳이 결코 같은 사직동이 될 수 없을 테니.

 

아버지의 사무실이 있었던 작은 건물을 볼 때마다, 회상할 수 있는 장소가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사뭇 느낀다. 시간을 담아내고 세월을 견뎌낸 것은 외형이 어떠하든 그 자체만으로도 작은 역사가 되니 말이다. 만일 사직동에 예전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한 군데라도 남아 있었다면, 소녀가 느꼈던 상실감이 그토록 크진 않았을 테다. 아버지와 함께 식사했던 음식점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내게 큰 선물이 된다. 우리는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고, 더듬을 추억이 많을수록 우리의 삶은 더 풍성해질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둘이서 랄랄라'님은?

평범한 아줌마입니다. 제게 간직한 꿈이 하나 있는데요. 3 층짜리 조그만 건물을 지어 1층은 작은 도서관으로, 2층은 작은 출판사로, 3층은 선교사를 위한 단기 게스트하우스로 만들어 멋지게 활용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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