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 처음에서 영원으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픽션들》 | 민음사 | 2011

 

거울, 백과사전, 미로, 도서관, 무한, 알렙, 삐에르 메나르, 푸네스, 그리고 나침반. 이 정도면 짐작하셨으리라 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혹자는 말하지요.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20세기 현대문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보르헤스는 그처럼 많은 이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작가들의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랭 로브그리예(lain Robbe-Grillet)부터 토머스 핀천(Thomas Ruggles Pynchon, Jr), 존 바스, 주제 사라마구(Jos? de Sousa Saramago), 살만 루시디(Ahmed Salman Rushdie)를 비롯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제라르 주네트(G?rard Genette) 또한 보르헤스라는 이름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표했지요.

 

물론 저 같은 한낱 독자에게도 보르헤스라는 이름은 각별하고 소중합니다.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저의 닉네임 역시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 바벨의 도서관 〉에서 따온 것인데요. 도서관 사서 출신이라 그런지 보르헤스 하면, 저는 이 단편소설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바벨의 도서관, 거기에는 무한한 육각형의 방이 있고 각 방에는 두 면을 제외한 네 면마다 다섯 개씩, 모두 스무 개의 책장이 들어서 있다고 하지요. 이 방과 방 사이에는 거대한 통풍 구멍이 나 있는데, 덕분에 어떤 방에서든 끝없이 뻗어 있는 위층과 아래층을 훤히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상상해 보세요. 낭하와 층계, 육각형 모양을 한 방들이 무한하게, 영원히, 고귀한 책으로 가득 찬 채, 그러나 매우 비밀스러운 모습으로 감춰져 있는 세계를. 거기에는 쓸 수 있었으나 쓰지 않았던 책, 소실된 책이 보관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지요. 상대의 갈피에서 어느 한 줄을 인용하고, 참조하는 동시에 반론하고 지시하는 겁니다. 그 속에서 하나의 문장은 이전의 다른 문장을 기반으로 생산됩니다. 문장의 해석은 읽는 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의미로 개방됩니다. 문학비평가 헤럴드 블룸(Harold Bloom)은 보르헤스를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했지요. “체호프에게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저자이지만 보르헤스에게 셰익스피어는 모든 사람인 동시에 아무도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곳에 간다면 서가와 서가 사이를 거니는 것만으로 인생의 시간을 잘 탕진하고 낭비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에서 저 책으로, 그 책에서 다시 다른 책으로. 완결되지 않은 여행을 할 수도 있겠지요. 궁극의 해답을 기록한 단 한 권의 책을 발견하기 위해서든 그저 영원한 순례 그 자체를 위해서든.

 

저는 민음사에서 나온 다섯 권짜리 보르헤스 소설 전집을 지니고 있습니다. 월급으로 산 첫 전집이었지요.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한 달을 바친 대가를 보르헤스로 풀었던 셈입니다. 요즘 나오는 밀란 쿤데라나 로베르토 볼라뇨 전집, 이탈로 칼비노 전집에 비하면 보르헤스 소설 전집의 분량은 상당히 소박한 편에 속합니다. 압축과 함축을 중요시했던 보르헤스에게는 이마저도 많게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보르헤스가 단편소설 〈 알렙 〉 첫머리에 햄릿의 대사를 옮겨놓은 까닭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천만에, 나는 호두껍질 안에 웅크리고 들어가 있으면서도 나 자신을 무한하기 그지없는 어떤 공간의 ‘주인’으로 여길 수 있네. (207쪽, 보르헤스 소설 선집 제3권 < 알렙 > 중)

 

지름 2, 3cm의 작은 구체에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이 존재한다는 '알렙'처럼 보르헤스는 동시적인 것에서 영원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영국 포병대 위치를 베를린에 교신하기 위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그 미로들의 미로를 헤매던 ‘유춘’과 같이 어스름 짙은 들판에 서서 “무한한 이야기들, 무한히 가지가 갈라지는 이야기들”(본문 중에서)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분명한 것은 그에게 글쓰기란 고통에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거울과 백과사전으로 ‘우크바르’라는 상상의 지역을 발견해내는 일이란 매우 즐거운 유희일 수밖에요. 보르헤스는 환상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현실을 제게 처음 알려준 소설가였습니다. ‘텍스트’에 참여하고 그것을 만지며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쁨을 말입니다.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12월의 서평 주제는 '처음'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각자의 '처음'을 책과 함께 떠올려 보세요.

'오늘의 처음'으로 생생히 떠오르길 바랍니다.

 

| 펜벗 일문일답

 

● 월급으로 산 첫 전집이 민음사에서 출간한 보르헤스 전집이라고 하셨죠. 첫 월급으로 샀던 책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세요?


이것저것 꽤 많이 구매했던 것 같은데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가 기억나요. 보르헤스 전집의 검은 표지 위에 한강 소설집의 오렌지빛 표지가 겹쳐 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걸까요. 《내 여자의 열매》에 나오는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라는 문장이 좋아서 그걸 제목 삼아 짧은 리뷰 한 편을 썼던 기억도 납니다.

 

● 생각하고 계신 꿈의 도서관은 어떤 모습인가요? 이를테면, 도서관의 위치, 서재의 구성에 관한 구체적인 모습이랄까요?


만약 제 마음대로 장서 구성을 할 수 있는 도서관이 생긴다면, 십진법에 따른 분류 외에도 책 한 권 한 권마다 ‘보라 참조(see ~ )’나 ‘~도 보라 참조(see also ~)’ 목록을 표로 붙여 두고 싶습니다. 본래 ‘보라 참조’나 ‘~도 보라 참조’는 도서관에서 키워드를 통일하고 연관어를 안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인데요. 이걸 이용해서 한 권의 책이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하는 거죠. 그러면 특정 작가의 책을 파고드는 전작주의 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독서가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합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막막한 독자라도 일단 그 도서관의 책 한 권을 집어 드는 순간,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책 지도를 발견하는 셈이 될 테고요.

 

● 프로필의 구절이 인상 깊습니다. '오랫동안 찾던 책을 발견하기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마음속에 늘 품고 다니는 책은 무엇인가요?


오랫동안 찾던 책을 발견하고 싶다는 말은 그 책을 읽는 첫 번째 독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그 책을 찾아내 읽는 첫 독자가 될 수도 있고, 염치없게도 그 책을 씀으로써 제일 처음 그 글을 읽어나가는 이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오랫동안 찾던 책을 발견한다는 건, 그 책을 만나는 순간 저절로 알게 될 것 같아요. 무수한 책들을 거쳐 이제 여기에 이르렀구나 하면서.

 

● 요즘은 무슨 책을 읽으세요?


피터 비에리의 철학 에세이 《삶의 격》과 여러 사상가의 에세이를 수록한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를 최근 다 읽었고요. 지금은 돈 드릴로의 《마오 2》 초반부를 읽고 있습니다. 《리브라》를 읽다가 덮은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기필코 성공해 보려고요. 12월 중으로는 버지니아 울프와 플래너리 오코너의 몇몇 작품을 찬찬히 읽을 계획입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바벨의 도서관님은?

오랫동안 찾던 책을 발견하기를, 그 일로 주어진 인생의 시간을 잘 탕진하고 낭비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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