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 아스라이

 

 

파트릭 모디아노 | 《혈통》 | 문학동네 | 2008 

 

일명 '게이' 오를로프, 스티오파, 드니즈, 남십자성, 나치 점령하의 파리, 레지스탕스, 이중 신분, 여러 개의 여권, 어느 저녁 카페의 테라스, 희미한 실루엣…. 평범해 보이는 이 단어들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혈통>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단어들의 열거이자 희미한 불빛을 품은 몸짓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의미심장하게 시작했던 <어두운 상정들의 거리>. 나는 이제야 그 '한낱 환한 실루엣'에 가려졌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혈통>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라는 작품이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에 대한 해설 같은 작품이다. 또 그러면서 새로운 이야기이기도 한데, 영화로 말하자면 스핀오프(spin- off)개념으로 얘기해도 될 것 같다. <어두운 상정들의 거리>는 주인공이었던 '기'가 기억을 잃은 자신의 과거를 추적해나가는 내용인데, <혈통>을 읽다 보면 '기'의 모델이 저자 파트릭 모디아노의 아버지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1940년 6월,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으로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되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감시를 받게 되는데, 저자 파트릭의 아버지는 '토스카나 유대인 가문'이었다. 

 

인간에게 '이름'이란 무엇일까? 인간에게 있어 정해진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지 A에서 B로 바뀌었다는 사실만 남는 걸까? 그때 그 기억의 사슬에서 하나를 제거하면 '당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휴대전화를 서너 개 나누어서 생활하는 사람들, 그들에겐 각각의 영역에서 불리는 이름이 존재할 것이다. 만일 그때 각각의 영역에서 다른 이름으로 다른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당신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당신이 그 질문을 받기 전에 "불행히도 사람들은 당신에게 결코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치의 탄압에서 유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려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의 결과가 얼마나 큰 파장과 균열을 가져오게 될지 어린 파트릭은 물론 파트릭의 아버지 자신도 몰랐다. 파트릭은 나치 치하에서 아버지가 이중 신분과 그 외에도 몇몇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신분 노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중 신분을 사용했던 아버지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된다. 정말 이상하고 묘한 시대였다. 파트릭은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치 치하에서 아버지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개와 늑대의 중간쯤에 위치한 묘한 시대를 살던 묘한 사람들...' 이라고 지칭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실제로 묘하게 사라지기도 하고 묘하게 덧붙여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들을 나열하면 '유령들의 목록'과도 같았다. 아마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유령들의 목록' 중의 한 부분일 것이다.

 

실제로 <어두운 상점들의 도시>에서 주인공 '기'는 소나쉬체와 스티오파에 의해서 자신이 몰락한 귀족 가문인 프레디 하워드 드 뤼즈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며 게이 오를로프와 프레디를 추적하지만, 그마저도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계속되는 추적 끝에 '기'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여권과 '페드로'라는 이름과 앙주국 15-28번이라는 전화번호, 캉바세레스가 10번지 8구라는 주소를 어렵게 찾아낸다. 하지만 자신이 '페드로'일지도 모른다며 찾아간 주소에서 '기'는 또다시 자신이 '멕케부아'라고 불리던 남자였고,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드니즈'였다는 것을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여러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 사람의 기억이자 여러 사람의 기억이기도 한 묘한 이야기였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혈통>을 읽고 나면, 똑같은 단어와 똑같이 등장한 인물들 때문에 두 작품 간의 경계는 미묘한 망설임 속에서 무너져버린다. 그래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스러워지는데, <혈통>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그 시간에 대한 회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감정 이입 없이 담담하게 서술한 것이 그 특징이다. 대략 열네 살부터 스물한 살까지의 삶에 대한 기록으로 나치 치하의 유대인 탄압, 이중 신분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들과 그 피를 물려받은 아들의 피로한 삶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한 문장으로 <혈통>의 내용을 요약해버릴 수도 있지만, 이 짧은 문장으로 대신하기엔 그 얄궂은 시대는 희미한 실루엣으로 가득 찬 것 같다.

 

파트릭은 사십 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그렇게도 들어가기 싫었던 기숙사 생활을 6년 동안이나 계속하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아버지의 모든 고독의 시간에 대해 이해하지만 그 시간들은 결코 다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자신은 존재하지만 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반쪽짜리의 삶으로, 자신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름은 버렸지만 ‘피’만은 버릴 수 없었던 얄궂은 시대의 묘한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살해해야 하는 삶은 압박과 불안이 되어 그 얄궂은 시대를 흔들고 균열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소설 속 '기'는 끝내 자신의 온전한 기억을 찾지 못했고, 파트릭의 아버지는 스위스에서 숨을 거뒀다. 그 시간은 이제 희미한 실루엣이 되었다. 우리는 파트릭 모디아노가 느끼듯이 전쟁의 비극으로 인해 타인이 자신에게 제대로 질문한 시간을 영원히 놓쳤음을 안다. 그리고 나는 전쟁의 비극, 인종차별에 대한 비극, 그 시대의 균열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희미한 실루엣으로 완성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새삼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혈통>을 읽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덧없이 흘러가는 저녁 빛의 어스름한 불빛들 속의 희미한 실루엣. 그 불빛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붙잡기 위해 서둘러야 한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muo'님은?

삶의 모든 흔적 때로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고 있지 않는 듯한 책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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