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 요조에게는 호리키가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 | 《인간 실격》 | 민음사 | 2004

 

외투가 필요한 계절이다. 밤바람이 제법 차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가을은 벌써 갈 준비를 하고, 몸이 으슬으슬 한기를 느끼는 걸 보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나의 20대 후반도 어느새 떠나갈 준비를 하는 듯하다.


여기 《인간 실격》에 서른을 앞둔 '요조'라는 사내가 있다. 정확히는 스물일곱. 나와 동갑인 이 남자는 자신이 실격이라 말한다. 그것도 인간 실격. 정말이지 딱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위축되고, 보모들에게 몹쓸 짓을 당해 한평생 트라우마를 간직한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잘생긴 얼굴, 그리고 전신에서 뿜어내는 어두운 분위기 덕에 끊이지 않는 여자관계뿐이다. 그에게는 진정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고 할 만한 사이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호리키'만이 그 조건에 제일 근접했을 뿐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 역시 요조의 이야기만 저릿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짧은 분량의 일대기를 읽고, 다시 펼칠 때마다 더욱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 건달 호리키였다. 물론 요조의 익살을 한눈에 꿰뚫어 봤던 '다케이치'도 있었지만 그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인간 실격》을 통틀어 요조와 직접적인 끈이 있었던 것은 역시 호리키라 답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호리키만이 유일한 요조의 친구였다.


호리키와 나. 서로 경멸하면서 교제하고 서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것이 이 세상의 소위 '교우'라는 것이라면, 저와 호리키의 관계도 교우였음은 틀림없습니다. (106쪽)


대부분 그렇지만 요조와 호리키 그들이 ‘친구’라는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같은 느낌을 뿜어내면서도 그것이 서로에게 '그래도 저놈보다는 내가….'하는 안도감을 주었기 때문 아닐까. 어린 시절 유치하지만 진정성이 필요한 시간을 거치며 그들은 상대를 통해 세상을 정의하고, 무수히 많은 생각을 털어내기도 한다. 한 마디로 호리키와 요조는 서로 배출구 같은 존재라 할 수도 있다.

 

《인간 실격》을 읽은 많은 사람은 말한다. 친구랍시고 요조의 불행을 지켜보며 오히려 흐뭇해 하고, 삶을 흔들기나 하는 저 호리키라는 존재야말로 요조가 보았던 인간계의 추악함 중 하나라고. 하지만 나는 되려 묻고 싶다. 요조가 자살을 시도했을 당시에도 아내의 강간 장면을 직접 목격했을 때에도, 또 다른 자살 시도 후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의 곁에서 한결같은 태도를 보였던 사람이 누구인지 말이다.


쓰러진 사람은 그 자체로 고통을 받고 끝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쓰러짐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심정은 더욱 착잡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망가져 가는 친구 곁을 지키기보다 모른척하고 떠나간다. 나는 호리키가 요조라는 친구를 대하는 방식에서 쇠붙이의 담금질 같은 것을 보았다. 호리키는 요조가 무너질 때마다 도망가지도, 측은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요조를 자극하고, 두들기면서 삶에 대한 반작용을 이끌어 내려 했다.


너 각혈했다면서? 호리키는 내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마자 그렇게 말하더니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다정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다정한 미소가 고맙고 기뻐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 다정한 미소 하나에 저는 완전한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매장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29쪽)


물론 그 모든 것들로도 요조의 실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어쩌면 담금질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의 중대한 원인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친구 호리키의 역할이었다. 결국 요조의 삶은 그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 최후의 장면이 부러웠다. 그들의 삶이 제아무리 '인간 실격'이었어도 그 우정만큼은 내게 있어 합격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끔 미안해진다. 내가 끝내 외면해버린 친구들에게 나는 한 명의 호리키가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녹색양말'님은?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저도 그런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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