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을 위한 우산》 - 이 비가 길어지겠다

 

 

빌헬름 게나치노 | 《이날을 위한 우산》 | 문학동네 | 2010

 

일 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별다른 감흥이 있거나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희미하게 남은 느낌은 환등기처럼 돌고 도는 1인칭 화자의 끈질긴 시선과 관찰이었다. 일 년 뒤 5장을 다시 읽고 나니 그때 느낀 ‘끈질긴 시선과 관찰’은 표피적인 것이었다. 작가만의 독특한 언어로 표현된 섬세하고도 기이한 세계관이 핵심이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빌헬름 게나치노는 《이날을 위한 우산》에서 세계에 대한, 삶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성찰과 실존을 어떻게 하면 상투적으로 쓰지 않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풀밭에 앉아 황량하면서도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강을” 바라보는 46세의 주인공이라면 보통 속된 자기연민이나 우수, 중년의 쓸쓸함에 빠질 공산이 크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실성한 사람이나 반쯤 미친 사람 그리고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기이한’ 사람이다. 주인공은 몸통이 부서진 뒤 남은 트렁크 손잡이를 보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삶”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리 위에서 키스한 연인들의 갑작스러운 불안, 어머니에 대한 짧은 회상과 연결한다.

 

“지금 이 순간 내 관심은 오직 내 재킷 호주머니에 계속 생겨나는 보푸라기에 쏠려 있다.” (71쪽)

 

이 소설에서 위 구절은 아무런 위치도 점할 수 없어 보이는 지극히 쓸데없고 사소한 부분이다. 나는 우연히 이 구절을 읽고 박솔뫼의 단편 소설 ‘겨울의 눈빛’이 떠올랐다. 고향 광주(와 극장)를 애틋하게 맘속에 품고 사는 주인공은 자신의 주거 지역과 거리가 먼 고리 원전의 방사능 유출 상황을 보고 뜻 모를 모멸감을 느낀다. ‘겨울의 눈빛’ 역시 처음엔 몰랐지만, 다시 읽었을 때 빠르게 스쳐 지나간 이상한 구절을 발견했다. 고리 원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봐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주인공이 복도 계단에 가만히 앉아 스웨터에 난 보풀을 뜯다가, 무심코 그 보풀을 입에 넣고 삼키는 장면이다. 힘주어 쓴 부분이 아니라 딱히 특징적이지도 않고, 주인공이 왜 저러는지, 저 행위가 소설에서 어떤 의미를 드러내는지도 알 수 없다. 다시 읽었을 땐 그 장면이 강렬하게 뇌리에 꽂혔다.

 

“반나절 내내 오직 무릎에 와 닿는 부드러운 풀의 감촉만 느끼면서 이리저리 쏘다녔다.” (74쪽)

 

이 부분을 읽고 나는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이 떠올랐다.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젊은 주인공이 제 방의 벽에 난 못 자국을 보고 ‘수상쩍은 구멍’이라고 생각하는 장면. 그는 생각에 휩싸여 주머니칼로 구멍의 깊이를 재어 보고, 옆방까지 꿰뚫릴까 두려워한다. 혹은 잔디밭에 버려진 이상한 원뿔 모양의 종이를 주우려고 집착하는 장면. 쓸데없어 보이는 행동에 영혼을 담는 인간의 노력은 이해할 수 없기에 그 자체로 숭고하고 실존적이다. 소설에서나 나타날 법한 독특한 장면이지만 사실 자기도 모르게 일상에서도 이런 기이한 행동을 할 때가 있지 않나. “지속되는 것은 모두 기이해질 수밖에 없다.” (75쪽) 어쩌면 그 기이함이야말로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부이자 인간의 본질적인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강을 헤매며 왔다 갔다 하는 주인공은 포르트-다(fort-da) 놀이를 반복하는 아이 같다. “삶 전반의 총체적인 기이함”을 견뎌내려면 인간은 ‘반복’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반복하는 인간은 “단지 교육만 많이 받은 나 같은 아웃사이더들은 어디에 몸을 숨겨야 할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현대판 거지” (84쪽)에 불과하겠지만, 예리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반복한다면, 끔찍하리만치 엄격한 성찰과 자기 응시를 영원히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 작은 관찰에 동참한다.

 

“자기 삶이 멈춰 있는 동안 작은 동물들을 관찰하는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다.”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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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쓰고, 사랑하는 실존주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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