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논어》 - 어쩌다 마주친 논어

 

 

신창호 | 《한글 논어》 | 판미동 | 2014

 

‘논어’라는 말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또 다른 단어이자 인물이 바로 공자다. 유교, 성인(聖人), 예(禮), 인(仁) 등의 자(字)로 연상되는 인물이 공자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수많은 단어 중 유교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공자의 일생과 가르침은 유교라는 틀 안에 한정되어버린다. 그러나 공자의 가르침을 모두 아우르고 이를 계승하는 실천이 유교에 서려있다. 나는 전자와 같았다. 오직 유교만을 보려 하고 유교에서만 얻으려 했을 정도로 스스로 틀에 기꺼이 갇혀 논어를 접했다. 으레 논어란 그러하겠지, 하는 생각만으로 《한글 논어》의 서문을 읽었다. 흥미롭게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깨달았다. 《한글 논어》 속에는 '논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한글 논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논어가 아니라 '한글'이다. 공자의 손으로 자신의 가르침과 숙원을 담은 듯해 보이지만 논어는 제자들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집필했다 하더라도 논어에는 미화와 격상이 만연하다. 논어는 2차 창작물인 셈이다. 게다가 논어는 한문 직해가 무용할 정도로 중국의 역사가 깊이 서려있다. 이때 한글은 3차로 개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3차에서 끝날 법하지만, 《한글 논어》는 4차에 이른다. 저자 신창호는 해석과 해설을 통해 4차 가공까지 맺는다. 가공이라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깎음의 부정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가공의 문제는 국내 논어 저서 상황이 매한가지다. 논어를 날것으로 접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심심찮게 고백한다.

 

신창호의 《한글 논어》는 각 장이 한글로 구성돼 있다. 이로 인해 독자는 공자와 그의 생에 가까워진다. 한글만의 차용이 깊이의 부재를 야기하기도 한다. 일례로 이한우의 《논어로 논어를 풀다》는 한자의 해석과 공자의 일생, 시대상에 대한 기술에 있어서도 상당 부분 그리고 상당량(量) 차이를 넓힌다. 올바른 귀결이 아니지만 저절로 《한글 논어》의 얕음을 가늠할 수 있다.

 

《한글 논어》의 예상 독자층이 대중임을 고려해 볼 때, 공자의 헤아림과 속내에 완전히 이르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아는 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긴 시간과 많은 정력의 투자는 '논어'를 교과서로만 만들 뿐이다.

 

공자가 말하였다.
"지도층 인사는 세 가지 경계해야 할 일이 있다. 젊을 때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으므로 성적 욕구를 경계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혈기가 마냥 강하므로 다툼을 경계하며, 늙어서는 혈기가 시들고 쇠약하므로 얻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계씨(季氏) 7

 

계씨 7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비단 지도층으로 한정하며 운을 떼긴 하나, 나이 먹는 자세에 덕, 예, 인, 학 모두를 아우른 것만 같다. 나는 지금 젊음에 머물러 있기에 어른과 늙음이라는 말을 단순히 넘겨짚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가리켜 흔히 ‘중년의 위기’라는 말로 비겁한 합리화를 이룰 때 나는 입술을 질근 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란 존재가 공자의 눈에 담긴 추악함의 표상과 다를 바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경험의 연속이 실전이라고 하지만, 손끝으로 느껴야만 경험이 아니지 않던가.

 

여태 한자와 공자라는 존재가 벽으로만 느껴진 탓에 논어를 가깝게 여기지 못했다면, 《한글 논어》는 단비와 같다. 4차 가공물 아니 새로운 창작물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한글 논어》는 주관의 개입이 크다. 게다가 한글이기에 표면적으로 뿌리를 찾을 수 없는듯하다. 그러나 한 인물이 일생에 걸쳐 정립한 사상을 단 한 권으로 헤아릴 수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한글 논어》는 제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꽤 마음에 든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Ki'님은?

토머스 핀천을 좋아하는 대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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