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스러운 탐정들》 - 詩를 위한 시간

 

 

 

 

로베르토 볼라뇨 / 우석균 옮김 | 《야만스러운 탐정들》 | 열린책들 | 2012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었다. 읽었다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이 책은 마치 어린이 동화 속 주인공 여우가 그랬듯 조금씩 먹을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처음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을 때는 1권의 끝 부분에서 포기하고 말았었다. 첫 번째 이유는 '아르투로'와 '울리세스'를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했다. 두 번째는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제국과 '파블로 네루다' 제국 사이에 끼여 숨 쉴 수 없었던 상황에서 아르투로와 울리세스가 그리는 라틴 아메리카의 자유와 혁명의 이야기들이 내게는 아주 먼 나라 이야기처럼, 마치 유통 기한이 지난 통조림 날짜를 확인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나의 의심은 빗나갔다. 어느 순간 그들의 거친 자유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빠져 들어갔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조국 멕시코에서 길을 잃은 아방가르드 여성 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젊은 시인들의 이야기다. 자유와 혁명은 언제나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다. 야만적인 시대에 자유를 부르짖던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부조리와 부딪히며 살아가야 하는 억압된 현실의 고통과 닮았다.

 

이 소설은 크게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문학과 시인을 꿈꾸는 법대생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로 시작된다. 가르시아는 내장 사실주의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알라모의 시 창작 교실에서 만난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의 시에 반하여 전위주의 그룹인 내장 사실주의에 가입하게 된다. 방황과 거침없는 자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려는 반골 성향은 단숨에 가르시아를 사로잡는다. 그곳에서 다른 내장 사실주의자들을 만나며, 시와 인생, 청춘과 방황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1975년 12월 31일의 일기가 1부의 마지막이다. 킴(호아킨 폰트)이 창녀인 루페를 피신시키기 위해 아르투로와 울리세스에게 멀리 떠나 주기를 부탁했고, 킴의 임팔라 자동차에 갑작스럽게 가르시아가 뛰어오르면서 끝이 난다. 그 시각은 1974년 마지막 시각이자 1975년 최초의 시각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3부에서 다시 연결된다.

 

2부는 1976년에서 1996년까지 아르투로와 울리세스를 만났던 사람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로베르토 볼라뇨가 하고 싶었던 말이 가장 함축적으로 담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아르투로 볼라뇨'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얼터 에고, '울리세스 리마'는 볼랴뇨의 친구 '산티아고 파파스키아로'이기 때문이다. 볼랴뇨와 파파스키아로는 전위주의 그룹인 '인프라레알리스모'(밑바닥 현실주의)를 만들었는데, '내장 사실주의'가 그 모델이라고 한다. 아마도 볼라뇨는 내장 사실주의를 통해 자신이 꿈꾸던 문학과 몰락하는 문학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문학은 죽었고, 기득권의 힘에 의해 전혀 쓸모 없는 것이 유지되는 현실. 시인들의 영예는 자유와 혁명 대신 욕망으로 채워졌고, 추하고 위선으로 가득한 문학은 타락했다. 희극으로 시작된 모든 것이 비극과 공포, 미스터리로 끝이 났다. 그렇게 문학은 죽었다.

 

2부의 구성은 흐르는 시간과 흐르지 않는 시간으로 다시 구분된다. 1976년 1월 '아마데오 살바티에라'의 흐르지 않는 시점과 20년 동안 계속 흘러가는 시점으로 나뉘게 된다. '아마데오 살바티에라'는 실존하지 않지만, '옥타비오 파스'(실존 인물)와 같이 글로 생계를 유지하는 인물이다. 2부는 아르투로와 울리세스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아마데오 살바티에라'나 '세사레아 티나헤로'와 같이 재능 있는 시인이 야만적인 시대에 문학을 하려면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타난다. 그들이 '대서인'과 '볼품없고 뚱뚱한 아줌마'로 얼마만큼 비참하게 상실되어 갔는지.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그려진다.

 

또한 어느 기득권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했던 아르투로와 울리세스에 대한 상세한 증언이 이어지는데, 그들 대부분은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 그 물결을 따라 내장 사실주의의 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가입했었다. 또 아르투로와 울리세스는 보르헤스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고, 존 더스패서스의 번역된 작품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시인이라고 부르기에 뭔가 부족할 정도로 시를 쓰지도 않았고, 때로는 마약을 팔기도 했다. 하지만 시와 삶에 대한 열정만큼은 가득했고, 그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혁명과 시를 위해 자신을 버릴 수도 있었다. '내장 사실주의'는 권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하나의 흐름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열정은 권력에 대항하는 혁명도 아니었고, 문학의 올바른 길에서도 아무것도 바꿔놓지 못했다. 20년이 흐른 후, 내장 사실주의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자유의 힘을 믿고 '시의 세계'로 뛰어들었던 그들은 잊혔다.

 

3부는 1부 이야기의 끝인 1976년 1월에서 다시 시작한다.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다. 내장 사실주의 어머니인 '세사레아 티나헤로'를 찾아 소노라로 떠난 아르투로와 울리세스, 가르시아와 루페의 여정이 시작되는데, 조금 다른 면이 있다면 3부는 현실이 아니다. 시간이 이리저리 해체되고 어제가 오늘이 되는 시간, 오늘이 내일이 되는 기이한 시간이다.

 

울리세스와 아르투로는 우연히 만난 경찰에게 '산타테레사'로 가는 지름길을 물어본다. 이들은 계속해서 끝도 없는 길을 달려보지만 길을 잃은 것 같기도 하고 꿈속을 헤매는 듯하다가 어는 순간 '산타테레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세사레아를 찾기 위해 또 수없이 길을 달리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끝없는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같은 장소인 산타테레사로 되돌아온다. '산타 테레사'는 허구적 공간이다. 어쩌면 '산타테레사'는 잃어버린 시간을 의미하거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이야기하는 모든 공간을 포함하는 한 지점인 '알레프'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3부에서 볼라뇨는 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서 길을 잃은 세대의 비애를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1968년 9월 멕시코 정부는 민주개혁을 갈망하는 반독재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멕시코 국립 자치대학에 경찰과 군대를 보내 학생들을 쓸어갔다. 이 사건은 이후 10월 2일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으로 이어져 1만여 명이 희생된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에 의해 아옌데 정부가 무너지는데 이러한 정치적 현실은 라틴 아메리카의 지식인이 떠안을 수밖에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두 사건은 볼라뇨 소설 《부적》과 《먼 별》에 등장한다. 볼랴뇨는 모든 것들을 소멸하고 폭력적인 현실이 허구의 공간이기를 간절히 바랬는지 모른다. 멕시코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인 세사레아를 찾기 위해 도착한 그곳에서 아르투로와 울리세스는 죽음을 맞는다. 어쩌면 그것이 맥시코, 또는 우리의 현실일 것 같다.

 

이미 고인이 된 로베르토 볼라뇨,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자리 굳히기' 문학을 비판하며 문학의 올바른 길을 찾고자 했던 그는 '산타테레사'라는 괴물을 통해 자신만의 지름길을 찾았을까? 폐허의 땅 소노라에서 '공장'의 지도를 만들며 다가올 2600년을 기다리던 세사레아 티나헤로는 마지막 희망을 보았을까? 멕시코에서 길을 잃은 멕시코인들은 이제 자기만의 길을 찾았을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거인의 등장에 굴복하지 않고도 어둡고 깊은 동굴 속에 갇힌 '아이'를 구해낼 수 있을까? 지금은 아쉽게도 그 어떤 질문에도 거대하고 거만한 침묵뿐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muo'님은?

삶의 모든 흔적 때로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고 있지 않는 듯한 책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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