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문학동네, 2007

새들, 페루, 죽다. 이 세 가지는 하루를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낯선 단어들이다. 눈에 보이는 새라고는 왠만하면 날지 않는 비둘기,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도 헷갈리는 페루, 아직은 멀게 느껴지는 죽음. 그런데 세 단어의 한 데 모였을 때, 묘한 매력을 느꼈다. 로맹 가리의 단편 소설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낯선 것들에 대한 동경일까, 아니면 ‘새들이 페루에 가서 죽는 이유’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까, 답은 잠시 뒤에 찾기로 하고 책을 먼저 손에 쥐었다.

책을 편 것은 일상의 긴장이 풀린 주말, 덜컹이는 전철 안. 지구 먼 곳으로부터 온 햇빛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늘 타던 전철이었지만 환상의 공간에 머문 듯 했고, 종이 위 문자들은 어지러이 망막에 박혔다.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는 동안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어지러움은 잠시, 소설에 짙게 배어 있는 고독이 밀려왔다. 인적 드문 해변에서 자신의 이름보다 고독이 더욱 친숙한 사내. 그는 우연히 해변에서 자살하려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를 구한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여인을 보며 사내는 연민 혹은 애정을 느낀다. 그녀를 안을까? 고독을 선택한 그에게 불쑥 찾아온 뜨거운 감정은 그를 괴롭힌다.

그녀의 중얼거림은 너무나도 절박했고, 그녀의 눈빛에는 애원이, 그의 어깨에 매달린 그녀의 연약한 두 손에는 약속이 깃들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가슴에 꼭 안고 그는 이따금 자신의 두 손 안에 묻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살포시 들어올렸다. 불현 듯 수십 년간의 고독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아홉 번째 물결이 그를 쓰러뜨리고는 그녀와 함께 먼 바다로 그를 휩쓸어갔다. (p 28.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인간, 그 알 수 없는 허울

사내는 왜 외로울까. 그는 어째서 벗어날 수 없는 고독에 스스로 투신했을까.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2차 대전에 로렌 비행중대 대위로 참전한 로맹가리는 역사의 격동 속에서 삶의 모순을 느꼈을 테다. 그가 공부한 것은 명확한 법학인데, 그가 마주한 현실은 새벽녘 안개길 만큼이나 불투명하다. 더욱이 유태계 프랑스인인 그는 유태인 학살을 지켜보며 인간 생명의 나약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목격했다. 그가 목격한 인간의 몸뚱이에 희망이란 뜨거운 피가 흐를 수 있었을까.

“운전사는 번들거리는 얼굴의 반점을 다시 한번 처녀 쪽으로 돌려 그녀를 한동안 바라본 다음 다시 눈앞의 길을 주시했다. 그래요, 이 어린 것은 금간 유리처럼 연약하지요. 폭격, 폐허 속에서의 생활, 그리고 그 딱한 군인들…… 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었겠지만, 전쟁이란 다 그런 것이라며 당연하게 여겼겠지요. 문제는 그때 이후 이 어린 것이 모든 것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린 겁니다.”(p253. <지상의 주민들>) 전쟁의 충격으로 눈을 감아버린 이 여린 여인은 흰 눈 가득한 크리스마스를 보기 위해 눈을 뜨고 싶어 하지만, 그녀의 순수함은 이내 훼손된다.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는 여러 작품 속에서 반전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예술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든 치러야 한다는 미술품 애호가 S(<가짜>), 사랑하던 옆방 여인의 교성을 듣고 자살을 선택한 청년(<벽>), 문명의 손이 묻지 않은 곳에서 우연히 만난 위대한 그림에 희열을 느끼는 남자(<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등은 마지막 순간 배신을 당한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을 때 당혹스러운 건 비단 소설 속 인물뿐만이 아니다. 이성으로 예측한 방향대로 흐르지 않는 인간관계. 언제 깨질지 모르는 그 관계를 붙잡고, ‘이건 안전해’라고 ‘능동적인 착각’을 하고 있는 나는 안. 전. 한. 가.

위태롭지 않은 곳이 없는 현실, 작가는 환상으로의 탈주를 꿈꾼다. “마부석에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자체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비둘기들이 거리에서 똥을 쪼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충격적인 것은 비둘기의 태도였다. 그 비둘기는 마부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그 비둘기는 고삐에 매여 있지 않았고, 옆좌석에는 가는 끈이 늘어뜨려진 작은 종이 달려있었다. 비둘기는 이따금 부리로 줄을 잡아 끌어당기곤 했다. 한 번 잡아당기자 말이 왼쪽으로 돌았고, 두 번 잡아당기자 오른쪽으로 돌았다.”(p179. <비둘기 시민>)

환상으로의 탈주

이 상상이 미쳤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불에 태워죽이고, 누군가를 등쳐먹기 위해 최고의 지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미치지 않은 거라 할 수 있을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속 16편의 단편들을 읽으며, 사내는 왜 외로운지 원인을 밝히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짐작은 간다. 하지만 그건 단지 내 생각일 뿐이다. 이성과 논리의 틀로 광기의 시대를 재단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 또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면 프랑스의 대문호 로맹 가리가 차가운 권총으로 자신의 생을 날려버리지 않았겠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그들의 주검은 바닷물에 쓸려 이리저리 뒹굴고, 그나마 숨이 붙어 있는 새들은 어린 아이들의 발에 짓이겨져 골수를 쏟는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갈 곳을 알고 있다. 인간은 어디로 돌아갈지 모른다. 차가운 길바닥에서, 소음 가득한 공장에서, 총탄이 비행하는 전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새들을 부러워하지 않더라도, 새들을 동정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명횡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 돌아갈 곳을 찾아봐야겠다. 

안늘(ak20@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2
  1. 조르바 2009.08.17 10:55 address edit & del reply

    아, 이 멋진 책! 저는 '어떤 휴머니스트'란 무지 짧으면서도 인상적이었던 단편이 기억에 남아요.

    • 반디앤루니스 2009.08.17 14:41 신고 address edit & del

      저도 어떤 휴머니스트 보면서, 섬뜩함과 허무를 느꼈어요.. 정말 말로만 휴머니스트란.. 잔인하죠..^^;;
      조르바님~ 늘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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