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식 골든앨범: 그대 있음에, 새는》 - 송창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송창식 | 《송창식 골든앨범: 그대 있음에, 새는》 | 뮤직리서치 | 2011

 

7월 25일부터 5주간 매주 금요일 박재현의 < 송창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를 소개합니다. 이 글은 독립잡지 [월간 이리] 2014년 3월호부터 7월호에 연재된 글입니다.  이후 새롭게 이어지는 글은 월간 이리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 첫 만남

 

그렇다. 나는 송창식빠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땐 새롭게 등장한 댄스 음악과 눈물 없이도 들을 수 있는 발라드가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송창식, 하면 팔 벌리며 가나다라마바사 부르는 젊은 가수의 모창이 떠오르곤 했다. 땀내 풍기던 중학생 시절, 나의 불알친구는 송 씨라는 이유로 "너희 아빠 송창식 아이가?" 혹은 두꺼운 목소리의 가나다라마바사 같은 말과 노래로 놀림을 받았다. 애들은 좋다고 낄낄댔다. (그런데 참 놀라운 건, 그 친구 삼촌의 성함이 정말 송창식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성인이 되어 그의 삼촌 집에 우연히 들르게 되었는데, 삼촌은 인연이 닿아 윤형주를 초대한 적이 있으며 윤형주 역시 자신의 친구랑 똑같은 이름은 평생 처음 본다고 했단다.) 나도 물론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묵직한 소니 시디플레이어에 비틀즈를 넣어 듣곤 했다. 사실 억지 춘향으로 간 피아노 학원이나 길보드 차트의 최신 유행 테이프를 가끔 사 듣던 것과 다르게 음악이라는 것을 제대로 향유해 본 게 이때가 처음이었다. 특히 비틀즈에 흥미를 느끼며 《1》을 수백 번 듣고서 차차 정규 앨범까지 섭렵, 미공개 트랙을 모은 <앤쏠로지 1,2,3>마저 모으며 폴과 존의 목소리에 시간을 빼앗겼다. 이후, 대학생이 되어서는 스티비 원더와 카펜터스, 이한철을 즐겼고 제대 후엔 브릿 팝과 마이클 잭슨과 마빈 게이, 사라 본을 반겨 들었다.

 

송창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간이 흘러 대학 4학년이 되었다. 교보문고 핫트랙에서 일하던 사촌누나가 종종 샘플 시디를 줬는데, 어느 날인가 흰색 양복 차림의 진지한 가수가 70년대스럽게 담긴 앨범을 내밀었다. 귀한 거라고 했다. 거기엔 심플하게 ’SONG CHANG SIK’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현재보다는 과거 음악에 늘 귀가 움찔했기에(또 당시엔 산울림과 이문세를 듣던 때라) 무척이나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하지만 구닥다리 노트북으로 리핑할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왔고, 학교생활에 바쁘다는 핑계로 여차저차 청취할 기회를 조금씩 미뤘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 그와 그의 친구들이 출연했다. 놀러와 ‘세시봉’ 특집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괴짜라고 했고, 그의 말과 행동에 나 역시 매력을 느꼈다. 무엇보다 노래가 압권이었다. 특히 함춘호의 기타와 합주해 부른 < 한번쯤 >은 정말 굉장했다. 그는 근엄한 소리꾼이 되었다가도 어느새 어린아이가 되어 만득이 인형 만지듯 노래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렸다. 무아지경에 빠지면서도 결국 웃고 마는 얼굴이 흥을 더했다. 물론 흥의 중심엔 리드미컬한 스트로크가 있었다. 얼마나 들뜨게 만드는지 손가락 끝이 절로 움직였다. 기타를 한번 쳐보고 싶다는 충동도 함께 흔들거렸다. 풍부한 성량에서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도 빼놓을 수 없었다. 맑고 곧은 목소리는 격정적인 멜로디에 입혀져 속을 시원하게 뚫고 갔다.

 

 

선물 받은 앨범을 얼른 열어 아이폰에 담았다. 정확히 그때부터였다. 아, 그것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중독적인 구석이 있었다. 레논 앤 매카트니처럼 그 역시 스스로 곡을 만들어냈다는 데 더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시공간적 여유가 되면 항상 그의 노래를 틀었다. 샤워할 때도 그의 목소리는 재생되어 심심한 공간을 꽉 울려 줬다. 이미 그때는 그의 앨범을 모두 다운 받았을 때였다.

 

레논 앤 매카트니 때와 달리 나의 애정은 잠시도 식지 않았다. 첫 장편소설에도 그의 이야기를 넣었을 정도니. 그해 말엔 한 대학교 아트센터에서 열렸던 ‘세시봉 콘서트’를 관람했다. 맨 앞줄에 앉았던 나는 처음으로 그와 악수할 수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비현실적이었다면 과장일까. 해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턴테이블에 음악을 얹어 듣던 나는 그의 레코드를 더 적극적으로 모았다.(지금까지 그와 관련된 레코드를 총 스물여섯 장 소장하고 있다. 영국산 로저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여름에 열린 ‘가인과 특별한 만남’이란 콘서트에선 막 출판된 내 책을 줄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한 시간 정도는 화장실에 앉아 무엇이든 읽는다기에 기대가 커, 내 책을 읽었을까, 상상해 봤다. 그 여부에 관해선 나중에 다루려고 한다.

 

해가 지나 그의 노래를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미사리에 있던 그의 전용 라이브 카페가 리모델링을 마치고 < 쏭아 >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연 것이다. 대구에서 살다 서울의 한 출판사에 취직한 나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 여기며 간간이 활동하던 다음 카페 ‘창식사랑 TWO’에도 자주 기웃거렸고 한 달에 한두 번 그곳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했다. 모두 ‘영이야’, ‘한불휘’, ‘수림’, ‘해달’ 같은 닉네임을 실명 대신 사용했다. 낯선 정경이었다. 촌스럽게 내가 이름을 닉네임으로 했던 터라 더 그랬다. 나는 꾸준히 모임에 참석했다. 비슷한 열정을 가진, 혹은 나에겐 없는 추억까지 가진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둘러앉아 공연을 감상한 뒤엔 간혹 무대에서 내려온 선생님을 초대해 노래의 뒷이야기나 특별한 일화를 들었는데 그게 또 하나의 재미였다. 그러다 어느새 나는 젊다는 이유로 운영진이 되었다.

 

출판사 편집부에서 어김없이 월간지를 만들던 어느 날, 편집장이 말했다. “이번에 인터뷰 코너 재현 씨가 좋아하는 송창식 선생님으로 해볼까요?” 가끔 쏭아에서 선생님에게 인터뷰에 관한 언질을 하기도 했고 허락도 받은 상태였다. 난 환하게 웃었다. 거기다 원래 선배가 담당하던 꼭지를 특별히 내가 취재를 하는 게 어떠냐고 권하기까지 했다.

 

심한 독감에 걸린 선생님과 무사히 얘기를 나누고 무사히 글을 써 무사히 책에 실었다. 다만, 책엔 모든 내용을 담을 순 없었다. 독자층을 생각해 대체로 잘 아는 얘기를 해야 했다.

 

그의 앨범을 듣기 시작한 후로 그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기까지. 참 많이 듣고 보고 씹고 맛봤다. 그래도 아직은 그를 잘 모르겠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의 얘기를 조금 해보려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개 그를 괴짜 정도로 여기기 때문이다. 기존에 알던 것과 카페에서 그가 들려준 여담, 책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 등 그의 세계에 대해 무겁지 않게 그려 내가 느낀 즐거움을 함께 누렸으면 한다. 어쩌면 고루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우리 세대에 더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말이 길었다. 프롤로그라 생각해 주길.

 

오늘의 음반을 리뷰한 박재현님은?
87년생으로 단편 소설 '허전한 목을 채우고'로 데뷔했고 장편 소설 「당신만 모르는 이야기」를 출간했다. 현재, 할 말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잡지 「월간 이리에서 송창식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한 여행 잡지에 여행기도 연재할 예정이다. 여전히 엘피를 고집하며 클래식, 재즈, 오래된 가요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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