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만 - 열화당 사진문고 38》 - 판소리와 같은 사진

 

 

김녕만 윤세영 | 《김녕만 - 열화당 사진문고 38》 | 열화당 | 2013

 

‘단순히 웃기는 사진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것보다는 웃음 속에 눈물도 있고 생활도 배어있고 인간미도 들어있는, 말하자면, 판소리와 같은 사진을 해보고 싶다.’ 사진가 김녕만의 이야기다. 고향의 영향인지 그는 늘 ‘판소리와 같은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김녕만의 고향은 전라북도 고창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창군청에서 주최한 ‘고창읍성 축성 연대 찾기 공모전’에 수상한 이력을 갖고 있다. 사진기자라면 응당 지녀야 할 부지런함과 기록 정신을 일찍이 인정받은 셈. 소년 김녕만은 상금을 갖고 곧장 서울의 사진학원으로 향했다. ‘고창’은 내성적인 소년 김녕만을 사진가 김녕만으로 만들어줬다.

 

‘우체부’ 1975년, 고창. (출처: 김녕만 홈페이지 ‘김녕만의 사진세계’)


“편지 한 장이 서로의 마음을 이어 주던 시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이 찾아오는 집배원 아저씨는 늘 반갑고 고마운 손님이었다. 서해안에 인접한 내 고향 고창은 원래 눈이 많은 고장이지만, 이날은 유난히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자전거가 넘어지고 소포 뭉치가 날아가기도 했다. 얼마나 손이 시렸는지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서 주먹을 쥔 채 셔터를 눌러야 했다. ? 고창, 전라북도, 1975.” (18쪽)

 

1978년, 고창을 떠난 그는 동아일보의 사진기자가 되면서 본격적인 ‘보도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1980년 광주의 봄, 1983년~1994년 판문점, 1994년~1999년 청와대. 그의 카메라에 담긴 굵직한 역사다. 그는 역사 현장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억지로 한 일은 없다.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있었을 뿐이다. 

 

“5월 27일의 무력진압이 끝나자,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까지 끌려가고 있다. 의무적으로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 당시 상황에서 기자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기록용’이라는 말이었다. 신문에 싣지도 못할 사진인 줄 뻔히 알면서도, 기록용이라는 명분으로 취재에 임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이 제대로 보도되지 못한 탓에 광주 시민들로부터 규탄을 받기도 했다.” (96쪽) 

 

 

“폭풍우 같던 열흘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갈라서는 슬픔을 겪었다.대부분 젊디젊은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에 서러움과 안타까움은 더했다. 유가족을 태운 영구차 위로 구름이 무심히 펴 있다. 이제 슬픔만 남았다.” (104쪽)

 

김녕만은 선배 기자 황종건과 1980년 5월 18일부터 26일까지 광주에서 기록했던 사진을 모아 《光州, 그날》(사진예술사, 1994)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했었다. 사건이 있고 난 후 14년 만이었다. 그는 “사진집을 내고서야 희생자에 대한 마음의 빚을 조금 갚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포착한 진실들은 역사를 새롭게 창조했다.

 

사진집의 첫머리, 김녕만의 작가론은 월간 《사진예술》의 편집장이자 아내 윤세영이 기술했다. 수많은 사진작가들을 대상 자체로 바라본 사람이 쓴 작가론답게 글은 객관적이면서도 아내만이 바라볼 수 있는 정확한 시선을 품고 있다. 덕분에 감상자는 사진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김녕만의 사진은 ‘인간적’이다. 사진에서 사람을 소홀히 하지 않는 그의 정성스러운 성품이 읽히고, 그런 점이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우리는 사진 속 대상을 바라보면서 그 대상을 바라본 사진가의 시선까지 함께 읽을 수 있고, 나아가 우리와 사진가, 그리고 사진 속 대상이 삼위일체가 되는 순간 감동을 느낀다.” (14쪽)

 

사진가의 시선이 정성스러워서일까, 김녕만의 사진에선 유독 인간의 ‘본연’이 발견된다. 그의 ‘판문점’ 사진에서 보이는 군인들의 빈틈은 따뜻하기까지 하다. 결국, 사진가와 사진 속 대상 모두 웃을 수밖에. 

 

‘판문점’, 1992. (출처: 김녕만 홈페이지 ‘김녕만의 사진세계’)

 

“제6차 남북 고위급회담 수행원으로 평양에 가는 남측 장교와 마중 나온 북측 장교가 길이 미끄러워 위험하자 손을 잡았다. 주적으로 규정된 남북의 군인이 손을 잡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도 나는 혹시 이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오래전부터 꿈꿨다. 그래서였는지 갑작스러운 순간이었지만 놓치지 않았다. 멀리서 내가 사진 찍는 것을 본 다른 기자가 자기도 찍겠다며 황급히 달려오다가 빙판에 미끄러져 크게 다치기도 했다.” ? 판문점, 1992. (136쪽)”

 

그의 홈페이지에는 고향 얘기부터 그가 대학 시절 찍었던 사진, 수십 년의 취재기가 담겨있다. 글과 사진, 기록물의 양이 상당하다. 홈페이지 이름 ‘김녕만의 사진세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 홈페이지 한쪽에는 딸 김은성의 글도 있다. 딸이 아빠를 생각하며 쓴 글 ‘아빠 방식대로의 사랑’은 98년 경기여고 교내 백일장대회에서 무려 금상을 받았다.

 

“아빠가 내 사진을 찍으실 때 카메라 렌즈에 비춰진 가장 예쁜 모습의 딸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진에 찍힌 겉모습뿐만 아니라 마음이 예쁜 딸로서 아빠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 아빠 방식대로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겉으로가 아니라 저 마음 깊숙이 있는 소중한 마음으로 말이다.”

 

김녕만은 최근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예 고창에 새로이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가 사진을 오래오래 많이 찍었으면 좋겠다. 마음이 예뻐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테니까.

 

-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원 (hyewonjung@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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