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 세상을 깨우는 소리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 DG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리라

 

사실 베토벤 교향곡 9번「합창」이 꼭 연말에만 연주되어야 하는 곡은 아니다. 음악 연주의 역사에  어느 정도의 조예가 있는 애호가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이제 막 고전음악을 듣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아, 그래?"와 같은 반응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일본 음악·공연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에서는 각 오케스트라들이 12월의 정기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하는 게 일종의 관습처럼 내려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곡이 초연된 것은 연말이나 겨울의 분위기와는 상관없는 5월이었으며 하다못해 가사에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형제가 되어 얼싸안고 자유를 위한 노래를 부르며 성역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가슴 벅찬 가사가 한 해를 정리하고 반성하는 연말과 새로운 시작을 위해 희망을 갖고 준비하는 연시에 적합했던 게 아닐까.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행사는 역시 거창하게 해줘야 제격이며 자고로 축제에는 명분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지구상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을 축제일을 하나만 정해야 한다면 큰 이변이 없는 한, 아마 새해를 맞이하는 날이 되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종교·정치·인종을 막론하고 인류 전체의 유산으로 자리 잡은 악성의 이 위대한 음악도 그 축제를 기념하는 자리에 당당히 올라와 있을 것이다.

 

올 12월에 서울시향과 정명훈은 또 하나의 음반을 발매해 자신들만의 축제를 즐겼다. 바로 앞서 말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순수한 국내 합창단과 독창자들과 함께  발매한 것이다. 도이치 그라모폰이라는 메이저 레이블에서 대작을 녹음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념할 만한 일인데 음반의 질 또한 매우 우수하다. 속된말로 '최소한의 선' 정도를 넘어서 더 높은 수준까지 욕심을 낼 수 있는 음반이 탄생한 것이다. 

             

달려라,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길을!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새 음반을 소개하기에 앞서 일단 그동안 이어져 내려온 9번 교향곡의 중요한 녹음들에 대해서 간략히 정리해봐야 할듯하다. 먼저 이 곡과 관련해 '최고의 명반' 지위를 상당히 오랜 시간 지켜온 음반이 있다. 국내 모 원로 평론가의 책에도 실려 유명해진 푸르트벵글러와 바이로이트축제 관현악단의 1951년 녹음이 그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귀로 듣기에 이 음반은 '명반이라기보다는 그저 오래된 녹음 중에 가장 유명한 음반' 정도로 분류하는 게 나을 듯하다. 최근의 조사결과 이 녹음은 라디오 방송, 리허설 음원, 실황음원 등이 짜깁기되어있는 음반임이 밝혀졌고(물론 이처럼 여러 개의 음원 중 가장 좋은 것들을 재조합하는 방식은 적지 않게 쓰이는 방법이다. 하지만 문제는 푸르트벵글러의 이 음반이 마치 하나의 테이크로 녹음된 실황처럼 알려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한 논란을 감안하고 듣더라도 음질, 연주의 일관성 면에서 큰 점수를 주긴 힘들듯 싶다. 아마 구하기는 힘들겠지만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기 몇 달 전인 1954년 8월에 루체른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음반이 훨씬 뛰어나다 볼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의 사후로는 헝가리의 지휘자 페렌츠 프리차이가 1957년에 베를린 필과 녹음한 음반을 첫 번째로 꼽고 싶다. 칼같이 맞아 떨어지는 앙상블과 카라얀에 의해 변화되기 이전의 베를린 필의 카랑카랑한 음색이 어우러진 매력적인 연주이며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지치지 않고 밀어붙이는 추진력과 큼지막한 스케일이 듣는 이를 압도한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음반은 1962년도의 CD녹음과 1977년의 영상이 담긴 DVD가 가장 훌륭하며 특히 77년의 영상물은 카라얀 특유의 영상연출법과 맞물려 음악 역사상 또 하나의 금자탑을 세웠다.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조지 셀의 1968년 녹음(BBC)은 활화산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격정이 인상적이며,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2000년도 영상물은 실황연주 특유의 열기와 깔끔하게 닦여진 오케스트라의 음색이 매우 훌륭하다.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이번 음반은 전체적인 레코딩 역사의 큰 틀에서 봤을 때 사실 뚜렷한 특징이나 이정표를 제시하진 못한다. 그보다는 거의 새롭게 태어나 몇 년간의 단련을 거친 후 아시아 최고 수준으로 재탄생한 오케스트라의 준수한 녹음기록 정도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얼핏 평가 절하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서구음악(서양인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연주하는 그 서양 고전음악이다!)을 연주하는 아시아의 오케스트라로서 보여줘야 할 것은 충분히, 그리고 멋지게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자신이 태어난 곳, 자란 곳에서 체득하지 못한 걸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남들이야 말은 쉽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서구인이 아무리 한국민요를 구성지게 부른다고 해도 한국 사람이 직접 흥얼거리는 그 자연스러움에 비할 수 없듯이, '원조' 혹은 오리지널의 거대한 벽 앞에 겁 없이 도전장을 내미는 그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쇼비니즘에 입각한 칭찬이 아닌, 진정한 노력과 투자로 최선의 결과물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그들이기에.

 

오늘의 음반을 리뷰한 '박현준'님은?
편견없이 음악을 듣고 편견없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음대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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