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7번] - 찬란한 오로라의 노래

 

파보 베르글룬드·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7번] | LPO | 2010

 

수오미의 목소리

 

'수오미(Suomi)'는 핀란드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중요한 단어다. '핀란드'라는 국가를 나타내는 고유명사로도 쓰이지만 '핀란드인' '핀란드 정신'과 같은 광범위한 뜻을 함께 표현할 때 사용된다. 어원은 정확치 않지만 슬라브 언어나 발틱 언어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며, 핀란드라는 영어식 지명을 대체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유럽 대륙 자체가 워낙 좁은 공간에서 복닥거리며 살아 온 역사를 가지고 있는 데다, 국가 간의 경계선 역시 수없이 바뀌어 왔기 때문에 어느 나라나 이러한 '정체성 확립'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은 지도상의 국경선을 지워버리는 순간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현대로의 진입에서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국가'라는 시스템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이 같은 개념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특히 약소국가의 경우  국민의 단결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러한 정신적인 틀이 필요했던 게 사실이다. 핀란드 역시 '핀'족이 나라다운 나라를 제대로 세워보기도 전에 이웃나라인 스웨덴과 러시아에 번갈아가며 시달었고 전쟁을 치르더라도 승리의 기억보다는 배상금을 물어내거나 타국의 식민지나 자치령이 되었던 기억이 대부분인 나라였다.

 

핀란드의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조국은 늘 이런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드레날린 충만한 그의 음악만은 팍팍한 정치상황에 지친 수오미의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 소품, 자신들이 사랑하는 호수의 땅을 묘사한 웅대한 교향시,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보듯 어두움의 정서가 짙게 깔려있다가도 민족적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 목소리를 내는 수오미 인들의 목소리나 북국의 오로라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피날레를 가진 교향곡들. 이렇듯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해 한 민족의 목소리를 담아내면서도 쇼비니즘적인 요소를 최대한 없애고 예술성을 강조한 시벨리우스의 작품은 수오미 사람들의 언어 그 자체였다. 실제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인 사이먼 래틀은 그의 자서전에서 "나는 본머스(Bournemouth)의 지휘자 파보 베르글룬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실례로 시벨리우스의 많은 멜로디들이 핀란드어 발음의 리듬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언급하였다.      

 

시벨리우스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베르글룬트

 

파보 베르글룬트(Paavo Berglund,1929~2012)는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프로페셔널 연주자로서도 활동을 했으며, 핀란드 방송교향악단 시절에는 왼손잡이 바이올린 주자로 나름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지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자신이 직접 조직한 헬싱키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1953년부터였다. 그 후에는 헬싱키 필하모닉, 핀란드 방송 교향악단 등과 함께 작업하면서 전업 지휘자로서의 커리어를 착실하게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음악의 정확성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의 리허설은 매우 엄격했으며 연습의 강도가 '장난 아니게' 높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더불어 바이올린 주자 출신으로서 가지고 있는 현악기 자체의 선율미에 대한 깊은 감수성이 더해져서 단단하면서도 풍성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예술인이었다.

 

베르글룬트는 시벨리우스와도 친교가 깊었다.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교향시 「연인(Rakastava)」을 지휘하는 베르글룬트의 모습을 보고난 뒤 직접 만나 찬사를 전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1957년에 베르글룬트가 헬싱키 필하모닉과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곡 전곡을 연주했을 때는 자신과 악보의 오류를 수정하는 작업을 함께 할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이 교정본은 코펜하겐의 출판사인 '빌헬름 한젠'을 통해 출판되었으며, 지금도 이 '베르글룬트 에디션' 악보의 앞 장을 보면 베르글룬트가 직접 작성한 수정사항과 악보가 첨부되어 있다. 베르글룬트는 2012년 세상을 뜨기까지 수많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시벨리우스의 작품들을 연주하며 '시벨리우스 전도사'와 다름없는 활동을 펼쳤다. 특히 핀란드 이외에 시벨리우스의 작품을 가장 많이 연주하는 국가인 영국에서도 많은 연주를 가졌으며 훌륭한 녹음들도 다수 남겼다. 베르글룬트는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과 2번을 각각 2003년과 2005년에 런던 필하모닉(이하 LPO)과 연주한 적이 있는데 이 콘서트를 녹음한 음반은 매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헬싱키 필하모닉과 함께한 연주도 좋지만 LPO와 비교적 최근에 녹음한 이 음반은 음질의 선명함(SACD로 제작)을 등에 업고 명장의 노련함을 만끽할 수 있다는 데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번 교향곡의 4악장 첫머리에서 등장하는 트럼펫은 구름을 뚫고 비추는 햇살처럼 맑고 청명하며 1악장의 능구렁이 같은 완급조절은 듣는 사람을 말 그대로 '흔들어' 놓는다. 7번 교향곡은 시벨리우스 특유의 형식 조직-단순한 동기로부터 빵이 부풀어 오르듯 발전되고 또한 소멸하기도 한다-을 완전히 꿰뚫고 있으며 그것을 오케스트라에 선명하게 이식시켜놓았다. 작품 끝부분에 오케스트라가 베르글룬트의 리드를 따라오지 못해 템포가 굼뜨게 변하자 베르글룬트가 연주 중에 소리를 지르며 독려하는 부분은 옥의 티이긴 하지만 그 이후로 LPO가 정신을 바짝 차렸는지 무사히 연주를 마치고 청중들로부터 환호를 받는다. 아마 평생을 시벨리우스에 바친 노대가에 대한 진심어린 존경에서 우러나온 박수였으리라. 연주를 들어보면 그가 왜 오스모 밴스케나 콜린 데이비스와 함께 역사에 길이 남을 시벨리우스 스페셜리스트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음반을 리뷰한 '박현준'님은?
편견없이 음악을 듣고 편견없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음대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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