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추락의 역사를 지나

 

 

 

안토니오 알타리바·킴 |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길찾기 | 2013

 

20세기 하면 떠오르는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같이 역사책에 기록된 큰 사건이다. 우리나라로 한정 짓는대도 한국전쟁이나 민주화운동처럼 굵직한 일 정도다. 한 세기가 100년이다. 그 시간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왔을지 헤아리면 역사에 대한 내 인식 안에서 개인의 삶이 이토록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만 생각해도 20세기를 살았던 사람인데 먼저 입에 올린 것은 역사책에서 접한 이름뿐이니. 하기야, 그 이름의 주인은 내 할아버지보다 세상 속으로 훨씬 더 날아올랐을 게다. 어떤 면에서든 승자가 된 사람. 주로 기억되는 것이 그런 사람이라면, 나머지 숱한 사람들은 역사책에서 잊히고 때론 삶의 바깥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들이라고 도약한 적이 없을까? 지금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난 것은 애당초 날지 않은 결과가 아니라, 날고자 했던 시도가 좌절되고 변해 온 결과라고 봐야 한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그런 삶을 충실히 재현한 이야기다. 1910년에 스페인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승자가 되길 꿈꾸었으나 끝내 5층 창밖으로 몸을 던진 사내, ‘안토니오’의 이야기.

 

‘안토니오’는 저자인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2001년 5월 4일에 자살했다. 90년을 살아온 아버지는 20세기 정치 이념의 격전장인 스페인 내전을 몸소 겪은 장본인이었다. 농사짓는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20대를 새로이 시작한 아버지는 “나를 옥죄던 그 모든 장벽들이 한 방에 허물어지고, 하루 아침에 새로운 삶이 펼쳐진 것 같”(38쪽)은 기분에 취했으나, 갓 선포된 공화국에 파시스트 및 보수정당과 결탁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주변 상황이 격변한다. “이곳의 상황은 나로 하여금 현실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난 이제 싸워야만 하는 시대를 살아야”(46쪽) 한다고 느낀 아버지는 군부에 대항하는 아나키스트 조직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온 삶을 걸었음에도 전쟁이 군부의 승리로 돌아가자 아버지에게 선택지라곤 “패배를 받아들이고 승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123쪽)만 남게 된다.

 

최선의 선택은 이제 투쟁을 포기하는 것…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쟁을… 최선의 선택은 내가 따랐던 용감하고 위대한 사람을 가슴 속 깊은 곳에 묻는 것… 그의 신발도 함께… 최선의 선택은 그 시절을 지우는 것이다… 숭고한 사상과 함께 내가 날아오를 수 있었던 그 시절을… (124쪽)

 

이후 아버지의 삶은 그가 싸워온 적을 닮아 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돈을 쫓는 자본가가 되고, 국가 이념에 걸맞은 가정을 꾸리고, 더는 꿈꾸지 않는 무력한 노인이 되어 간다. 그리고 아버지는 죽음을 택한다. 도약을 거듭했으나, 결과적으로 길고 긴 추락이 되어버린 삶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대로 끝났다면 정말 잊히고 말았을 삶. 그러나 기억의 몫은 아들에게 전해졌다. 저자는 스스로 ‘안토니오’가 되어 90년 역사를 다시 썼다. 만화가 킴과의 합작을 통해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아난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독자인 나에게도 그 기억의 몫을 나누게 한다. 물론 이것이 지난 비극을 바꿔 놓지는 못한다. 하지만 저자는 ‘안토니오’의 추락을 가리켜 “나의 아버지는 창가에서 하늘로 날아갔다.”(214쪽)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패배했으되, 단지 그렇게만 설명되어서는 안 되는 삶에 정식으로 예우를 보내게 된 것이다. “더 넓게 보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213쪽)에게. 그 사람들 중 하나일지도 모를 자기 자신에게.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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