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 거울이 되어 오는 곳, 절터

 

 

이지누 |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 알마 | 2012

 

가고 싶다. 말인즉슨, 행선지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인데 사실 자신이 지금 가고자 하는 곳이 진정 어딘지를 알고 가는 이가 얼마나 될까. 제아무리 마음에 정한 바가 곧은 인간이라도 앞으로의 여정을 내다볼 수는 없는 일이다. 행선지가 있다 한들 그곳이 나에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일이고. 가고 싶다며 내 길을 꽤나 앞서나가는 듯 보여도 사는 일은 결국 수동적인 데가 적지 않다. 가도 가도 끝내 무엇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 기다림의 일환이다. 어디에 닿을지, 무엇이 올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때부터였다. 큰 스님들의 다비장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20년이 가깝도록 겨우 서른 차례 남짓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밤새 다비장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 무엇 때문에 고승대덕의 다비가 치러지는 날이면 버릇처럼 그곳으로 향하는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한다. (81쪽)

 

퇴옹 성철스님 다비식을 시작으로 큰 스님들의 다비식을 기록해온 이지누의 말이다. 나는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가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여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가 폐사지를 답사한 기록이다. 폐사(廢寺), 말 그대로 폐허가 된 옛 절터다. 더 이상 절이 아닌 곳에서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 책에 소개되는 진도 금골산 토굴터, 장흥 탑산사터, 벌교 징광사터, 화순 운주사터, 영암 용암사터, 영암 쌍계사터, 강진 월남사터, 곡성 당동리 절터, 무안 총지사터는 전부 전남 지역의 폐사지다. 그는 먼저 이들의 역사적 맥락을 읽어낸다. 남도는 지리적 특성상 불교문화가 융성한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의 통제 밖에 있었다. 때문에 "경제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낙후되었지만 오히려 사상은 분방할 수 있었"(8쪽)던 면은 폐사지의 흔적과 관련 고문헌에 잘 드러난다. 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여정이 인상적인 대목은 따로 있다. 어디에 간 것만을 말하지 않고 그곳이 나라는 인간에게 무엇이 되어 왔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가는 길이 험하다는 용암사터에 관한 이야기.

 

오늘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나라 안 절집이나 절터가 어디인들 아름답지 않을까 마는, 용암사터는 유독 멀리서 봐야 그 본래면목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많은 절집들이 그 마당에서 내다보는 그윽한 앞 풍경을 내세우지만 용암사터는 반대다. 오히려 먼 곳에서 그를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렇기에 용암사터는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들이 유발하는 난감한 그리움을 유감없이 뿜어낸다. 그 때문에 언뜻이라도 절터를 보고 말았다면 그곳으로 가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매혹적인 곳이기도 하다. (…) 아름다운 장면들이 말을 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장면들이 묵묵히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이 받는 위안은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니 기어코 부처님에게 다다르지 못할지라도 이미 그를 찾아 길을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일이다. 아름다운 존재를 찾아서 진흙길이나 돌너덜을 마다하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이미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188쪽)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을 그에게 온 것은 이 같은 깨달음이다. 절터는 그곳으로 향하는 자신의 얼굴을 되비추었다. 옛날이 되어버린 절을 그리고 "부처님"을 그리는 자신의 얼굴. 이들 행선지는 가고자 해도 다다를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폐사지 아홉 곳의 순례기는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기다리는 일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무의미하지 않다. "진흙길이나 돌너덜을" 걷다가 발이 머무는 절터가 자신에게 거울이 되어 올 때, 그 미완의 모습 또한 아름다움을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가 보여주고 있으므로. 가고 싶다, 가고 싶다, 절터를 그리워하는 각각의 여정을 통하여.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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