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 - 이불 홑청에 담긴

 

최갑수 | 《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 | 달 | 2010

 

낯선 골목을 걷고 있노라면 시간의 회벽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추억의 한 장면을 만나곤 한다. 골목을 따라가면 언제나처럼 작은 공터가 나오고 왁자한 아이들이 그곳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비석치기를 하거나, 양갈래머리를 한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다. 때로는 무리에 속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 놀이에 끼이고 싶어 이리저리 기웃대며 놀이를 방해하지만 저녁 어스름이 질 때까지의 골목은 온통 아이들 차지였다. 어둑어둑 해가 지면 아이들은 아쉬움만 한아름 내려 놓고 공터를 떠난다. 호박꽃이 환한 저녁이면 공터 한켠에 놓인 평상으로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밤새 모깃불이 타올랐었다. 이따금 어른들의 이야기가 호박 넝쿨처럼 길게 이어지는 날이면 졸음에 겨운 아이들은 제 어미의 무릎을 베고 곤한 잠에 빠져들고 풀벌레 소리만 별처럼 가득했었다.

 

골목에서는 그때 맡았던 제 어미의 땀내음처럼 아릿한 향수가 밀려오곤 한다. 낮은 담장 넘어 손바닥만한 마당 한켠에선 걸레를 빠는 누이의 모습. 일렁이는 검은 머릿결에 함초롬한 가을 햇살이 소복소복 쌓일 것 같은 오후.  영훈, 종애, 영숙, 정태 같은 낯익은 이름들이 어디선가 들려올 것만 같다. '아무개야!  밥 먹어라!' 하는 메아리가 앞산 머리에 쩌렁쩌렁 울릴 것만 같다. 손을 뻗으면 그 정겨운 풍경이 하마면 잡힐 듯한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골목의 옛 모습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까치발을 뜨면 안마당까지 훤히 보이던 정겨운 풍경도, 깡통을 차며 놀던 작은 공터도, 세월의 더께가 일던 담배가게도 이제는 모두 아슴아슴 멀어지고 있다. 여행작가 최갑수의 《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최갑수 골목산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나즈막한 슬레이트 지붕이 골목으로 나란히 펼쳐지는, 골목을 따라 코스모스 여린 데궁이 일렁일 것만 같은 그때의 풍경 속으로 안내한다.

 

골목을 다니다보면 순수한 사랑으로만 가득 찬 곳에 들어서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은 바람으로 흔들리는 미루나무의 움직임처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나는 할머니들과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지켜보며 보일러로 따뜻해진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을 때의 느낌을 받았다. 온통 평화와 사랑으로 충만하다는. (240쪽)
 
서울의 부암동이나 북촌 한옥마을에서부터 통영의 동피랑, 청주의 수암골, 부산의 태극도마을, 대전의 복지관길 등 저자의 발길은 몇 남아 있지 않은 전국의 골목을 누비고 있다. 건물의 높이가 1m씩 높아질 때마다 남보다 두세 걸음쯤 앞서 걸어야만 했던 우리는 골목의 여유란 그저 게으름의 상징, 청산해야 할 구태의 하나쯤으로 여기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미의 시큼한 땀내음이 물씬 풍겨오던 삶의 터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리에는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도통 찾을 길 없는 콘크리트 건물만이 위압적인 자세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이렇듯 풍경의 변화는 사람들의 일상을 생경하게, 또는 살풍경하게 만들어 놓았다. 추억은 오직 마음 속의 그리움으로만 존재하는 추상적 개념이 되고 말았다.

 

나는 지금 수암골 골목에 서 있다. 주홍빛 불이 들어오고 있는 가로등 아래로 단발머리 여자 아이가 뛰어간다.  먼 지붕 위로 별이 돋고 어디선가 졸리운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모든 것은 익숙하지만 새롭게 다가온다.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곳. 그곳이 바로 골목이다. (359쪽)

 

언젠가 댐 건설로 인해 자신이 발붙이고 살던 고향을 잃고 실향민 아닌 실향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호수 어드메쯤을 가리키며 자신이 살던 곳이라고 말했었다. 그때 나는 느꼈었다. '아, 개발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픔이 되는구나!'하고 말이다. 개발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음을 그때 알았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체취는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새로이 태어나는 자식들에게 제 부모의 흔적을 지우도록 강요하는 사회를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까. 골목을 보존해야 하는 첫째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은가.

 

뽀얀 가을 햇살 속에 온종일 펄럭였던 이불 홑청처럼 순수한 마음이 흘러가던 곳. 그곳이 바로 골목이었음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모퉁이를 돌면 백구가 컹컹 짖던 내 어릴 적 친구의 집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제는 몇 남지도 않은 골목이 부디 무사하기를... 그곳에 흐르던 순수의 마음들이 계단을 오르고, 공터를 돌아 고샅고샅 흩어지기를... 

 

오늘의 책을 리뷰한 ‘꼼쥐’님은?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딱히 장르를 정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읽는 잡식성의 독서가이자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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