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잽》 - 이토록 멋진 잽을 날리다니…

 

 

김언수 | 《잽》 | 문학동네 | 2013

 

세상이 싸움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와 경쟁을 해야 하고 끝내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치열한 싸움터 말이다. 어떤 이가 반칙을 쓴다는 것도 안다. 알면서 눈을 감아주기도 한다. 진정한 승리는 때로 승패와는 상관없으니까. 김언수의 소설집 《잽》에서 그려내는 세상도 그렇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바탕 싸우고 나서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표제작 〈잽〉은 정말 멋지다. 아니, 아름답다. 화자인  ‘나’는 열일곱 고등학생이다. 평범한 학생이다. 수업 시간에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회오리바람을 보기 전까지. 그 행동으로 윤리 선생에게 빰을 맞았고 반성문 제출을 거부해 3년 동안 화장실과 운동장을 청소해야 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화가 났다. 화를 표출하기 위해 권투를 배우기 시작한다. 관장은 싸움의 기술로 잽과 홀딩을 알려준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잽을 날리고 싶었을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윤리 선생, 혹은 세상 전부인지도 모른다. 아니, 관장은 잽보다 홀딩이 더 좋은 기술이라는 걸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홀딩이라는 좋은 기술도 있지. 좋든 싫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거야. 끌어안으면 아무리 미워도 못 때리니까. 너도 못 때리고 그놈도 못 때리고 아무도 못 때리지. (26쪽, 〈잽〉 중에서)

 

누구나 잽을 날리고 싶었던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감하게 잽을 날리는 이는 많지 않다. 그토록 열심히 잽을 연습했지만 결국 한 방을 내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매일 세상이라는 싸움터를 향해 나가지만 상대도 나처럼 고단하고 피곤한 상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맞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주먹을 내밀지 않고 있는 고요한 세상이어서 도대체 어디다 잽을 날려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31쪽, 〈잽〉 중에서)

 

〈금고에 갇히다〉는 제목 그대로 금고에 갇힌 이야기다. 화자인  ‘나’는 사기가 전문으로 금고털이 기철과 금고업체 여직원과 함께 금고를 턴다. 그 과정 중에 어이없게 금고에 갇힌다. 안에서는 절대로 열 수 없는 거대한 금고에 갇힌 셋은 서로를 원망하다 밖으로 나갈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다 금고에서 금으로 만든 주사위를 발견하고 뱀놀이판을 만든다. 그들이 견디고 위로받을 수 있었던 건 보석도 귀금속도 아닌 그저 놀이였을 뿐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금고 밖에서 꿈꿨던 환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금고 속에서만 빛을 발하는 보석도 마찬가지. 우리 스스로 무엇에 갇혀 살고 있는지 묻는 소설이다. 

 

사기꾼은 환상을 파는 직업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거짓보다 진실에 휠씬 가깝다. 진실에 가까운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에 가려 하고, 자신이 움켜쥘 수 없는 것들을 움켜쥐려고 한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사기꾼과 손을 잡는다. (43쪽, 〈금고에 갇히다〉 중에서)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는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암살범으로 지목된 화자  ‘나’의 이야기다.  ‘나’는 정체를 모르는 남자의 압박과 고문을 이겨지 못해 진술서를 작성한다.  ‘나’는 나를 잊어버리고 진짜 암살범이 되어 그들이 내 준 자료에 맞게 진술서를 쓴다. 어떻게든 진술서를 써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 한데 점점 진술서가 좋아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에 따른 진술서를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고민이나 걱정 따위는 사라지고 완벽하게 그 틀에 들어가면 편했다. 문득,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진술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소설 속 화자가 애잔하고 애틋하다.

 

나는 자료를 해석하고 거기에 살을 붙이고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사건을 조리에 맞게 결합했다. 나는 날마다 진술서 속의 이야기들을 상상하고 느끼고 호흡했다. 그러자 나는 진술서의 세계가 점점 좋아졌다. 아무런 의혹도 모순도 없는 세계! 이처럼 논리적이고 명확한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지!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더이상 나에게 암살범이라는 가짜 암시를 주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암살범 그 자체이고, 진술서 그 자체였다. 나는 이제 자료만 준다면 어떤 진술서도 열두 시간 안에 완벽하게 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143쪽,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 중에서)

 

김언수가 그려낸 인물은 평범하다. 대표로 나설 싸움꾼이 아니라 의자를 지키고 있는 후보 선수들이다.  술집 뒷골목의 풍경을 담담히 그려내며 그곳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단발장 스트리트〉, 그저 그런 날들의 반복 속에서 소파 옮기는 일이 특별한 사건이 되는 일상을 보여주는 〈소파 이야기〉, 한때 잘 나가던 과장이었지만 실직 후 아버지 병원비로 아파트까지 팔고 슈퍼를 하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사는 〈빌어먹을 알부민〉 속 가장 등 모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시민이다. 그래서 더 정이 간다.

 

김언수가 고맙다. 때로 답답하고 때로 외로운 세상에, 이토록 유쾌한 잽을 날려주다니.

 

오늘의 책을 리뷰한 '선인장'님은?
그저 폭넓은 책읽기를 꿈꾸며 책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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