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맨발로, 너에게

 

 

황인숙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문학과지성사 | 2006

 

문득 어떤 기억들은

 

산탄총이 되어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기는 거예요.
산산히 뇌세포를
부숴버리는 거예요.
지져버리는 거예요.

 

자욱한 포연 속에서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거예요.
새들도, 거리의 소음도 비틀거리며
막 분홍?이 되는, 아침이 비틀거리며.

 

머릿속이 내달린다. 비루한 오늘, 불현 듯 닥쳐오는 그날의 부끄러움을 피해 저 멀리. “철심을 넣은 수의처럼/ 누렇고, 뻣뻣하고, 불길하고, 뻔뻔한” (12쪽, ‘어쨌든 그것부터’ 중에서) 엇, 하고 터져 나온 말, 그 말에서 줄줄이 새어 나오던 못생긴 마음, 감추려 했으므로 더욱 추해져버린 자신으로부터. 초조한 도망자가 되어 현재를 좀먹으며 또 다른 현재를 향해 부질없이. 그러나 이 몸의 자리는 아직도 오늘. “몸에 끔찍이 익숙하고/ 정신에 어이없이 낯선/ 내가 있다./ 내가 있었고, 기다리고 있다.” (64쪽, ‘아침을 본 짧은 기억’ 중에서) “오늘 신문은 벌써 반찬 국물로 얼룩져 있다.” (13쪽, ‘어쨌든 그것부터’ 중에서)

 

긴말 하기 싫다

 

그냥 멍청한 것
그냥 삐뚜름한 것
그렇다면 그냥 견딜 말한데
멍청하고 삐뚜름한 것, 아!
         쩌르륵 거울에 금이 간다
         쩍 갈라져 뒤집어질 것 같다

 

어쩌겠니, 내가
어제 오늘 못생겨진 것도 아니고……
항상 이렇게 생겼었다는 것이 위로가 되다니!

 

어떻게든 추슬러 다시 평범한 생활의 얼굴을 갖기 위해 다른 쪽으로 달리기. 말과 마음의 그럴 듯한 이유를 찾는 방황, 설령 그것이 핑계고 변명일지라도 일단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가 급선무. 메우지 못한 틈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불화의 흔적은 나 아닌 모든 것을 탓으로. 마치 “아저씨, 이 집은/ 왜 이렇게 술이 잘 쏟아지는 거예요?/ 자꾸 술병을 쓰러뜨리며/ 곤드레가 된 한 사내가/ 술집을 나와/ 비틀비틀, 한 발, 한 발,” (18쪽, ‘장엄하다’ 중에서) 죽음이 정해져 있는 장소로 다가가듯. 또 그런대로 얼기설기 자기합리화를 완료한 후 일상으로 무사한 척 복귀.

 

데그럭거리다

 

머리가 죄악으로 무겁고 가책으로 모나서
쉽사리 잠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하, 가기도 두렵다.
거기가 어딜지 빤히 알기에.

 

뗏장 같은 이불을
당겼다 걷어찼다 뭉개며
데그럭거리는 머리통을 버둥버둥 끌고

 

당도하면, 거기.
하늘은 먹장구름, 길은 엉망진창
회칠 벗겨진 담장 끝의 녹 칠한 막다른 집.
입구도 가구도 망가지고 모호하다.

 

당도하면 거기.
모르는 이들도 빚 청산을 요구하고
천사 같은 친구도 나 닮은 얼굴로 떠돈다.

 

진즉에 입 다물 일이었다. 조화에 이르지 못한 건 내가 “멍청하고 삐뚜름”해서가 반 이상. 가만 보니 여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똥 묻는 개인 채로 잘도 시끄럽게 짖어대 왔구나. “나는 타락했다./ 내가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피의 계율을 잊었기 때문에.” (86쪽, ‘자유로’ 중에서) “나는 캄캄하게 누워있다./ 캄캄한 생각이 중얼중얼 쳐들어온다./ ‘진실에 닿는 고통’ ?/ 아니, 고통은 있는데 진실은 없다./ 무슨 삶이 이렇담!/ 고통만스럽고 진실은 없다./ 비천한 삶이다.(56-57쪽, ‘아무 불도 켜지지 않았다’ 중에서) 그래도 어김없이 아침은 오고 나는 살고 나는 사람이고, 이대론 도저히 안 되겠고.

 

열이 활활 나는 삶의 손바닥으로

 

아아아, 니! 아니다!
이건 삶이 아니야.

 

아, 날것이여.
날것, 날것, 날것들이여.
나를 두들겨, 깨뜨려.
내 안의 날것을, 아직 그런 것이 있다면,
깨워다오.
이 허위인 삶을
쪼고, 쪼고, 물어뜯어다오.

 

그런데, 어디 있는가, 날것들이여.
내 뭉실한 삶이
거친 이를 가진 입이 되어
쩍 벌어진다.
질겅질겅 씹고 싶은 날것들이여.
꿀꺽 삼키고 싶은 날것들이여.
꿀꺽꿀꺽 삼켜 구토하고
배 앓고 싶은 날것들이여.

 

열이 활활 나는 삶의 손바닥으로
나를 후려쳐다오, 날것들!

 

그리하여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47쪽, ‘비’ 중에서)인 저 비처럼, 맨발로, 너에게 비로소 태어나 처음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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