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 <사일런트 랜드>


 

폴 브록스, <사일런트 랜드>, 연암서가, 2009

 

요즘 TV 드라마 소재로 심심찮게 나오는 소재 중 하나는 주인공이 기억상실에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의 기억들 혹은 중요한 일에 대한 기억들을 잊고 있다가 아주 극적인 타이밍에 다시 기억을 찾는 뭐 이제는 그렇고 그런 스토리. 이와 함께 식상한 소재를 하나 더 들어 본다면 바로 치매에 관한 것이다. 드라마에 자주 쓰이는 이 두 소재인 기억상실과 치매는 바로 뇌에 이상이 생겨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드라마 소재로 널리 쓰이면서 이제 뇌질환은 특이한 병이 아닌 친숙한 병이 된 것만 같다.

이런 대중매체의 영향 때문일까. 최근 뇌에 관련된 책들에 관심을 갖고 몇 권을 읽었다. 남녀의 차이를 만드는 뇌에 관한 이야기부터 뇌졸중으로 인해 특이한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 관한 이야기까지. 또한 뇌를 단련하는 방법이나 뇌의 기능을 좋게 해준다는 방법에 관한 책까지 - 주로 치매나 건망증예방에 관한 것들을 다루고 있는 책들이다. - 이런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더욱 뇌에 관한 궁금증이 더해져 갔다. 그래서 이 책을 보는 순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인 표지도 내 시선을 끌었고 또 신경심리학자라는 저자의 타이틀도 내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책은 처음부터 나의 관심을 듬뿍 끌었고 나는 뭐에 홀린 듯이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다. 홀린 듯이…. 이 책은 신경심리학자인 저자가 그동안 진찰해온 뇌질환 환자들의 임상 기록에 관한 내용인데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다. 길지 않은 사례라 집중하기도 좋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의사가 쓴 티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을 매력 있게 만드는 점이다.

저자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들 중 루리야와 올리버 색스의 책도 예전에 읽어보았는데 확실히 이 책과는 다르게 지루했던 것이 사실이다. 뇌손상 후의 이상 증상에 대한 것이기에 충분히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이번 임상 실험에 관한 이야기에 비하면 루리야나 올리버 색스의 이야기는 전문가가 쓴 티가 많이 난다. 그래서 이 책과 같이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기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글들이다.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은 바로 저자의 글 쓰는 방법에 있는 것 같다. 소재들이야 모두 뇌질환으로 인한 환자들의 사례이기에 어느 것이 더 흥미롭거나 덜 흥미롭다고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책이 유독 재밌게 잘 읽히는 이유는 바로 저자가 환자와의 근접한 위치에서 글을 쓰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직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비교적 자세하게 그러나 딱딱하지 않게 써 내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가끔은 환상적인 요소까지 가미하면서 말이다.

숨은 영혼 찾기

또 한 가지 다른 책들에 비해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자꾸만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바로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말이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보통 머릿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관장하는 부분이 머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를 나답게 만드는 자아가 바로 머릿속 뇌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상식에 가까운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두뇌를 아무리 샅샅이 뒤진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자아는 고사하고 그 비슷한 것도 없다. 기계 속의 유령(영혼)은 없는 것이다. 이제 누구나 철이 들어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계의 작동 결과이고, 이 기계가 물리적․사회적 세계를 통과하면서 만들어낸 존재이다. 마음은 과정과 상호작용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구체적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사물들 사이의 공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허공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를 해방시키는 아름다운 생각으로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뇌 속 어딘가에 영혼이 매달려 있다는 생각은 왠지 모르게 촌스럽다. (p. 94~95)

저자는 초지일관 이 점을 강조한다. 바로 뇌는 단지 뇌일 뿐이라고. 인간의 두뇌 속에는 살(肉) 덩어리밖에 없다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강의에서도 학생들에게 두뇌는 단지 생물학적 대상이라는 인식을 주려고 노력한다. 또한 저자는 말한다. “두뇌의 속을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가 한편으로는 살덩어리에 지나지 않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이 허구적 관념임을 알게 된다.”(p.104) 라고. 이는 다른 장기를 수술할 때는 인격이 두뇌 속에 안전하게 피해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뇌를 수술 할 때는 인격이 다른 신체의 어느 부분에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두뇌는 하나의 절연된 대상으로만 취급해서는 그 기능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두뇌의 기능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 심신의 관계가 그보다 더 넓은 물리적․사회적 풍경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다.”(p.86) 이같은 설명을 들으니 두뇌가 나를 나답게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온전히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저자의 의견에 수긍이 될 것도 같다.

이 책은 분명 신경심리학자가 쓴 뇌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임상 실험의 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다보면 육체와 마음, 정신과 물질, 주관적 체험과 객관적 지식, 사람이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두 가지 방법인 자아 이론과 꾸러미 이론 등 철학적인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 자꾸만 나 자신에 대해 생각이란 걸 하게 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참 묘한 매력이 있는 책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설해목’님은?

책이 내 삶을 바꿔 줄 거라는 그 믿음 하나로 매일매일 책을 읽고 또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올해 드디어 10년 만에 책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어 더없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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