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사이 흐릿한 끈 - <이효석문학상수상작품집 2009>(토끼의 묘 외)

 

편혜영 외, <이효석문학상수상작품집 2009>(토끼의 묘 외), 해토, 2009

 

가산 이효석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신진 작가 발굴을 위해 제정한 ‘이효석문학상’이 올해로 10회를 맞았습니다. 그동안 이순원, 성석제, 윤대녕, 정이현, 구효서, 박민규, 김애란 등 주목받는 작가들이 이효석문학상을 거쳐 갔습니다. 10회를 기념하는 <이효석 문학상 수상 작품집 2009 (토끼의 묘 외)>(이하  <작품집>)에는 편혜영, 김애란, 박성원, 조경란, 이장욱, 천운영, 한유주 등이 함께했습니다. 이중 편혜영 작가는 이효석문학상을 수상, 표지에 얼굴이 가장 크게 나오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이번 문학상 수상작은 편혜영 작가의 <토끼의 묘>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6개월짜리’ 파견근무에 나갑니다. 주인공은 도시를 떠나 조금 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고 파견근무를 수락했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 의미 없는 일들,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무적인 인간관계, 심지어 무단결근을 해도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 통장에 잔고는 늘어납니다. 이게 배부른 투정 혹은 편안한 삶일까요? 존재의 이유가 무(無)로 사라진 공간에서 주인공은 토끼를 발견합니다. 애정을 주지 않아도, 아무 때나 버려도 되는 애완용 토끼. 주인공은 버려진 토끼에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토끼의 묘>가 흐릿한 인간관계를 건조하게 그린 작품이라면 수상작가 자선작 <크림색 소파의 방>은 그로 인한 인간의 내재적 불안과 공포를 그린 작품입니다. 소도시에서 지방근무를 하던 ‘박’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아내와 젖먹이 아기와 함께 서울로 이사를 갑니다. 무미건조하기만 했던 소도시를 떠난다는 기쁨도 잠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자동차 와이퍼가 고장 나 폐허가 된 주유소로 도움을 청하러 갑니다. 술 취한 청년이 와이퍼를 고쳐주지만, 박의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고치는 도중 아내의 젖가슴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 도움의 대가를 바라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불청객과의 만남 자체를 불쾌하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서울로 향하지만, 차는 갑자기 멈춰 서고 불쾌함은 불안과 공포로 바뀝니다.

김애란의 기수상작가 자선작 <너의 여름은 어떠니>는 청년 실업자로 방바닥과 친분을 쌓고 있는 미영이 주인공입니다. 고향 친구의 장례식에 갈 예정인 미영은 대학 시절 가슴에 품었던 선배의 전화를 받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다급한 목소리에 미영은 선배를 만나기로 하고, 설렜던 한 때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선배의 모습에서 ‘선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선배가 미영을 부른 것은 자신이 만드는 방송의 게스트로 섭외한 것입니다. 미영은 날씬한 여인과 핫도그 많이 먹기 대회를 벌이고 있는 ‘뚱뚱한 여자’가 됩니다. 선배와의 기억, 고향 친구의 죽음, 핫도그를 씹고 있는 지금의 나. 미영은 눈을 감습니다.

듣고 싶어, 아니 말하고 싶어

추천 우수작 <고백의 제왕>(이장욱)은 <너의 여름은 어떠니> 보다 시간이 더 오래 지난 대학 동창들의 이야기입니다. 대학 시절 서양철학을 공부하며 지식을 논하던 이들. 하지만 이제 그런 열기는 세상의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매해 하는 망년회가 지겨워질 무렵 이들은 ‘고백의 제왕’이라 불리던 친구 ‘곽’을 부릅니다. 곽은 자신의 첫 경험, 부친 살해 시도 등 쉽게 상상치 못했던 일들을 ‘고백’해 친해지고, 또 멀어진 친구입니다. 그런데 친구들 모두 곽과의 연락을 끊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개인적으로는 다들 곽과의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곽과 은밀한 고백을 들으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픈 중년 사내들의 욕망. 어쩌면 감정의 농도가 짙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곽의 모습이 부러웠는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추천 우수작 <웃는 동안>(윤성희)은 죽은 ‘나’가 바라본 친구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입니다. 예고된 죽음을 맞은 ‘나’는 친구 영재, 성민, 민기와 함께 자신의 장례식을 바라봅니다. ‘친구의 죽음’이란 비장한 출발이지만, 젊은이들의 여정은 유쾌하기만 합니다. 친구들은 ‘나’와의 약속대로 장례식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가야하는지 고민하고, 예전에 극장에서 훔친 낡은 소파를 들고 차례대로 자신의 집으로 가기도 합니다. 초등학생들에게 ‘이건 움직이는 자동차야’라고 ‘뻥’이나 치면서 말입니다. 누가 봐도 세상이 버린 ‘루저’지만, 그래도 이들의 관계는 따뜻합니다. 한 여자를 두고 누가 대시할까 시합했던, 수험표가 있으면 할인받는다는 말에 수능시험도 안보고 극장을 찾았던 기억이, 비록 한 명이 죽었지만, 여전히 유효하니까요.

언급한 작품들은 속에서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흐릿해진 인간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외로움과 불안, 공포(편혜영),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관계를 부정하게 되는 젊은이들(김애란), 냉정한 시간이 멀어지게 한 관계 속에서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려는 중년의 사내들(이장욱), 그리고 세상의 버림을 받았지만 함께 있어 기죽지 않는 청년들(윤성희)까지. 또 <너의 여름은 어떠니> <고백의 제왕> <웃는 동안>에는 공통적으로 죽음의 정서가 깔려 있어, 현실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작품집>에는 이밖에도 추천 우수작 <기타부기 부기우기>(조경란), <남은 교육>(천운영), <장면의 단편> (한유주)등의 단편 소설들과 편혜영의 수상 소감, 문학적 자전, 김애란 등의 ‘내가 만난 편혜영’ 등이 실려 있습니다. 반디(ak20@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2
  1. Sun'A 2009.09.04 10:5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반디님 잘보고 갑니다..
    주말 재밌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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