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응시하는 사내와 허무 - <자코메티와 늙은 마네킹>


 

최승호, <자코메티와 늙은 마네킹>, 뿔, 2008

 

저기, 사내가 있다. 비오는 거리, 옷을 뒤집어 쓴 사내는 웅크린 자세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하나, 둘, 셋, 넷. 이 지난한 숫자놀음이 끝나도 사내의 바라봄은 멈출 줄 모른다. 길거리에서 마주쳤으면 잠시도 시선을 허락하지 않았을 그이지만, 그의 눈이 나의 눈을 사로잡는다. 사내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을까.

그는 밖으로 나갈 때 방 안에서 문을 노크한다. 보다 넓게 폐쇄된 공간으로 열리는 문을 그는 보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 노크할 권리 있는 존재, 즉 인간임을 주장하기 위해 그는 노크한다. 그러나 과연 아귀지옥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과 원만하게 어울릴 수 있는지를 그는 늘 걱정하고 복면을 쓴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그는 너무 착하다. (p. 89, ‘어느 정신병자의 고독’ 중 일부)

문은 열지만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또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을 때 바람 같이 불어오는 고독. 사내는 ‘자신은 여기에 있었고, 여기에 있으며, 여기에 있을 것’을 알리기 위해 손 떨리는 노크를 한다. 하지만 아귀지옥처럼 시끄러운 세상은 그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더욱이 자신을 복면 속으로 감춘 사람들은, 그것이 유일한 생존전략이라도 되는 양, 더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그는 너무 착하다. 하지만 ‘착하다는 것’은 그 어떤 위로가 되지 않는다. 쉽게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고독’이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을 생각하면 불안감은 또다시 찾아온다. 태초의 시간, 모든 사람은 어미의 작은 (공평한) 길에서 시작했을 테지. 그때는 월등히 큰 자도, 월등히 모자란 자도 없었을 테지. 하지만 세상이란 불공평한 길은 서로 다른 복면을 쥐여 주며 ‘살아라’하고, 사람은 사람을 밟고 밟힌다. 복면은 뒤집어쓰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하는 마법의 면죄부인가. 사내는 멈칫한다. 사내는 복면 쓴 이들을 바라볼 자신도, 복면을 쓸 자신도 없다.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눈만은 여전히 제 기능을 하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고독과 아귀지옥의 경계에 선 사내는 죽음을 본다. 사람들은 “계단을 스물아홉 번 밟으면 / 스물아홉 순간 늙는 줄 모르면서 / 마흔 계단을 밟으면 / 마흔 순간 죽어가는 줄 모르면서”(‘지하철 정거장의 노란 의자들’) 살지만, 이미 죽음을 걸어가고 있다. 누군가 ‘나는 살고 있다’고 소리쳐도 상관없다. 그 외침이 끝나는 순간, 죽음은 그만큼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죽은 혼들의 거리에서 늙은 마네킹을 나는 보았다. 부동의 자세로, 공허의 굳어버린 표정으로 침묵하는 마네킹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없었다. 터지는 웃음도 흘러내리는 눈물도 없는 세월을 마네킹은 살았던 것이다. 과연 살았던가. (…) 우리가 욕망의 인질처럼 늙어갈 때 마네킹도 상점의 인질처럼 고독 속에서 늙어야 했다.
(p. 66, ‘늙은 마네킹’ 중 일부)

‘죽은 혼들의 거리’에서 본 늙은 마네킹은 터지는 웃음도, 흘러내리는 눈물도 없는 세월을 살았다. 코웃음이 난다. “그게 산 거냐?” 늙은 마네킹이 대꾸한다. “그러는 너는?” 웃음의 끝에 코끝이 저려온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길지도 않은 나의 시간들. 욕구, 욕망, 욕정, 그 무엇이라고 불려도 상관없는 삶의 흔적들이 늙는 마네킹과 함께 사내를 비웃는다.

밤의 식료품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p. 36, ‘북어’ 중 일부)

북어의 비웃음으로 채색된, 삶의 마침표로써의 죽음.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내의 몸을 지탱하던 뼈도, 사내가 해골로 보이지 않게 만들어 주던 살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허기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던 내장들도, 없다. 모든 게 사라진 시공(時空). 슬퍼할 필요는 없다. 슬퍼할 심장도 이미 사라졌을 테니. 죽음 앞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뒤를 돌아본다. 부끄럽든, 부끄럽지 않든 자신의 흔적을 확인하고 싶은 마지막 욕망이다. 하지만….

그동안 내 흔적은
잡목림을 쏘다닌 사족(蛇足)들이 아니었는지
눈이 내려
흰 밤이 되니 흔적이 없다

(p. 104, ‘눈이 내려 흰 밤 되니’)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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