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에 더 비극적인 - <검은 새의 노래>

 

아름답기에 더 비극적인 - <검은 새의 노래>

 

현기증이 날 정도로 눈부신 하늘. 날개를 세차게 퍼덕이며 나는 새들. 그 중 한 쌍은 생의 축복을 온몸으로 느끼듯 아름다운 사랑 놀음을 한다. 그러다 욕정을 참지 못한 수컷은 암컷에게 씨앗을 전하려 하지만, 암컷은 몸을 비틀어 수컷의 노력을 수포로 만든다. 그리고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암컷. 하지만 수컷은 언젠가 다시 그 은밀한 노력을 재개할 것이다. 그들의 날개는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으며, 눈부신 하늘은 그들의 사랑을 관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원주민 청년 씨비야는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또한 한 여성(버로니카)을 가슴 속에 품고, 그녀에게 다가가 사랑(혹은 욕망)을 드러었다. 하지만 암컷이 그랬듯 버로니카는 씨비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씨비야가 바라본 새들과 같은 것은 여기까지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 ‘감히’ 피부색이 다른 버로니카를 탐한 씨비야는 강간범으로 체포되고, 좁디좁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에게 다시는, 버로니카를 처음 만난 해변을 수놓던 눈부신 햇살은 허락되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씨비야는 세 번의 소외를 느낀다. 첫 번째는 피부색으로 인한 운명적 소외다. 그는 원주민 치고는 많은 교육을 받지만 운명의 그리 관대하지 않다. 그는 백인 정착촌을 위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고, 대학에서는 흑백 분리 수업을 받았다. 또 바닷가에서는 ‘백인전용’ 팻말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두 번째 소외는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낙인이다. 사람들은 사건의 진위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백인들에게는 ‘금기에 도전한 쳐 죽일 놈’이고, 원주민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여기에 씨비야라는 존재는 없다. 그냥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강간범’만 존재한다.

세 번째 소외는, 앞의 것들보다 사태가 심각한데, 자기감정으로부터의 소외다. 해변을 걷던 씨비야는 ‘마치 고대도시의 유적에 있는 아름답고 부서진 황금 상 같은’ 영국인 소녀 버로니카를 본다. 그녀의 몸에 붙잡힌 그는 가던 길을 멈춰, 그녀의 매혹적인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 혼자 마음을 졸이고, 며칠 동안 그녀를 기다리면서 겉잡을 수 없는 내적 충동에 휩싸인다. 그런데 세상이 손가락질 하고, 버로니카가 그 일을 ‘악몽’이라고 하면서 씨비야는 자기감정에 대한 확신을 잃어간다.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가.

결국 그 사랑은 백인에 대한 분노, 운명의 저주, 일시적인 욕정 가운데 방향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마저 박탈당한다. 남은 건 자신을 관찰 대상으로 보는 스위스계 독인인 범죄학자 에밀 뒤프레와 희망이었던 자식이 절망으로 변한 슬픔에 사로잡혀 눈물범벅이 된 어머니뿐이다.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한 쪽은 사랑이고, 다른 한 쪽은 아니라고 하는데, 이를 사랑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특히 한 쪽이 ‘폭력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사랑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씨비아의 기억은 ‘사랑’스럽다. 이는 온전히 작가 루이스 응꼬씨의 정교한 감정 묘사에 기인한다. 그는 씨비야가 버로니카에게 처음 마음을 빼앗겨 열병을 앓고, 우연히 마주쳐 느끼게 되는 환희의 순간 등을 을 더없이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버로니카와 나는 그저 단순하게 마주친 것이 아니라 우연한 포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의 몸을 향해 거의 쓰러지듯 충돌했다. (…) 그녀가 입은 씰크 옷의 감촉은 물론이고 그녀의 맨팔의 감촉을 느꼈을 때 나는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그때 나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떨어진 물건을 집으려 몸을 굽혔다. 그녀는 낮은 어조로 공손하게, 그리고 백인 여성이 원주민에게 하는 것치고는 아주 부끄러운 듯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그것은 그녀가 오래전부터 마법에 걸린 내 심장에 감아온 모든 욕망의 실타래를 풀어낼 만큼 강령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p. 134 - 136)

이 쓰라린 비극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답은 멀지 않다. 그가 ‘검은 새’이기 때문이다. 근대 백인들은 말했다. 인간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자유롭다고. 단 검은 새는 예외. 백인들은 검은 새의 노래를 듣고자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씨비야와 버로니카의 이야기에 결말만 있을 뿐, 그에 앞서 펼쳐진 이야기가 없다. 물론 씨비야의 이야기에는 모든 감정이 다 들어있다. 그는 금기에 도전할 생각도, 누군가를 해칠 마음도 없었다. 만약 그들이 이 마음을 들었다면, 그리고 그 후회도 지나치게 늦지만 않았다면 비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이 새에게 검은 색을 주었다면, 노래는 허락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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