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의 맛] 주원규, <붉은 방>

요즘 가장 잘 팔리는 책은? 《주기자》입니다. 어제는 그 책을 읽었습니다. 《시사IN》 주진우 기자가 쓴 기사와 ‘이것이 팩트다’라는 제목의 후일담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조작, 거짓말, 번복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진짜 사실의 입지는 좁기만 하고요. 책에 실린 기사의 일부를 발췌해 봅니다.  


박 양은 방과 후에 “할 이야기가 있다”는 같은 학교 이 아무개 군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 이 군은 친구와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며 친구네 아파트로 박 양을 유인했다. (…) 이 군에게 험한 일을 당한 후 박양은 친구에게 “어디야”라며 여러 차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 박 양은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5명이 나서서 현관을 지키고 박 양을 협박했다고 한다. (…) 박 양은 집에 돌아온 후 바로 목욕을 하고 잤다. 그 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시사저널 823호》에 게재된 2005년 기사입니다. 학교 폭력 피해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술에도 가해자는 제대로 처벌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건을 쉬쉬했으며, 오히려 박 양만 원인을 제공한 쪽으로 손가락질 받았다고요. 너무도 명백한 사실인데 말입니다. 저는 몸서리쳤습니다. 사실이 무력한 세상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붉은 방>은 그런 현실이 잉태한 소설입니다.


범준이 자신보다 여덟 살 많은 누이를 데리고 사촌에 온 게 벌써 4년 전 일이다. (167쪽)


파란 불로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녀석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그렇게 멈춰 있을 뿐이었다. (191쪽)


《실천문학 2011 봄호》중에서


<붉은 방>에서 범준은 누이의 포주입니다. 누이의 매춘과 그 행위가 적나라하게 담긴 비디오가 남매의 주요한 수입원이죠. 어느 날, 집장촌이 재개발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범준은 일련의 사건에 휘말립니다. 그 과정에서 누이가 살해됩니다. 이 때문에 범준은 손에 피를 묻히고 맙니다. 결말에 이르러 범준의 독백이 등장합니다.


범준은 물었다.

‘누가 내 적이냐.’

‘누가 누이의 적이냐.’

‘누가 누이를 죽였냐’고 묻고 또 물었다.


직설적입니다. 저는 또 다시 몸서리쳤습니다. 사람들은 곧잘 육하원칙을 확인하려 듭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물음이 있습니다. 누가 내 적이냐. 누가 박 양의 적이냐. 누가 박 양을 죄인으로 만들었냐. 이렇듯 ‘진실’에 가까워져야만 사실을 복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물이나 사건의 어떤 부분도 극화하지 않은 듯, 날것과도 같은 문장을 접하고 나니, 저는 <붉은 방>을 다 읽고도 잠시 “그 자리에 그렇게 멈춰” 서 있습니다.


주원규는 등단하고 6년이 지나 《열외인종 잔혹사》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후 재개발, 종교, 정치, 재벌 등 사회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장편소설을 주로 써 왔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오히려 투명해진다. 외치거나 주저앉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주저앉음은 단순한 자포자기가 아니다. 이 사회의 집단적 아픔을 단순한 애국주의나 몇몇 이슈를 통해 물타기하려 드는, 부패한 타성에 젖은 선동적 추진력에 근본적으로 제동을 거는 것이다. 그 주저앉음이 광장이건, 학교건, 파업의 현장이건 상관없으리라.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외침을 쏟아낼 수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유일한 소통의 통로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이 소설가는 스스로 감당해 마땅한 문학의 몫을 찾은 듯합니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 주원규

1975년생. 200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9년 한겨레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열외인종 잔혹사》, 《무력소년 생존기》, 《망루》, 《반인간선언》등이 있음.


* 현재까지 발표 작품

《열외인종 잔혹사》 | 한겨레출판 | 2009 

《천하무적 불량 야구단》 | 새움 | 2010

《무력소년 생존기》 | 한겨레출판 | 2010 

《망루》 | 문학의문학 | 2010 

《불의 궁전》 | 문학의문학 | 2011

《반인간선언》 | 자음과모음 | 2012 

《아지트》 | 실천문학사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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