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하다, 아름답다, 무책임하다 - <신들의 사랑법>



 이동현, <신들의 사랑법>, 오푸스, 2009


문득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하루. 누가 휴대폰에 ‘얼음’ 주문을 걸었나 봅니다. 모닝콜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울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이런 말을 해주고 싶죠. “침묵의 미덕도 적당히….” 어쩌다 전화가 오면 반가운 마음에 휴대폰을 듭니다. 그런데 “고객님~”으로 시작하는 전화를 받으면 화가 납니다. 대체 쓰지도 않는 ☆☆카드는 왜 연체가 되었다는 건지. 한 때는 연인들의 애정행각을 ‘닭살’이라며 비난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소주도 치킨에만 먹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책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법에 지친 당신에게’란 부제를 단 <신들의 사랑법>. 원인은 다르나 지치긴 지친 저는 냉큼 책장을 넘겼습니다.

이 책은 제우스, 헤라, 아프로디테 등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인공들과 다윗, 솔로몬, 삼손 등 성경의 주인공들이 펼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신, 성경 속 인물들의 이름을 들으면 왠지 성(聖)스러운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웬만한 막장 드라마는 저리 가라지요. 이는 목차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뼛속까지 바람, 제우스’, ‘그녀가 하면 로맨스’, ‘영웅호색 또는 아내 수집’, ‘벌거벗은 여걸’ 등. 이는 주말에 나오는, 선정적인 제목으로 독자들을 낚으려고 하는, 옐로 페이퍼의 문구가 절대 아닙니다. 엄연히 ‘신들의 사랑법’입니다.

그럼 먼저 ‘세상 모든 여자를 소유한 남자’ 제우스를 볼까요? 신 중의 신 제우스는 역시 관대했습니다. 세상이치의 여신 메티스, 누이이자 곡물과 수확의 여신 데메테르, 테베의 공주 안티오페 등 그는 여신, 님프, 인간을 가리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작업의 기술 또한 환상이었습니다. 스파르타 왕의 아내 레다를 사랑하기 위해 백조로 변신했고,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를 유혹하기 위해 하얀 황소로 둔갑했습니다. 또 전장으로 떠난 암피트리온을 기다리는 알크메네 앞에는 남편의 모습으로 등장해 ‘민망한 삼자대면’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남편을 둔 헤라는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주름살 제거 수술을 엄청나게 받았을 것 같습니다. 
 


(보티첼리,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사진 오푸스 제공)
 

여기서 제우스의 이야기만 하면 엄연히 남녀차별이겠지요. 평등한 21세기에 그럴 수 없습니다. 또 자신의 얘기를 빼면 섭섭할 이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입니다. 그녀는 기술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남편으로 두었지만, 그가 썩 마음이 들지는 않았나 봅니다. 그리스 신화 주요 남신 일곱 중 반수 이상과 관계를 맺었다고 하니까요. 헤파이스토스, 그의 형제 아레스, 술의 신 디오니소스, 숙부가 되는 포세이돈까지 ‘러브러브 리스트’에 올렸다고 하니, 보통 솜씨가 아닙니다. 또 디오니소스에게는 아테네의 후계자 테네우스에게 버림을 받은 아리네아드네 공주를 소개시켜주면서, ‘사랑으로 널리 이롭게 하리’란 정신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웬만하면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성경이 워낙 유명한 탓이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한 번 들어봤음직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만 모아 놓으니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싸움 구경, 불 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사랑 타령인데, 그 속에서 싸움까지 있으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습니까. <신들의 사랑법>은 그렇게 읽는 재미가 쏠쏠한 책입니다. 여기에 저자의 말솜씨도 한 몫 합니다. 대학에서 미술이론과 비평을 전공했던 저자는 ‘딴지일보’에서 신화와 성서를 소재로 한 연애칼럼을 쓰며 남녀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을 상상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입담이 오죽하겠습니까. 잠시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다음은 다윗의 아들 암논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배다른 누이 다말을 유혹하는 장면입니다.

다말은 암몬의 궁으로 가 별다른 의심 없이 떡을 만들어 암논에게 주었으나, 그는 먹을 생각은 않고 시중 들던 사람들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주위를 물리친 암논은 사근사근한 말씨로 다말을 끌어들였다. “그 떡을 가져와서 네 손으로 먹여주렴.” / 다말이 그릇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자 암논은 다말이 내미는 떡은 뿌리치고 그녀의 두 손을 움켜쥐더니 함께 떡을 치자고 제안했다. (p 119)

한 남자가 선의를 갖고 찾아온 여인을 범하려는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웃으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저자의 입담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철에서 책을 읽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쳐다봤습니다. ‘젊은 사람이 안 됐다’는 눈빛으로….
 


(스틴, '암논과 다말', 사진 오푸스 제공)
 

<신들의 사랑법>은 독자들에게 이성을 ‘꼬시는 법’을 가르쳐주는 실용서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제우스의 변신술도, 아프로디테의 미모도, 다윗의 권력도, 에로스의 활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네들의 사랑과 이별, 고뇌를 들려주면서 ‘인간의 사랑법’에 지친 우리들을 위로해 줍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사랑의 모습은 끊임없이 변해왔으며, 누가 정해놓은 사랑법은 없다는 겁니다. 이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조건을 따지거나, 다른 이의 것과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88만원 세대의 연애라니, 암담한 현실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고시원의 좁은 방과 로맨스를 연관짓기란 쉽지 않다. (…) 그러나 본인 스스로 사랑의 감정을 거세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연애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것이 결국 가슴 아픈 나누기 사랑이 될지라도, 가난해서 사랑하지 못했다는 변명을 중얼거리는 것보다는 낫다. 연인의 살냄새가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삭막해지겠는가? (p 156)

언젠가 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단, ‘신들의 사랑법’을 그대로 따라하지는 마십시오. 두툼한 은팔찌만이 사랑의 흔적으로 남을 수 있으니까요. 반디(ak20@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0
prev 1 ··· 487 488 489 490 491 492 493 494 495 ··· 50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