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벨리우스: 교향곡 6번, 7번, 핀란디아] - 남쪽에서 바라본 북쪽나라


 

피에타리 인키넨,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 [시벨리우스: 교향곡 6번, 7번, 핀란디아]  | NAXOS | 2011

 

교향곡의 새 지평을 열다

 

베토벤과 이후의 작곡가들은 교향곡이라는 장르를 대할 때마다 갈수록 산적해있는 과제에 직면해야 했다. 자기 고백과도 같은 감정의 폭발과 형식적 균형미의 이상적인 조화, 그리고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담아낼 수 있는 음악어법에 대한 기대가 날로 커져만 갔으므로 그에 따른 부담감도 함께 느껴야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는 그런 시대였다. 훗날 교향곡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은 인물로 평가받게 될 구스타프 말러는 혹평과 호평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작품들이 ‘교향곡’보다는 ‘교향시’로 불리기를 바랐다.

 

시벨리우스는 이처럼 세상이 살벌한 때 낭만주의의 영역에서 막 껍질을 깨고 나온듯한 두 편의 교향곡을 발표했다. 말러의 음악은 확장지향적이고 R.슈트라우스는 연주자에게 최상급의 테크닉을 요구한다. 이에 비해 시벨리우스의 그것은 확실히 참으로 소박해 보이거나 핀란드와 그 주변부로 제한된 지엽적인 음악으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7개의 교향곡의 차례를 밟아가다 보면 언뜻 베토벤이 9개의 교향곡에서 보였던 행보와 비슷한 ‘거장의 풍모’를 느끼게 된다.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시벨리우스의 초기교향곡 1번과 2번은 과거 세대의 유산을 일정부분 인정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담아내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구세대로부터의 탈피, 혹은 표현적 진부함의 파괴를 꿈꾼 그 이후의 작품들이 그렇고(베토벤의 교향곡 3번, 5번과 시벨리우스의 3번, 4번 교향곡), 대자연의 모습을 노래하는 듯한 분위기의 곡들(베토벤의 교향곡 6번과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5번) 역시 그렇다. 게다가 한층 능숙해진 손길로 펼쳐낸 마지막 교향곡에서 작곡자 자신의 영역을 깊이 탐구하려는 모습을 볼 때면, 은근히 여러 구석이 닮았음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말러와는 다르다, 말러와는!

 

사실 국내에서 「교향곡 2번」이나「핀란디아」외에는 시벨리우스의 작품이 자주 다뤄지지 않는 것 같아 일견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리 넓지 못한 레퍼토리 탓에 벌어지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말러가 생각보다 자주 연주되는 것을 보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말러의 교향곡과는 여러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식과 주제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라든가 그에 연관된 악기들의 역할까지, 비교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이 보일 것이다.

 

우선 말러는 악기 연주자에게 테크닉의 측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 필요 이상으로 극한의 경지를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고음과 최저음, 가공할 속도와 정확성을 요구하는 앙상블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흡사 ‘묘기대행진’의 한복판으로 밀어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가장 중요한 순간에 주제선율은 찬란한 관현악의 향연에 하나의 도구로써 동참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시벨리우스의 음악에서는 작곡자와 악기는 철저히 주제선율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처럼 취급되며 형식미와 유기적 연결성이라는 거대한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열쇠가 된다.

 

교향곡에 대한 두 사람의 이러한 상반된 견해는 실제 그들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07년, 핀란드를 방문한 말러는 시벨리우스를 만났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교향곡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시벨리우스는 자신이 “(교향곡에 있어서)엄격함과 스타일, 그리고 모든 모티브들 사이의 내적 긴밀함을 가져다주는 깊은 논리를 추구한다.” 라고 하자 말러는 “아니오, 교향곡은 세계와 같소.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남쪽에서 바라본 북쪽나라

 

대체로 시벨리우스 교향곡 음반을 선택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의 길이 있다. 오스모 벤스케, 레이프 세게르스탐, 오코 카무, 에사-페카 살로넨, 그리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파보 베르글룬트처럼 핀란드 출신 지휘자의 음반을 고르거나 존 바비롤리, 앤소니 콜린스, 콜린 데이비스, 레너드 번스타인, 사이먼 래틀처럼 비 핀란드인 출신으로서 시벨리우스의 음악에 천착한 지휘자들을 선택하는 것. 물론 어느 쪽이든 저마다의 장점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을 내서 살펴본다면 충분히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좋은 녹음으로는 핀란드 출신의 젊은 지휘자인 ‘피에타리 인키넨(Pietari Inkinen,1980~)’이 낙소스 레이블에서 뉴질랜드 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한 음반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지난 2009년에 한국을 방문해서 서울시향을 지휘하기도 한 그는, 한누 린투(Hannu Lintu)와 함께 앞서 이야기한 핀란드 지휘계의 바통을 이어받을 차세대 주자로 각광받고 있다. 연주를 함께 한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언뜻 이미지 상으로는 시벨리우스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침착한 젊은 지휘자와 함께하는 이들은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고 훌륭한 음색으로 자신들만의 시벨리우스를 그려나간다.

 

특히 시벨리우스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신세계가 담긴 교향곡 7번에서 그들은 기대 이상의 뛰어난 연주를 들려준다. 중량감이나 다소 심각한 표정이 필요한 부분에서 묵직함이 부족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건 아쉽지만 그보다는 선배 지휘자들의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시대의 시벨리우스 상을 제시하려는 젊은 지휘자의 노력에 박수를 쳐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박현준'님은?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있으며 지금은 공익근무요원으로서 어정쩡한 신분의 삶을 살고 있는 남자입니다. 남의 연주에 대해 끼적이는 걸 좋아하면서도 음악을 공부하며 생긴 어정쩡한 동업자 정신 탓에 나쁜 연주를 나쁜 연주라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암튼 정체가 수상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트위터 http://twitter.com/brahms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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