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츠> - 자본주의 수술을 위한 메스 혹은 치료제

 

 

조너선 크롤 | <레츠> | 이후 | 2003

 

 

"월급 받은 다음 날부터 다음 월급날만 기다리며 살아."

 

아기가 태어나면서 씀씀이가 커졌다. 어떤 면에선 꼭 필요한 지출이기에 씀씀이랄 것도 없다. 그러나 자조 섞인 웃음이 의미하듯 월급은 늘 충분하지 않다. 지인의 집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일,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하지만 올해 셋째가 태어난 지금, 생활비를 무시할 순 없다. 한 달에 얼마를 벌면 걱정이 없을까.

 

우리는 (거의) 모두, 자본주의 안에서 태어났다. 태어나 처음 본 존재를 엄마로 아는 오리처럼 우리 역시 태어나 처음 접한 것이 자본주의이기에, 그 안에서 숨 쉬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본주의 외에, 시장 외에 그러니까 돈 외에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 줄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돈(錢)은 엄마, 아니 그보다 더 절대적인, 신(神)이다. 돈 아니면 안 될 것이 없고 못할 것이 없다.

 

수업 중 아이들에게 "얼마를 주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냐?"라고 물었다. 10명 중에 9명의 친구들이 "얼마를 줘도 내 목숨을 줄 수 없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목숨에 매기는 값, 생명보험은 고작 몇 '억'에 불과하다.(물론 더 적은 사람도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우리 목숨의 가치는 서울의 일반적인 아파트 한 채의 그것조차 못하다. 그래서 화장실에선 사람의 목숨을 산다는 광고가 나부낀다.

 

돈은 또한 미디어다. 내가 돈을 주고 사는 행위, 물건들이 곧 나를 대변한다. 타고 다니는 차, 입고 다니는 옷, 들고 다니는 가방이 곧 나를 나타낸다. 오죽하면 모 자동차 광고는 "친구의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나는 자동차로 답했다."라는 카피를 내세웠을까. 모든 것을 0과 1로 코드화하는 디지털 세상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한다. 강이든 바람이든 사람이든 실체는 사라지고 숫자만 남는다. 그런데 애초에 돈은 물물교환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던가. 

 

돈은 물물교환이라는 근원적 속성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돈이 누군가의 주머니에 쌓이면서, 즉 시장에서 증발하는 것이 문제라는 사람들이 있다. 1983년, 마이클 린튼이 시작한 지역화폐, 레츠(local exchange trade system)운동이다. 쉽게 말해 레츠는 특정 지역에서만 거래되는 화폐이다. '원'이 한국에서만 사용가능한 화폐인 것처럼 서울 혹은 경상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별도의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레츠는 전 세계 수백 곳에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고, 한국에서는 대전 한밭레츠(www.tjlets.org)가 대표적이다. 

 

 

레츠는 개인의 시간과 재능을 거래할 수 있는 진입장벽이 없는 시장을 따로 만든다. 예를 들면 잔디 깎기, 아기 돌보기, 집 보기, 안마, 외국어 가르치기 등등 개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원칙상으론 레츠의 시장을 통해 거래된다. 예를 들면, 민수가 범수, 정현 부부가 영화를 보러 간 사이 두 사람의 아기를 봐 주고 100 두루를 받는다. 범수네 집에서 나온 민수는 받은 두루를 갖고 지역화폐 사용이 가능한 바비슈퍼에 가서 20두루를 내고 두부, 호박 등 저녁거리를 샀다. 바비슈퍼 주인 바비는 11월에 받은 1,000 두루를 갖고 인근 인순카센터에 가서 정기점검을 받는다.  

 

 

레츠와 기존 시장의 공통점은 화폐 단위가 있고 수요와 공급 원칙에 따라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별도의 단위(1999년 시작된 한밭레츠는 두루라는 단위를 사용한다.)를 사용한다는 것과 가격이 시간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시장에서 상품은 생산, 유통하는 데 들어간 비용에 이윤을 붙여 설정된다. 혹은 부가가치를 발생시킨 만큼 가치가 매겨진다. 그러나 레츠에선 소요시간에 맞춰 가격을 책정하여 상대적으로 노동 자체에 보다 큰 의미를 둔다. 

 

레츠가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일정 기간 단위로 화폐가치가 떨어지도록 디자인을 해 놓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어떤 레츠는 6개월 단위로 화폐가치가 50%씩 떨어진다. 2010년 6월에 300두루를 벌었다면 12월엔 150 두루의 가치밖에 갖지 못한다. 때문에 빨리 써야한다. 이는 돈의 순환을 강제한다. 그런데 그 지역 내에서만 쓸 수 있으니 돈은 지역 내에서만 돌고 돈다. 이는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건강하게 만든다. 돈이 돈다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누군가의 일자리가 새로 생기고 누군가의 물건이 새로 팔리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레츠는 소비를 촉진하는가. 그렇다. 그런데 지금의 환경 문제를 일으킨 가장 큰 원인 역시 무분별한 소비에 있지 않던가. 그렇다. 그렇다면 레츠 역시 환경을 악화시키는 시스템 아닌가. '부분적으로' 그렇다. 기존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사도록 강요한다. 이 과정에서 멀쩡한, 한참 더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이 '쓰레기'로 전락한다. 그러나 레츠에선 새로운 물건을 사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재사용, 재활용하는 것이나 같은 가치를 갖는다. 즉, 두루의 관점에선 차이가 없다. 어떤 면에선 성능의 차이가 없는 제품을 훨씬 싼 가격에 살 수 있다. 아니 좀 더 이기적으로 말하자면 벌기 힘든 '원' 대신에 상대적으로 벌기 쉬운 '두루'를 씀으로써 '원'을 아끼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돈도 벌고(아끼고) 쓰레기도 덜 만들고 그러면서 필요한 물건은 얻고.

 

위 마지막 문장에서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돈은 쓰면 좋을 것이라면서 '원'을 아껴 좋다니. 이 지점에서 우린 지역화폐에 대한 한 가지 회의적인 시각을 짚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대안이라고 하면 기존의 것을 100% 대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역화폐가 기존의 화폐를 100% 대체하지 못하는 것을 레츠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레츠의 기능은 기존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서비스 품목들을 거래할 수 있는 마당(場)을 만들어 순환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이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있다. 또한 지역화폐가 기존의 화폐를 100% 대체한다면 이는 국가통화가 모습을 바꾼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레츠는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의 수명을 연장하는 또 다른 꼼수처럼 비춰질지 모른다. 그러나 기존 자본주의와 레츠의 결정적인 차이는 내가 쓰는 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아는가 모르는가에 달려 있다. 박영남 선생이 <레츠>에 '인간의 얼굴을 한 돈'이란 부제를 붙인 것처럼 레츠는 네트워크 안에 있는 사람들 간에 거래하는 매체이기에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높여 준다. UN 이 계발 중인 행복지수에 따르면, 사람들의 행복도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지표는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레츠는 '인간의 행복을 높여주는 돈'이란 명명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 점에서 레츠를 기존 자본주의에 대한 산소호흡기가 아닌 기존 자본주의를 수술하기 위한 메스 혹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제(큐어)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엽집 그 녀석’님은?
2004년 빨간 알약을 먹고 매트릭스에 깨어난 후 되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할 지 고민하고 있음. 현, 성미산학교 생태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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