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내가 당신에게로 가도 괜찮겠습니까

 

 

한강 | <희랍어 시간> | 문학동네 | 2011

 

 

난 늘 보이지 않게 흔들렸다. 시간을 죽이는 일이 어렵다는 걸 모르지 않았고 새처럼 날기 위해 그보다 몇 배 갈고 닦으며 움츠려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랍어 시간>에 일어난 두 남녀의 부딪침, 상처와 트라우마, 그리고 사랑. 이런 것들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자기탐색. 시간 속에 뭉뚱그려 새롭게 피워내는 티끌만한 무엇.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래도록 소설의 틈바구니에서 길을 잃었다. 언젠가 말간 손으로 바흐와 슈베르트를 연주하던, 나와 콩쿨에 나갔을 때 객석 대신 옥상에서 한 송이 꽃을 들고 기다려주던 오빠. 가장 예쁘지 않았지만 가장 예쁜 줄 알았던 아홉 살에 세상에서 제일 잘 보이고 싶었던 이는 그 뿐이었음을, 그가 아직 남자이기 이전에. 

 

언제 헤어졌었지. 잠시 살던 다세대 주택에서 잘 지어진 새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이사온 후 오빠를 만났던가, 그렇지 않았던가. 동네 아이들 모두 모아놓고 생일파티를 할 때면 생일선물로 문구세트를 사주던, 좋아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은 채 잘보이려 애썼던 사람. 그러니까 내가 열한 살, 그가 열두 살 즈음 본 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소식은 간혹 들었어도, 대면할 일은 없어서 내가 그런 것처럼, 그도 간혹 나를 생각하는지, 정확히 말하면 내 아홉 살 즈음과 피아노 콩쿨 후에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던 작은 손의 자신을 기억하는지 묻고 싶었다. 시간 속에 흩어진 추억, 그 안에서 내가 붙잡고 싶은 건 시간일까. 그랬을 지도 모른다. 그와 그녀의 희랍어 시간처럼, 그와 그녀의 버티듯 흘러내려간 삶처럼, 그와 그녀의 하룻밤처럼, 그와 그녀가 서로를 향해 한걸음 내딪던 순간처럼.

 

나는 아직 행간 사이에 묻어나던 그 또는 그녀의 사연을 되새기고 있다. 사랑이란 것은,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다면, 어쩌면 내 모든 것을 까뒤집어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경험, 아픔, 시간, 실수, 기쁨, 슬픔, 어려움, 오만, 편견, 시기, 질투를 포함한, 포개지는 모든 것들을 공유하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남자에게 과거의 남자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명언 아닌 명언은 인간의 나태함을 부분적으로 잘 알고 공감한 사람들의 입에서 공통된 언어로 나온 말이다. 서글픔 만큼 울림도 큰 소리. 과거에 어떤 사랑을 얼만큼 했든, 미래에 만나는 남자는 내 모든 과거를 끌어안아 추억으로 공유해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내 품었다. 나는 나일 뿐, 누군가의 나였다고 해서 그게 내가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도 그를 그렇게 보듬을 것이고,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것이므로. 

 

사랑의 시간. 사랑을 시간이라고 정의내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희랍어 시간> 속 남녀의 희랍어 시간을 사랑으로 뭉개버릴 수가 없어서, 사랑은 단지 시간이 아니라 앞뒤 문맥, 상황, 추억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여자는 말을 하지 않고 남자는 지독히도 시력이 나쁘다. 둘이 영영, 어쩌면 아무 것으로도 서로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세속적으로는. 침묵과 빛이 만나는 이야기라고 작가는 썼다.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하는 두 존재가 영공 속에서 부딪치는 이야기로 나는 읽는다. 나를 털어놓고 너를 듣는다는 것은, 너를 털어놓고 나를 듣는 것만큼 중요한 얘기. 남자와 여자의 개인적인 것이 만나는 지점보다, 혼자서 자신의 것을 터지기 직전까지 안고 가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 미칠 듯 만져졌다. 잡히지 않는 것에 안달내지 않는 그들의 많은 것이 편안했다. 

 

팔랑거리며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더라도, 사랑해달라고 매달리지 않더라도, 존재가 존재를 알아본다면 그것은 기척이 아니라 기적이 아니겠는가. 꽃씨처럼 훌훌 날아가 앉고 싶은 곳에 살포시 내려앉아 뿌리내리면 그것이 탄생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끝없이 추락하는 <희랍어 시간>의 남자와 여자를 구해준 것은 불행히도 내가 아니다. 지독히 침잠하는, 어둠 속으로 떠밀리는, 당신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끝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행간과 행간, 문장과 문장 사이로 비집고 밀려들어오는 추억 때문이다. 내 추억. 궁극적으로는 내 기억. 모든 기억을 추억이라 부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행복해지기도, 아쉬워지기도, 아련해지기도 하는 삶.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날이 오면 나도 그때에 소리 없이, 빛 없이, 언어 없이, 몸짓도 없이, 사랑을. 허락없이 사랑을 가르쳐도 괜찮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당신을 기억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때는 시간을 드릴게요. 나의 모든 시간을 내어 드릴게요. 우리, 온전한 만남을 기약할 수도 있을 거예요. 아직은 미안합니다. 나는 나입니다. 여전히 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속에 당신이 있을 거예요. 내가 온전히 당신이 될 수는 없지만, 사랑의 시간은 내가 당신이 되는 것이나 당신이 내가 되는 것에 놓이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언제나 당신 속에, 당신은 언제나 내 속에, 우린 그렇게 어느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서로에게 얽혀있을 테니까요.

 

두려웠어요.

두렵지 않았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내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기 전에,

당신은 나에게 천천히 입맞추었지요.

 

이마에.

눈썹에.

두 눈꺼풀에.

 

마치 시간이 나에게 입맞추는 것 같았어요.

입술과 입술이 만날 때마다 막막한 어둠이 고였어요.

영원히 흔적을 지우는 눈처럼 정적이 쌓였어요.

무릎까지, 허리까지, 얼굴까지 묵묵히 차올랐어요. (189-190쪽)

 

다시 기다려 달라고 한다. 언어로 심장을 느끼게 할 수가 없어서. 당신은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희랍어를 가르치고 배우듯, 각자 살아가던 그들이 희랍어 시간에 하나로 만나듯, 우리 또한 어느 순간은 하나가 될 거라고 안주하고 있었다. 마모된 감정은 남자의 두 세계로 쪼개어져버린 정체의 자아와 미쳐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아든 여자의 자아와 만나 더 너덜너덜해졌지만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올랐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이해'라는 하나만으로도 빛날 정도로 반짝이는 삶. 

 

또르르 흐르는 눈물 방울 하나를 억지로 나뭇잎 위에 올려놓는다. 똑, 하고 소리나며 떨어질 때까지. 적어도 물방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마르는 것이 아니라 떨어질 것이다. 내 것들이 또는 내가 당신에게 그러하듯이. 당신도 나에게 그러길 바라지만, 어렵다면 반드시 나를 거쳐가라고, 당신의 아픔도. 왜 배우는지 모르는 희랍어를 붙잡고 씨름하던 여자와 어째서 가르치는지 알지 못하던 남자의 앞으로의 만남이 자꾸만 나를 덮치는 듯 해서 얼른 책을 치워버렸다. 어렵다, 닿는 것. 어쩌면 한 번도 그러질 못했을 거란 생각 때문에 고통스럽다. 언어로는 아무 것도 전달하지 못한다던 말은 맞았다. 아, 그렇다면 지금 내가 당신에게 전달하려는 뭉클한 이것을 당신은 알고 있겠지. 어떤 면에서 당신은 나보다 훨씬 많이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오늘의 책을 리뷰한 ‘감성소녀’님은?
아직 20대인 것이 희망. 자칭 예술애호가.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다. 몰입과 지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단 것을. 규격적 인간을 선호하는 세상을 거스르며 살고 싶어 책읽기를 선택했다. 로마 스페인광장에서 하루 종일 사람구경하며 책 읽는 삶을 꿈꾸지만 여의치 않은 현실에 로마로 떠나는 사람들의 여권에 도장 찍어주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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