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선'에 해당되는 글 42건

  1. 2011.05.27 <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 속, 흔들리는 당신에게
  2. 2010.11.12 <카탈로니아 찬가> - 행동으로 알고, 앎으로 행동하라
  3. 2010.11.02 <위대한 강> - 강은 흘러야 한다!
  4. 2010.10.29 <버마시절> -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5. 2010.10.15 <팔레스타인에 물들다> - 무엇보다, 그곳에 '사람'이 있다
  6. 2010.10.08 <에곤 실레> - 벌거벗은 자화상을 생각하다
  7. 2010.10.01 [이슈와 추천도서] 가을이 오면, 나는 ‘나’를 읽고 싶어진다. (2)
  8. 2010.10.01 <느림과 비움의 미학> - 매인 데 없이 자유로워라
  9. 2010.09.27 <2046 + 화양연화> - 소리는 기억을, 기억은 다시 감정을 데리고 온다
  10. 2010.07.09 <百의 그림자> - 쓸쓸함이 쓸쓸함을 만났을 때

<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 속, 흔들리는 당신에게


 

  

지그문트 바우만 | <모두스 비벤디> | 후마니타스 | 2010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그 위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칼날이 번뜩이고 있다. 순식간에 끊어져버릴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오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닿는 불온한 상상이 이어진다. 언제 어떻게 끝날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는 ‘유동하는 근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실업, 전쟁, 테러 등 도처에 산재하고 있는 위험은 번뜩이는 칼날과 같이 팽팽히 당겨진 현대인의 목숨 줄을 노리며 삶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동하는 공간과 시간 속의 삶의 양식, <모두스 비벤디 Modus Vivendi>. 지그문트 바우만는 이와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의 실체를 파헤치고 이로부터 유동하는 세계 속, 흔들리는 당신을 향해 조언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그 메시지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새로운 생활환경의 양상을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근대성은 이전의 ‘견고한’ 국면에서 ‘유동하는’ 국면으로 바뀌었으며, 국민국가의 단위에 머물러 있던 권력과 정치의 영향 범위가 달라지며 권력의 상당 부분이 정치적으로 규제 받지 않는 전지구적 공간으로 이전된 반면 정치는 여전히 지역 차원에만 머물러 있어 정치적 통제가 존재하지 않는 해방된 권력이 생겨나고 이것이 또한 불확실성의 근원이 된다고 말한다. 게다가 이는 과거에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개인에 대한 보호의 역할을 약화시켜 개인에게 일어난 불행은 ‘선택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개인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세계는 점차 경계를 뚫고 해체하는 ‘지구화’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물질적·지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사회에서의 개인은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만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 개인은 “무역과 자본, 감시와 정보, 폭력과 무기, 범죄와 테러 등의 선별적 지구화가 낳은, 계획에도 없었고 예상치도 못한 부작용”이라는 ‘부정적 지구화’의 불의와 혼란에 맞서 스스로 ‘유연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실패나 패배의 책임을 떠안고 곧장 사회의 생산 영역 밖으로 밀려나 ‘잉여 인간’도 되지 못한 영원한 ‘쓰레기’로 전락하는 수밖에.

 

쓰레기가 되는 삶, 그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일상의 근저에서 현대인들을 위협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형성되는 과정에 놓여 있는, 미완성 상태의, 취소될 수 있고, 폐기될 수 있는 순간들의 모음”으로서의 ‘유동하는 근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국경 없는 시장과 경계 없는 지구는 권력을 쥐고 흔드는 소수 엘리트들에게 더 넓은 행동 범위를 제공해줄 뿐, 본질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힘없는 개인에게 전지구화는 오히려 사회로부터 배제된 ‘인간쓰레기’가 되어 떠돌고 흘러 다녀야 할 불안정한 공간이 늘어난 것을 의미할 뿐이다. 지금, 이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그렇게 불확실성의 시대, 지옥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바우만의 메시지가 들려온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끊임없는 경각심이 필요하고 불안이 따르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2007, 207-208쪽)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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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 행동으로 알고, 앎으로 행동하라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1

 


1936년에 발발했던 스페인 내전. 프랑코가 지휘한 파시스트 반란군과 이에 대항한 공화주의자들과의 전쟁은 결국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 전쟁에 참전한 조지 오웰의 기록이 바로, <카탈루니아 찬가 Homage to Catalonia>다. 파시즘에 저항해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싸웠던 많은 이들의 열망이 아군의 배신으로 환멸과 분노, 절망으로 바뀌어야 했던 서글픈 역사. 오웰은 그 어디에 오마주 Homage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전쟁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바로셀로나에 도착한 오웰이 생전 처음으로 맞보았던 ‘평등의 공기’을 향한 걸 거다. 당시 무정부주의자들이 통치하고 있었던 바로셀로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는 ‘계급 없는 사회의 축소판’과 같았고, 군에 자원한 후 배치된 아라곤 전선에서도 오웰은 이와 다르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장교에서 사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같은 월급을 받고, 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계급적으로 차별을 받지 않았다. 오웰은 그곳에서 평등한 공동체의 가능성과 희망을 본 것이다.

“나는 우연히 정치적 의식과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정상으로 취급되는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다. […] 모두들 똑같은 수준에서 생활하였으며,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어울렸다. 이론적으로는 완전한 평등이었다. 실제적인 면에서도 완전한 평등에 가까웠다. […] 문명화된 생활의 여러 가지 일반적인 동기들, 예컨대 속물근성이라든가, 돈을 악착같이 벌어 모으려는 태도, 상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 누구도 주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않았다.” (139-140쪽)

물론 그 경험 안에서 오웰이 직면해야 했던 현실적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 더러움, 권태, 이 그리고 생명의 위험 등은 정의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의욕적으로 전선에 투입된 많은 이들의 시간을 고통으로 채웠던 게 분명하다. 특히, 오웰은 이렇다 할 전투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불필요한 경계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에 대해, 당시에는 전선에서 보내는 그 기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무익한 시기로 여겨졌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오웰에게 또한 “다른 방식으로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웠”던 소중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파시스트에 대한 항쟁의 주도권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가고, 스탈린의 지시를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함께 파시즘에 저항했던 무정부주의자들을 배신해 결국 내전의 승리가 파시스트 프랑코에게 돌아가게 된 이후에도, 오웰이 그것에 대한 환멸 대신 깊은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의 수립을 갈구하는 그의 욕망이 전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러므로 이 책, <카탈로니아 찬가>은 그 기억을 가져다 준 경험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사건의 밖에서 그것을 관망하며 현장의 소리를 듣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당시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며 죽어있는 글을 쓸 때, 오웰은 자신의 양심이 시키는 대로 세상에 뛰어들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고, 이 경험과 기억 그리고 앎으로 다시 ‘정치적 글쓰기’의 목적과 방향성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웰의 글이 지니고 있는 욕망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를 특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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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강> - 강은 흘러야 한다!

 

프레데릭 백, <위대한 강>, 두레, 2010 

 


“자연은 그 자체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적응하며 살아남은 생명체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에 대한 지식을 우리의 영감을 드높이는 법칙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그것을 자연을 파괴하기 위한 더 훌륭한 방법을 찾는 데 쓰고 있다. […] 이러한 행동의 중심엔 소유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 이런 때일수록 자연과 더불어 사는 메시지에 자기를 연대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프레데릭 백의 인터뷰 중에서, 「Naturopa Magazine」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에너지 고갈과 환경오염 등, 파괴되어 가고 있는 자연에 대한 우려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며, 녹색 성장, 녹색 경영, 녹색 혁명 등, 전세계적으로 불어 닥치고 있는 녹색 열풍은 그 긴급한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는 분명 이전까지 벌어졌던 환경과 개발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논쟁과는 다른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친환경’은 이미 정치 경제 할 것 없이 모든 영역에서 반드시 고수해야 할 지상의 목표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이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그리고 지금 여기, 그 사고방식이 거창하게 벌이고 있는 ‘사업’이 있다. ‘4대강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한강과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파헤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한다. “홍수를 예방하고 수질을 정화하며 생태공간을 만”들어 강을 살리고자 한다고. 그러나 강은 이미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스스로 그러한’ 것일 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저 흐르도록 내버려두기만 하면 될 뿐, 굳이 ‘강을 살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없다. 오히려 더 이상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지. 지난날 강이 겪었던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면.

프레데릭 백의 <위대한 강>은 같은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재구성해 만든 작품으로, 이 책의 중심에 캐나다의 세인트로렌스 강이 있다. 약 2만 년 전 빙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 강은 북아메리카의 여러 원주민이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이었으며,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임을 겸허히 받아들였던 그들은 필요 이상을 욕심내지 않으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곳이 1534년 프랑스인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를 시작으로 제국주의 유럽인들의 각축장이 되면서부터 강은 더 이상 ‘스스로’ 살아 흐르지 못하고, 부의 축적을 위한 도구가 되어 죽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위대한 강>은 과거 인간의 무책임한 욕심이 낳은 세인트로렌스 강의 ‘슬픈 역사’를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예고한다. 강을 대상으로,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벌이는 모든 행위는 결국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임을.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강의 숨통을 조이는’ 사업은 그만두고, ‘새로운 봄을 맞으며, 위대한 강과 굳게 손을 잡’는 것이다. “강이 숨겨 둔 무한한 에너지는 물이 되살아날 것을 약속하며, 인간에게 새로운 봄을 맞으라고 한다. ‘지구의 봄’이 찾아오던 시절에 그랬듯이, 위대한 강, 막토고엑(‘큰 강의 흐름’이라는 뜻)과 굳게 손을 잡으라고.” (64쪽)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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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시절> -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조지 오웰, <바머시절>, 열린책들, 2010

 


1920년대 중반, 영국의 식민지 버마. 조지오웰의 <버마시절>은 영국에 기생해 권력을 휘두르고,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위해 새로운 음모를 꾸미는 하급 치안 판사 ‘우 포 킨’으로부터  시작된다. 개발을 통한 문명화의 논리로 영국의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원주민 의사 베라스와미, 이를 부인하며 영국 제국주의의 본질은 사실상 세계 평화를 위한 희생이 아닌 강탈을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플로리. 이 둘 모두는 우 포 킨이 식민지 권력의 핵심인 유럽인 클럽에 들어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에서 희생의 제물로 선택된 인물이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오 포 킨의 사악한 계획은 성공으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 사이를 채우고 있는 아이러니, 피지배자의 희생의 제물이 돼버린 지배자의 예정된 파멸. 게임의 승패는 결정났지만, 승자와 패자 그 누구도 해피엔딩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결말.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 그리고 권력을 향한 맹목이 낳은 비극.

<버마시절>은 조지 오웰이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버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입장에서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식민주의자들이 문명화라는 논리로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의 불합리함을 여실히 보여주며, 이와 함께 이러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면서도 단호하게 이를 끊어내거나 맞서 투쟁하지 못하는 나약한 한 인간(플로리)의 내면적 고뇌와 절망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한 인간과 제국주의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이의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자살이라는 결말로 이어진다. 플로리의 ‘버마시절’은 끝이 났고, <버마시절>의 이야기 또한 끝이 났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그간 인류의 역사에 수많은 비극을 새겨 넣은 인종적 편협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문명이라는 독단적 입장으로 문명화되지 않은 것들의 가치가 매겨지고 있으니. 게다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인간의 욕망은 부와 권력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만족을 모르지 않던가.

결국 모든 비극은 자기 본위 대로 매겨진 우월의 가치가, 차이의 단순함을 지우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것을 채우고 지키기 위해 버려진 것들이 타인의 비극, 혹은 인류의 비극을 지속시킨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부와 권력을 얻고 승리감에 도취된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가 얻기 위해 버린 것이 정작 '인간다움'일지 모르며, 그러므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결말 또한 비극이라는 것을.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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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 물들다> - 무엇보다, 그곳에 '사람'이 있다

 

안영민, <팔레스타인에 물들다>, 책으로여는세상, 2010 

 


"뉴스나 신문에서만 가끔 볼 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왜 싸우는지, 왜 폭탄을 터뜨리는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다쳐야 하는지,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뉴스를 보다가 이내 잊어버리는 사람들, 하지만 무언가 죄책감으로 마음 한 구석이 찝찝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은 뉴스나 신문에서만 가끔 볼 뿐, 그 이름이 지도 위에서 지워진 것도, 그 이유나 과정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이 책의 지은이가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해 시민활동을 한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과 비슷한 태도일 겁니다.

“한국도 일이 많은데 웬 팔레스타인?”

지은이 또한 처음에는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팔레스타인 아이가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맞아 죽은 사진을 본 후부터, 팔레스타인에 대해 공부하고 그렇게 알게 된 팔레스타인의 억울한 현실을 한국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고 하니까요. 이 책, <지도 위에서 지워진 이름, 팔레스타인에 물들다>는 그런 지은이가 직접 그곳을 찾아가 몸으로 알게 된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문화, 무엇보다 사람들의 일상적 삶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해보다 더 많이 얻어갈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결국, 사람을 목적으로 사람을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지은이의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장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장벽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고, 이스라엘군의 총격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총알을 몸으로 맞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에서 시민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많은 것을 사건과 사업과 일로 만들고, 그러면서 정작 그 사건과 사업과 일이 있어야 하는 이유인 사람들은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54쪽)라고 말하는 지은이의 마음이, 책 속 곳곳에 드러나 책 전체를 물들이고 있으니까요.

문제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사람을 말하지 않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즉 “우리처럼 즐거우면 웃고 슬프면 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그들을 슬프게 하고 울게 하는 “우리와는 조금 다른 조건”을 말하는 이 책이, 팔레스타인의 힘겨운 오늘을 우리와 가까운 현실로 느끼게 하는 이유입니다.

내 삶의 티끌만한 버거움에 허덕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그래서 종종 외로워지는 우리들에게,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진 것들(물, 전기, 안전 등)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건 일상의 투쟁을 계속해야 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표정이 전해져 옵니다. 
 


그렇게 “저녁 하늘에 노을이 지듯 사람이 사람의 가슴에 물드는 것, 연대란 그런 것이 아닐까” (55쪽)라는 지은이의 말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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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 벌거벗은 자화상을 생각하다

 

장루이 가유맹, <에곤 실레>, 시공사, 2010 


 

한 남자가 거울 앞에 서 있고, 그 눈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을 더 자세히 보면, 그 눈이 다시 나-보는 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결국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과 거울에 비친 자신, 그 모두를 보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인데요. 이렇듯, 자아(自我)와 타아(他我) 그리고 타자(他者) 사이를 오가는 예민한 시선이 바로, ‘불안과 매혹의 나르시시스트’ 에곤 실레 그 자체가 아닐까 합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팔로 머리를 비틀고 있는 자화상>, 1910년


“각 시대마다 예술가는 그 시대의 삶의 단편을 드러낸다. 그리고 바로 예술가라는 개인적 존재의 위대한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에곤 실레

기존의 관념이나 사상을 일소하려는 의지 너머로, 존재론적인 경험을 새로운 예술의 ‘원칙’으로 삼으려는 갈망을 지니고 있었던 에곤 실레. 그에 따르면 “예술가는 규칙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에게로 향하며 특히 자신이 만질 수 있는 것, 즉 자기의 육체로 향” (29쪽)합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자화상을 통해 그려낸 그의 벌거벗은 육체는 이미 ‘살의 매력’을 상실한 표현의 매체에 불과하며, 그 자체의 물질성이 아닌 영혼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 “육체를 다듬어 표현하기보다는 그대로 인정하며 장식으로 꾸며진 육체를 지우는 그의 욕망은 육체에 상처를 입히고 그 정체를 폭로” (149쪽)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울 앞에 서 있는 에곤 실레의 모습이 거칠고 뒤틀린 터치로 육체를 드러내고 벌거벗은 영혼의 시선으로 누군가를 응시할 때, 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어떤 불안과 매혹에 휩싸여 그 시선을 피하지 못하는 내가 있다면, ‘나’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이토록 단호하고 고통스럽게 온전히 벌거벗은 자아와 대면해본 적이 있는가.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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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추천도서] 가을이 오면, 나는 ‘나’를 읽고 싶어진다.

 

오랜만에 모두에게 찾아온 긴 연휴를 지내고 나니, 이제 완연한 가을이 와 있는 듯합니다. 번잡한 마음을 추스르고, 몸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있지만, 공연히 창밖으로 애꿎은 시선을 보내게 되는 건, 비단 저만이 아니겠지요. 늦은 밤 평소에 좋아하던 음악을 틀어놓고 마냥 뒹굴어도 좋겠고, 느긋하게 "책상 앞에서 詩集들을 뒤적이"며, "詩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어오"르는 걸 보아도 좋겠다, 생각합니다. 한 해의 반 이상을 꼬박 살아낸 우리가, '가을은 낭만의 계절'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핑계삼아 스스로에게 얼마간의 여유를 주는 것도, 저물어가는 해年와 함께 스스로를 정리할 수 있는 작은 시작이 될 테니까요.

 

 

 

 

「어떤 풍경」

 

고요한 서편 하늘

해가 지고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한 사람이

 

책 상 앞에서 詩集들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가 읽는 詩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러오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時間의 무상함

 

(어떤 사람이 시간의 詩를

읽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 지성사, 2010, 65쪽 

  

“시집들을 뒤적이”는 일은, 이제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내 안의 언어를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내 안에 있었지만, 그에 맞는 언어를 갖지 못했던, 어떤 감정과 생각들의 맨얼굴을 보고 싶을 때. 내가 나를 설명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절감할 때. 그때야 비로소 추상과 이미지로 열려 있는 시의 세계가, 객관에 지배되는 일상의 우리에게, 간절한 필요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 방향을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문학동네, 2001

 

늘 보고 듣고 느껴왔던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해, 그 생경함으로 '사실'과 '안전'의 지대에 안착한 일상을 뒤흔들고, 자발적인 혼란에 처하는 일. 그게 바로, 시를 읽고, 시에서 타인을 읽으며, 타인을 통해 다시 나를 읽는 방법이 아닐까요. 그러나 '시 읽는 철학자' 강신주가 강조해 말하듯, 이와 같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 "삶을 낯설게 하는" 것은 비단 예술과 시의 역할만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일상적 세계를 동요시키고 낯선 세계를 도래시키는 힘"은 "개념들을 창조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엮음으로써 새로운 사유 문법을 만드는" 철학 또한 충분히 지니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그러니 이 '가을의 낭만'이 자연스럽게 추동하는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를 위해,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을의 낭만에 기대어 내 자신을 설명해줄 언어를 찾아 헤매다 만난 이 책을 권합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즈음이 되면, 그 사이 무감하고 무던해져 버린 일상 속에서, 작년 이맘때쯤과 다른 '오늘의 나'를 찾고 싶어지는 모든 분들에게.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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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과 비움의 미학> - 매인 데 없이 자유로워라

 

장석주, <느림과 비움의 미학>, 푸르메, 2010 

 

 

「몽해항로 1」 ― 악공(樂工)

누가 지금
내 인생의 전부를 탄주하는가.
황혼은 빈 밭에 새의 깃털처럼 떨어져 있고
해는 어둠 속으로 하강하네.
봄빛을 따라간 소년들은
어느덧 장년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네.

하지 지난 뒤에
황국(黃菊)과 뱀들의 전성시대는 짧게 지나가고
유순한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여네.
곧 추분의 밤들이 얼음과 서리를 몰아오겠지.

일국(一局)은 끝났네. 승패는 덧없네.
중국술이 없었다면 일국을 축하할 수도 없었겠지.
어젯밤 두부 두 모가 없었다면 기쁨도 줄었겠지.
그대는 바다에서 기다린다고 했네.
그대의 어깨에 이끼가 돋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네.
갈비뼈 아래에 숨은 소년아,
내가 깊이 취했으므로
너는 새의 소멸을 더듬던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라.
네가 산양의 젖을 빨고 악기의 목을 비틀 때
중국술은 빠르게 주는 대신에
밤의 변경(邊境)들은 부푸네.

-장석주, 『몽해항로』, 민음사, 2010, 31-32쪽

 

하루를 시작했던 해는 금세 저물어 어둠을 몰고 온 밤을 맞이하듯이, 우리의 생애를 채우는 무수한 시간 또한 그렇게 흘러 일국이 끝나는 시점을 향해 가고 있겠죠. 그리고 그 시점에 다다른 누군가의 입에서는 결국, “일국(一局)은 끝났네. 승패는 덧없네.”라는 시의 노래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이토록 짧은 생애의 순간들을, 승리에 골몰하며 보내는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는, 그리 오래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승패의 여부가 아니라 그 삶을 채워 나가는 과정이며, 그렇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삶을 어떻게 연주해 나갈 것이냐, 일 테니까요.

아마도 시인 장석주는 그 해답을 『장자』에서 찾은 듯합니다. 우리에게 ‘존재의 기술’, 즉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를 질문하는 『느림과 비움의 미학』은 그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으니까요.

지난 10년 동안 『장자』를 머리맡에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읽었다는 저자는 잘 알려진 ‘독서광’ 답게 삶과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독서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온 삶에서 받아온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기 탐색과 자기 생성의 기술”을 『장자』라는 책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겠죠.

그가 강조해 말하듯, 장자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바람처럼 떠도는 방랑의 천재, 예기치 않은 은유와 환유로 잠든 뇌를 깨어나게 하는 수사학의 달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드는 초월과 지혜의 진인” (368쪽)이며, 이러한 그의 면모는 이 책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장자』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곽상의 편집에 따라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장자』의 내편은 ‘느림과 비움의 미학’으로 연결되는 이치의 근본을 밝히고 있어, “자기만족과 나태함”에 빠져 있는 현 인류의 반성적 거울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삶과 죽음, 옳고 그름,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등을 끊임없이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만물이 하나라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편견과 아집에 얽매여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이켜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현실적 삶에 대한 시인의 예민한 시선이 더해진 이 책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장자』 속 이야기를 우리 가까이로 데려와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렇게 이 책은, 세상의 속도에 맞춰 사느라 자기 탐색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것과 저것 사이의 분별과 편견에 사로잡힌 마음에 매여, 참된 삶의 자유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말합니다.


느리게, 그리고 비우며 살고, 매인 데 없이 자유로워라. 라고.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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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6 + 화양연화> - 소리는 기억을, 기억은 다시 감정을 데리고 온다



 

 

 


# 1. In The Mood

좁은 골목을 홀로 걸어가는 것.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은 세계 속에서, 나에게 허락된 아주 일부분의 공간을 오고가는 것. 그게 인생일지 모른다.

내가 차지할 수 있는 세계는 내 육체의 부피, 꼭 그 만큼에 지나지 않으니, 그 육체의 사라지지 않는 표면이 나와 나 아닌 것을 나누어, 나는 언제나 나이게 하고, 나 아닌 것이 될 수 없게 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인생은, 육체의 표면 안에 갇힌 고립감을 견디며 홀로 걸어야 하는 매순간의 고독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걸음마다 따라붙는 긴 그림자의 쓸쓸함은, 그래서 인생의 고독을 떠오르게 한다.
 

 
 

 
# 2. For Love

골목의 한 귀퉁이, 무심한 듯 빛을 쏟아내던 가로등이 있었고, 그 빛으로 드러난 고독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고독이 고독을 알아보는 뜨거운 순간이 있었다. 좁은 골목을 스치듯 지나가며, 홀로 걷는 육체의 설움을 고백하던 그때, 드디어 나는 ‘너’를 갖게 되었고, '우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 순간’은 무능력할 따름이다.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그때, 거기’에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부질없이 영원을 탐하는 마음이 흐른다. 붙잡아두는 것 없이 모조리 흘려보내는 시간의 흐름을 외면하려 애써 몸부림도 쳐본다. 느슨해진 시간 안에서 찰나마저 촘촘하게 새겨 넣으려는 기억이 바로 그 몸부림이다. 하지만 기억은 시간의 배려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잔인함의 증거가 되기 일쑤이다. 모든 기억은 지나간 순간의 아쉬움만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 도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너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었던 바로 그 감각으로, 사라지지 않는 너와의 거리를 확인한다. 다시 한 번 고독을 마주한다. 우리 사이, 그 뜨거운 설렘을 만들어낸 것도 결국 그 거리였음을 지독히 알게 된다.

# 3. Yumeji's Theme

소리가 들려온다. ‘그때, 거기’에서 들었던 바로 그 소리다. 설렘이 먼저 오고 그 다음이 설움이다. 짧은 순간, 음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소리가 서로를 두드렸던 설렘을 닮았다면, 이 음에서 저 음으로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멜로디는 서러운 감정을 타고 북받쳐 흐르는 눈물을 닮았다. 그 소리 안에서, 두드림과 흐름이 함께 하는 걸 들으며, 설렘과 설움이 결국 고독이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이어져 있음을 생각하는 건 지나친 감상일까. 

문득 찾아든 기억이 감정을 데리고 오면, 나는 ‘그때, 거기’에서, 나와 너 사이를 오고갔던 게 있다면, 그게 바로 이 소리였을 거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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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의 그림자> - 쓸쓸함이 쓸쓸함을 만났을 때

황정은, <百의 그림자>, 민음사, 2010


시간은 무엇에게나 흔적을 남긴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평생 동안 혹은 그 이상으로. 이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사이, 필시 무언가는 사리지고 또 무언가는 생겨난다. 수많은 밤과 낮을 오고가며 이루어진 생멸(生滅)의 축적이 다름 아닌 시간의 흔적일 것이다. 그렇게 어제를 지나 오늘에 이르는 우리에게 아픈 상처의 기억을 남기는 것도, 그 고통을 이겨낼 또 다른 기억을 심어주는 것도 결국 시간이다.

이 소설, <百의 그림자>은 그 시간의 흔적들을 생각하게 한다. 처음 책을 폈을 때, 우리에게는 숲을 헤매고 있는 ‘은교’와 ‘무재’가 걸어들어 온다. 쓸쓸한 그들의 기억, 그들에게 새겨진 시간의 흔적이 함께 따라 들어온다. 그 안에 집 나간 어머니, 무뚝뚝한 아버지, 왕따와 폭행을 당했던 은재의 학창시절과, 아홉 명의 식구, 개연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빚을 지게 된 무재의 부모, 아버지의 죽음 등이 들어 있다.

그들의 일상이 이어진다. 은교와 무재를 만나게 했던 장소,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가 이야기 속에 들어온다.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 다섯 개의 건물이었으나 사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그곳. (29쪽) 그 자체가 시간의 흔적이고, 그 안에 수많은 이들의 삶을 담아냈을 그곳, 전자상가의 역사가 함께 들어온다. 가족들에게 외면당한 기러기 아빠, 공사장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유곤 씨, 전구를 파는 ‘오무사’ 할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전자상가 철거가 시작된다. 그렇게 사십여 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의 삶을 품어 주었을, 그 ‘시간의 흔적’을 참 쉽게도 지워버리는 철거가, 또 한 번의 쓸쓸함을 남기며 또 다른 '시간의 흔적'으로 새겨지고 있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113-115쪽)

전자상가의 가동을 밀어내고 들어선 깔끔한 공원 벤치에 앉아 은교와 무재는 말한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요. […] …… 어디로 갈까. ……조용하네요. 네. 예쁘네요. 예쁘지만,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112-117쪽)

그러나 여기에 한 번의 눈물로 타인(그들)의 불행을 쉽게 지나쳐 가게 하는 상투적 표현은 없다. 그들은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그림자가 일어섰다’고, 말하자면 언제고 우리 옆에 들러붙어 있는 어둠이 결국 일어서고야 말았다고 말할 뿐.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둠 속을 걷고 또 걷는 그들이, 모두에게 남겨진 ‘시간의 흔적’처럼 시간을 걸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실컷 울고 난 후, 어렵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나는 없다. 내 옆에도 그림자(어둠)는 언제든지 달라붙어 있으니까.

그러나 삶의 어느 순간에 “달려온 방향과 가야 할 방향이 모두 어둠에 잠겨 있”을지라도, 은교의 쓸쓸함과 무재의 쓸쓸함이 만나 그랬던 것처럼, “걸어갑시다”라고 말하며 손을 이끌어주는 누군가를 만나 “어둠에 잠겼다가 불빛에 드러났다가 하며 천천히” 시간을 걸어 나가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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