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5.01.07 《사포》 - 아슬아슬하게 아찔하게
  2. 2014.01.17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절망의 구렁텅이에 있다면
  3. 2011.08.12 <다다를 수 없는 나라> - 잊고 잊혀져 자유로워지다
  4. 2011.06.16 <분노하라> - 우리 모두에겐 분노할 의무가 있다!
  5. 2010.05.07 <아름다운 하루> - 어린 시절에서 빌려운 짧은 시간의 아름다움 (2)

《사포》 - 아슬아슬하게 아찔하게

 

 

 

 

알퐁스 도데 | 《사포》 | 예문 | 2014

 

《사포》에는 사랑에 대한 풍부한 묘사와 그 앞에 웅크리고 발가벗겨진 인간의 모습이 있다. 장과 파니에게서 예상치 못했던 사랑의 숨은 그림자들을 발견한다.

‘연애’보다도 ‘사랑’은 그 깊이를 가늠하기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언제나 쉽게 달라져 버릴 것을 알고도, 늘 사랑에 대해 정의하고 싶어 하는 연유 또한 이 때문이 아닐까. 사랑이란 그것의 본질적 속성 위에 유연한 형체들을 지닌 모습으로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만 같다. 다양한 문학 작품 속의 새로운 주인공과 그들이 알려주는 모든 것을 통해, ‘사랑’의 정의를 하나씩 보태어 본다.

알퐁스 도데의 《사포》에 그려진, ‘파니’에 대한 ‘장’의 사랑 또한 그러하다. 사랑은 때때로 이유를 짚어낼 수 없는 따스한 분위기와 찰나에 다가와 환락 같은 안온함에 사뿐히 자리한다. 선택과 결정을 위한 움직임을 알아차잖기도 전, 순간의 얕은 변화에 자리를 쉽게 내어 주는 것이 사랑의 시작일 뿐일지도 모른다. 다만, 순수한 열병과 같은 감정의 휩쓸림만이, 경외심과 찬탄과 아름다움, 희생과 헌신, 그것들만이 ‘사랑’을 그리지는 않는다. 사랑이라는 슬하는 이리도 깊고 넓다. 알량한 허세 의식, 진흙탕 같은 질투, 우둔함, 나약함, 동정과 연민, 광포한 충동, 우유부단함 속에서도 사랑은 미약한 숨을 내뱉는다. ‘장’이 그것을 알려주었다.

프랑스 남부의 명망가 자제인 장은 외교관 시험 준비를 위해 파리에 있었다. 그는 무도회에서 15살 연상의 파니를 만난다. 고지식하고 엄격한 편이지만 순진하던 장은, 파니와의 관계가 집안과 자신의 미래보다 중하지 않고 마뜩잖음을 느끼면서도 파니의 지속적인 구애와 질긴 숙명과도 같은 끈에 의해 점차 그녀에게로 이끌린다. 장은 곧 파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신경 쓰며 그녀와 동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 난 사랑에 빠진 걸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렇지만 어쨌든 이처럼 나를 따스하게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사랑어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한 게 아닐까?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이러한 행복을 접어 두고 살아올 수 있었지··· ··· 타락이라든가 구속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얼마나 우스운 얘기야··· ··· 이 세상에서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이 여자 저 여자와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 한 여자의 사랑을 받으며 편안하게 지내는 지금의 생활을 더 불결하고 추하다고 할 수 없지··· ··· (본문 중에서)

그는 외무부의 연수 기간인 3년 동안만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면 될 거라고, 스스로 불안을 자위했다. 황홀감에 도취되어 신혼 같은 생활을 보내던 그때 의도치 않은 일들이 발생한다. 무도회를 주최했던 디셸레트와 유명한 조각가 카우달을 만나, 파리 사교계의 꽃으로 많은 예술가와 사랑을 거쳐 온 파니의 과거에 대해 듣게 된 것이다. 사랑의 경외심을 찬양하던 라구르너리 시의 사포가 파니였다니, 카우달이 조각한 브론즈 빛의 아름다운 사포가 파니였다니. 파리의 유명 예술가들의 뮤즈, 그녀가 '사포'였다. 그는 역겨움과 더러움을 느끼며 파니를 향한 경멸스러운 감정에 비틀거리면서도, 속마음에 생경한 목소리가 울린다.

생각이 이쯤 미치자 장은 당대의 프랑스를 뒤흔드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거쳐 간 여자를 자신도 한번 안아봤다는 우쭐함과 그 예술가들이 자기더러 미남이라고 불러 주었다는 데 대한 묘한 자부심이 어이없게도 마음 한구석을 차지해 가는 걸 느꼈다. 그의 나이 때에는 무엇이든 확실한 게 없으며 더군다나 세상에 대한 이해라든가 삶에 대해서 아직도 방황과 모색을 시도하는 때라 남들이 조금만 부추겨도 세상이 다 제 것인 양 믿는 법이다. (···) 장 역시 그랬다. 라구르너리가 아름다운 운율로 시를 적어 노래하고 카우달이 심혈을 기울여 대리석과 브론즈로 조각한 사포의 모습이 후광에 싸여 그의 머릿속에서 자꾸 커져만 갔다. (본문 중에서)

파니의 곳곳에 새겨졌을 지난 사랑의 방탕한 흔적들과 함께 파니의 출생과 집안에 관한 사실들이 연달아 베일을 벗는다. 감추어 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 후, 파니는 이전의 고귀함과 조심스러움을 버리고 장 앞에서 거침없고 난잡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그즈음 도착한 고향의 편지를 빌미로, 장은 파니와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끝낼 결심에 이른다.

혼란스러움과 질척거리는 사랑놀음에 진이 빠져버린 장은, 고향으로 돌아와 평온함과 순수함에 젖어든다. 결국 그는 파니에게 이별을 고한다. 얼마 가지 않아 전원생활의 고루함과 나른함에는 싫증이 났지만, 행간에 녹아나는 애정이 애무와도 같은 파니의 편지는 계속되었다. 궁금함과 기다림은 애틋한 마음과 그리움으로 색칠되어 가고. 장과 파니는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떨어져 있던 여백만큼의 새로움에도―새로움이 늘 그렇듯― 아주 짧은 행복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겨우 지켜보았을 따름이다. 짧았던 새로움이 퇴색되고 장은 다시 허물을 벗겨내 벗어나야 할 구실을 들먹였다.

남루해지던 생활이 이어지던 중 장은 급작스레 나타난 어린 소녀에게서 모든 것이 합당하고 정돈된 것만 같은 구원을 발견한다. 소녀는 좋은 집안의 자제였고 젊었으며 싱그러웠다. 그렇게 파니를 떨쳐 보냈음에도, 알 수 없는 잔영이 그의 온몸과 정신을 휘감았다.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채 혼자 사는 사람들 특유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허전하고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것은 끝나 버린 사랑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다는 갑자기 잃어버린 분신을 향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한솥밥을 먹고 잠자리를 같이하던 날들이 켜켜로 모여 보이지 않는 견고한 천이 한 올 한 올 짜지기 마련이며 그런 관계가 느닷없이 단절되었을 때 그 견고함은 고통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본문 중에서)

혼란과 방황의 시간을 꾸역꾸역 넘기며 새로운 소녀와의 그것이 사랑이자 행복이라고 다짐하던, 장은 그가 보냈던 편지들을 돌려받으러 파니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맞닥뜨린 파니의 옛사랑과 흐트러진 침대 시트에 장은 광포한 질투에 휩싸인다. 그날, 장은 파니를 떠나지 못했다. 그는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곧 제자리로 돌아와 버리는, 늪에 머물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는 영원히 장에게서 멀어지는 길을 택한다. 장은 저 멀리 사라지는 파니의 모습을 바라본다.

완전히 파멸해 버린 자신의 허망한 삶이 바위가 파도에 씻겨나가듯 그의 가슴속에서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아름다움과 경외심으로 점철된 열정만이 사랑은 아니다. ‘파니’를 향한 ‘장’의 사랑은 질척했고 갑갑했지만, 처절할 만큼 순수하고 원색적이기까지 했다. '사랑'의 또 하나의 정의다.

 

 

Trackback 0 Comment 0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절망의 구렁텅이에 있다면

 

에밀 시오랑 |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챕터하우스 | 2013

 

걸을 때마다 절망과 고통에 부딪히는 시대다. 하여 많은 이들이 환멸의 삶을 살고 있다. 길을 잃은 양처럼 목자를 찾는다. 불안과 허무로 채워진 삶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인문학과 철학을 향한 관심의 급증을 보면 그곳에 무언가 해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어쩌다 읽게 된 책이다. 그러니 나는 에밀 시오랑의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그의 사색에 더 쉽게 흡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 쫓기는 듯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유를 선물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한 긍정이나 행복에 대해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죽음, 고통, 허무, 슬픔, 우울로 가득하다. 그것이 모두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고통에 대해 생각하고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에밀 시오랑은 ‘유’가 아닌 ‘무’ 를 통해 존재를 말하는 듯하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던 시절, 살아내기 위해 살았던 시절에는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이런 구절을 마주하면서 죽음은 삶의 동의어구나 생각한다. 

 

삶의 구조 자체에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의 구성 속에 없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죽음을 없음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삶을 삶의 부정이라는 원칙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은 ‘없음’ 이 결국 삶을 누르고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없음을 향하는 도정을 현재화한다. ('죽음에 대한 소고'중에서, 45쪽)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을 생각하니 말이다. 아니, 슬픔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는 여지없이 죽음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 다만 그것을 누가 알아차릴까 두려울 뿐이다. 하지만 슬픔의 얼굴은 표가 난다.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는 슬픔에 표정은 잠식당하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엔 슬픔의 주제를 잃어버리고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슬픔은 신비로 교체된다. 아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는 슬픔이라니...  

 

깊은 슬픔으로 충격을 받은 사람의 얼굴에서는 너무도 많은 외로움과 체념을 읽을 수 있어, 슬픔에 찬 얼굴은 곧 죽음이 밖으로 드러난 형상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슬픔은 신비로 향하게 된다. 그 신비는 너무도 깊어 슬픔을 수수께끼로 남긴다. 만일 신비의 등급을 매긴다면 슬픔은 무한하고 끝없는 신비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슬픔에 대하여' 중에서, 73쪽)

 

어제와 다르지 않는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때로 수많은 어제를 그리워한다. 그때는 좋았는데, 그때가 행복했는데,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에 속한 삶이 아니라 오늘을 느껴야 한다고 에밀 시오랑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순간은 오늘인 것이다. 현재를 기억하고 현재의 나를 사랑하라는 말이다.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의 상처가 남긴 환부를 지켜보며 살기 때문이다. 그는 이별했던 순간, 무시당했던 순간, 부끄러웠던 순간을 현재의 순간으로 채울 수 있어야만 충만해질 수 있다는 걸 각인시켜 준다. 

 

영원한 현재는 실존이다. 영원한 현재를 경험하면서 실존은 자명해지고 확실해진다. 순간의 연속에서 떨어져 나온 현재는 없음을 벗어나 존재를 생산한다. 순간의 기쁨 그리고 사물의 온전한 있음이 주는 매력에만 관심을 쏟는 사람, 순간 속에 살 수 있고, 현재를 빈틈없이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순간 속의 절대' 중에서, 155쪽)

 

모든 구절에 밑줄을 긋고 싶다. 아마도 이 책을 만나는 모든 이가 그럴 것이다. 주제마다 우울과 허무가 산재해 있지만 분명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왜 나만 불행할까, 왜 나만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절망하는 이에게 나의 심연과 마주하게 만든다. 산다는 건, 그 자체가 고행이다.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지만 내가 느끼는 고통은 세상의 전부가 당연하다. 그럼에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감당해야 할 고통의 몫이 줄어든다. 안다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에밀 시오랑은 그것을 아는 사람이다.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외로움이 아무리 깊더라도,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는 세상을 더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객관적 의미나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목표를 찾을 수 없지만, 존재의 다양한 형태들은 내게 언제나 슬픔과 희열의 원천이다.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이 우주의 궁극적 목적을 충분히 보상해주듯, 청명한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구름 조각이 나의 우울한 염세주의를 즐겁게 해주는 순간들을 경험했었다. 내면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지극히 미미한 자연의 광경에서도 상징적 의미를 발견한다. ('고통의 저주스러운 원칙' 중에서, 198쪽)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는 제목처럼 곧 해가 뜬다는 명징한 사실을 잊고 살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만 살아갈 것이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어둠이 길어질수록 마주할 빛은 크고 눈부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통과 절망의 삶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삶을 지배하고 이끌 수 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선인장'님은?
그저 폭넓은 책읽기를 꿈꾸며 책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Trackback 0 Comment 0

<다다를 수 없는 나라> - 잊고 잊혀져 자유로워지다




 

크리스토프 바타유 | <다다를 수 없는 나라> | 문학동네 | 2006

 

어떤 풍경 속의 길을 걷는다. 한걸음 또 한걸음. 가는 걸음마다 자꾸 멈춰 서게 된다. 그 멈춤으로, 보았던 걸 다시 보고 생각하게 된다. 어딘가에 닿기 위해 그 길에 오른 사람이라면 여정이 지체되고 있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목적지에 닿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길을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 있다. 길 곳곳에 지극한 아름다움이 놓여 있고,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매혹된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흐름에 자신을 맡겨도 좋지 않을까.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 Annam>가 이와 같다. 이 소설을 읽는 방법이 그렇다는 얘기다.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이야기. 그러나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건너가는 속도, 혹은 독자를 데려가는 속도가 더디다. 이는 문장과 문장 사이 논리적, 인과적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는 것도 이유일 테지만, 그 문장들 자체가 품고 있는 깊이와 아름다움에 매혹되는 게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문장과 문장이 만나 만들어지는 이야기보다 문장 다음을 뒤따르는 여운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더 풍요롭다. 

 

“각각의 문장들은 광대한 바다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하나씩의 섬이다. 섬과 섬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 이 소설을 구성하는 각각의 문장들은 마치 이야기 속의 외롭고 행복한 도미니크와 수녀 카트린처럼 고립되어 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망망대해와 건너지를 수 없는 침묵의 공간이 깊고 넓어진다.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섬처럼 고립된 문장들 사이에 깊고 넓어지는 침묵의 공간 속을 들여다보며 거기에 자신의 적막한 존재를 비춰보고 있다는 것을 어느 한순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153-155쪽)

 

그렇다면 그 문장들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는 우리는 결국 어떤 이야기를 향해 가는가. 자국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러 온 베트남의 어린 황제 칸, 그가 타지에서의 외로움과 고독으로 죽음을 맞자, 일단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베트남을 향해 배에 오른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베트남으로 가는 길고 험난한 여정과 그들이 베트남에 도착한 후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다. 누군가는 항해 도중에, 또 누군가는 베트남에서, 대자연의 엄혹함과 인간들 사이의 다툼으로 스러져간다. 그리고 잊혀져간다.

 

결국 살아남은 이는 도미니크와 카트린 수녀 뿐이다. 그러나 이들 또한 잊혀지긴 마찬가지다. 대혁명이 일어난 프랑스에서, 동방으로 떠난 선교사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더 이상 없다. 그러는 사이 도미니크와 카트린 또한 자신을 잊어간다. 과거 프랑스에서의 자신과 복음의 전파라는 목적을 가지고 베트남에 당도했던 그때를. 그렇게 유유히 흐르는 시간은 그들과 함께 했던 이들의 목숨과 문명이 그들에게 이식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과거로 사라져간다. 그러니 이제 그들에게 남겨져 있는 건, 베트남이라는 미지의 땅에서 다시 시작될 삶이고, 맨몸과 맨 정신으로 감각되는 생(生)의 지속뿐이다.

 

“프랑스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가 무의미해졌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베트남의 그 풍경들 가운데, 다스려지지 않은 대자연 앞에서 카트린 수녀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녀의 기도는 곧바로 핵심으로 향했고 이제 유혹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세계는 속이 빈 조가비였다.” (49-50쪽)

 

걷고 또 걷는 동안, 멈추고 또 멈춰 서는 사이, 침묵으로 시간은 흐르고 기억의 조각들은 떨어져 나간다. 그 기억들의 무게가 다 지워지고, 더없이 가벼운 생만 남아 이토록 자유롭다.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0

<분노하라> - 우리 모두에겐 분노할 의무가 있다!


  

스테판 에셀 | <분노하라> | 돌베개 | 2011

 

뉴스를 읽는다. 비정규직 비율 증가, 청년실업, 양극화과 빈부격차, 늘어나는 자살률, 급감하는 출산율, 높아만 가는 대학 등록금 등. 삶을 옭죄는 오늘의 문제가 내일의 뉴스를 채워가는 현실이 끝없이 이어진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뉴스(NEWS)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매일이 같은 그 뉴스들 밑으로 성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매달려 있다. 그러니 길게 늘어져 있는 그 목소리들에서 수많은 이들의 삶의 무게를 읽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 다시 한 번 강조해 말하건대,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새롭지 않은 뉴스에 덧글로 감정을 외치고, 그 덧글을 읽으며 감정에 동조한 후, 그 동조로부터 자기 위안을 얻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러나 산재한 문제들을 해결해 세상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읽는 것만으로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는 세상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다. 들리지 않고 읽히는 분노란 자기 위안이나 만족 이외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분노의 이유는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나”(18쪽)야 하는 것이다.


<분노하라 Indignez Vous!>의 저자 스테판 에셀은 바로 이 지점에서의 분노를 촉구한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15쪽)


그 분노는 개인의 안위를 떠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경우로 나아가야 한다. 즉, 자기를 위한, 자기 안에 갇힌 분노가 아니라 타협의 여지가 없는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분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존엄성과 자신이 서 있는 곳,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그 분노의 표출 방법이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는 “폭력에 의거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을 영속화할 수 있”으며, 폭력적인 희망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역사를 진보로 이끄는 주도적 힘은 희망에 있으며,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므로,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이므로.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당신은 개인으로서 책임이 있”으며,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참여해야”
합니다. (26, 18-19쪽)


짧은 책자에 담긴 노투사의 진심어린 호소가 현장의 소리, 그 분노의 울림을 듣지 못했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산재함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현실에 급급해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던 내가, 개인으로서의 책임과 인간으로서의 의무 모두를 방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0

<아름다운 하루> - 어린 시절에서 빌려운 짧은 시간의 아름다움

안나 가발다, <아름다운 하루>, 문학세계사, 2010 

“시몽 오빠와 롤라 언니는 황금시대를 기억하고 있다. 빌리에라는 깡촌에서 살던 그 때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 시골구석에 살던 시절, 그리고 부모님이 함께 행복해하던 시절. 그때 세계의 시작은 집 앞이었고 세계의 끝은 마을의 끝자락이었다.” (56쪽)

어린 시절, 그 작은 몸이 기억하는 세계 안에 가장 빛나는 인생의 한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직 세상을 다 알지 못해서 행복할 수 있었던 시간이 그렇게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익숙함의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알아봐주며 충만한 행복으로 서로를 채워주던 그 시절, 우리 모두의 황금시대는 이미 와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 그 때보다 더 넓은 세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휘청거리며 살아나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그 때 그 시절의 아름다움은 더없이 소중하고 그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안나 가발다의 <아름다운 하루>는 바로 그 그리움으로 가득 채워진 소설입니다. 혹은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모든 어른들의 현재에서 출발해 다시 그 일상으로 돌아오는 여행기이기도 합니다. 이는 어느새 30대에 접어든 시몽, 롤라, 가랑스, 벵상, 이렇게 네 형제자매가 각자의 일상에 메어 있는 어른의 현실로부터 일탈해 그들이 공통된 세계로 묶여있던 어린 시절의 애틋함을 되새기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랜만에 사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이들 형제자매는 제각기 변화된 모습으로 만나, 변하지 않은 그들의 기억을 꺼내 ‘아름다운 하루’를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불청객처럼 오빠 시몽의 옆을 차지하고 있는 까다로운 올케, 언니 롤라가 겪은 이혼의 상처 그리고 부모님의 이혼 등. 어린 시절의 완벽한 세계를 깨트리는 것은 언제나 시간의 흔적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존재로 인해 지나간 시절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각자의 일상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더 이상 어린 아이일 수 없는 어른들은 그 시절의 추억을 통해  불청객처럼 찾아온 시간의 아픈 흔적을 위로하고 다시금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아름다운 하루’의 일탈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가랑스의 말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겠죠.

“저 세 사람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서 남겨진 마지막 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 […]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것, 그리고 우리 넷이 느끼고 있는 이것은 약간의 여분일 뿐, 잠깐 붙잡아 놓은 것, 잠시 동안의 여유, 한순간 허락받은 은혜. 다른 이들에게서 훔쳐온 몇 시간……” […] 한 계절이 끝나갈 무렵, 무너져가는 성의 발치에서 정말로 소중한 순간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변화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뜻을 모아 감행한 우리의 탈출을, 이 정겨움을, 어쩐지 부드럽지만은 않은 이 사랑을 버려야만 한다는 것을. 끈을 놓아버려야 하겠지. 잡았던 손을 놓고 결국엔 강해져야 하겠지.”
(135-136쪽)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는 게 다 그런 거니까(c'est la vie).” 또다시 우리는 힘을 내 오늘을 살아나갑니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2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