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5.02.10 『아내의 빈방』 -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2. 2014.09.30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3. 2014.09.02 [반달토끼의 책방앗간] 윤영호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
  4. 2014.01.14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 삶의 가장 절박한 질문
  5. 2013.10.02 [서점에서 만난 사람] 기억되지 못한 삶을 기억함으로 - 《제7일》의 소설가 위화
  6. 2013.02.05 [서점에서 만난 사람] 잃어버린 내 삶의 끝, 죽음을 찾아 -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저자 김형숙
  7. 2011.12.27 <가나> - 죽음으로부터 삶
  8. 2011.03.18 <제5도살장> - 죽음과 아주 가까운 이야기
  9. 2010.12.16 <무릎딱지> - 언젠가 새살은 꼭 돋는다
  10. 2010.09.03 <저녁> - 죽음은 어스름한 저녁 빛을 닮았다

『아내의 빈방』 -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버거, 이브 버거 | 『아내의 빈방』 | 열화당 | 2014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오직 나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도 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도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누군가 사라지면 그 자리는 영원히 빈 공간이 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다. 그곳에서라도 그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말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떤 이는 그런 시간을 오래도록 지속한다. 누구도 그 시간을 방해할 수 없다. 충분한 애도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당신은 사 주 전에 죽었지. 어젯밤 처음으로 당신이 돌아왔다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없어진 자리에 당신의 존재감이 돌아왔다고나 할까. 베토벤의 「피아노를 위한 론도」 2번(작품번호 51)을 듣고 있던 중이었소. 구 분 남짓한 동안 당신은 그 ‘론도’였고, 그 ‘론도’가 당신이었지. 거기에는 당신의 밝음, 당신의 고집, 당신의 치켜 올라간 눈썹, 당신의 부드러움이 들어 있었다오. (10쪽)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존 버거의 글은 부드러운 햇살처럼 쏟아진다. 마치 그 햇살로 아내를 안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사십 년을 같이 산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분명 아내는 죽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곁에 존재한다.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을 때,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 때 함께 있다. 만질 수 없는 형체로, 볼 수 없는 형상으로, 대답이 없는 메아리로.

당신을 유심히 보면, 길을 찾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섬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오. 모자를 쓰거나 코트를 입은 모습, 머리를 만지는 모습, 문을 여는 모습, 돌아서서 나가는 모습. 당신은 길을 찾는 사람이오. (13쪽)

우리는 종종 잊는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해 잊는다.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생생했던 세포는 긴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져 꺼내지 않는 옛 이불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당신을 기억하는 일이 새삼 힘들다. 무엇을 좋아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예정된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존 버거는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로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 뒤돌아보고 있소. 그리고 당신이 그런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당신은 시간을 벗어난 곳에, 되돌아보거나 내다보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으니 말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31쪽)

존 버거와 그의 아내 베벌리 버거가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며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아내의 물건에 담긴 아내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자 노력했을 존 버거. 점점 사라지는 아내를 향한 눈빛은 얼마나 애틋했을까. 화수분 같았던 두 사람의 사랑은 잊힐 수 없다. 아들 이브 버거에게 전해졌을 사랑은 감히 그 크기를 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지속된다. 어쩌면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나밖에 없다는 말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당신이 살고 있다면 말이다.

엄마가 어디 계신지 모르기 때문에, 엄마의 몸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가요. 잠시 후면 저희가 고른 돌멩이가 엄마 무덤 위에 놓이겠죠. 흙과 풀 사이에 놓은 텐데, 그러면 아름다울 거라고 믿고, 또 그러기를 바라요. (35쪽)

애도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랑하는 방법이 그렇듯이. 아내의 빈방은 존 버거의 사랑으로 채워진다. 이 얇은 책에는 사랑이 전부 담기지 않는다. 부재 속에 존재하는 ‘당신’이라는 사랑을 살 뿐이다.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아내의 빈방』은 어떻게 읽게 되셨어요?

존 버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아내의 빈방』을 만났어요. 개인적으로 제게도 2014년은 죽음과 상실을 벗어날 수 없는 해였기에 더욱 마음이 닿았습니다.

● 오랫동안 서평을 써 온 선인장님에게 ‘서평’은 특정한 활동이 아니라 이미 일상의 일부 같아 보입니다. 서평은 처음에 어떤 계기로 쓰게 되셨어요?

그저 독후감으로 시작된 메모였습니다. 분명 읽었지만 모든 책을 소장할 수 없기에 나중에 다시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 필요하기도 했고요. 책에 대한 애정의 작은 표현이랄까요. 정작 지금은 좋은 책에 대해 쓰지 못하고 있네요.

● 평소 한국문학을 즐겨 읽으시죠. 『아내의 빈방』과 함께 읽으면 좋을 한국문학 작품도 추천해주시겠어요?

같은 주제라 할 수 없지만 이런 책들이 떠오릅니다. 김선우의 『물의 연인들』, 한강의 『검은 사슴』, 윤대녕의 『누가 걸어간다』, 서영은의 『꽃들은 어디로 갔나』, 박범신의 『외등』이요.

●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잡았는데 감기 때문에 쉽지 않네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선인장'님은?

그저 폭넓은 책읽기를 꿈꾸며 책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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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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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토끼의 책방앗간] 윤영호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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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 삶의 가장 절박한 질문

 

최진영 |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 실천문학사 | 2013

 

죽어야겠다는 생각과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같은 무게로 시소의 양 끝에 앉아있으며, 원도는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일지 선택하지 못한 채 시소의 중간에 위태롭게 서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최근 것이고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은 오래전 것이지만, 최근 것이라고 해서 더 가볍지도, 오래된 것이라고 더 묵직하지도 않다. (41쪽)

 

“검은 봉지에 담겨 으슥한 곳에 버려진 불법 쓰레기 같은 원도.”이것은 원도의 기억이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지난 삶을 샅샅이 뒤져 “인생의 뒤틀려버린 단 한 순간”의 장면을 복원하려는 의식의 몸부림이다. 온갖 실패가 켜켜이 쌓여, 병든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한, 고독한 생(生)의 절박한 되새김질이다. 그 안에, 원도의 눈앞에서 물을 먹고 죽은 아버지가 있다. 죽기 전에 그가 남긴 “만족스럽다”라는 말이 있다. 산 아버지가 있고, 너를 이해한다, 원하는 대로 살아도 좋다, 그러나 네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의 말이 있다. 원도의 앞에선 늘 눈물을 보이고,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원도가 아닌 다른 아이들을 돌보던 어머니가 있다. 그 어머니가 원도 대신 정성으로 돌보던 장민석이란 남자가 있다.

 

확연한 기시감 속에서도 거부할 수 없었던 맹목적인 실패들, 기억도 학습도 젬병인 원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다.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 원도를 꿰뚫어버린 것. 메워지지 않는 구멍을 내버린 그런 것. (…) 메워지지 않고 계속 썩어 들어가 더 깊은 구멍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러므로, 상처라기보다 통로다. 상처는 몸의 일부지만 통로는 몸을 뚫고 지나가는, 몸의 바깥이다. 나와 닿아있지만 오직 나만의 것은 아닌 것. 내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것. 나를 뚫고 지나가기에 나를 소외시키는, 나는 절대 볼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길. (64쪽)

 

이것은 메워지지 않는 구멍을 쫓는 이야기다. 그와 닿았던 타인, 그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었던 그들의 흔적을 되짚는 일이다. 알 수 없었으므로 모르는 그대로, 그를 뚫고 지나가며 상처를 내고 방향을 바꿔놓은 그들을 불러들이는 기억이다. 오해와 몰이해에 분노하며 자기만의 이해로 또 다른 오해를 구축해온 고립된 내면의 설명이다. 변명이다. 당신은 그런 그를 보고 “검은 봉지를 채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피해갈지 모른다. 알게 된 후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왜 죽지 않았는가” 그것을 끝내 원도에게 묻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원도를 만나기 전까지.

 

덮지 말고 끝까지 보라. 이것은 숱한 구멍 중 가장 광활한 구멍, 당신에 대한 기억이다. (168쪽)

 

퍼즐을 맞춘 후, 전체 그림을 보기도 전에 다시 판을 뒤엎고, 새로운 그림을 맞춰갈 수 있다. 조각은 많다. 그것들 모두, 반드시 필요한 조각이다. 모든 순간이 결정적이다. 살아야 할 이유라면 무수히 많다. 살아내는 일 분 일 초, 모든 행위와 생각이 결국 다 사는 이유다. 어떤 것은 이유고 어떤 것은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드문드문 살 수 없다. (240쪽)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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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기억되지 못한 삶을 기억함으로 - 《제7일》의 소설가 위화

 

취재·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빈자와 부자, 사람과 삶이 둘로 쩍 갈라져 있다. 그 사이를 자본의 칼이 날카롭게 지나간다. 날에 베이고 피 흘리는 건 안 됐지만 빈자들의 몫. 먹고 살겠다 아등바등 거리던 몸부림의 끝에 고독해서 서글퍼진 죽음들이 남았다. 따뜻한 피 돌고 비릿한 땀냄새 그득한 이 생의 흔적마저 애도해줄 이 없는 이들이 죽음 이후에도 안식에 이르지 못한 채 희뿌연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 창세기

 

그렇게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제7일》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위화는 죽음 이후의 시간에 다시금 삶을, 현실을 들여다 놓았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깨지고 망가져 너덜거린 채로 죽음으로 내몰린, 말해지지 않고 기억되지 않으나 결코 망각해선 안 되는 인생사들을 움켜쥐고. 고요하고 적막한 사후에야 비로소 기억을 곱씹고 추억을 되새겨 삶을 정리할 수 있게 된 이들로부터 그와 다르지 않은 현실에서 그와 다르게 않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로, 7일의 시공을 전하기 위해 지금-여기에 그가.

 

 

 

항상 현실과 밀착된 이야기를 써오셨는데요. 이번 소설은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후세계가 배경이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현실의 시점에서 썼다면 한 각도나 한 단면만을 다루게 되었을 텐데, 사망 이후의 시점을 선택해 사회 전체를 보다 객관적이고 다채롭게 그리고자 했습니다.”

 

흔히 죽음 이후에는 평등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데요. 《제7일》은 사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빈자와 부자, 그 불평등한 처지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죽은 후에 찾은 화장터에서 그 모습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고요.

 

   대기실 오른쪽에는 쇠틀에 고정된 플라스틱 의자가 줄줄이 놓여있고, 왼쪽에는 푹신한 소파가 둥글게 몇 겹의 원을 이루며 놓여 있었다. 소파 구역의 중앙 탁자에는 플라스틱 꽃까지 꽂혀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에는 화장을 기다리는 대기자가 무척 많았지만 소파 쪽에는 다섯 명뿐이었다. 그들은 전부 성공한 명사들처럼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고, 플라스틱 의자 쪽 사람들은 하나같이 옷깃을 여민 채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귀빈 구역의 화제는 수의와 유골함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은 모두 최고급 명주 수의로, 손으로 직접 수를 놓은 화려한 무늬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수의의 가격을 말했는데, 여섯 명 모두 2만 위안이 넘었다. (…) 이어서 그들은 자신의 유골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두 장미목 재질에 정교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면 6만 위안이 넘는다고 했다.
   우리 쪽에서도 수의와 유골함에 관해 이야기가 오갔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인조 견사에 천연 면사가 섞인 1천 위안 이하의 수의를 입고 있었다. 유골함은 측백나무나 잡목 재질에 조각은 없었고 가장 비싼 게 8백 위안, 가장 싼 게 2백 위안이었다. (17-20쪽)

 

“현재 중국에는 경제 발전의 폐해인 불평등 문제가 불거지고 있고, 그 점을 소설 속에서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제7일》에선 화장터에서 화장된 후 유골함에 안치되는 것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수의와 유골함, 묘지 등을 마련할 만한 경제적 여력이 있고, 죽은 이를 애도해줄 누군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요.

 

“죽고 나서 ‘안식의 땅’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서 잊힌 고독한 사람들입니다. 가족이 있다 해도 그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를 알지 못하니, 스스로가 직접 자신을 애도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고요.”

 

   걸음을 옮기려다가 뭔가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흩날리는 눈송이 속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장(喪章)이 떠올랐다. 나는 외톨이라서 애도해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애도하는 수밖에.
   다시 셋집으로 돌아가 옷장에서 검은 천을 찾았다. 한참을 뒤졌지만 검은 천은 보이지 않고, 대신 검은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탓에 검은색에 희끄무레한 색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소매 일부를 잘라 하얀 잠옷의 왼쪽 소매에 끼웠다. 스스로 애도하는 모양새라 부족한 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만족스러웠다. (16쪽)

 

 

소설 속 모든 이야기는 화자인 ‘양페이’를 통해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는 이승에서의 자신의 삶뿐 아니라 사후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을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제7일》의 서사가 그를 통해 진행되는 만큼, 이 인물의 성격이나 태도 등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양페이’가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배경이 사후세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 속 상황들을 더욱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장치이고요.”

 

   앞으로 걷고 또 걸어 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강제 폭력 철거에 항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현수막도 걸지 않고 구호도 외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불행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가면서 나는 그들이 서로 다른 강제 철거의 피해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나는 그 폐허를 바라보았다. 콘크리트 사이로 옷가지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옆으로 지게차 두 대와 트럭 두 대, 경찰차 한 대가 정차해 있고 따뜻한 차 안에 경찰 네 명이 앉아 있었다.

   빨간색 오리털 점퍼를 입은 여자아이가 부러진 철근이 양옆으로 구불구불 튀어나온 시멘트 판에 혼자 앉아 있었다. (…) 아침에 집을 나서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집이 사라진 것이다. 집도 부모도 보이지 않아, 폐허에 앉은 채 부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칼바람에 덜덜 떨면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첫째 날’, 30, 34쪽)

 

(…)
“저쪽에서 우리 딸을 보신 적이 있나요?”

 

(…)
“두 분 딸을 보았습니다. 정샤오민이죠.”

 

(…)
나는 그들이 말하는 딸이 누구인지 알았다. 빨간 오리털 점퍼 차림으로 콘크리트 폐허 위에 앉아, 그 차가운 바람 속에서 숙제를 하며 부모를 기다리던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 아이는 부모가 바로 밑 폐허 속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
“샤오민은 두 분 위에 앉아 있었어요.” (‘다섯째 날’, 204, 207, 209쪽)

 

그가 전해준 저마다의 사연에 화가 나고 눈물도 나고 미소가 번지기도 합니다.

 

“소설로 옮기면서 재구성된 면이 있지만, 실제로 모두 중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샤오민’의 부모는 야근 후 새벽에 돌아와 아이를 학교에 보낸 후 잠들어 있었습니다. 강제 철거가 이미 진행된 후에야 잠에서 깨어나고요. 그래서 그들이 무너지는 건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폐허 속에 묻히게 된 것이고요.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권력에 의해 “그들 부부가 업무 중에 함께 순직했다는 이야기로” 엄폐되었으니까요. 소설 안에는 이 같이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된 뉴스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작가로서 현실을 직시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세대 작가들이 다들 그런 것처럼 저 또한 제 작품을 통해 실제 현실을 일관되게 다루어왔는데요. 요즘은 이 일에 다소 어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실제 중국사회가 소설보다 더 황당한 경우가 많거든요. 말하자면, 지금 중국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이거 그냥 현실 이야기지.’ 정도로 받아들인다는 거죠. 하지만 이 소설을 미래의 독자들이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비로소 ‘우리가 정말 황당한 시대를 살았었구나’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이 중국 현실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설보다 황당한 중국사회, 이 현실을 제대로 알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요. 언론의 자유, 실제 중국 상황은 어떤가요?

 

“중국 정부는 매체와 문학에 대한 통제와 검열을 계속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방식이 조금 달라졌죠. 소설의 경우, 독자들이 직접 찾아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TV나 신문 등의 다른 매체에 비해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현재 문학은 출판사 사장이 그 소설을 출간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고요. 반면에 매체에 대한 통제는 여전히 강한 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놀고 싶어서 문학을 시작하게 됐다고 밝히셨습니다.

 

“일단 ‘논다’는 것은 자유와 관계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외의 일은 하지 않는 것이죠. 지금도 물론 그 생각은 유효하고요.”

 

놀려고 문학을 한다고는 하셨지만 창작의 고통이 있을 것 같은데요. 작품 쓰시다가 스트레스가 생길 때 어떻게 해소하시는지요.

 

“처음에 글쓰기를 시작했을 땐 굉장히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무엇을 쓴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기도 했고, 점점 더 글 쓰는 게 재미있어졌습니다. 가장 좋은 건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몰입해서 글을 쓰는 건데, 지금은 거의 내 존재를 잊을 만큼 몰두해서 쓰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한참 글을 쓸 때는 뇌가 각성 상태여서 잠을 잘 못 잡니다. 반면,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잠이 솔솔 쏟아지고요. 필요할 때 자고 필요 없을 때 안 자야 하는데 그게 바뀌어있어 고민입니다.(웃음)”

 

 

작가로서 앞으로의 목표가 있으실 텐데요.

 

“단순합니다. 내가 계속해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써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죠.”

 

 

위화(余華)

 

1960년 중국 저장성에서 태어났다. 1983년 단편소설 〈첫 번째 기숙사〉를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등 실험성 강한 중단편 소설을 잇달아 내놓으며 중국 제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첫 장편소설 《가랑비 속의 외침》으로 새로운 글쓰기를 선보인 위화는 두 번째 장편소설 《인생》을 통해 작가로서 확실한 기반을 다졌다. 《인생》은 장이머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으로 '위화 현상'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1996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로 세계 문단의 극찬을 받으며 명실상부한 중국 대표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1998년 이탈리아 그린차네 카보우르 문학상, 2002년 중국 작가 최초로 제임스 조이스 기금, 2004년 프랑스 문학예술 훈장 및 미국 반스 앤 노블의 신인작가상, 2005년 중화도서 공로상, 2008년 프랑스 꾸리에 엥테르나시오날 해외 도서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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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잃어버린 내 삶의 끝, 죽음을 찾아 -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저자 김형숙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죽음을 읽습니다. 스스로 죽거나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 관한 기사입니다. 양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끌끌 차며 원인과 결과 사이에 놓인 간략한 사실 관계를 확인합니다. 그러고는, 그만입니다. 사건?사고가 된 죽음이 잠시나마 내 삶을 스쳐가는 방식입니다. 사람도 삶도 이야기도 없는 타인의 죽음입니다. 죽음을 봅니다. 재빠르고 위생적으로 죽음이 처리되는 장례식장에서입니다. 정확히는 죽음 이후의 광경이고, 구체적으로는 낯설고 불편한 타인의 슬픔입니다. 이렇듯 죽음은, 아직 내 것이 아닌 채로 타인의 것으로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게 삶의 끝에 가서야 나는, 나와 무관해진 내 죽음을, 내가 잃어버린 내 죽음을, 비로소, 눈치채게 되겠지요.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이 찬찬히 말해주듯이 말이죠.

 

저녁

 

 

새의 그림자가 길게 끌고 가는 것은 누구일까

 

땅거미가 야금야금 갉아 먹는 것은 무엇일까

 

붉은 옷의 승려가 사는 서녘에서는

 

마지막 시체가 연기를 피워 올리고

 

떠난다거나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이미 먼 세상의 일이다

 

서른세 번, 망자를 거두는 종이 울리면

 

어렵사리 네가 붙잡은 나마저 사라진다

 

- 송기원, 《저녁》, 실천문학사, 2010

 

반디 |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먼저,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출간을 축하 드립니다. 이 책에는 오래도록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셨던 그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데요. 그런 만큼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어떠신가요?

 

김형숙 | 개인적으로는 책을 쓰는 과정이 간호사 생활 전반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간에 산발적으로 오고 가던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확인하고 통합할 수 있었고, 간호사로 일하는 동안 쌓인 상처를 스스로 치유 받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어린 아이를 오래 업어주는 꿈, 누군가(아마도 남매의 아버님이었을 듯)의 무덤 앞에 고개 숙이고 서있던 꿈을 꾸게 했던, 오랜 죄의식에서도 좀 자유로워진 것 같고요.

 

그러나 출판 사실은 여전히 부끄럽고 부담스럽습니다. 저 자신을 너무 적나라하게 내보인 것 같고, 또 짧은 소견으로 내가 이런 글을 써도 괜찮을까,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글은 아닐까 하는 염려를 떨쳐버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출판 후에도 사람들이 몰랐으면, 되도록 책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가까운 이들 몇 분 외에는 출판사실을 알리지도 못했죠.

 

다행히 책을 읽은 분들이 각자 가까운 이들을 보내면서 느낀 점을 말씀해주시며 필요한 책이었다고 격려해주셔서 조금씩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반디 | 책을 읽으며, 때마다 저자 님의 어린 시절과 그 기억을 마주하는 듯했습니다. ‘병원에서 맞이하는 현대의 죽음’과 대비되는 ‘자연스러웠던 죽음’의 추억에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을 이해하려는 저자 님의 마음 씀씀이에서 특히 그러했고요. “이제 삶의 내용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의 그것과 더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며 삶을 돌볼 작정”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요. 저자 님께 어린 시절은 어떤 의미로 남겨져 있나요?

 

김형숙 | 저는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읍내로 나가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린 시절 그 고향마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듯이 제겐 그 시절이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늘 현재와의 연장선 상에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그곳에 살고 계신 덕택인지, 친구나 선후배, 사제 관계 외에 도시에서 맺기 힘든 일상의 관계들은 여전히 그곳을 통해 보고 있었던 것 같고요. 그곳을 떠난 후 제 삶은 늘 도시와 그곳,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고 있었다는 기분이 듭니다. 일상에서 수시로, 걷거나 하늘을 볼 때, 현재의 삶이 무거워 도망가고 싶을 때, 현재의 문제를 확인하고 싶을 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거나 다음을 준비할 때 등 저는 습관처럼 그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때로 너무 과거에 고착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때도 있죠.^^

 

어쨌든 제게 그곳은 출발점이면서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어떤 기준선 같기도 합니다. 

반디 | 어린 시절 경험하신 ‘자연스러웠던 죽음’이 있었기에,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의 실상을 더욱 잘 보실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는 과거와 현재, 시골과 도시라는 시?공간의 차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죽음이 이전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과거 고향 마을의 어떤 점을 이어가야 할까요?

 

김형숙 | 굉장히 중요한 질문 같아서 분명히 답하기는 부담스럽습니다만, 저는 ‘죽음에 직면하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든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라는 것. 과거 고향 마을에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일상의 곳곳에서, 수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든 혹은 서서히 예고하고 다가오든 사람들은 피할 방도가 없었기에 늘 죽음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까지, 사람들은 수시로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할 기회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 의학의 발달로 사람들은 그 기회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우리는 죽음을 피하거나 유예할 가능성, 혹은 죽음이 병원으로 격리되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유로 자꾸 임박한 죽음조차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병원 안에서는 정확히 언제 사망할 지 모른다는 이유로 또 자명한 죽음을 입에 올리기를 꺼리고요. 고향에서 저절로 가능했던 ‘죽음에 직면하기’가 이제는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가능한 일이 되었고, 그래서 ‘죽음준비교육’, ‘웰 다잉 운동’ 같은 노력들이 생기지 않았을까 합니다.

 

최근 들어 나이 들고 약해지는 것을 반드시 질병이나 문제로 봐야 하나? ‘정상’적인 삶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팔순이신 저희 아버지께선 최근까지 과중한 농사를 감당하시느라 발목관절이 심하게 상하셨는데요. 통증도 심하고 잘 걷지도 못하셨죠.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할 때 저는 두 가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통증과 예전같이 농사일을 감당하실 정도로 잘 걸으시는 것. 통증은 해결해야 할 문제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일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은 정상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죽음에 있어서도, 피해갈 방법을 찾을 때와 불가피하게 받아들이고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죽음에 대한 제 주장은 모두 후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요.

 

반디 | 현대인에게 죽음은 기피와 터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죽음에 대한 경험은 병원, 장례식장 등, 특화된 공간에 한정되어 있고요. 말하자면 죽음이 일상적 공간으로부터 내쫓긴 것인데요. 병원에서 오래도록 근무하시면서 이에 대한 고민이 없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김형숙 | 저는 여전히 가능하다면 일상적인 삶의 공간 안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활하던 가정에서 죽음을 맞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 인적 지원방안이 마련되기를 희망하고 있고요. 호스피스 케어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시점에 이런 희망이 너무 꿈 같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생각으로 가정 호스피스 활성화에도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병원에서조차 죽음이 기피와 터부의 대상이 되어 서둘러 처리할 문제로 다루어지는 데 있다고 봅니다. 중환자실에서 환자가 사망하거나 임종이 예상되는 경우 간호사로서 가장 난감한 점은 바로 옆 병상 환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사망한 환자의 가족들이 소리 내어 울지 못하도록 제지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병동에서 다인실 환자 중 사망이 임박하여 ‘처치실’이라고 하는 곳으로 이동해 사망을 기다리는 경우를 보면 그야말로 죽음이 ‘은폐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병원에서 죽음이 기정사실이 된 환자조차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고, 환자의 죽음을 확인하는 절차로서 가족의 마지막 면회가 이루어지는 현실입니다. 중환자실이나 암병동뿐 아니라 일반병동에도 큰 비용 부담 없이 임종환자와 가족들이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격리방을 준비하는 등 병원 안에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반디 | ‘연명치료 중단’과 ‘존엄사’ 논쟁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혹 병원과 보호자 사이에 벌어지는 법정투쟁이 기사화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일반으로까지 확대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자 님께서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김형숙 | 잘 모르겠지만, 죽음에 대한 우리사회의 태도와 맥락을 같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좀 불순한 생각이지만)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시킬 만한 당사자들은 모두 사망했고, 살아있는 이들에게 죽음은 자신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각자 살아내기도 벅찬데 ‘먼 훗날에나 잠깐 거쳐갈 삶의 마지막’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또 우리사회가 워낙 급격히 변하는 중이라 몇몇 사건을 계기로 불거진 문제들이 학계에서 논쟁이 되는 것과 일반인들의 경험으로 체화되는 데 시간 차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연명치료중단과 존엄사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큼 첨단의학의 발달이 가져온 문제들이 우리사회에 불거지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체감하기로는 그래도 최근 들어 전문가집단을 중심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확산하기 위한 움직임이 꽤 활발해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반디 |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은 경험에서 비롯된 사례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가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진 알기 어려웠던 ‘중환자가 된다는 것’과 ‘중환자실에서 죽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실상을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었고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쓰시는 동안 어려운 점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책을 쓰면서 특히 염려되거나 마음이 쓰이셨던 부분이 있었나요?

 

김형숙 | 책을 쓰면서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마음 쓰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많이 일반화시켰다고는 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사용하고 있고, 대부분 가슴 아픈 경험을 사례를 쓰다 보니 (환자와 가족뿐 아니라 연관된 의료진들까지 포함하여) 당사자들이나 유사한 경험을 한 분들의 상처를 건드리면 어떡하나, 독자들에게 등장하는 상황이나 사람들에 대하여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면 어쩌나 하는 것. 또한 민감한 이슈들이 많은 의료현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제 주제와 능력을 벗어나는 것까지 논의가 확대되는 것은 아닌지…… 등등

 

다행히 출판 후 만난 분들이 구체적인 사례에 집중하기보다는 전반적인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이를 확산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주셔서 안심하고 있습니다.

 

반디 |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주변화되어 있는 현대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 문제의식과 고민을 이어가는 데 참고가 될만한 책이 있을까요?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처럼 일반인들도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으로요. 더불어 그 동안 읽으신 책 중, 책이 전하는 마음과 생각이 참 좋더라, 하는 책이 있다면 몇 권만 추천해주세요.

 

김형숙 | 먼저 제가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며, 일반인들에 비해 독서량이 많은 편도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참고로 이 주제와 관련하여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간호사로서 대학과정에서 ‘퀴블러로스의 죽음의 5단계’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었고, 《인간의 죽음》(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분도출판사, 2000)을 읽은 것이 ‘죽음을 앞둔 이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을 알지 못하고 사망하였기에 책의 내용이 우리 현실의 구체적인 환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내 삶의 마지막이 어떠했으면 좋겠다, 혹은 나는 어떤 자세로 죽음을 맞고 싶다는 생각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던 책으로는 너무나 유명해서 모두들 한번쯤 읽어보셨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미치 앨봄 ·모리 슈워츠, 살림, 2010),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헬렌 니어링, 보리, 1997)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죽음을 터부시하나, 다른 사회에도 마찬가지였나 하는 의문으로 재미있게 읽은 책들은 《죽음 앞에 선 인간》(필립 아리에스, 동문선, 2006), 《춤추는 죽음》(진중권, 세종서적, 2005)이 있는데 사진과 그림이 많아 모두 두 권짜리인데도 쉽게 읽혔습니다.

 

 

고전 작품에선 죽음이 어떻게 그려졌나 했을 때 《이반일리치의 죽음》(톨스토이)을 다시 읽었고, 한 여성 철학자인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쓴 《편안한 죽음》(함유선 역, 아침나라, 2001)*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현대적 의료환경에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죽음과 함께 춤을》(베르트 케이제르, 마고북스, 2006)을 인상에 남습니다. 저자는 안락사가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한 요양원에서 일하는 의사랍니다. 의학, 죽음, 인간에 대해 그렇게 건조한 시선으로, 유머러스하게 관조할 수 있는 눈이 부러웠습니다.

 

* 편집자 주 :《편안한 죽음》는 현재 《죽음의 춤》(성유보 역, 2010)으로도 번역되어 한빛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반디 | 최근 서점에선 셸리 케이컨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이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죽음의 존재론’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이 사전의료지시서나 호스피스 등,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연결고리가 필요할까요?

 

김형숙 | 의료인, 일반인들, 학생들을 위한 죽음준비교육이 필요하다는 등의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조금 막연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는 죽음에 관한 관심이 일반적인 죽음,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나 ‘막연히 언젠가 닥칠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실제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내가 가족들과 더불어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분명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사회적, 제도적인 준비에 대한 논의와 준비가 함께 이루어져야만 사전의료지시서나 호스피스 케어와 같은 개인적 선택이 왜곡되지 않고 인간다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는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전의료지시서가 병상이 부족한 급성기병원과 의료비를 부담하는 가족의 이해관계에 맞물려 대책 없는 치료중단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 내가 살던 곳에서 마지막까지, 최대한 (도움을 받아가며) 독립적으로 일상을 유지하다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소망에 비추어 보자, 의료인으로 20년 가까이 살면서도 막연하던 의료시스템의 문제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말기상태에서 집에서 의료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상(정상)의 범위를 확장시켜 주고, 마지막까지 나를 일상의 공간에서 돌봐주는 의료나 제도는 없는가? ‘나의 죽음’, ’나의 죽음준비’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회적 준비, 사전의료지시서나 호스피스 등 실질적인 문제가 논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디 | 어린 시절 ‘할머니 같은 이야기꾼’,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꿈을 키우셨다고 했는데요. 그래서인지 이 책은 독자가 친근한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문장을 따라 유연하게 흐르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자꾸만 듣고 싶어지고요. 혹시 아직 풀어내지 않은 이야기를 또 다른 책에서 들려주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김형숙 | 지금까지는 특별히 생각해둔 다른 출판 계획이 없습니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도 계획하여 쓴 글이라기보다는 좀 급작스런 결정이었습니다. 제가 뒤늦은 공부를 시작한 학생인 만큼 우선은 공부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혹시 마음 속에 차오르는 말들이 있으면 글을 쓰는 건 그때 생각해 보겠습니다.

 

반디 | 마지막으로 반디앤루니스 독자 여러분께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김형숙 | 책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진한 부분은 논의를 통하여 함께 채워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인간다운 마지막, 준비된 죽음을 맞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고, 특히 병원에서의 죽음에는 의료기관, 혹은 의료인들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보니 그들의 전문적인 의견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경험상 ‘나의 죽음’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말할 수 있는 부분도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의학적 판단이나 전문가의 의견 이전에 내가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지, 그를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할 수 있는지 활발하게 의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형숙

 

1966년 경남 거창의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나 소를 몰고 산을 누비며 자랐다. 1986년 학비가 낮고 취업이 잘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떨결에 서울대 간호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 취직하여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면서 의외로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연명치료나 장기이식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했고, 답을 찾아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에 진학했다. 거기에서 생명윤리학을 공부하고 「의료상황에서 가족중심 의사결정의 문제점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다 보면 의식이 저하된 뇌·척추질환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들의 팔다리에 통증을 가하는 일을 종종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환자에게 통증을 주는 일이 너무 괴로워 간호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이직을 결심하고 19년 만에 병원을 떠났다.

 

지금은 간호사로 일하면서 겪은 일들을 돌아보고 정리할 겸 지방 도시로 이주해 간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이제 삶의 내용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의 그것과 더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며 삶을 돌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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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 죽음으로부터 삶

 

 

정용준 | <가나> | 문학과지성사 | 2011

 

 

“시간은 죽고 싶다는 생각의 끝없는 회귀이고, 삶은 그것을 버텨내는 불안함이자 미쳐가는 정신의 바다를 항해하는 돛 없는 배였다.” (‘가나’ 중에서, 52쪽)

 

이미 죽은 자의 목소리다. 하지만 이는 산 자의 그것과도 다르지 않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이들이 책 속에 가득하다. 그러니까 정용준의 소설집, <가나>는 죽음으로 이끌리는 생(生)들의 노래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전면에서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는 죽음에의 충동이 보인다. 그 밑바닥에서 삶의 끝으로 그들을 충동질하고 있는 폭력이 선명하다. 폭력이 일어나는 과정, 그 결과가 여실히 드러난다.    

 

“손톱이 붙어 있는 손가락을, 아직 죽지 않아 꿈틀거리며 피를 토하고 있는 목줄이 걸려 있는 개를, 상체가 콘크리트에 깔린 소녀의 하체를, 껍질이 으깨진 곤충의 다리처럼 규칙적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바람 빠진 공진처럼 찌그러져 있는 머리를, 상의가 벗겨진 채 죽은 남자의 오돌토돌한 척추뼈를,” (‘여기 아닌 어딘가로’ 중에서, 206쪽)

 

그는, 죽음이 생을 휩쓸고 간 참혹한 광경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러 바라본다. 그저, 바라본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냉정하게 그리고 고요하게. 그 냉정의 시선 안으로 독자들이 초대된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의 근원, 그 인물들이 느끼는 고통이 보이기 시작하고, 죽음으로 이끌리는 그들의 삶 앞에 우리가 당도해 있다. 폭력에 의해 망가지고, 그 폭력으로 다시 스스로를 다독이려는 이들의 처절함이 선연하다.  

 

“다시 열한 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책상 위에 책을 내려놓고 오른손에 연필을 움켜쥐겠어. 공들여 깎은 연필의 뾰족한 검은 끝을 선생의 왼쪽 목덜미에 정확하게 겨낭할 거야. (…) 그리고 아무 망설임 없이 선생의 목에 연필을 찔러 넣을 거야. (…) 선생의 목에서 흐른 피가 녹아내린 딸기 맛 아이스크림처럼 흰 블라우스를 적시고 교탁 위에 동그랗게 고이면 선생의 눈앞에 교과서를 쫙 펼치며 이렇게 말할 거야.

 

천천히 읽어봐. 한 문장씩. 또박. 또박. 또박.” (‘떠떠떠, 떠’ 중에서, 12-13쪽)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상황에 그들이 놓여 있고, 실제로도 몇몇은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여기’는 말하는 자들의 세상, 말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저 듣고 있어야 할 뿐이다. 그들의 말을, 그 말이 강요하는 그들의 법과 규율을. 항변은 통하지 않는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그들의 언어를 말하는 자들은 알아듣지도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철저히 억압받고 소외당한 언어들이 안으로만 자꾸 쌓이고 또 쌓인다.

 

“떠, 떠떠, 떠떠, 떠떠떠, 떠, 떠, 아아, 아아아하아아, 아아아, 아, 사, 사, 사아, 아, 아아, 아아아, 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 아, 아아아, 해.” (‘떠떠떠, 더’ 중에서 38-39쪽)

 

하지만 이들에게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이 존재한다. 간질로 인해 괴기스럽게 뒤틀리는 몸 안에서 누구도 상상 못할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는 여자와 누군가는 분명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사. 랑. 해. 라는 말을 어렵사리 쏟아내는 남자의 '사랑'이 그렇듯, 차마 말해지지 않은 것들의 이면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읽어내는 이들이 서로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죽음에의 충동으로 일렁이는 삶 속에서 생(生)에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작가 정용준의 시선이다. 죽음으로부터 삶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집 <가나>의 방식인 거다.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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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 죽음과 아주 가까운 이야기

 

커트 보네거트 | <제5도살장> | 아이필드 | 2005 

 


인간의 생(生)은 죽음을 향해 전진한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 법. 시간의 축이 무한으로 이어지고 있다면, 그 축에 하나의 점을 찍는 게 결국 유한한 인간의 삶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삶의 의미 또한 생겨나는 것일 테고. 뒤꽁무니에 죽음을 달고 달려가는 것, 그게 우리의 하루이고 또 인생일 것이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사건이며, 더 정확하게는 자연 자체의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가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삶이 죽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죽기 위해 산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삶은 삶을 위해 존재할 뿐, 우리는 그야말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생의 한가운데에 틈입하는 죽음이라는 사건은 자연을 거스르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특히, 그러한 죽음의 순간이 전쟁과 대량학살, 살인 등과 같이 맹목적으로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인간의 행동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설명으로도 그것을 이해할 방도가 없다.

여기, 그 이해할 수 없는 죽음들에 직면한,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가 ‘커트 보네거트’가 있다. 그는 1944년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에게 생포된 후, 드레스덴의 ‘제5도살장’에서 연합군의 폭격 와중에 살아남았다. 13만의 드레스덴 사람들이 죽어간 연합군의 소이탄 폭격에서 말이다.

“드레스덴이 파괴되던 날 밤에 그는 지하 고기 저장고에 있었다. 위에서는 거인이 걸어 다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고성능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거인들은 걷고 또 걸었다. 고기 저장고는 아주 안전한 대피소였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라야 이따금 천장에서 떨어지는 칼시민 도료로 샤워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미군들과 경비병 넷과 손질이 끝난 동물 시체 몇 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머지 경비병들은 공습이 시작되기 전에 드레스덴의 안락한 자기네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모두 가족과 함께 살해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는 거지.” (207쪽)

“그렇게 가는 거지.” 초연한 듯, 방관하는 듯 죽음에 덧붙이는 커트 보네거트의 한 마디. 13만의 무고한 생이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을 목격한 자로서, 그것을 말하기 위해 오랜 세월 고민해온 작가로서, “클라이맥스와 스릴과 성격 묘사와 멋진 대사와 서스펜스와 갈등을 다루는 전문가”로서 그에게 남겨진 단 한 마디.

이는 <제5도살장>이라는 소설을 있게 한, ‘이해할 수 없는 죽음들’에 대해 말하는 작가의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쟁의 중심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웠던 순간을 경험한 그가 그것을 말하기 위해 선택한 게 바로, '그때 그 장소로부터 멀어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대리인이기도 한 소설의 주인공 ‘빌리’가 트라팔마도어라는 행성에 납치되고,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 과거, 현재, 미래를 오고가는 것은, 무한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축에서 한 점으로서의 인간과 그 죽음들을 바라보겠다는 작가의 태도를 드러낸다.

그렇게 모든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트라팔마도어 인들의 가상적 시점을 차용해, 그때 그 장소의 죽음들을 초연한 태도로 인정하는 듯 가장하고, 이를 통해 한 점로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그 죽음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 그 죽음을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한 작가 커트 보네거트는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다 "그렇게 가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가"서는 안 된다고.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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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딱지> - 언젠가 새살은 꼭 돋는다

 

샤를로트 문드리크, 올리비에 탈레크, <무릎딱지>, 한울림어린이, 2010

 


아이는 말합니다.

“엄마가 오늘 아침에 죽었다. 사실은 어젯밤이다.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난 밤새 자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달라진 건 없다. 나한테 엄마는 오늘 아침에 죽은 거다”

팔과 다리를 쭉 뻗고 힘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퍼뜩 ‘망연자실 茫然自失’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왠지 이 말이 아이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갑작스럽게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의 마음을 어른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서 오는 어색함이랄까요? 제 눈엔 분명 아이가 ‘자기를 잃은 듯 아득하고 멍한’ 그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해도 말이죠.

그러나 더 이상 어른인 제가 어떤 말을 떠올리며 아이를 설명하려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있으며, 저는 그저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아이의 언어를 배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러니 그 아이의 언어로 채워진 <무릎딱지>를 읽은 것은 상실과 상처로부터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가는 우리 삶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아이로 돌아가, ‘엄마의 죽음’이라는 크나큰 상처에 새살이 돋고 한 폄 쯤 더 성장해 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래서 애잔함과 동시에 따뜻한 마음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하루아침에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는 화가 납니다. “이렇게 빨리 가 버릴 거면 나를 낳지 말지, 뭐 하러 낳았”는지. 아침마다 빵에 지그재그로 꿀을 발라서 반으로 잘라먹는 걸 아빠한테 가르쳐 주지 않은 일에도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이 아이, “엄마가 어디로 떠난 게 아니라 죽었다는 것”을, “살아 있지 않는 게 죽음이라는 걸” 다 알고 있네요. 엄마의 죽음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까지도요. 오히려 아이는 “젖은 수건 짜듯이 꼭 짜면 온몸에서 눈물이 뚝뚝 쏟아질 것” 같은 가엾은 아빠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그렇지만 엄마가 죽은 지 몇 밤이 지나고 나자, 아이는 아빠를 돌볼 정신이 없어집니다. 자꾸 사라지는 엄마 냄새와 목소리를 잊지 않으려 애를 써야 하니까요. 우선 엄마 냄새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집 안의 창문을 꼭꼭 닫아야 합니다. 아무리 날씨가 더운 여름이라고 해도 말이죠. 잘못하면 엄마 목소리가 지워질지도 모르니까 어떻게든 다른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엄마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귀를 막고 입을 다무는 일도 잊지 않습니다. 그래도 숨은 쉬어야 하니까 코는 그냥 놔두고요.

그러다 아이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엄마의 목소리가 바로 들여온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침 마당을 뛰다가 넘어져 무릎에 상처도 났습니다. 아이는 계속 엄마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고, 그래서 무릎에 앉은 딱지는 계속 뜯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상처에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아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상처가 난 자리에 다시금 상처를 내며 아픔을 반복하긴 보단, 그 상처를 덮고 있던 딱지가 떨어지고 매끈매끈한 새살이 돋아나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낫겠죠. 곧 사라지고 말 엄마의 냄새와 목소리는 가슴으로 기억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저절로 떨어진 딱지를 보며 “울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울지 않았던 아이처럼 말입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성숙해진다는 말은 아이의 몸에서 어른의 몸으로 자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종종 우리에게서, 가장 원하고 사랑하는 무언가를 빼앗아 가며, 죽음과 이별 그 또한 삶의 일부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절망과 상실감으로 상처 입은 우리는 그만큼의 ‘삶에 대한 이해’와 함께 정서적으로도 성장해나가니까요.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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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 죽음은 어스름한 저녁 빛을 닮았다

송기원, <저녁>, 실천문학사, 2010 


생(生)과 사(死)를 구분해, 생을 얻은 순간에 ‘시작’을, 잃은 순간에 ‘끝’이라는 말을 덧댄 의식에 ‘내’가 있다. 나 이전에 시작은 없었고, 나 이후에는 끝도 없을 텐데,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나는, 내가 없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에서조차 나를 잃을 줄 모른다. 내가 있고 난 후에 줄곧 나와 함께 했던 생이고, 내 몸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생이다. 애초에 나와 무관하게 주어진 생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잊고 싶은 건 많지만 어느 것도 잃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이, 그 생에 매달려 있는 끈질긴 집착을 낳는다. 그 집착이, '끝'이 지닐 수 있는 가뿐함을 지우고, 그 자리에 아쉬움을 가득 채워 죽음의 무게를 더한다. 그러니 생의 무게 또한 덩달아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몸」

참 오래 몸에 머물렀다.

주인인 듯 내가 머무는 동안에, 몸은
벼라별 모욕을 다 겪고, 몇 군데는
부러지고 꺾이고 곪아서, 끝내
만신창이가 되었을 거다.

귓구멍에 감창이 들어차고
뱃구레 가득히 욕지기가 출렁거려
똥구멍이 미어지는 수모를 견대고야, 비로소
몸이 나를 버렸을 거다.

이제 나는 몸이 없는 곳을 떠난다.

그렇게 몸이 없이 사방을 돌아보면, 아아,
몸 이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몸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없구나.

-66쪽, 「몸」전문

 

“몸이 없이 사방을 돌아보면”이라는 가정으로 죽음을 상상해본다. 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나를 생각하니, 처음에는 이 몸의 허망함이 먼저 찾아오더니, 그 다음에는 무중력의 가뿐함이 서서히 다가오는 듯하다. 잊고 싶었지만 잊히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그 몸에 새겨져 무게를 더했던 모양이다. 더욱이 “몸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니, 생을 잃을 아쉬움뿐 아니라, 나를 고집하는 의식 따위가 머무를 데 없다. “태어나 첫 숨을 들이마실 때에도 첫 숨만큼 나는 죽었”고 “날아라 새들아 푸른…… 일곱 살 푸르른 때도 십 분의 얼마만큼 나는 이미 죽었”으니, 서른 해 가까이 살아온 나는 “참으로 열심히” 죽어, 그 몸의 무게를 덜어온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죽음의 상상력으로 숨 쉬는 生”이 이리도 가벼울 수 있음을 짐작해, 낮 동안 뜨겁게 생을 달구던 빛을 지나 어스름한 저녁 빛처럼 다가오는 죽음 또한 기꺼이 생각해 볼 일이다.

 

「저녁」

새의 그림자가 길게 끌고 가는 것은 누구일까

땅거미가 야금야금 갉아 먹는 것은 무엇일까

붉은 옷의 승려가 사는 서녘에서는

마지막 시체가 연기를 피워 올리고

떠난다거나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이미 먼 세상의 일이다

서른세 번, 망자를 거두는 종이 울리면

어렵사리 네가 붙잡은 나마저 사라진다

-43쪽, 「저녁」전문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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