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설'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10.29 《인간실격》 - 요조에게는 호리키가 있었다
  2. 2014.10.10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 밤의 숲으로 달려라
  3. 2009.07.02 당신이 없었다 당신: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탈주
  4. 2009.06.09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 시간의 강을 건너 그대를 만나다 (2)

《인간실격》 - 요조에게는 호리키가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 | 《인간 실격》 | 민음사 | 2004

 

외투가 필요한 계절이다. 밤바람이 제법 차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가을은 벌써 갈 준비를 하고, 몸이 으슬으슬 한기를 느끼는 걸 보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나의 20대 후반도 어느새 떠나갈 준비를 하는 듯하다.


여기 《인간 실격》에 서른을 앞둔 '요조'라는 사내가 있다. 정확히는 스물일곱. 나와 동갑인 이 남자는 자신이 실격이라 말한다. 그것도 인간 실격. 정말이지 딱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위축되고, 보모들에게 몹쓸 짓을 당해 한평생 트라우마를 간직한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잘생긴 얼굴, 그리고 전신에서 뿜어내는 어두운 분위기 덕에 끊이지 않는 여자관계뿐이다. 그에게는 진정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고 할 만한 사이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호리키'만이 그 조건에 제일 근접했을 뿐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 역시 요조의 이야기만 저릿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짧은 분량의 일대기를 읽고, 다시 펼칠 때마다 더욱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 건달 호리키였다. 물론 요조의 익살을 한눈에 꿰뚫어 봤던 '다케이치'도 있었지만 그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인간 실격》을 통틀어 요조와 직접적인 끈이 있었던 것은 역시 호리키라 답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호리키만이 유일한 요조의 친구였다.


호리키와 나. 서로 경멸하면서 교제하고 서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것이 이 세상의 소위 '교우'라는 것이라면, 저와 호리키의 관계도 교우였음은 틀림없습니다. (106쪽)


대부분 그렇지만 요조와 호리키 그들이 ‘친구’라는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같은 느낌을 뿜어내면서도 그것이 서로에게 '그래도 저놈보다는 내가….'하는 안도감을 주었기 때문 아닐까. 어린 시절 유치하지만 진정성이 필요한 시간을 거치며 그들은 상대를 통해 세상을 정의하고, 무수히 많은 생각을 털어내기도 한다. 한 마디로 호리키와 요조는 서로 배출구 같은 존재라 할 수도 있다.

 

《인간 실격》을 읽은 많은 사람은 말한다. 친구랍시고 요조의 불행을 지켜보며 오히려 흐뭇해 하고, 삶을 흔들기나 하는 저 호리키라는 존재야말로 요조가 보았던 인간계의 추악함 중 하나라고. 하지만 나는 되려 묻고 싶다. 요조가 자살을 시도했을 당시에도 아내의 강간 장면을 직접 목격했을 때에도, 또 다른 자살 시도 후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의 곁에서 한결같은 태도를 보였던 사람이 누구인지 말이다.


쓰러진 사람은 그 자체로 고통을 받고 끝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쓰러짐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심정은 더욱 착잡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망가져 가는 친구 곁을 지키기보다 모른척하고 떠나간다. 나는 호리키가 요조라는 친구를 대하는 방식에서 쇠붙이의 담금질 같은 것을 보았다. 호리키는 요조가 무너질 때마다 도망가지도, 측은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요조를 자극하고, 두들기면서 삶에 대한 반작용을 이끌어 내려 했다.


너 각혈했다면서? 호리키는 내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마자 그렇게 말하더니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다정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다정한 미소가 고맙고 기뻐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 다정한 미소 하나에 저는 완전한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매장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29쪽)


물론 그 모든 것들로도 요조의 실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어쩌면 담금질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의 중대한 원인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친구 호리키의 역할이었다. 결국 요조의 삶은 그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 최후의 장면이 부러웠다. 그들의 삶이 제아무리 '인간 실격'이었어도 그 우정만큼은 내게 있어 합격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끔 미안해진다. 내가 끝내 외면해버린 친구들에게 나는 한 명의 호리키가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녹색양말'님은?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저도 그런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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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 밤의 숲으로 달려라

 

 

 

오에 겐자부로 |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 문학과지성사 | 2014

 

한밤중에 동료들 가운데 소년 두 명이 탈주했기 때문에, 새벽녘이 되어서도 우리는 출발하지 않았다. (7쪽)

 

태평양 전쟁 말기, 감화원에 수용된 소년 15명은 깊고 외진 산촌에 갇혀 버렸다. 그들을 애초에 버렸던 가족마저 전쟁 통에 뿔뿔이 흩어지고, 소년들은 이제 오갈 데도 없다. 도주하여 날뛰어도 그들은 폭력을 쥔 자의 손에 이끌려 다녀야 한다. 동료 중 누군가 탈주하면 다 같이 출발하지 않듯, 감화원 소년 모두는 그들이 뭉쳐야 그나마 살고, 흩어지면 인간 사냥에 의해 개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년들은 몸과 마음에 새롭게 새겨지는 상처와 침묵에 익숙했다. 불안은 당연한 일상이었다.

 

집단적인 광기와 분노가 복잡하게 뒤엉키는 시대에 마을에는 기어코 전염병이 감돌았다. 낌새가 누그러지지 않자 마을 사람들은 점점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들을 멸시하거나 철저히 이방인으로 취급했기에 피난 중에 그들이 안중에 들 리 없었다. 소년들을 무참히 짓밟던 촌장도 마을을 떠났다. 미처 떠나지 못한 어른의 시체는 파묻히기도 전에 살아남은 아이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을은 오염된 들개, 쥐, 고양이, 그리고 식별조차 불가능한 시체 따위로 어수선했다. 소년들에게 출구는 없었다. 폐쇄된 그곳에서 소년들은 자유로워졌다.

 

감자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마침내 우리의 위장은 초라한 음식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고, 졸음과 포만감에서 오는 애매한 슬픔이 우리의 부드러운 머리를 물처럼 흠뻑 적셨다. (41쪽)

 

감화원 소년들, 조선인 부락의 소년, 마을에 남겨진 여자아이, 탈영한 군인, 이들 사이에 이방인은 없었다. 모두 버려졌기에 그들끼리 살아남아 마을을 지킬 작정이었다. 자유의 몸이 되기 전까지 소년들에게는 슬픔도 여유가 되지 못했다. 버려짐과 동시에 소년들은 서서히 기쁨이라는 감정을 알았고, 용케도 서로를 위할 줄 알게 되었다. 사랑도 했다. 모두 떠나고 죽음만이 남아있는 마을에서 소년 각자는 차츰 그곳의 주인이 되어 갔다.

 

“나, 눈으로 세수할래.” 동생은 고개를 숙이고 바지 끈을 고쳐 묶으며 말했다.
“나중에 해.”
동생은 자신의 자루에서 밥그릇을 꺼내며 낮게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앞으로 쭉 여기 있자. 오래오래, 지금처럼.”
“나도 너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어른이 되고 말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나 자신도 이제는 동생과 마찬가지로 이 눈에 둘러싸인 토방에서 오래도록 삶을 보내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모든 출구가 닫혀 있었다. (148쪽)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의 전개 과정 중 처음 내리는 흰 눈은 소년들의 미약한 기쁨이 되어 준다. 흰 눈이 쌓이며, 소설의 전반부를 감싸던 어두운 풀빛도 잠시 자취를 감춘다. 그들이 사냥에서 잡은 꿩과 동박새, 각종 죽은 새의 무리가 흰 눈을 배경으로 “회청색, 노랑, 검정, 초록” 오색찬란한 물결을 이룬다. 기쁨이 도래한 마을에는 침묵도 소리와 노래로 바뀐다.

 

행복도 잠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마을로 복귀한 촌장은 소년들의 마음에 간신히 피어나던 기쁨의 새싹을 뽑고, 평화를 헤치며 어린 소년들을 쏘기 시작한다. 소년들은 다시 짐승으로 복귀하고야 만다. 어린 짐승이 하는 빈약한 말이라곤 “용서해주세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109쪽) 뿐이다.

 

그리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소년 ‘나’는 끝내 자신이 배회하던 숲 속으로 달린다. 그 순간 소년은 죽지 못해 살아야 한다는 감정을 느꼈을까? 그는 오열하는 감정을 억누르고 처음으로 의지를 갖고 밤의 숲을 관통했다. 소년은 죽을힘을 다해 극한으로 치닫는다. 소설의 대미에서 인간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약한 슬픔은 애매하게 남겨두라고 있는 게 아닐 것이다.

 

| Editor_ 정혜원

hyewonjung@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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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없었다 당신: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탈주

 

 

히라노 게이치로, <당신이 없었다 당신>, 문학동네, 2008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행위다. 그것이 작가가 되었든, 작품 속 인물들이 되었든, 아니면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든. 그래서 책을 손에 쥐기까지의 과정은 늘 설렌다. 오늘은 또 누구를 만날까. 얼마 전 기억 속에 뚜렷하게 각인된 작가가 한 명 있었다.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다. 해금연주자 꽃별을 만났을 때 그녀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문장에 감탄했으며, 블로그 이웃 태극취호님도 좋아하는 작가로 그를 꼽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그를 만나라는 일종의 신호일까. 그렇게 히라노 게이치로의 <당신이, 없었다, 당신>을 만났다.

<당신이, 없었다, 당신>은 작가가 2007년 발표한 단편 소설집이다. 소재, 형식 모두 다른 열한 편의 소설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 온 건 두 번째 단편 ‘페캉에서’를 통해 느낀 주체의 사라짐이다. 이 작품은 오노라는 작가가 프랑스에서 잠시 떠난 여행에서 느낀 감정을 그린 이야기다. 문화교류사업의 일환으로 낯선 땅에 체류하고 있는 소설가 오노는 뜻밖의 휴가를 얻어 세 번째 장편소설 <장의>를 쓰기 위해 5년 전 찾았던 곳 페캉으로 향한다. 당시 그는 그곳에서 문득 다른 소설의 착상을 얻는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등장인물 모두 동일자(同一者)라는 것이다. 메인 플롯은 주인공 오노의 여정이지만, 그가 만나는 이는 타자가 아닌 그가 만들어냈던 소설의 주인공 KH이다. 작가와 작가가 만든 인물(오노), 그 작가가 만든 인물(KH)의 만남, 이 끝없이 미끌어지는 과정에서 오노와 KH, 그리고 히라노 게이치로 자신의 정서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작가는 때로는 오노가 되고, 때로는 KH가 되어 20대 청춘이 겪은 다양한 감정들을 녹아낸다. 주어(주체)는 명시돼 있지만 그것이 누구의 감정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노가 만든, KH가 등장하는 소설의 제목이 ‘페캉에서’인 건 단순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오노는 ‘페캉에서’의 KH가 결국 자살을 선택할 것을 명시하고 있는데, 오노는 KH가 죽음을 맞이한 곳으로 향한다. 과연 오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초반 느리게 전개되던 소설은 또 다른 ‘나’가 등장하면서 가속도가 붙는다. 여기서 작품에서 등장하는 정서가 구체적으로 누구의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가, 오노, KH와의 정서적 교감만이 남을 뿐이다. ‘모두가 주체가 될 수 있음’은 곧 ‘누구도 주체일 수 없음’의 다른 말이다. 주체는 해체되고 정서만 남는 일련의 과정, 그렇게 ‘당신’은 없어진다.

없어진 ‘당신’의 돌아옴

‘페캉에서’처럼 주체가 사라진 작품이 있는 반면, 형식의 파괴를 통해 정반대에 위치하는 작품들도 있다. ‘여자의 방’과 ‘어머니와 아들’이 그 예다. ‘어머니와 아들’을 처음 보면 이게 뭔가 싶다. 「어머니와 아들 1-1」 「어머니와 아들 2-1」 「어머니와 아들 3-1」로 이어지는 페이지 전개는 우리가 익숙한 소설의 전개방식과는 다르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 작품의 룰을 발견할 수 있다. 「어머니와 아들 1-1」은 다음 페이지의 「어머니와 아들 1-2」로 이어지고,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와 아들’은 줄과 줄이 아닌 페이지와 페이지로 이어지는 소설이다.

내용을 보면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형식상 챕터는 다르게 분류돼 있으나 이야기 전개 양상은 거의 유사하다. 어머니와 아들의 이별, 먼 곳으로의 여행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다. 다른 점은 인물들이 처해있는 배경과 설정 정도이다. 하지만 각 챕터의 결말이 비슷한 듯 조금씩 달라지면서 페이지를 앞뒤로 넘기면서 호기심은 증폭된다.

‘여자의 방’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로만 따지자면 아 작품은 2페이지짜리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도 다양한 위치의 텍스트를 제거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느낌(혹은 이해 불가한 상황)을 연출한다. 이런 형식적 실험은,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의 존재를 명확하게 한다.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는 가운데 작가가 사라지는 것과 반대로 작가는 이야기 전개를 일부러 방해하면서 ‘나 여기 있소’라고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이쯤 되면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가 왜 이런 ‘실험’ 혹은 ‘장난’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옮긴이 신은주가 작가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다음 문장이 그 힌트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시도에 어떤 새로운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세계와 현대의 인간이 직접 요구하는 새로움이다. 누구나 변화를 실감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소설만이 언제까지나 2세기 이전의 스타일로 그것을 좇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한 창작상의 변화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보수적인 독자와는 아예 깨끗이 ‘작별할’ 생각이다. (p. 324, 『파도』, 2007년 2월호 재인용)

이처럼 작가는 ‘당신’이라고 명명백백하게 일컬을 수 있는 것들(주체, 형식)에 변화를 가하면서 새로운 소설 공간을 꿈꾼다. 물론 작가의 이런 시도가 얼마만큼 공감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작가가 밝혔듯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사람과 애정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크로니클’이나,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현실에서 환상으로 점프하는 ‘이방인#7-9’, 사회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돋보이는 ‘자선’ 등이 기억에 먼저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없었다 당신>은 히라노 게이치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재미와 감동은 낯익은 것이 낯설게 비춰지는 순간에 출현하는 것을 작가와 독자 모두 알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은 작가가 ‘낯설게 하기’ 방법을 이미 알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교외로 나오자 눈앞의 경치는 푸른 수목들로 뒤덮였고, 창에 비치는 그의 모습도 짙어졌다. 그는 우연히 자신의 눈과 마주쳤다. 그것은 마치, 그가 알아차리기 오래 전부터 그렇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던 듯했다.” (p. 60)

우연과 낯설음. 우리에게는 불현 듯 찾아오겠지만, 작가는 오래 전부터 그렇게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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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 시간의 강을 건너 그대를 만나다

  

아사다 지로,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북하우스, 2008


칠흑같은 어둠. 시리도록 푸른 연기. 담배연기라 생각했다. 어떤 사연이 있어 연기를 내뿜지 못하고 저리도 곱게 피워 올릴까. 가슴을 누른 무게를 겨우 뚫고 낸 숨통인가. 책을 읽고 다시 보니 그것은 향이다. 죽은 이를 호출하는 가녀린 외침.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은 산자와 죽은자 간의 사랑, 아픔, 그리움을 그린 아사다 지로의 단편 소설집이다. 여기엔 7편의 이야기가 있다.

고백컨대 책을 덮고 글을 쓰기가 무척이나 망설여졌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비밀이 있어 그 비밀을 어느 정도 노출해야 하는지 판단이 쉬이 서지 않았고, 어떻게 건드려도 깨지고야 말 것 같은 유려한 문장의 흐름이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한 페이지 전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하던 격한 감정의 출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모한 도전을 하는 이유는 많은 이들과 함께하기 위함이요, 글쓰기를 통해 나의 바닥을 체험키 위함이다. 한 가지 믿음과 한 가지 기대는 있다. 작품이 좋으면 그에 대한 글도 좋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과 어쩌면 영적인 존재가 나의 손을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다. 행여나 여기서 글 읽기를 중단하는 분들을 위해 한 마디 한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은 정말 슬프고 무섭고 아련하다.

슬프고

“그 남녀 손님은 달도 없는 한겨울 산속 길을 서로 부둥켜안고 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왔었다고 이모님은 말했다.” (p 9, ‘인연의 붉은 끈’)

그 남녀는 누굴까. 누구의 눈을 피해 달도 없는 밤 산꼭대기 신사를 찾았을까. 남자는 명문가문의 대학생이고, 여자는 유곽에서 만나 한 눈에 사랑에 빠진 이다. 청춘을 빼놓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이들의 사랑을 남자의 가족은 축복할 리 없다. 둘은 결심한다. 수중의 돈이 허락하는 곳까지 가서 함께 죽음을 택하자고. 하지만 죽음이 온전히 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탓인지, 아니면 그들이 겪은 고통이 모자란 탓인지, 최후의 자유의지도 예상을 빗나간다. 이렇듯 사랑을 모티브로 한 ‘인연의 붉은 꽃’, ‘뼈의 내력’, ‘손님’은 극복할 수 없는 신분의 차로 인해 비극적 삶을 산 이들의 사랑을 노래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어느 것 하나 의지대로 택할 수 없는 운명. 이는 통속 멜로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하지만 아사다 지로의 것은 독하고 슬프다. 시련 후 찾아오는 달콤한 시간은 없다. 오히려 인물들을 비극적 상황으로 몰아넣고, 온몸으로 그 시간을 견디라 한다. 어린 화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연의 붉은 꽃’은 아픔이 더 크다. 화자가 볼 때 청춘남녀가 사랑을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어른들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둘을 가로 막는다. 사랑이 거절당하고, 남녀가 괴로울수록 화자의 상실감은 더 커진다. 작가는 남녀의 비극적 상황에 어린 화자의 애절한 마음을 더해 차곡차곡 슬픔을 채운다.

무섭고

“어찌할 수가 없어 죽는 건 관두고 벌레를 잡아먹거나 상처에 솟은 구더기를 집어먹거나 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를 뜯어서 먹었어.”(p. 87, ‘벌레잡이 화톳불’)

사업에 실패에 시골로 도망친 쓰야마는 가족들이 자신을 만났다는 얘기를 듣는다. 한창 회사가 잘나가던 시절의 ‘나’를. 쓰야마는 또 다른 ‘나’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 같아 괴롭다. 이때 동네 영감님은 힘든 상황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날 수 있을 있음을 말하며, 자신이 겪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얘기한다. 여기서 그 상황을 극복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오로지 그 체험만이 강렬하게 전해온다.

전쟁은 ‘벌레잡이 화톳불’뿐 아니라 ‘원별리’(遠別離)의 배경이 된다. 이들이 일본인이란 걸 생각하면 그들이 마주한 현실이 얼마나 처절했을지 짐작이 간다. 사랑하는 이를 두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땅, 전우라고 불리던 이들은 한낱 고깃덩이가 된지 오래다. 여기에 삶의 희망이 있을 리 없다. 구두끈으로 목을 매려고 해도 툭 끊어져 그것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이 키운 것도 아닌데 몸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구더기를 바라봐야 하는 심정, 지독한 외로움도 사치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상실해버린 이들의 상황은 그저 무섭기만 하다.

아련한

“아, 안개 속에서 사신이 다가온다. 검은 외투를 입고 얼굴은 목도리로 둘둘 감고 백합 꽃다발을 안고서. (…) ”오지마, 오지 말라고. 나는 아직 안 죽을 거야. 기어코 돌아가서 요리코를 내 품에 안아봐야 해. 내 자식을 내 품에 꼭 안아봐야 한다고. 그런 다음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지금은 제발 못 본 척 지나가줘.””(p. 286~287, ‘원별리’)

고도 근시로 현역 입대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야노에게도 전쟁의 이별은 찾아온다. 그토록 사랑했던, 임신한 아내 요리코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저 문밖으로 나가면 아내를 만날 수 있을 거 같은데 나갈 수 없다. 또 악질적인 감기에 걸려 파르르 떨리는 몸뚱이로는 아내를 마음껏 그리워할 수도 없다. 칠흑같이 어둔 밤 야노는 근무를 서러 나간다. 대기를 가득 메운 안개, 그 안개를 뚫고 오는 죽음의 신. 아니, 난 이렇게 죽을 수 없다. 사랑과 전쟁은 ‘원별리’에서 교차된다.

좋은 기억도 아픈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다 추억이라고 했던가. 시간은 비극적 사랑과 죽음의 공포를 아련하게 만든다. ‘인연의 붉은 끈’, ‘벌레잡이 화톳불’ 모두 사건의 발생시점과 발화의 시점의 거리가 없었다면 얘기할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사진이 바래는 것과는 달리 이들 기억은 빛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매초의 기억은 더욱 강렬해져 몸 속 깊숙이 파고든다. 그토록 바람, 그리워함이 없었다면 산자와 죽은자는 다시 만날 수 없었을 테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이야기는 시간의 강을 건너 그렇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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