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5.02.25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 삶은 어딜 가든 따라온다
  2. 2015.01.23 《소비를 그만두다》 - 왜 사는데
  3. 2011.06.01 <여기에 사는 즐거움> - 섬, 그곳에서 살고 싶다 (2)
  4. 2010.08.12 <패배를 껴안고> - 패전이 가져온 일본의 현주소와 그 진실
  5. 2009.07.02 당신이 없었다 당신: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탈주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 삶은 어딜 가든 따라온다



마루야마 겐지 |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 바다 | 2014

미디어에서 조장한 농촌의 모습에 속아, 은퇴 후 아무 생각 없이 시골에 내려가 은퇴자금마저 다 쓰고, 빈민이 되어 도시로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매정한 대도시의 삶을 뒤로하고, 공기 좋고 물 좋고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는 인정 넘치는 이웃 사촌이 즐비한 곳이 농촌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미디어의 조장이 아니라면 과연 이러한 농촌의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을까? 실제로 농촌에 살던 많은 젊은이가 도시로 이동하는데, 과연 그들은 대도시 사람들이 귀농을 꿈꾸며 그토록 떠나고 싶어하는, 바로 그 대도시로 유입된 걸까? 이 질문에 대해 엄밀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결국 귀농을 해도 만족할만한 생활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마루야마 겐지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직설적으로 늘어놓는 사람인데, 이 책에서는 미디어에서 조장된 귀농과 농촌생활에 대한 환상을 깨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듯하다.


어렵게 돌려 말할 것도 없이 대도시처럼 수많은 인간이 익명성을 갖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사는 생활방식에 비해, 농촌의 경우 몇 세대에 걸쳐 같은 장소에서 모여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도시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 농촌 주민들은 마을 구성원들의 사생활에 서로 깊숙이 개입하는 삶을 살아오곤 했다. 그러니 미디어에서 조장한 인간미 넘치는 농촌생활의 실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대도시에서 생활했던 이들의 기준으로 봤을 경우, 터무니없는 사생활 침해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농촌에는 마을만의 무언의 생활규칙이 있다. 외지인이 암묵적인 규칙을 어길 경우,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한편 저자는 치안에 대해서도 논한다. 대도시의 경우 농촌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아주 좁은 지역에 인구가 밀집해서 살고 있기에 치안이라는 측면에서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지방의 경우 넓은 면적 대비 경찰의 수치는 대도시의 그것과 비교할 경우 현저하게 낮다. 결국 이는 치안 서비스의 질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서울특별시 중구의 치안 수준과 경기도 포천, 양주, 광주 같은 넓은 행정구역의 치안 수준이 과연 같을까. 단위 면적당 배정된 경찰의 수치는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되리라 본다.


마지막으로 건강에 대한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 대도시에는 다양한 종류의 의료기관을 비롯하여 종합병원 응급실이 존재한다. 하지만 시골은 반대되는 의료 환경을 지닌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 책의 주된 소재를 귀농으로 삼았지만, 본질적으로 인생의 무게는 무거울 수밖에 없으며 그 무게라는 것이 농촌으로 거처를 옮긴다고 해서 더 가벼워지는 건 아니라는 걸 독자들에게 격정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막연히 낙원이 존재하리라는 믿음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마주할 때 오히려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간명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이 마주하기 싫어하는 내용을 '귀농'이라는 소재로 풀어낸 마루야마 겐지! 그의 힘 있는 문체 때문이라도 열혈의 에너지가 필요한 이들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 여겨 추천하고 싶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청아'님은?

Ex Libris 블로그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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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를 그만두다》 - 왜 사는데


 

 


히라카와 가쓰미 | 《소비를 그만두다》 | 더숲 | 2015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는 참으로 많고 첨예하다. 2015년 1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갑과 을의 논쟁, 그리고 폭력이다. 어린이집 아이를 학대한 보육교사, 땅콩회항으로 불붙은 을을 향한 갑의 횡포. 물론 이 말고도 한둘이 아니지만 거의 모든 현안이 덮일 만큼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이 문제들을 살펴보면 단순한 폭력의 문제는 아니다. 유아 학대를 보면 맞벌이 때문에 아이를 맞길 수밖에 없는 가정, 보육교사의 과도한 노동환경, 어린이집 운영에 관한 비리가 얽혀있고 갑, 을 문제 또한 노동과 돈에 대한 문제가 얽혀있다. 이는 비단 어린이집에 CCTV 하나 설치한다고, 가진 자들이 친절함을 장착한다고 해서 해결될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돌아가 보면 '돈', 자본으로 귀결된다. 그럼 돈 문제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돈이 신앙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살게 되었는가. 왜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자신들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해석하는 동안 그렇지 못한 자는 늘 박탈감에 시달리고 일자리를 걱정해야 하는가. 많이 '소비'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며, 더 많이 소비할 능력이 있는 자들을 칭송하고 동경하며 떠받드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저자는 이런 우리와 다르지 않은 금전 만능주의의 사회, 자국 일본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있다. 물론 이 책이 이러한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제 더는 생산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가 되어버린 '개인'의 모습을 돌아보며, 소비를 위해 살아가는 일본 사회에 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참 비슷하게 변하고 있다. 가족중심의 사회에서 서구사회처럼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로 바뀌었고, 기업들은 '시장창조'라는 이름으로 지역과 가정을 잘게 쪼개 개인을 만들고 개인의 욕망을 환기해 '소비자'를 만들었다. (89쪽)


 

이를 미개 시장으로 확대한 것이 바로 '세계화'다. 우리는 '소비'의 주체가 되어 기업들이 환기한 욕망을 따라 '소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대형 상점이 들어서 지역 경제 기반이 흔들리고 이를 따라 형성된 시민들의 긴밀한 관계 역시 파괴된다. 우리는 철저하게 노동과 생산이 분리되어 그들을 위해 일하고, 또 소비한다.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저자는 소비자에서 생산자가 되자고 말한다. 창업이 아닌 '소 상업', 돈벌이가 아닌 '살아가기'가 중심이 된 '탈소비자'를 생각하자고 한다. 싸게 사는 것이 아닌 비싸도 가치 있는 소비를 하는 것, 적게 벌되 잘 순환시키는 것, 상품 경제 속에 '증여'와 '교환'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하지 않는 사회'로 재설계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말한다.

이 책은 오로지 소비 그 자체에만 초점이 맞춰있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욕망만을 좇아 사는 우리 모습에 좋은 충고를 들려준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은 이 모든 것들을 조금 두루 뭉실하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책의 3분의 1 정도는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에서 보이는 경험담이 대부분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수필이나 새로운 대안을 제안한 입문서 정도로 본다면 꽤 괜찮을 책이고, 만일 그전에 이와 관련된 책을 읽었거나 자주 접해 보았던 사람이라면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락아프리카'님은?

밴드 아프리카의 보컬리스트입니다. 역사(고대사)와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 소설 분야의 책을 좋아합니다. 우리 부부를 선택하여 함께 살게 된 사연 많은 길고양이 4마리와 정도사라 불리는 드러머 남편과 유유자적, 대책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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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사는 즐거움> - 섬, 그곳에서 살고 싶다


 

 

야마오 산세이 | <여기에 사는 즐거움> | 도솔 | 2002

 

 

"인생의 어느 시기에 배움과 동경의 여행은 끝나고, 여기에 산다는 것이 시작된다. 때때로 떠나는 여행도 포함하여, 여기에 산다고 하는 것은 대다수인 우리에게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인생 여행의 참다운 시작이다."

 

야마오 산세이 씨는 시인이다. 서른 아홉에 일본 남쪽 끝의 야쿠 섬이라는 곳으로 간다. 숲속에 터를 잡은 그는 오전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오후에는 농사일을 하는 삶을 시작한다. 직접 집을 짓고, 먹거리를 재배하고, 땔감을 구하는 삶, 원숭이와 사슴이 애써 기른 농작물을 다 먹어치우기도 하고, 잦은 태풍으로 번번이 집과 터전이 황폐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행복과 즐거움이 함께 하는 삶, 이 책은 그러한 삶에 대한 보고서이다. 

 

"여기에 산다고 하는 것은 호화로운 즐거움을 찾는 게 아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어도 물론 나쁘지 않다. 그러나 내게는 일상 속에서 계속되는 즐거움이야말로 가장 좋고, 조몬 삼나무가 그리 하듯이, 텃밭 한 귀퉁이에 놓은 통나무에 앉아 날마다, 아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변 풍경을 바라보면서 잠시 쉬는 시간이야말로 참 시간이라 말할 수 있다."

 

섬이라는 외딴 공간, 숲속의 작은 오두막, 아침에 눈을 뜨면 간밤에 망울을 터트린 나팔꽃이 마당에 가득하다. 바쁜 일도 서두를 것도 없다. 필요에 맞추어 오늘 할 일을 정한다. 가족과의 소박한 밥상, 노동의 기쁨. 살아간다는 것은 태어남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수십 억 년 진화가 가져온 축복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야마오 씨 삶의 편린을 살펴보자.

 

5월, 수유나무 열매와 나무딸기가 익는 달이다. 빗쿠리 수유나무 열매는 새끼손가락 끝 정도의 타원형으로 잘 익으면 반투명한 루비처럼 진홍빛이 된다. 그냥 빨갛기만 할 때는 시고 떫어서 손길이 가지 않지만, 진홍색으로 잘 익었을 때는 단맛과 신맛이 잘 어울려 먹기 좋은 들 과일이 된다. 오후에 유치원에서 돌아온 딸이 하는 최초의 놀이는 수유나무 열매따기다.두 살짜리 동생과 작은 봉지를 들고 둘이서 새빨갛게 익은 것만 따 모으고, 먹고 싶은 만큼은 자기들도 먹는다.

 

열흘 정도 지나면 수유나무 열매의 계절은 끝이 나지만, 나무딸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무딸기는 집 주위의 풀숲을 비롯하여 어디에나 자생하고 있는 까닭에 어른 아이를 불문하고 이 시기는 딸기의 계절이다. 수유나무 열매는 신맛이 강하기 때문에 한번에 대여섯 알 정도 먹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나무딸기는 거기에 있는 것을 다 따먹고 다른 곳에 새로운 나무를 발견하면 또 따먹고 싶어진다.

 

채집의 즐거움, 야마오 씨는 이것을 석기문화라고 부른다. 나무열매를 따먹으며 생존해온 우리 인류가 수백 만 년에 걸쳐 유전자에 각인된 즐거움, 이것이 산업혁명 이후 단 일, 이백 년 만에 사라질 리가 만무하다. 석기시대 사람들에게 그 시대가 풍요로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들의 시대에 그 시절의 문화가 풍요로움과 기쁨으로 기억되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작가가 '석기시대 충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 우리의 문명을 균형 잡힌 모양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깊은 성찰의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야마오 씨는 그 깨달음을 일컫는 말로 '가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가미', 일본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신, 하느님, 신령. 특히 부처님에 대한 神道'라고 되어 있다. 나도 '가미'란 보통 神으로 번역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야마오 씨가 말하는 '가미'란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과는 그 개념이 많이 다르다. 책에서 '가미'에 대해 소개한 글을 몇 개 찾아보자.

 

"가미는 아직 명확하게 신의 형태에 도달해 있지 않는 원초의 존재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예배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하나로서의 신과 구별하기 위해 삼라만상으로서 나타나는 오래되지만 새로운 신을 그냥 가미라고 표현한다. 이 가미는 지배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고 조직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제까지의 신과는 다르다."

 

"가미에도 여러 가미가 있지만 제비꽃이라는 가미는 무조건 사람을 행복 속으로 밀어 넣는 성질을 가진 가미다."

 

"가미란 우리를 초월해 있으며 우리에게 좋은 기운을 주는 것, 깊고 강한 에너지를 주는 것의 별명이다."

 

"우리가 만나서 진심으로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풀이든, 나무이든, 바위나 돌이든, 사람이든, 곤충이든 나는 그것을 가미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가미가 무엇을 일컫는 말인지 알겠는가?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라도 알 것 같다면, 당신도 아마 깨달음에 조금씩 다가가려는 사람이리라. 그렇다, 그것은 깨달음이다. 야마오 씨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터득한 깨달음,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숲은 숲이기에, 바다는 바다이기에, 또 풀 한 포기는 그 풀 한 포기의 생명이기에 그곳에 즐거움과 행복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깨달음, 야마오 씨는 그것을 '가미'라는 단어로 표기한다. 마치 노자와 장자가 '道'라는 용어를 사용하였 듯이.

 

야마오 산세이 씨는 2001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25년간의 섬생활을 마감했다. 권력과 부귀를 탐하지 않고 수고로움과 소박함에 감사하던 삶,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지구 전체의 생명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자 꿈꾸었던 삶. 어차피 정해진 시간의 둘레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무엇이, 어떠한 것이 보다 더 가치있는 삶일까? 야마오 산세이 씨의 삶과 자세는 어쩌면 내가 가야할 길의 작은 등불일 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duck’ 님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나를 인정하며 스스로 만족해 살아가는 삶을 꿈꾸는 책 읽는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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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껴안고> - 패전이 가져온 일본의 현주소와 그 진실

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민음사, 2009 

 


많은 개인들이 전쟁,폭력,강간, 정신적 가해 등으로 인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심각한 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의사들의 표현에 따르면 이러한 요인, 즉 트라우마를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인간의 뇌구조로 인해 완전치유는 불가하더라도 효과적인 트라우마 희석으로 그 증세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트라우마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현실과의 조화를 통해 좀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비단 개인뿐 아니라 국가 내지는 민족적 형태로 확대되기도 한다. 우리 한민족에게 다름 아닌 일본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다. 임진왜란과 일제감정기라는 거대한 역사적 트라우마는 그 기간내내 민족 개개인에게 개인적인 트라우마로 확대 재생산 되면서 민족 전체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증상을 발현시키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가까우면서도 멀기만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는 일본의 패망 이후 5년 8개월이라는 미군정기간 동안 일본과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고찰한 책이다. 우리에게 일본 특히 1945년전후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거의 1차적으로 감정적인 반응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만큼 강력한 트라우마를 제공한 원인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제대로 일본을 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존 다우어는 이 시기의 일본과 일본인의 심리상태를 고찰하므로써 지금의 일본과 일본인을 이해하는 시금석을 제공하고 있다. 얼마전 자민당의 장기집권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정권이 자리잡은 일본은 패전의 아픔(?)을 딛고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면서도 극우세력들의 망언과 전범을 위한 신사참배 및 교과서 역사왜곡 등을 통해서 주변 당사자국들의 심리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일본과 일본인의 근저에 깔려 있는 심리상태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우리에게는 상당한 숙제거리 중에 하나이다.

이 책을 통해서 지금의 일본의 상태를 100%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군정의 점령 하에 놓인 일본의 상태와 일본인들의 심리상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유추가능 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보기엔 다소 우호적일 수밖에 없는 시각으로 패망 이후 일본을 바라보고 있지만 학자다운 냉정함을 잃지 않고 현상 그대로를 기술하고 있어 일본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준다. 쇼와천황(히로이토)의 항복선언으로 일본, 적어도 일반대중은 한밤중에 난리를 맞은 격이었다. 극도로 통제된 사회에서도 몇몇 루트를 통한 불리한 전황의 소식을 듣긴 했지만 그동안 천황을 비롯한 군국주의자들과 초국가주의자들의 오래된 교육과 홍보에 의해 도저히 질 수 없는 전쟁에서 패망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미군의 점령이 현실화 되면서(이때 미군은 19세기 페리제독을 앞세워 강제로 개방을 할 당시 게양했던 성조기를 다시 달고서 또 다시 일본땅에 발을 딛게 된다) 일본인의 삶은 표현 그대로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절망이나 허탈의 의미하는 '교다쓰'라는 말이 전후 일본 사회전체를 대변하는 신조어가 되어버렸다. 이전까지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야마토신민이라는 우월성을 입증(?)받은 민족이 하루 아침에 4류국민으로 전략함으로써 교다쓰의 강도는 실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능가했던 것이다. 육체적인 피로감보다 패망 이후 밀려오는 심리적 허탈과 절망은 일본사회구조를 송두리채 변신시키기도 남을 만큼 엄청난 것이였다. 이러한 정신적 공황상태에 대해서 일본군국주의하에서 고통받은 민족이나 국가 입장에서는 당연시되는 시각이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분명 그랬다는 것이다.

맥아더를 수장으로 하는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일본은 또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연합국의 좌장인 미국의 점령으로 일본은 수술대에 오르게 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군정의 정책에 따라 사회구조를 재편하게 된다. 어느날 갑자기 미군와 함께 온 민주주의는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일반 대중 속으로 깊고 넓게 퍼지면서 동시에 왜곡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와 한국전쟁 이후 우리가 겪어던 비뚤어진 민주주의 산출물들을 고스란히 일본대중들도 겪었던 것이다. 식민지로부터의 물량공급이 차단되면서 일본경제는 그야말로 파탄 자체였고 일반대중은 그저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익히 겪었던 바 있던 이데올로기의 혼란은 패망이라는 좌절과 함께 이들을 강타했고 나라의 근간이라고 하는 헌법의 제정 마저도 그들의 손이 아닌 미군정 하급관리들의 손에 의해 명시되는 치욕을 겪게 된다. 물론 연합국측에서 보면 당연시 되는 방법이었지만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이 오히려 일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시행착오였고 이러한 시행착오가 불씨를 남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미군정은 한반도의 남쪽에서와 같이 일본에서도 제대로 된 역활을 수행하지 못했다. 일본에 대한 전문가 없이 일본을 통치했던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정작 도쿄전범재판은 피해당사자인 조선이나 인도네시아을 비롯한 동남아시아국가를 배제한 서구일색으로 처리하여 일종의 면죄부를 부여한 꼴이 되어버렸다. 또한 맥아더는 천황이라는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오히려 천황제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역사적 단절이 아닌 재연장시키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의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의 재등장이라는 불편한 진실의 근원은 바로 다름 아닌 이 시기 미군정과 일본 극우세력의 합작품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신민의식의 정점에 서있던 천황을 존속시키면서 왜곡된 민주주의의 도입자체가 그 태생적 한계를 갖게 했기 때문이다. 전범재판을 통해서 면죄부를 획득한 구군국주의자들의 정계 복귀(미군정의 암묵적 동의하에)와 히로히토의 건제는 패망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스틱스의 강속으로 밀어버리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내부적인 요인과 일본인들이 말하는 신의 선물인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행운이었던 것이다. 사실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군정은 일본경제에 대해서 관심 자체가 없는 그저 뿌린대로 거둔다는 방관자적 입장을 견지했으나 한국전쟁은 이런 방침을 일거에 바꿔 버린 결과가 돼버렸다. 미군정은 그동안의 점령을 통해서 파악한 일본의 최대강점인 집중과 관료주의에 의한 경영방식을 통해 한국전쟁을 지원하게 되면서 일본은 하루 아침에 다시 살아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전범재판을 통해 도조 히데키등의 A급전범을 비롯한 몇몇 군국주의자 및 초국가주의자들을 처리하므로써 더 이상 국민전부가 전쟁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면죄부를 받은 상태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고기가 물을 만난 격으로 일본재건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물론 일본인 전체가 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 진정으로 전쟁에 대한 책임과 황군이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해외에서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과 사과를 통해 새로운 일본을 건설해야 한다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제도의 근본적인 변혁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심리는 단지 신에서 인간으로 옷만 갈아입은 천황을 위주로 정말 새로운 일본을 향해 질주했던 것이다. 패망으로 받은 교다쓰의 상태는 너무나 쉽게 마치 어느날 갑자기 피었다고 져버리는 벚꽃처럼 정말 허망하게 잊혀져 갔던 것이다.

대동아공영을 내세워 조선, 대만, 중국,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로 편입하면서 시작된 군국주의의 망령은 지금도 그 피해 당사국들에겐 너무나 큰 결코 완치될 수 없는 트라우마로 존재하고 있다. 비록 일본 역시 전쟁을 통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임에는 틀림없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고 해외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인명들을 생각하면 가해자나 피해자를 떠나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고 상고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런 불행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이 그 첨경인 것이다. 이런면에서 보는 패망 이후 일본 점령정책과 사회변화상은 아주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과 패전은 일본인이 '인간성,인격,개성'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며,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에 군국주의나 초국가주의의 도래를 막지 못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쟁 책임은 일본인 전체가 져야 하며 국민은 세계를 향해 사죄하지 않으면 안된다" 저자의 이 한마디가 의미하는 바는 실로 큰 것이다.

<패배를 껴안고>는 피해당사자국들이 보기엔 일종의 일본 껴안기로 오인될 수 있는 소지가 있을 수 있으나 이 책은 패망 이후 일본의 변화과정을 미군정과의 관계를 통해서 서술하고 있는 일본 국내에 한정된 내용들이다. 패망을 받은 상처와 개인들의 산산조각난 꿈을 통해서 결국 인류가 껴안고 가야할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껴안기는 결코 일방적인 껴안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가 밝혔듯이 성숙된 일본의 사죄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외 당사자국들의 진심어린 상호 껴안기를 통해서 좀더 성숙하고 발전된 미래가 당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물잡이'님은?
모든 것에 미혹(迷惑)되지 않는 불혹의 뜻만큼 진실한 독서는 40부터라고 생각하기에 요즘 부쩍 책을 더 가까이 하게 되는것 같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느낄 수 없는 소통을 책과의 만남에서 찾고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저 책을 읽어나갈 뿐이다. 행복이 동사이길 바라듯이 독서 또한 타인과의 소통행위로 인식하면서 삶의 새로운 이정표를 향해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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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없었다 당신: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탈주

 

 

히라노 게이치로, <당신이 없었다 당신>, 문학동네, 2008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행위다. 그것이 작가가 되었든, 작품 속 인물들이 되었든, 아니면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든. 그래서 책을 손에 쥐기까지의 과정은 늘 설렌다. 오늘은 또 누구를 만날까. 얼마 전 기억 속에 뚜렷하게 각인된 작가가 한 명 있었다.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다. 해금연주자 꽃별을 만났을 때 그녀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문장에 감탄했으며, 블로그 이웃 태극취호님도 좋아하는 작가로 그를 꼽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그를 만나라는 일종의 신호일까. 그렇게 히라노 게이치로의 <당신이, 없었다, 당신>을 만났다.

<당신이, 없었다, 당신>은 작가가 2007년 발표한 단편 소설집이다. 소재, 형식 모두 다른 열한 편의 소설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 온 건 두 번째 단편 ‘페캉에서’를 통해 느낀 주체의 사라짐이다. 이 작품은 오노라는 작가가 프랑스에서 잠시 떠난 여행에서 느낀 감정을 그린 이야기다. 문화교류사업의 일환으로 낯선 땅에 체류하고 있는 소설가 오노는 뜻밖의 휴가를 얻어 세 번째 장편소설 <장의>를 쓰기 위해 5년 전 찾았던 곳 페캉으로 향한다. 당시 그는 그곳에서 문득 다른 소설의 착상을 얻는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등장인물 모두 동일자(同一者)라는 것이다. 메인 플롯은 주인공 오노의 여정이지만, 그가 만나는 이는 타자가 아닌 그가 만들어냈던 소설의 주인공 KH이다. 작가와 작가가 만든 인물(오노), 그 작가가 만든 인물(KH)의 만남, 이 끝없이 미끌어지는 과정에서 오노와 KH, 그리고 히라노 게이치로 자신의 정서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작가는 때로는 오노가 되고, 때로는 KH가 되어 20대 청춘이 겪은 다양한 감정들을 녹아낸다. 주어(주체)는 명시돼 있지만 그것이 누구의 감정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노가 만든, KH가 등장하는 소설의 제목이 ‘페캉에서’인 건 단순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오노는 ‘페캉에서’의 KH가 결국 자살을 선택할 것을 명시하고 있는데, 오노는 KH가 죽음을 맞이한 곳으로 향한다. 과연 오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초반 느리게 전개되던 소설은 또 다른 ‘나’가 등장하면서 가속도가 붙는다. 여기서 작품에서 등장하는 정서가 구체적으로 누구의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가, 오노, KH와의 정서적 교감만이 남을 뿐이다. ‘모두가 주체가 될 수 있음’은 곧 ‘누구도 주체일 수 없음’의 다른 말이다. 주체는 해체되고 정서만 남는 일련의 과정, 그렇게 ‘당신’은 없어진다.

없어진 ‘당신’의 돌아옴

‘페캉에서’처럼 주체가 사라진 작품이 있는 반면, 형식의 파괴를 통해 정반대에 위치하는 작품들도 있다. ‘여자의 방’과 ‘어머니와 아들’이 그 예다. ‘어머니와 아들’을 처음 보면 이게 뭔가 싶다. 「어머니와 아들 1-1」 「어머니와 아들 2-1」 「어머니와 아들 3-1」로 이어지는 페이지 전개는 우리가 익숙한 소설의 전개방식과는 다르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 작품의 룰을 발견할 수 있다. 「어머니와 아들 1-1」은 다음 페이지의 「어머니와 아들 1-2」로 이어지고,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와 아들’은 줄과 줄이 아닌 페이지와 페이지로 이어지는 소설이다.

내용을 보면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형식상 챕터는 다르게 분류돼 있으나 이야기 전개 양상은 거의 유사하다. 어머니와 아들의 이별, 먼 곳으로의 여행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다. 다른 점은 인물들이 처해있는 배경과 설정 정도이다. 하지만 각 챕터의 결말이 비슷한 듯 조금씩 달라지면서 페이지를 앞뒤로 넘기면서 호기심은 증폭된다.

‘여자의 방’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로만 따지자면 아 작품은 2페이지짜리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도 다양한 위치의 텍스트를 제거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느낌(혹은 이해 불가한 상황)을 연출한다. 이런 형식적 실험은,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의 존재를 명확하게 한다.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는 가운데 작가가 사라지는 것과 반대로 작가는 이야기 전개를 일부러 방해하면서 ‘나 여기 있소’라고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이쯤 되면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가 왜 이런 ‘실험’ 혹은 ‘장난’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옮긴이 신은주가 작가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다음 문장이 그 힌트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시도에 어떤 새로운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세계와 현대의 인간이 직접 요구하는 새로움이다. 누구나 변화를 실감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소설만이 언제까지나 2세기 이전의 스타일로 그것을 좇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한 창작상의 변화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보수적인 독자와는 아예 깨끗이 ‘작별할’ 생각이다. (p. 324, 『파도』, 2007년 2월호 재인용)

이처럼 작가는 ‘당신’이라고 명명백백하게 일컬을 수 있는 것들(주체, 형식)에 변화를 가하면서 새로운 소설 공간을 꿈꾼다. 물론 작가의 이런 시도가 얼마만큼 공감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작가가 밝혔듯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사람과 애정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크로니클’이나,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현실에서 환상으로 점프하는 ‘이방인#7-9’, 사회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돋보이는 ‘자선’ 등이 기억에 먼저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없었다 당신>은 히라노 게이치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재미와 감동은 낯익은 것이 낯설게 비춰지는 순간에 출현하는 것을 작가와 독자 모두 알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은 작가가 ‘낯설게 하기’ 방법을 이미 알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교외로 나오자 눈앞의 경치는 푸른 수목들로 뒤덮였고, 창에 비치는 그의 모습도 짙어졌다. 그는 우연히 자신의 눈과 마주쳤다. 그것은 마치, 그가 알아차리기 오래 전부터 그렇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던 듯했다.” (p. 60)

우연과 낯설음. 우리에게는 불현 듯 찾아오겠지만, 작가는 오래 전부터 그렇게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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