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15.03.02 『우스운 사랑들』 -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2. 2015.02.03 『남자의 자리』 -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3. 2014.12.05 다시, 소설
  4. 2014.09.12 《면도날》 - 여보게, 젊음이여
  5. 2014.01.14 [반디 행사 수첩] 새해맞이 소설 대표 출판사 브랜드전
  6. 2013.09.24 [서점에서 만난 사람] 닫히지 않는 이야기의 문 -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소설가 에트가르 케레트
  7. 2012.12.12 [북테스터] 《장마딩의 여덟째날》 북테스터 20분 모집!
  8. 2011.08.30 [요즘 뭐 읽니?] 조현,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9. 2010.11.16 <고양이 호텔> - 고양이를 만나러 오세요
  10. 2010.10.29 <버마시절> -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우스운 사랑들』 -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밀란 쿤데라 | 『우스운 사랑들』 | 민음사 | 2013


우리가 위대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데,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또는 쇼팽과 조르주 상드 이들의 사랑에 왜 감동하는 것일까? 거세된 아벨라르 곁에서 충실하게 곁을 지켰던 엘로이즈와 정신적 관계를 추구했던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특별한 그 무엇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일까? 처음엔 달콤한 꿈처럼 느껴지던 감정들이 점점 더 건조한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푸석한 감정으로 바뀌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는 사랑에 관한 문구, 문장, 해석이 무수히 존재한다.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떠올릴 때면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이 먼저 떠오른다. 파스칼 키냐르는 "사랑할 때 연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그림자를 향해 몸을 돌리지만 서로 껴안으면서 그림자를 뭉개버린다."고 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나 그 감정의 토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인 것 같다. 사랑하는 이의 감정을 더 충실하게 알기 위해 상대방을 껴안고 감정이 포개어지는 순간, 그들 각자의 그림자는 형체가 없어져 누가 누구의 그림자인 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사랑의 아이러니'다.

밀란 쿤데라의 『우스운 사랑들』은 일곱 개의 단편집이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에 집착하고 사랑의 감정에 진실하지 못하기에 우스운 사랑이고, 굴욕적인 모습으로 삶이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누구도 웃지 않으리」에서는 스리보비체라는 교수가 주인공이다. 그는 자투레츠키라는 사람이 쓴 논문의 비평을 써주기로 약속하고 점차 미루는 과정에서 자신의 연인 클라라를 끌어들인다.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자 그는 클라라를 이용해 자신의 복잡한 현실을 피하려 한다. 자신에게 놓인 불리하고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클라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스리보비체는 클라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다. 클라라는 오히려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생각으로 스리보비체를 떠나려 한다. 스리보비체의 모습은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가느라 정작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대변한다. 제목처럼 그 누구도 웃을 수 없는 씁쓸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예측 불가능한 사랑의 이야기는 「에드바르트와 하느님」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자신이 욕망하는 감정을 겪고 난 후 뜨거웠던 사랑의 감정이 식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에드바르트는 여자 친구인 알리체의 육체를 욕망하지만 그녀는 크리스천으로 독실한 신자다. 알리체는 믿음이 없는 에드바르트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주겠다고 선언하면서 에드바르트는 거짓으로 하나님을 믿는 척해야 한다. 에드바르트는 교장과의 면담 이후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자신의 불온한 정신을 들키고, 교사 직책에 불안을 느끼게 되자 하나님을 믿는 척하는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몰입한다. 결국 에드바르트는 자신에게 의혹을 제기한 교장과의 갈등, 거짓으로 둘러싸여 불안의 요소를 만들어낸 모든 인간관계가 단조롭고 의미 없는 기호들이라고 생각한다. 알리체를 사랑했던 감정까지 혼란스러워지자 그는 진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에드바르트를 보면서 현대인들의 낯익은 모습을 보는 듯했다.

「영원한 욕망의 황금 사과」는 믿음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과도한 믿음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인생에서 함정이 될 수 있고, 배교자나 이교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히치 하이킹 게임」은 단순한 게임에서 시작되었던 서투른 사랑놀이가 죽음의 계약서와 같이 서로를 파멸시켜 간다는 내용이다. 순수했던 두 남녀의 단순한 게임은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해 쌓여지지만, 동시에 모방된 언어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읽고 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랑의 감정이 사람을 가장 나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랑의 폭력은 우리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하다. 세상에는 사랑만큼 위대한 것이 없고 또 사랑만큼 힘든 일도 없는 것 같다. 위대한 사랑에는 존재하고, 우리들의 사랑에는 없는 것이 상대방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보통 사람들의 사랑에 진실한 마음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표현은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감정과 연결돼 있다. 인간관계의 무대 위에 서다 보면, 때때로 눈이 가려진 채 연기를 하거나, 누군가가 무대의 배경과 장치를 바꿨는데도 모르고 계속 연기를 하다가 실수와 오해를 사기도 한다. 모든 감각과 감정에 집중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러한 실수와 오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실수와 오해가 없었다 해도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뿐 이기적인 감정은 늘 이타적인 마음을 이긴다. 상대방 본연의 색이 드러날 수 있도록, 또는 나와 상대방의 그림자가 뭉개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 어렵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는 순간, 자신의 언어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오색 무지개 색깔 같았던 사랑의 감정이 단일한 회색 그림자가 되는 것을 목격하고 만다. 그러한 상황들은 "우리는 모든 색깔을 다 보여줄 수 있지만 아무리 변화무쌍한 카멜레온도 흰색을 보여 줄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도르비이의 말처럼, 수많은 색 중에서 정작 흰색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대방이 가진 본연의 색깔을 가끔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뭉갠다. 자신의 색은 '언어'라는 화려함으로 치장하기 바쁘다. 마치 무수히 찍힌 점들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었단 '쇠라'의 그림처럼 가까이 가서야 어떤 색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사랑의 실체는 이와 비슷하다. 이론적인 현실 속에서 복잡하고도 미묘한 '사랑의 거리'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완전한 사랑은 적절한 거리의 침묵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muo'님은?

삶의 모든 흔적 때로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고 있지 않는 듯한 책들을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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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아니 에르노 | 『남자의 자리』 | 열린책들 | 2012


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를 떠올려본다. 윤덕수(황정민)는 피난길에 잃어버린 아버지와 여동생을 기억하며 스스로 가장이 된다. 그는 홀로된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핀다. 그게 자신의 의무라 여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학업도 포기한다.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파독 광부에 지원하고 여동생의 결혼 자금을 위해 베트남에 간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그에게 남은 건 장애가 난 한쪽 다리와 계속 돌봐야 하는 가족뿐이다. 이러한 삶이 당연한 거라 믿으며 그는 의지를 꺾지 않는다. 시간이 흘렀고 그도 늙었다. 자녀들은 자라서 가정을 꾸렸고, 그에겐 손자들도 생겼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시장통의 오래된 가게를 왜 끌어안고 사는지, 왜 오래전 시간을 붙잡고 놓지 않는지를.

아니 에르노가 『남자의 자리』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되짚으며 말한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고백 같은 아버지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 보편적인 개념의 아버지였다. 가족을 위해 애쓰면서도 애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함, 점점 자신의 영역이 좁아지고 자녀가 자라면서 거리감이 생기는 순서까지 똑같았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역사를 적었다. 어떤 감정보다 지극히 객관적인 순서의 기록이었다. 작가가 직접 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까지 적을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 사이가 어떤 교감으로 이루어졌을 한때의 시간이 준 기억. 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순간부터 봐 왔던 모습. 늙어가던 아버지의 생활과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쌓이는 서로의 삶. 그렇게 아버지의 크기가 달라져 갔다.

이 무렵, 그는 벌컥 화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증오감에 입가에 뒤틀릴 정도로 심하게 화를 냈다. 나는 어머니와 어떤 공모 의식으로 맺어지고 있었다. 달마다 찾아오는 복통, 골라야 할 브래지어, 화장품 같은 것들을 통해서였다. (…) 우리에겐 그가 필요 없었다. (91쪽)

투병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조금씩 달라졌다. 얼핏 추측하기에 육체의 노쇠함보다 정신적인 피폐함이 더 삶을 짓눌렀을 듯하다. ‘나는 이제 상자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가족들에게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어. 나는 혼자야…… 그에 반해 자식들은 점점 자라 다른 세계로 편입하고 세상을 알게 되어 자주적으로 살아간다. 아버지는 관심 혹은 간섭의 기회까지 사라진 영역을 오롯이 혼자 지킨다. 늙고 나약해져, 그만의 세계를 산다.

픽션을 거부하는 그녀의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써지고 있지만, 그 개인적인 경험이 그녀만의 기억은 아닌 것 같다. 애틋했던 부모와 자녀 사이도 시간이 흐르면서 무덤덤하고 건조해진다. 살아가는 방식과 시간이 달라 서로 얼굴을 보기도 힘들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고 벽이 쌓인다. 보통의 가족이 이런 시간을 거친다.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의 모습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아버지와 나 사이는 그 '보편적'인 범주에조차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아버지와는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대화로 시작된 말은 싸움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자동으로 차단되는 마음. 서로에게 타인이 되어 살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우리'라는 표현은 없다. 아버지에 관한 이러한 책은 나에게 늘 넘어야 할 거대한 산으로 자리한다. 보편성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모르는 시간을 알기 위해 부딪혀야만 하는 전쟁 같은 도전이다.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그가 어떤 시간을 통과해 어른이 되었고, 어떤 마음으로 부모가 되었으며, 어떤 바람으로 늙어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아니 에르노가 하는 말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그녀의 글을 통해,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하는 물음표를 띄우며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오갔을 대화를 그려봤다. 아버지의 유년기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듣고 있을 딸의 눈빛, 몰랐던 시간이 오고 가며 쌓였을 애틋함과 이해, 아직 멀어지기 전인 부녀의 관계. 나는 바람 같은 시선을 던지며 이 짧은 소설을 꾸역꾸역 삼켰다.

아버지가 화두가 되는 이야기 앞에서 나는 늘 답답하다. 애써 피해가고 싶고, 쉽게 건너가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다행이었던 건, 그녀가 이 글을 참 담담하게 썼다는 점이다. 감정의 파도가 지극히 일렁일 것 같은 사건 앞에서도 아니 에르노는 기록 의무자처럼 객관적이다.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래야 쓸 수 있었던 그녀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기억, 정리, 기록이 차례차례 가능해지는 순간에 비로소 찾아오는 안도감과 같이. 언젠가 나의 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는 시간이 오면 나도 이런 기록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 가슴속 말, 이해, 정리를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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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그 남자’를 아버지로 생각한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이 '전쟁 같은 도전'이라고 했는데, 전쟁을 마치고서 아버지의 거대한 산은 좀 작아 보이던가요?

‘그 남자’를 주제로 여러 책의 주인공을 떠올려 봤는데 연인 같은 남자가 많더라고요. 그 많은 남자 사람을 뒤로하고, 언젠가 한번은 마음 다잡고 덤벼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였어요. 펜벗 주제가 아니었더라면, 이 책을 다시 책장 구석에 넣어둘 것만 같아서요. 아버지를 소재로 한 영화나 책은 늘, 저를 힘들게 하거든요. 가까이 가기 위해 아주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늘 제자리에 서 있다가 되돌아가곤 합니다. 평소의 저라면 그런 경우 관계 유지를 포기하는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 단절이 ‘단절’이 되지 않더군요.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아, 그 거대한 산이 이제는 작아 보이냐고 물으셨죠? 아니요. 작아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힘들어도 다시 산에 오르자 다짐하고 언젠가 또 이런 이야기를 선택할 것 같아요.

● 평소 다양한 장르를 신중하게 소화하는 캔맥주 님의 모습을 보고 노력하는 ‘다독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은 언제부터 즐겨 읽으셨어요?


저 정말 책을 안 읽고 사는 대한민국 사람이었거든요. 대학에 다닐 때도 전공 서적 외 책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고 말하면, 지금 제 주변의 책 지인들이 놀라시더라고요. ‘정말?’ 하면서요. 네, 정말요. ^^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책을 즐기기 시작한 건 한 5년쯤 된 것 같아요. 우연히 모교 구내서점에 갔다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잠깐 읽었는데요. 서서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바로 사 들고 나왔어요. 그때부터였어요.
지금도 저는 책을 편식하고 많이 읽지도 못하지만, 책을 옆에 두고 늙어가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 있어요.


●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와 하이타니 겐지로의 『상냥하게 살기』를 같이 읽고 있어요. 내키는 대로 두 책 중 손에 잡히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스토너』는 한 남자의 평범한 일생을 담았어요. 심심한 듯 들릴 수 있는데, 오히려 그의 평범한 삶이 너무 와 닿아요. 이 책의 홍보 문구에서 ‘사는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누구나 스토너다.’라고 하는데요, 딱 그거였어요. 우리 사는 모습과 너무 닮았어요. 그래서 뭉클하게 공감하게 돼요. 『상냥하게 살기』는 하이타니 겐지로가 사십 대에 발표한 육십사 개의 산문집이에요. 나중에 그가 아와지 섬으로 이주한 후의 일상도 들려주는데, 진지하면서 재미있어요. 문득, 하이타니 겐지로가 좀 엉뚱한 아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이런 선생님을 만났다면 조금은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게 돼요.


● ‘펜벗’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펜벗에 선정되고 나서 궁금했어요. 매달 어떤 주제로 새로움을 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처음부터 선정된 주제가 저의 기대만큼 새롭거나 신선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반전이었어요. ‘처음’, ‘겨울’, ‘그 남자 그 여자’ 이런 주제가 어떤 책을 떠올리는데 상당한 고민과 관심을 두게 하더라고요. 어떤 책을 골라 볼지 이렇게 많이 고민해본 적이 정말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보면 참 평범한 주제일 수 있잖아요. 일상에서 늘 떠올릴 수 있는 주제인데, 이 평범함이 비범함을 만들고 있었어요. 책에 대한 느낌과 의미가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의 펜벗이 좋아요.
굳이 소박하게 바라는 점 한 가지라도 말해보라면, 펜벗의 주제가 조금 더 친근해져도 좋을 듯해요. 예를 들어, ‘이 주인공만 보면 욕이 나온다.’ 같은 주제요. ^^


오늘의 책을 리뷰한 '캔맥주'님은?

책을 좋아하고 싶어서, 책을 읽어요. 내일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한 페이지를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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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소설

 

 


 

다시, 소설 

 

지난 2일이었습니다. 서울 동숭동에서 특별한 기획을 알린 행사가 있었습니다. 내용인 즉 이렇습니다. 한국 문학 100년을 재조명하고자 시대를 대표하는 100인의 배우가 소설을 낭독한다는 것이죠. 소설은 근대문학의 태동기인 1910년부터 제5공화국 시기까지 발표한 것 중 문학적 가치를 엄선하여 100편을 선정한답니다.

 

모처럼 반가운 소식입니다. ‘우리 문학’을 재조명하기 위한 이런 소소한 시도가 얼마 만인지요. 금번 반디앤루니스에서도 우리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서평을 나누며 책 이야기 하는 친구, 펜벗’과 함께 한국 소설의 첫 문장을 곱씹어 보았죠. 잠자고 있던 어느 소설이 이번 기회에 한 번 더 들추어지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펜벗과 함께 며칠 동안 모아본 한국 소설의 첫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소리 내 읽어 보고 싶어집니다. 첫 문장만 추리니 단어가 더 도드라져 보임은 물론이고요. 문장의 힘이 느껴집니다. 한자씩 읊조리며 문장을 씹는 재미도 느낄 수 있습니다.

 

왕들의 상여는 능선 위로 올라가다. 김훈,『현의 노래』
초록빛으로 가득한 들녘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조정래,『아리랑』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려갔다. 김애란,「자오선을 지나갈 때」(『침이 고인다』)

 

이참에 다 같이 소설 얘기하며 ‘소설이 왜 좋은지.’ 저마다의 이유도 되짚어보았는데요. 각자의 이유가 소설의 존재, 소설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말해줍니다.

 

“제가 살아보지 못하고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합니다.” -한량의 독서 님

“소설을 덮은 직후 잠깐 동안 내가 익숙하게 알던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syongg 님
"소설은 픽션이지만 현실을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있고, 철학적인 질문도 갖추고 있습니다. 작가가 글로 만든 장치를 파악하면서 동시에 행간을 저의 상상력으로 채워가며 읽는 행위 자체에도 흥미를 느낍니다.” -북찬희 님

“이해라는 말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우리들에게 소설이란 것이 희망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Rootbeer 님

“한국 문학에 대한 애정이 큽니다. 우리네 삶과 가장 많이 닮은 분야가 아닐까 싶어요. 소설을 통해 함께 아파하고, 위로받을 수 있어 좋아합니다.” -선인장 님

 

다시, 소설. 어쩌면 지금 이때 개인에게 가장 적절한 ‘매체’는 소설인지 모르겠습니다. 소설 같은 현실 말고 진짜 소설 말이죠. 걸출한 작가들이 날을 세웁니다. 한국 문학이 들려줄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소소한 행사를 빌어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소설(小雪)에 분다는 ‘손돌바람’만큼 무지막지한 위력은 아니어도 잔잔한 바람이 되어, 지금. 계속. 소설을 쓰고 있을 누군가에게 ‘애정’이 전해졌으면 합니다. 첫 문장을 읽으며 생각해봅니다.

 

“느리게 쓴다는 것은 문장을 공들여 쓰고 플롯을 좀더 흥미진진하게 구성한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거기에는 소설이란 인간이 겪는 고통의 의미와 구원의 본질에 대해서 오랫동안 숙고하는 서사예술이라는 인식이 숨어 있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한국 소설의 첫 문장을 만나 보세요.

 

연관도서

 

      

 

|Editor_김민경

mins@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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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 여보게, 젊음이여

 

서머싯 몸 | 《면도날》 | 민음사 | 2009   

 

‘구원’은 날카로운 면도칼을 넘어서는 것만큼 힘든 난제다. 인류가 가장 풍요로운 시기로 접어드는 20세기나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에나 마찬가지다. 1944년 서머싯 몸은 《면도날》을 출간했다. 이 시기 젊은이들은 전쟁과 공황이라는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 명예, 부, 내적 평화 등 다양한 삶의 가치를 추구했다. 그들이 선택한 가치는 곧 그들의 삶을 대변했다.

 

래리가 ‘정말’ 너를 사랑했을까? (…) 사랑이 열정이 아니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다른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야 (…) 너희 둘 사이엔 열정이 개입되지 않았어. (278-280쪽)

 

노년의 소설가 몸은 《면도날》에서 삶의 어떤 가치가 옳다, 그르다 평하지 않는다. 여러 인간상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뿐이다. 사랑을 버리고 다이아몬드와 모피코트를 택한 이사벨, 삶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유랑하는 래리, 미국인이지만 유럽 상류사회를 갈망하는 앨리엇,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상대를 잃고 방황하는 소피. 몸은 소설에서 여럿의 이야기를 엮어 나가며 그들 각자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를 얻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자칭’ 지식인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트집을 잡겠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대중은 모두 성공담을 좋아한다. 그러니 나의 결말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끝을 맺은 이 소설의 함의는 제목만큼이나 날카롭다.

 

《면도날》은 삶과 구원이라는 문제에 해답을 얻으려 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문제를 제기한다. “인식을 통해 본질인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래리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 서머싯 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세계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구원으로 가는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가는 것인가.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어. (…) (347쪽)


오늘의 책을 리뷰한 '송기'님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좋은 원두를 찾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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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 행사 수첩] 새해맞이 소설 대표 출판사 브랜드전

 

[새해맞이 소설 대표 출판사 브랜드전 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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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닫히지 않는 이야기의 문 -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소설가 에트가르 케레트

 

 

취재·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주변에 하나쯤은 이야기를 참 맛갈나게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똑같은 사건과 줄거리일지라도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라면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해지고 쫀득쫀득해집니다. 살을 더하거나 빼고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다음은, 그 다음은? 하고 성마르게 이야기를 재촉할 수밖에 없는데요. 이런 이야기꾼에게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려, 강도처럼 이야기를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이야기 하나 해봐.” 라며 권총으로 위협하고 윽박지르면서 말이죠. 

 

“평소처럼 하면 되잖아.” 수염은 투덜대며 권총의 공이치기를 당긴다. “이야기를 하느냐, 두 눈 사이에 총알이 박히느냐야.”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수염은 농담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11쪽,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중에서)

 

‘나’가 시작한 그 이야기가 궁금하시다고요? 그렇다니까요. 바로 그거거든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에 담긴 모든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다음은, 그 다음은?’이라는 마음의 소리를 반복하게 만들고, 그렇게 기발하고 통통 튀는 상상력으로 현실 안에서 초현실을 꺼내고, 초현실 안에서 현실이 떠오르게 하는 재주가 바로, 낯선 나라 이스라엘에서 건너온 작가 ‘에트가르 케레트’의 매력이라는 거죠. 그의 이야기,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반디| 작품은 그것의 태생적 배경, 즉 작품이 쓰인 시기의 역사적 상황, 작가의 성장 환경 등을 지니게 됩니다. 작가님의 작품 또한 이스라엘의 현대사라는 배경과 연관해 독해되곤 하는데요. 2013년, 한국 현대사의 자장 안에 있는 독자들에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로 묶인 작가님의 “주관적인 이야기”가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다가가길 바라시는지요?

 

에트가르 케레트| 지리적으로 멀리 사는 독자들이 최고인 것 같아요.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나라에서 살고 있는 저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 분들이 소설에서 발견하시거든요. 저는 독자들한테 이스라엘의 어떤 면을 가르치고 싶은 게 아니라, 스토리를 같이 나누고 공감하고 싶을 뿐입니다.

 

반디 | 표제작인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작가의 집에 괴한들이 들이닥쳐 이야기를 해 보라며 종용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첫 번째 순서로 하여 나머지 각각의 소설들이 배치된 점이 흥미롭습니다. 꼭 ‘천일야화’ 같기도 하고요. 다른 점이라면 책에 실린 이 소설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개별의 이야기라는 것이겠죠. 그 중에서도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이 이야기들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모든 이야기들을 시작하게 한 작가님의 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이 책이 쓰여진 때는 개인적으로 제 삶에서 매우 특별한 시기였습니다. 소설을 쓰는 사이에 결혼도 하고, 담보대출로 아파트도 얻고, 아이도 생겼거든요. 이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글을 쓰는 새로운 방식을 찾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써나갈 이야기가 과연 독자들에게 충분히 다가갈 지를 확신하는 데에도 시간이 조금 걸렸고요. 

 

표제작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계기가 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인물이 처한 환경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 인물의 복잡미묘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거든요. 말하자면, 객관적인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객관적인 사건일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니까요. 동일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트라우마로 남는 반면, 어떤 사람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살게 되는 것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삶에서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사건을 통해 주인공이 어떤 강렬한 감정을 느꼈느냐에 더 주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글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보다 아파트를 파는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삶이 훨씬 흥미로울 수도 있고요.  

 

제목인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은유합니다. 이 변화가 인물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고요. 예컨대, 잘 살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제 삶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누구인지는 몰라요. 그저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또 다른 삶이 펼쳐지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제가 부모가 되면서 다른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한 변화가 이 책에도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반디| 그런가 하면,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는 이야기 자체가 지닌 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누군가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될 테니까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를 읽으며 무엇보다 강하게 남은 인상 또한 그것이었는데요. 직접 이야기를 만들고 쓰시는 작가님께서도 이 이야기의 힘을 느끼신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은 일화가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사실 저는 작가로서 책을 출판하기 전부터 이야기에 힘이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어렸을 때의 일인데요. 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주먹으로 남자를 때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몰랐지만 저는 그 상황에 대한 저만의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얼굴을 맞은 남자가 여자의 이복동생이었는데 어머니가 죽고 화가 나서 때린 거라는 식으로 맥락을 만들면서요.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폭력을 중화시켰던 경험이죠.

 

 

반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단편들에선 일상이 재기발랄하게 묘사되는 상황에서도 삶의 비의가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삶이란 땀을 흘리는 것, 삶이란 지랄맞게 잊을 수 없는 아픔”(190쪽, <치핵>)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요. 하지만 인물들은 이런 삶일지라도 거부하지 않고 희망에 좀 더 가까이 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픔을 “살아 있는 느낌”(58쪽, <아침을 건강하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보이고요. 아픔 자체인 현실에서 문학의 역할,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사람들은 보통 기쁨과 고통, 두 가지로 감정을 구분하곤 하는데, 저는 뭔가를 느끼는 상태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로 구분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놀이공원을 갔다가 그곳을 나서면서, 누군가는 기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 감정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의 시간으로 아무것도 느낀 게 없다면 티켓을 낭비한 게 되겠고요. 물론 저 또한 삶에서 기쁨을 느끼는 편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떤 일로부터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제 삶 전체를 고통이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에서 기쁨만을 따로 분리해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아들한테 늘 하는 이야기가 ‘네가 원하지 않는 음식은 먹을 필요가 없지만 항상 모든 것을 맛보도록 하라’는 겁니다. 음식의 다양한 맛을 느끼듯, 삶이 가진 다양성을 충분히 활용하라는 의미죠.

 

반디| 많은 단편들에서 ‘거짓말’이 나오는데요. 기본적으로 허구인 소설 속에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내는 인물이나 그 거짓말로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가 등장하는 순간, 독자의 입장에선 허구인 이야기와 거짓말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야기와 거짓말에 대해, 작가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저에게 있어 소설(fiction)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이야기(story) 혹은 거짓말을 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거짓말이 있는데요. 어떤 상황을 모면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이 있는가 하면, 동정이나 연민 같은 인간적 감정이 작용해 타인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도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면, 누군가에게 그 삶은 지금보다 조금 더 쉬워질 수 있지만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에게는 삶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살면서 거짓말을 하지만 의도는 거의 선한 것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허구인 이야기는거짓말로 점철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제가 가장 진실해질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제가 쓰는 이야기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때 거짓말과 진실,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경계를 두기보다는 그 뒤에 있는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선한지 악한지에 대해 더 중점을 두는 편이고요.

 

반디| 개인적으로 <거짓말 나라>나 <문예 창작> 같은 경우는 결말에 이르러 아쉬울 만큼 더 보고 싶은 소설이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이어질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는데요. 그만큼 이야기 내에 또 다른 이야기가 가지를 치는 식으로 쓰인 것이 꽤 있습니다. 특히 이것을 아주 짧은 단편 소설 안에서 시도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아무래도 단편소설은 형식상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기에 한계가 있을 텐데, 그럼에도 단편소설 쓰기를 선호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개인적으로 ‘선호’한다는 말은 쓰고 싶지 않아요. 저도 기꺼이 장편소설을 쓸 용의가 있긴 합니다. 출판업자도 좋아하고, 제 은행잔고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웃음) 하지만 단편소설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제가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작가인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 스스로가 결정한다고 느끼는데요. 예컨대, 어떤 문을 향해 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 문이 제 앞에서 닫히면서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있는 이야기가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르는 거죠. 이렇듯 저는, 소설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느낌을 갖는 게 독자들에게는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쓰기-읽기가 작가와 독자의 지성이 만나는 관계라고 본다면, 독자 나름대로 다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스스로 생각해보는 게 엄격한 틀에서 쓰여진 이야기를 접하는 것보다 좋을 테니까요.

 

반디|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떤 방식으로든 진실에 다가가는 작업이라면,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독자가 글로 쓰인 소설을 경유해 작가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매우 친밀해질 수 있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제가 타인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면 사람들은 그 경험을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처럼(작가님께서 실제로도 이 말씀을 하실 때 통역해주시는 여성 분의 얼굴에 본인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 들이미셨더랬습니다^^) 독자들 또한 자신만의 상황이나 감정을 갖고 책을 읽을 겁니다. 그래서 같은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독자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고요. 예를 들어, 제가 쓴 한 편의 이야기를 두 명의 감독이 각각 로맨스와 호러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같은 이야기인데도 로맨스 영화를 만든 감독은 흥미롭고 재미있게 느꼈고, 호러 영화를 만든 감독은 무서웠다고 해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진실은 외부에서 보는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라 독자들 각자가 자기 삶과 관련해 질문을 이끌어내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진실인 거죠. 

 

반디| 소설집 안에는 작가님의 번뜩이는 상상력이 가득합니다. 평소에도 상상이나 공상을 많이 하실 것 같은데요. 불시에 찾아든 어떤 상상이 한 편의 소설로 완성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작가님만의 작업 방식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소설 쓰실 때의 습관이라든지, 작업하시는 공간의 분위기 같은 것도 궁금하고요.

 

에트가르 케레트| 저는 항상 다른 것들에 대해서 상상합니다. 시간이 될 때마다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기도 하고요.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하는 생각들이요. 어릴 때도 공상이 많은 편이었는데, 제가 공상한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불편해하거나 당황스러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은행을 턴다든지,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다든지 하는 공상들은 점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게 되고, 제 사적인 감정으로만 남게 되었죠.

 

글쓰기 규칙 같은 걸 따로 정해 놓지는 않습니다.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글을 쓰려면 저 혼자만의 장소가 필요합니다. 아들이나 아내가 있으면 글쓰기에 집중하기 힘들어서요. 장소만 있다면 그곳이 깔끔한 곳인지 지저분한 곳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더운 나라다 보니 속옷 차림으로 쓸 때도 있고, 소설을 쓰면서 관련된 것들을 큰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한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예전에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외부 지원금을 받고 작가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창밖에 숲이 보이고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는데요. 한 번은 그곳에 초대된 친구가 저한테 묻더라고요. ‘네가 글쓰기를 할 때 창밖의 아름다운 숲은 보지 않고 변기를 쳐다보더라. 왜 그랬니?’ 그 질문을 받고 제가 ‘의식적으로 그런 건 아닌데 글을 쓸 때는 물리적인 실제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와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글을 안 쓸 때는 저도 아름다운 경관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물리적인 장소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반디|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뜨겁고 민감한 곳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래서 타국의 사람들에겐 이스라엘의 문학작품보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이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것도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작가님께 어떤 의미일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이스라엘이 분쟁과 갈등이 많은 지역이긴 하지만, 살기에는 나쁘지 않은 곳이고 글쓰기에는 더없이 좋은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으로 이야기는 갈등관계와 다양성에 기반을 두고 쓰여지는데, 이스라엘만큼 갈등관계가 많은 곳도 없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사람에게 이스라엘은 천국과도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가끔 상상을 하게 되는데, 공항에서 여권 검사를 할 때 좋은 이야깃거리가 있는지를 보고 통과를 시켜주는 겁니다. (웃음)

 

반디| 살만 루슈디, 아모스 오즈, 조너선 사프란 포어, 얀 마텔 등 동시대 각국의 작가들에게 호평을 받으셨습니다. 작가님께도 한 사람의 독자로서 호평을 보내고 싶은 작가가 있을 텐데요. 동시대에 주목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면, 해당 작품과 그 이유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동시대 유대계 작가들과 매우 인상적인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마이클 샤본’ 등인데요.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정체성입니다.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작가들에게서는 이와 같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는데, 저의 경우는 오히려 외국에 사는 유대계 작가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반디 | 정체성의 문제를 말씀해주셨는데요. 자국 내 작가들이 느끼는 정체성과 이주한 작가들-디아스포라-이 다른 나라에서 고민하는 정체성은 그 본질에 있어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정체성 문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질문을 항상 하게 되니까요. 만약 내가 유대계 미국인이나 유대계 프랑스인이라면 어느 쪽 정체성에 더 가까운지, 자신을 규정하는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학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주제를 쓰게 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죠. 이스라엘인이 곧 유대인이니까요. 그래서 이스라엘 문학에서는 개인적인 정체성 문제보다 집단적인 이슈, 어떤 것이 국가에 이해득실을 가져오는지를 고민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심리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더 가까이 느끼는데요. 굳이 정체성을 구분하자면 제 자신이 이스라엘인이라기보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더 강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어떤 그룹에 속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어떤 측면에서 나와 맞지 않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동질감을 느끼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디|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감정을 중요시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체성 문제에 대한 작가적 관심이 국가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어진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대개의 사람들이 국적에 따른 정체성을 당연시하지만, 제가 쓰는 이야기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국적이 본질적으로 내재적으로 설정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늑대는 그저 한 마리의 늑대로 살아갈 뿐, 자기가 어떤 군락에 속해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사실상 국가라는 형태가 역사에 등장한 지는 얼마 안 됐고, 그 전까지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부족 형태로 살았잖아요. 이 국가라는 개념을 아파트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파트에 사는 세입자들이 공용 구역 청소를 얼마나 자주 하고, 침입자로부터 어떻게 사람들을 보호할 지 다같이 고민하는 것처럼, 국적을 선택하는 일도 같은 식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유대인은 꼭 이스라엘계가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이 국가와 연관된 자기 정체성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제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대해 감정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그들의 문화가 개별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코스모폴리탄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고요.

 

반면에 이스라엘처럼 국적을 중요시 여기는 나라에 사는 것은 심리적으로 부담이 됩니다. 제가 ‘텔아비브’의 작은 동네에서 살았는데요. 여섯 살 때 축구 토너먼트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게 태어나 처음 보는 축구경기였는데, 저희 동네 팀과 다른 동네 팀이 겨루는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보다 보니 다른 동네 팀이 신사적인 태도로 경기를 더 잘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쪽을 응원했는데, 선생님이 왜 다른 쪽을 응원하느냐고 해서 반발심을 느꼈었습니다.

 

또 제게는 형 한 명과 누나 한 명이 있는데, 형은 무정부주의자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건국이 정당화될 수 없고, 그래서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소수인종으로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누나는 신앙심이 굉장히 깊어서 종교지도자가 곧 정치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열한 명의 아이와 열 명의 손자를 갖고 있는 분이죠. 그런데 이렇게 형제 자매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 형제 자매는 모두 친절하고 따뜻하고 똑똑한 사람들이니까요. 오히려 제가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제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탈세를 하기도 하니까요. 말하자면, 사람을 볼 때 개인을 바라보지,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반디| 소설뿐 아니라 영화도 연출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작가님의 상상을 구현하는 데 있어, 소설과 영화 각각의 매력이 무엇인가요? 

 

에트가르 케레트| 영화의 매력은 여러 사람이 협업한다는 데 있습니다. 애초에 제가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 것인데, 글쓰기 자체는 작가가 혼자서 해야 하는 외로운 작업이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연극이나 영화에 관심이 생기고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저는 다른 사람과 일하면서 느끼는 연대감을 원했고, 그런 측면에서 영화가 큰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일하는 사람들과 연대감을 갖을 수 있저는 일하는 사람들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일하기를 선호하는데,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과 일하고 싶습니다. 

 

반디|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만큼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한국의 소설이나 영화, 혹은 그 밖의 문화를 접해보셨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부끄럽게도 한국에 대해 거의 모른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책을 읽은 적은 없지만, 굉장히 훌륭하고 유명한 한국영화 제작자들이 만든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호기심도 생기고 한국문화에 대해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껴져 앞으로 한국에 대해 더 배워볼 생각입니다.

 

에트가르 케레트(Etgar Keret)

 

이스라엘 젊은 세대의 가장 큰 지지를 받는 단편의 귀재이자 <뉴욕 타임스>로부터 '천재'라는 찬사를, 살만 루슈디, 아모스 오즈, 얀 마텔, 조너선 사프란 푸어 등 동료 작가들의 극찬을 받은 동시대 가장 독창적인 작가. 1967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1992년 소설집 《파이프》로 데뷔했다. 두번째 소설집 《미싱 키신저》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후 정체성과 사랑에 대한 고뇌, 고독감 등을 초현실적으로 그려낸 단편들을 발표해 카프카에 비견되었다. 《신이 되고 싶었던 버스 운전사》를 비롯해 《냉장고 위의 소녀》《네 편의 이야기》 등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여러 소설집이 35개국 3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여덟번째 소설집으로 기발하고 독창적인 스타일이 무르익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스라엘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2012년 미국에서 여섯번째로 번역 출간되어 그해 아마존 '올해의 책'에 선정된 것은 물론, 전 세계 22개국에 판권이 팔리는 등 세계적인 작가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밖에도 몇 권의 만화책을 공동 집필하고 어린이책을 썼으며 본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다른 예술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어 몇몇 단편이 그래픽 노블 《시차증》《가미카제 피자집》으로 묶여 나왔고, <리스트 커터스―어떤 사랑 이야기>의 원작인 중편소설 〈크넬러의 행복한 캠프 생활자들〉을 비롯해 40여 편의 작품이 영화화되었다. 그 자신도 영화에 조예가 깊어 아내와 공동 연출한 <젤리피시>가 2007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고 지금까지 영화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스라엘 출판협회에서 수여하는 플래티넘 상, 총리상 문학 부분, 문화부장관상 영화 부분을 수상했고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훈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미란다 줄라이가 수상하기도 한 국제적 권위의 단편문학상 프랭크 오코너 국제 단편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현재 네게브의 벤구리온 대학교와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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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테스터] 《장마딩의 여덟째날》 북테스터 20분 모집!

 

'삼화 출판사'에서 나온 신간 《장마딩의 여덟째날》을 읽고 리뷰를 써주실 북테스터 20분을 모집합니다. 19세기 말 중국 의화단 운동을 배경으로 한 《장마딩의 여덟째날》은 비이성적 광기에 휩싸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초하고 절망하며 고뇌하는 인간, 장마딩의 삶을 그려냈는데요. “모든 출로가 없는 절망과 반항, 모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산천 풍경, 민간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온갖 모습과 반복적인 대비”를 통해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이 만든 가장 이성 없는 역사가 인류 자신을 옭아맨,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를 작품화”한 소설입니다.

 

집단의 욕망이 광적으로 분출되는 역사 상황에서 내내 말할 권리 없이 사회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이의 목소리가 담긴, 《장마딩의 여덟째날》. 그 소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신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도서명: 《장마딩의 여덟째날》
■ 도서 상세정보 : http://www.bandinlunis.com/front/product/detailProduct.do?prodId=3550951
■ 모집 기간: 12월 10일(월) ~ 12월 16(일)
■ 모집 인원: 20명

 

■ 선정 기준:
□ 신청 댓글의 내용과 반디지수, 반디앤루니스 '나의 서재' 활동을 참고해 선정합니다.
□ 이전에 반디앤루니스 북테스터로 선정되셨던 분들의 경우, 해당 도서에 대한 리뷰를 참고해 선정합니다. 
□ 북테스터를 통해 반디앤루니스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되신 분들의 경우, 신청 댓글란에 이전에 작성하셨던 도서 리뷰의 페이지 주소(개인 블로그)를 함께 남겨주시면 선정에 참고하겠습니다. 

 

■ 발표: 12월 17일 (책과 사람 -> 북테스터 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배송지 확인 : 12월 17(월)~ 12월 18일(화)
■ 도서 발송: 12월 19일(수)
■ 서평 완료: 1월 6일(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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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 읽니?] 조현,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조현 |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 민음사 | 2011

 

저는 요즘 지난주 에디터의 북카트에서 소개해드렸던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를 읽고 있습니다. 카트에 담은 뒤 허겁지겁 사들인 이 책을 펼치자 그런 저를 기다렸다는 듯 표제작이 가장 먼저 실려 있었습니다. (아, 그보다 먼저 차례와 각 단편들의 제목 페이지는 영수증 모양으로 디자인 되어 있는데요. 평소 영수증을 모으고 영수증 일기를 종종 쓰곤 하는 터라 점점 더 이 책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는 한 권의 페이퍼백에 얽힌 우연 내지 시적 상상력의 역사이다. 우연이나 시의 작용에 관심이 없다면 단순히 햄버거의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 요악된 두 문장을 길게 펼쳐놓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햄버거'라는 시인의 시집 'Brownjohn, Hamburger, Tomlinson'이 어떠한 우연의 여정을 따라 정크푸드의 역사, 햄버거의 역사에 기여하게 되는지가 유쾌한 필치로 그려져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실제로 마이클 햄버거라는 시인과, 펭귄 출판사에서 출판된 동명의 시집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구글에서 검색하면 '실제로' 그들이 나옵니다!) 물론 그 뒤의 이야기는 허구이겠지만요. 그러고보니 저 첫문장이 의미심장하게 읽힙니다. 저는 이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를 읽어가다 반가운 이름을 발견하고 웃음 지었는데요. 그 이름은 작품 속 펭귄 출판사의 편집자로 나오는 '이본 마멜'이었습니다.

 

 

'이본 마멜'은 제가 몇 개월 전 읽었던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이란 소설 속의 편집자로 등장하는 인물이거든요. 꽤 두툼한 책이었던 <소설>을 읽느라 오랜 시간이 걸린지라 그 이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게 되었던 거죠. 게다가 비록 출판사는 다르지만(<소설> 속 이본 마멜이 일하는 출판사는 키네틱 출판사), 편집자라는 같은 직업을 가지고 등장하는 '이본 마멜'을 만나게 되니 마치 고등학교 동창생이라도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두번째로 실려 있는 단편은 작가의 등단작인 '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입니다. 이 작품에는 '냅킨 혹은 T.S. 엘리엇의「황무지」중 "Ⅳ. Death by Water"에 대한 한 해석'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밝히기 부끄럽지만) 어렴풋하게 영문학 전공자였던 듯도 한 저는 T.S. 엘리엇의「황무지」라는 단어를 보자 난해함에 그를 증오하기까지 했던 학부시절이 문득 떠올랐더랬습니다. 더불어 도대체 종이 냅킨과 T.S. 엘리엇, 황무지가 무슨 관계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었죠. 자, 그들의 자세한 관계파악을 위해 전 이만 총총!

 

- 컨텐츠팀 에디터 료(fololy@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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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호텔> - 고양이를 만나러 오세요

 

김희진, <고양이 호텔>, 민음사, 2010

 


시골에서 막 낳은 강아지를 가지고 올라온 적이 있었다. 고속버스에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오는 내내, 짐칸에 실려 온 그 아이는 서울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란 기생충을 몇 마리나 토해내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타보는 자동차에 멀미를 한 것이겠고, 시골 마당에서 아무 것이나 주워 먹은 탓에 뱃속에 우글대던 기생충들이 그 울렁거림을 이기지 못하고 쏟아져 나온 것이리라. 어린 마음에 예뻐서 데려온 그 아이가 죽지나 않을까 털컥 겁이 났다. 사실 동물은 절대 키우지 않겠다는 부모님을 설득해서 두 살 터울인 언니와 고집을 부려 데려온 아이였다.

시골 마당에 있었다면 저렇게 기다란 기생충을 토할 일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데려온 아이를 물신양면으로 돌봤지만 결국 그 아이, 한 달을 견디지 못하고 차가운 거실 한쪽에서 코피를 쏟아가며 떠나 버렸다. 처음으로 만난 죽음이었지만, 어린 마음에는 강아지가 죽었다는 무서움보다 죽어버린 그 아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먼저였다. 사실 엄마에게 혼날 일이 더 무서웠던 것이다. 강아지 데려오는 걸 결사적으로 반대한 엄마였으니까.

십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아이를 어떻게 했는지는 어쩐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딘가에 묻어줬던 건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처리해 버렸는지. 결국 작은 몸으로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버스 여행이 그 아이의 마지막 외출이 돼 버린 것이다.

김희진의 <고양이 호텔>에는 여행을 떠나온 수많은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고요다'와 함께 살아가는 고양이들, 버려진 길고양이를 데려다 키운다기에는 어쩐지 기괴한 모습의 그들은 분명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한 문학상 공모에 당첨되어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고요다는 언론에 노출을 극히 꺼리며 그 고양이들과 함께 세 개의 탑이 세워진 현대판 라푼젤의 성에 살고 있다.

그러던 중, 인터뷰를 하러 그녀의 성에 찾아온 '강일한' 기자와의 만남으로 고양이와의 생활을 즐기며 살아가던 그녀의 삶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작가가 묘사하고 있듯, 라푼젤의 긴 머리카락이 내려올 것 같은 난공불락의 성에 강인한이 침입한 것이다. 그는 기자라기보다 라푼젤을 성에서 끌어내려줄 왕자처럼 다가왔다. 인터뷰를 방패삼아 고요다의 삶에 조금씩 침범해 들어간 그는, 그녀가 만들어 놓은 규칙들에 딴지를 걸기 시작한다. 혼자 하는 생일파티에 동의 없이 참석하고, 매주 찾아오는 그녀의 섹스 파트너들, 결정적으로 그녀의 고양이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고요다의 고양이들은 '생각보다 지조 없는' 이름 대신 번호가 매겨져 있고, 목에 달린 끈의 색으로 그 중함이 표시된다.

외로운 그녀 고요다와 그를 구해 낼 강인한의 만남.

나는 이 둘의 만남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으나 김희진이 과연 그들을 해피엔드로 이끌 것인가에 대해서는 작품의 끝까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 작품을 만들어 낸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건 라푼젤 동화의 형식을 참고한 것이지 현대판 라푼젤이 아니다. 갑자기 등장한 '거구녀'는 라푼젤을 성에 가둔 마녀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일 뿐, 동화 속의 마녀는 아니었던 것이다. 거구녀의 등장으로 강인한과 고요다는 위기를 맡게 되고 고난의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물론 강인한은 인터뷰이로써의 고요다만을 원할 뿐이지만 말이다. 결국 마음이 동한 고요다의 심장은 조금씩 뛰기 시작하면서 마음으로 그들 받아들이게 된다. 그 이면에 강인한의 사기극이 있었을지라도, 외로운 고요다는 그것 역시 순진하게 믿어 버리는 것이다.

"정말로 그의 몸은 수술 자국투성이다. 가슴 한가운데로 뻗어 내려온 자국과 아랫배와 옆구리를 가로지른 자국이 선명하게 돋아나 있다. 그는 어제 저것 때문에 웃통을 벗지 않았던 것이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인간이란 모두 저마다의 아픔과 상처를, 고작 단추 몇 개로 숨긴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김희진의 <고양이 호텔>에서 고양이들은 중요한 매개체로써의 역할인 동시에 외로운 고요다의 동반자이다. 고양이와 외로운 젊은 여자, 그리고 그를 찾아온 젊은 남자. 그 둘의 의미심장한 사흘간의 동거, 그리고 나타나는 마녀, 거구녀의 방해. 결국 밝혀지게 되는 고양이들의 정체. 어찌보면 삼류 소설의 레퍼토리를 차용하고 있는 이 작품은 김희진의 힘있는 필력으로 결코 지루하지 않게 흘려간다.

외로움에 지친 일상인들에게는 한번쯤 꿈꿀 수 있는 판타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큰 위로가 되는 작품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김희진의 작품 속에서 고양이들은 내내 상처와 위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아무리 고요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도 곁에 없는 적막한 시간을 견디는 것은 두려움의 시작일 수 있다.

외로운 고요다의 곁을 지키고 있는 수많은 고양이들. 고양이와 고요다의 성으로 외로움을 치유하러 떠나 보는 것. 그것이 또 하나의 상처를 남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도전해 볼만한 일이다. 김희진의 필력으로 또 다른 희망을 보게 될 것이니...

 

오늘의 책을 리뷰한 '토토실~*'님은?
언젠가 내 이름으로 된 수필집 하나 갖는 게 소원인, 일상에서 만나는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유쾌한 독서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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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시절> -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조지 오웰, <바머시절>, 열린책들, 2010

 


1920년대 중반, 영국의 식민지 버마. 조지오웰의 <버마시절>은 영국에 기생해 권력을 휘두르고,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위해 새로운 음모를 꾸미는 하급 치안 판사 ‘우 포 킨’으로부터  시작된다. 개발을 통한 문명화의 논리로 영국의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원주민 의사 베라스와미, 이를 부인하며 영국 제국주의의 본질은 사실상 세계 평화를 위한 희생이 아닌 강탈을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플로리. 이 둘 모두는 우 포 킨이 식민지 권력의 핵심인 유럽인 클럽에 들어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에서 희생의 제물로 선택된 인물이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오 포 킨의 사악한 계획은 성공으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 사이를 채우고 있는 아이러니, 피지배자의 희생의 제물이 돼버린 지배자의 예정된 파멸. 게임의 승패는 결정났지만, 승자와 패자 그 누구도 해피엔딩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결말.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 그리고 권력을 향한 맹목이 낳은 비극.

<버마시절>은 조지 오웰이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버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입장에서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식민주의자들이 문명화라는 논리로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의 불합리함을 여실히 보여주며, 이와 함께 이러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면서도 단호하게 이를 끊어내거나 맞서 투쟁하지 못하는 나약한 한 인간(플로리)의 내면적 고뇌와 절망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한 인간과 제국주의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이의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자살이라는 결말로 이어진다. 플로리의 ‘버마시절’은 끝이 났고, <버마시절>의 이야기 또한 끝이 났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그간 인류의 역사에 수많은 비극을 새겨 넣은 인종적 편협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문명이라는 독단적 입장으로 문명화되지 않은 것들의 가치가 매겨지고 있으니. 게다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인간의 욕망은 부와 권력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만족을 모르지 않던가.

결국 모든 비극은 자기 본위 대로 매겨진 우월의 가치가, 차이의 단순함을 지우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것을 채우고 지키기 위해 버려진 것들이 타인의 비극, 혹은 인류의 비극을 지속시킨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부와 권력을 얻고 승리감에 도취된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가 얻기 위해 버린 것이 정작 '인간다움'일지 모르며, 그러므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결말 또한 비극이라는 것을.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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