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에 해당되는 글 32건

  1. 2015.03.02 『우스운 사랑들』 -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2. 2015.02.26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 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3. 2015.02.25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 삶은 어딜 가든 따라온다
  4. 2015.02.24 『사월의 미, 칠월의 솔』 - 한때는 내가 정말 사랑했던
  5. 2015.02.17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너의 사랑 나의 사랑
  6. 2015.02.16 『카프카 평전』 - 밤이 오면 글을 쓸 것이다
  7. 2015.02.13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의 위로하는 마음
  8. 2015.02.12 『내 심장을 쏴라』 - 내 심장을 쏴 봐
  9. 2015.02.11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 젊은이의 음지
  10. 2015.02.10 『아내의 빈방』 -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우스운 사랑들』 -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밀란 쿤데라 | 『우스운 사랑들』 | 민음사 | 2013


우리가 위대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데,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또는 쇼팽과 조르주 상드 이들의 사랑에 왜 감동하는 것일까? 거세된 아벨라르 곁에서 충실하게 곁을 지켰던 엘로이즈와 정신적 관계를 추구했던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특별한 그 무엇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일까? 처음엔 달콤한 꿈처럼 느껴지던 감정들이 점점 더 건조한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푸석한 감정으로 바뀌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는 사랑에 관한 문구, 문장, 해석이 무수히 존재한다.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떠올릴 때면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이 먼저 떠오른다. 파스칼 키냐르는 "사랑할 때 연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그림자를 향해 몸을 돌리지만 서로 껴안으면서 그림자를 뭉개버린다."고 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나 그 감정의 토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인 것 같다. 사랑하는 이의 감정을 더 충실하게 알기 위해 상대방을 껴안고 감정이 포개어지는 순간, 그들 각자의 그림자는 형체가 없어져 누가 누구의 그림자인 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사랑의 아이러니'다.

밀란 쿤데라의 『우스운 사랑들』은 일곱 개의 단편집이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에 집착하고 사랑의 감정에 진실하지 못하기에 우스운 사랑이고, 굴욕적인 모습으로 삶이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누구도 웃지 않으리」에서는 스리보비체라는 교수가 주인공이다. 그는 자투레츠키라는 사람이 쓴 논문의 비평을 써주기로 약속하고 점차 미루는 과정에서 자신의 연인 클라라를 끌어들인다.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자 그는 클라라를 이용해 자신의 복잡한 현실을 피하려 한다. 자신에게 놓인 불리하고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클라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스리보비체는 클라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다. 클라라는 오히려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생각으로 스리보비체를 떠나려 한다. 스리보비체의 모습은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가느라 정작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대변한다. 제목처럼 그 누구도 웃을 수 없는 씁쓸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예측 불가능한 사랑의 이야기는 「에드바르트와 하느님」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자신이 욕망하는 감정을 겪고 난 후 뜨거웠던 사랑의 감정이 식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에드바르트는 여자 친구인 알리체의 육체를 욕망하지만 그녀는 크리스천으로 독실한 신자다. 알리체는 믿음이 없는 에드바르트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주겠다고 선언하면서 에드바르트는 거짓으로 하나님을 믿는 척해야 한다. 에드바르트는 교장과의 면담 이후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자신의 불온한 정신을 들키고, 교사 직책에 불안을 느끼게 되자 하나님을 믿는 척하는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몰입한다. 결국 에드바르트는 자신에게 의혹을 제기한 교장과의 갈등, 거짓으로 둘러싸여 불안의 요소를 만들어낸 모든 인간관계가 단조롭고 의미 없는 기호들이라고 생각한다. 알리체를 사랑했던 감정까지 혼란스러워지자 그는 진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에드바르트를 보면서 현대인들의 낯익은 모습을 보는 듯했다.

「영원한 욕망의 황금 사과」는 믿음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과도한 믿음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인생에서 함정이 될 수 있고, 배교자나 이교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히치 하이킹 게임」은 단순한 게임에서 시작되었던 서투른 사랑놀이가 죽음의 계약서와 같이 서로를 파멸시켜 간다는 내용이다. 순수했던 두 남녀의 단순한 게임은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해 쌓여지지만, 동시에 모방된 언어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읽고 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랑의 감정이 사람을 가장 나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랑의 폭력은 우리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하다. 세상에는 사랑만큼 위대한 것이 없고 또 사랑만큼 힘든 일도 없는 것 같다. 위대한 사랑에는 존재하고, 우리들의 사랑에는 없는 것이 상대방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보통 사람들의 사랑에 진실한 마음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표현은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감정과 연결돼 있다. 인간관계의 무대 위에 서다 보면, 때때로 눈이 가려진 채 연기를 하거나, 누군가가 무대의 배경과 장치를 바꿨는데도 모르고 계속 연기를 하다가 실수와 오해를 사기도 한다. 모든 감각과 감정에 집중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러한 실수와 오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실수와 오해가 없었다 해도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뿐 이기적인 감정은 늘 이타적인 마음을 이긴다. 상대방 본연의 색이 드러날 수 있도록, 또는 나와 상대방의 그림자가 뭉개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 어렵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는 순간, 자신의 언어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오색 무지개 색깔 같았던 사랑의 감정이 단일한 회색 그림자가 되는 것을 목격하고 만다. 그러한 상황들은 "우리는 모든 색깔을 다 보여줄 수 있지만 아무리 변화무쌍한 카멜레온도 흰색을 보여 줄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도르비이의 말처럼, 수많은 색 중에서 정작 흰색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대방이 가진 본연의 색깔을 가끔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뭉갠다. 자신의 색은 '언어'라는 화려함으로 치장하기 바쁘다. 마치 무수히 찍힌 점들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었단 '쇠라'의 그림처럼 가까이 가서야 어떤 색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사랑의 실체는 이와 비슷하다. 이론적인 현실 속에서 복잡하고도 미묘한 '사랑의 거리'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완전한 사랑은 적절한 거리의 침묵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muo'님은?

삶의 모든 흔적 때로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고 있지 않는 듯한 책들을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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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 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김형수 |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 아시아 | 2014


이 책의 서평을 쓰기 위해 30분이나 방황했다. 책 속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다시 읽어보며, 수첩에 손으로 꾹꾹 옮겨 썼다. 그리고 다시 읽으며 그 문장이 뿜어내는 많은 추억과 생각의 파편들을 곱씹고 보니 30분이 흘렀다.

“오늘 이야기는 프롤로그에 속하는데, 작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피력하는 자리라 여기시면 되겠습니다.”

이 책의 주제는 위의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책의 깊이나 가치는 제외하고, 그저 무슨 책인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30분이나 방황한 후의 내 가슴은, 이 책의 서평을 ‘글쓰기로만’ 쓰지 말자고 말한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선물’이란 단어가 머리를 꽉 채우고 있다.

“인간은 흔들리면서, 뼈아프게 후회하면서, 자기 성찰의 낯 뜨거운 시간을 견디면서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는 생각...”

“종소리는 아무런 글자도 싣고 오지 않아요. 그런데 울려오는 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과 마찰이 되면서 어떤 느낌을 안겨다 줍니다. (...) 시는 언어를 마치 피아노의 건반을 다루듯이 다룹니다. 건반이 배,고,파 하고 말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이 거기에서 오래 굶은 자의 슬픔을 전달받는 거예요."

뼈아프게 후회하기, 낯 뜨거운 자기 성찰의 시간, 그런 것들이 쌓여 우리의 삶이 조금씩 완성되어간다는 말들을 읽었다. 이 말들이 나의 마음과 마찰하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을 멈춘다.

“겉으로 보이는 숱한 현상들이 섬세한 사유의 ‘체’로 걸러지고 전형화의 대패질에 벗겨져 나가 마침내 속을 드러내게 된 논문과 문학작품으로 변했을 때에야 비로소 쉽고 명쾌하며 의미 깊게 다가오지요.”

2월의 첫날, 일기장을 펼쳤을 때 ‘선물’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나는 한 달을 또 선물 받았다. 1월은 너무 갑작스레 찾아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건 아닐까 후회하며 2월의 첫날을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1년이라고 하면 길게 느껴져 지루해지지만 1년을 다시 열두 달로 나누어 이렇게 한 달씩 선물 받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새롭다. 1월의 부족한 점을 만회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제와 같은 오늘이란 지루함, 권태로움도 사라진다. 몇 십 년째 반복되고 있는 2월 1일이지만, 위의 문장에서 말하듯, 나의 ‘사유의 체’로 걸러진 하루는 반복된 2월 1일이 아닌 특별한 ‘오늘’로 다가왔었다.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놀라운 측면은 글 쓰는 행위 안에 세계를 인식하는 기능이 숨어 있다는 겁니다. (...) 낡은 사회의 가장 구체적인 산물인 나 자신이 새로운 나로 태어나려면 글쓰기를 해야 하고, 이 글쓰기가 세계에 대한 인식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장차 위대한 작가가 될 꿈이 있거나 말거나, 적어도 전인교육을 실시하려면 학생들에게 글쓰기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글쓰기 열풍 시대라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글쓰기 관련 책도 많아졌고 블로거의 글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결국 내가 이렇게 나를 알고 싶고 글을 쓰며 마음을 헤아렸던 것이 알고 보니 나의 의지가 아니라 유행하는 옷을 좇아 입었던 것에 불과했구나, 라는 생각에 조금 기운이 빠지긴 했다. 나의 생각이라 믿었던 것이 어쩌면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가 주입한 남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거나 작가가 되는 것은 어렵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쓰기가 보상도 없고 출세도 보장 안 되는 죽음의 길이라고 썼다. 이 책의 저자도 ‘풀과 나무’에 빗대어, 문학의 길이 얼마나 더디고 먼지 말한다.

“봄에 싹이 돋을 때 풀과 나무는 떡잎 상태로 구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오뉴월이 되면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나무를 덮어버리지요. 그런데 가을이 되어서 찬바람이 불면 풀은 말라서 소멸하기 시작하고, 겨울이 오면 완전히 모습을 잃어서 이듬해 봄에는 무의 상태에서 다시 떡잎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그에 반해 나무는 풀보다 성장하는 바가 훨씬 더뎌 보이지만, 가을이 되고 겨울이 와도 존재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계속 움츠러들지만 자신의 몸에 나이테를 남겨서 이듬해 봄이면 전년도에 성장한 자리에서 다시 싹을 돋우지요. 이 때문에 풀은 숲이 되지 못하고 나무는 숲이 됩니다. 문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풀의 길을 가는 자는 소멸할 것이고 나무의 길을 가는 자들이 숲을 이룹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옳은지 두려울 때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위로의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일까. 이 겨울을 이겨내면 분명 그만큼 나는 성장해 있을 테니 불안해하지 말고 견디어 보자,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과거의 한 사람을 떠올렸다. 몇 번이나 좌절을 반복해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 나와 내 친구를 위해 편지를 써 주신 분이 계시다. 그분은 방송에서 ‘이겨낸’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나와 친구에게 전해주셨다. 그때 나는 마음을 선물 받았다.

“글을 쓰는 과정이 단지 생각을 글자로 베껴내는 과정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새로운 자기로 깨어나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서평을 쓰며 내가 오늘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게 된다. 이 서평을 쓰기 전의 나로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나로 깨어난 것 같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reella'님은?

책과 글을 사랑합니다. 책은 저의 친구이자 연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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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 삶은 어딜 가든 따라온다



마루야마 겐지 |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 바다 | 2014

미디어에서 조장한 농촌의 모습에 속아, 은퇴 후 아무 생각 없이 시골에 내려가 은퇴자금마저 다 쓰고, 빈민이 되어 도시로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매정한 대도시의 삶을 뒤로하고, 공기 좋고 물 좋고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는 인정 넘치는 이웃 사촌이 즐비한 곳이 농촌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미디어의 조장이 아니라면 과연 이러한 농촌의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을까? 실제로 농촌에 살던 많은 젊은이가 도시로 이동하는데, 과연 그들은 대도시 사람들이 귀농을 꿈꾸며 그토록 떠나고 싶어하는, 바로 그 대도시로 유입된 걸까? 이 질문에 대해 엄밀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결국 귀농을 해도 만족할만한 생활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마루야마 겐지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직설적으로 늘어놓는 사람인데, 이 책에서는 미디어에서 조장된 귀농과 농촌생활에 대한 환상을 깨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듯하다.


어렵게 돌려 말할 것도 없이 대도시처럼 수많은 인간이 익명성을 갖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사는 생활방식에 비해, 농촌의 경우 몇 세대에 걸쳐 같은 장소에서 모여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도시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 농촌 주민들은 마을 구성원들의 사생활에 서로 깊숙이 개입하는 삶을 살아오곤 했다. 그러니 미디어에서 조장한 인간미 넘치는 농촌생활의 실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대도시에서 생활했던 이들의 기준으로 봤을 경우, 터무니없는 사생활 침해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농촌에는 마을만의 무언의 생활규칙이 있다. 외지인이 암묵적인 규칙을 어길 경우,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한편 저자는 치안에 대해서도 논한다. 대도시의 경우 농촌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아주 좁은 지역에 인구가 밀집해서 살고 있기에 치안이라는 측면에서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지방의 경우 넓은 면적 대비 경찰의 수치는 대도시의 그것과 비교할 경우 현저하게 낮다. 결국 이는 치안 서비스의 질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서울특별시 중구의 치안 수준과 경기도 포천, 양주, 광주 같은 넓은 행정구역의 치안 수준이 과연 같을까. 단위 면적당 배정된 경찰의 수치는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되리라 본다.


마지막으로 건강에 대한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 대도시에는 다양한 종류의 의료기관을 비롯하여 종합병원 응급실이 존재한다. 하지만 시골은 반대되는 의료 환경을 지닌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 책의 주된 소재를 귀농으로 삼았지만, 본질적으로 인생의 무게는 무거울 수밖에 없으며 그 무게라는 것이 농촌으로 거처를 옮긴다고 해서 더 가벼워지는 건 아니라는 걸 독자들에게 격정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막연히 낙원이 존재하리라는 믿음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마주할 때 오히려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간명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이 마주하기 싫어하는 내용을 '귀농'이라는 소재로 풀어낸 마루야마 겐지! 그의 힘 있는 문체 때문이라도 열혈의 에너지가 필요한 이들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 여겨 추천하고 싶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청아'님은?

Ex Libris 블로그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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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 한때는 내가 정말 사랑했던


김연수 | 『사월의 미, 칠월의 솔』 | 문학동네 | 2013


대학 졸업반 시절에 만났던 남자친구는 문학을 사랑하는 '문청(문학청년)'이었다. 문학이라면 한국문학과 외국 문학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고, 문학 관련 잡지도 찾아 읽었다. 그는 신춘문예에 도전할까 고민할 정도로 문학을 좋아했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출판사에 취직하고 나는 다른 길을 택하면서 우린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요즘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맨 뒷장에서 이 책의 편집, 디자인, 마케팅을 누가 했는지 본다.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찾게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을 봤었다. 요즘은 통 못 봐서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다. 그토록 꿈꾸던 신춘문예에 도전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유학이라도 간 걸까.

김연수의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도 헤어진 연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벚꽃 새해」의 주인공은 성진과 정연이다. 예전에 선물한 시계를 돌려받고 싶다는 옛 여자친구 정연의 요구에 성진은 아연할 수밖에 없다. 헤어진 남자에게, 그것도 6년 전에 준 선물을 내놓으라는 정연의 요구가 황당하기도 했지만, 실은 그 시계를 전당포에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더 황당한 건, 고가의 명품인 줄 알았던 그 시계가 알고 보니 짝퉁이었던 것. 시계를 되찾기 위해 성진과 정연은 다시 만나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둘은 연인이었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내 마음을 울렸던 건 성진의 대사다.

"그게 그렇더라구. 어릴 때만 해도 인생이란 나만의 것만 남을 때까지 시간을 체로 거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른이 되고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더라. 막상 서른이 되고 보니 남는 게 하나도 없어. 다 남의 것이야. 내 건 하나도 없어." (29~30쪽)

둘이 사귈 때는 영화 속 여배우의 대사마저도 내 것 같았다는 정연의 말에 성진은 다 남의 것이고 내 건 하나도 없다고 자조한다. 정말 그렇다. 사랑할 때는 거리에 울려 퍼지는 온갖 사랑 노래가 다 내 이야기 같고, 이 사람이 내 것 같지만, 헤어지면 내 것도 네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품인 줄 알았던 사랑도 언젠가는 짝퉁만도 못한 싸구려로 전락하리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내 건 하나도 없'는 것만은 아니다. 성진이 언젠가 둘이 함께 갔던 휴양지 호텔방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의 모습을 아름답게 기억하듯이, 그 어떤 사진이나 영화 속 장면보다도 강렬하게 남아있는 연인의 모습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보물이다. 사랑이 끝나도, 그 사람을 더 이상 못 보게 되어도 기억만은 온전히 내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게 남아 있어서 인간은 아무리 이별이 슬퍼도 다시 사랑하고, 다시 사랑할 사람을 만나려 하는 것이 아닐까.

한때는 꿈 많은 대학생이었던 그 남자와 그 여자. 문학을 사랑하던 그 남자를 동경했던 그 여자는 이제 그를 동경하지도 않고 남자를 따르는 대신 택했던 길을 걷고 있지도 않다. 다만 그가 좋아했던 소설을 읽고, 그가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책을 읽는다. 가끔 그를 추억할 뿐이다. 때로는 그런 사람이 내 인생에 정말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 다시 사랑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남기고 간 '내 것' 덕분임이 분명하다. 그 덕분에 나는 책을 좋아하는 남자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다시 사랑할 때는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책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택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그는 나에게서 무엇을 '내 것'으로 취했을까?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블로그에 올리신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의 다른 서평을 읽어 보았습니다. 이 소설은 어쩔 수 없음의 정서를 그리고 있다는 말에 공감했습니다. 부재, 아쉬움, 무력하고도 귀한 감정이 담긴 책을 읽을 땐 그 책을 읽는 시간도 무시할 수 없겠죠. 단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하루 중 어느 시간에 읽어야 좋던가요?

저녁 퇴근길,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밤, 할 일 없는 주말 낮 등 여러 시간에 이 책을 읽었는데, 그중 가장 좋았던 시간은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친 밤이었습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이 대개 그렇지만, 이 책은 옛 애인, 돌아가신 부모님 등 과거의 인물을 회상하는 내용이 많아서 팍팍한 현실을 잊고 추억에 취하고 싶어지는 밤에 읽기 좋았습니다. 단편집이라서 한 편씩 읽고 잠을 자기에도 좋았고요.

● 이번 서평에는 쇼키치님 개인의 사연이 퍽 담겼습니다. 이 서평을 마친 후 기분이 어떠셨을지 궁금합니다.

청춘에 관한 글을 많이 쓴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20대 초, 중반의 일이 많이 떠오릅니다. 책에 실린 「벚꽃 새해」라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학 졸업 무렵 사귀었던 사람을 떠올렸고, 그 사람을 생각하며 서평을 썼는데요, 서평을 마치고 나서는 그 사람보다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리워 마음이 아팠습니다.

● 펜벗 앨범을 다시 열어 쇼키치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20대의 많은 시간을 독자와 서평 블로거로 보냈고, 30대는 '지은이'로 거듭나고 싶다고 하셨어요. 책을 써 볼 생각이라면, 어떻게 쓰실 건가요?

20대에 고시, 취업, 전직 등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하고 실패하며 힘든 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소설을 읽으며 기분을 전환하거나 경제, 경영, 자기계발 책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만약 책을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처럼 책을 통해 위로 받고 싶고 답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소개하는 책을 써보고 싶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요네하라 마리처럼 기발한 발상이 빛나는 인문 에세이를 써보고 싶어요.

● 4개월간 펜벗 1기로 활동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단순히 여쭤봐도 될까요- ‘펜벗’은 어떠셨어요?

비록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사이지만, 매달 같은 주제를 생각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서평을 공유했으니 이 또한 더없이 소중한 ‘벗’이 아닐까요. 그동안 다수의 서평단 활동에 참여해보았는데, 서로 같은 주제를 생각하고 공유하는 활동은 없었기에 펜벗 활동이 특별하고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펜벗 1기로 활동한 지난 4개월 동안 무척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쇼키치'님은?

블로그 ‘키치의 책다락’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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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너의 사랑 나의 사랑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새물결 | 1999


버뮤다 해변에서 에스키모 어 배우기
여자와 남자, 이성 연인 관계에 대해 다룬 책들은 두 부류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여성을 위로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라는 식의 조언들, 다른 하나는 남성들에게 좀처럼 알아듣기 힘든 여자들의 말을 일부 해석해 주는 지침서. 서로 다른 별에서 왔다고 해도 될 만큼 둘 사이의 틈은 깊고 넓어 보인다. 그러나 이 간극의 탄생에 대해 비단 어느 한쪽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남녀 사이에서만 이런 간극을 느낄 것인가. 어쩌면 이는 모든 개인에게 해당되는 간극이 아닐까. 단순히 같은 성별이라고 해서 조금 더 가깝게 느끼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이는 어쩌면 오래된 착각일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조금 더 효과적으로 고독해졌다. 그 커다란 고독 앞에서 사람들은 애써 가족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족의 체계는 생존을 강요하는 경쟁 사회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모든 주말 드라마는 비정한 사회에 대비된 가족애를 그린다. 어떤 짓을 저질러도 가족 사이이기 때문에 용서될 수 있고,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함께 있어서 행복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과연 가족은, 가장 작은 단위인 핵가족-남자와 여자-부터 흩어지기 쉬운데,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조부모와 부모, 아이들까지 이어진다면 더 안전할 수 있다고, 인원이 많은 대가족일수록 깨질 수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리잔이 하나만 있든 여러 개 놓여 있든 깨지는 건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 폭력의 도피처로 가족을 이루었더라도,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기란 쉽지 않다. 남자든 여자든 기회의 평등을 부르짖고 개개인의 삶을 지키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성역할에 맞추어 서로가 일부분을 희생한다는 것은 너무나 크고 어려운 선택으로 보인다. 여자에게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만큼 남자 또한 가족한테서 떨어져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여자는 유능한 커리어우먼과 나쁜 어머니라는 이름 사이에서 갈등한다. 외부의 시선만이 아니라 그들은 서로에게도 그러한 희생을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부는 가장 깔끔한 ‘이혼’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그 결혼을 하나의 실패로 만들고 또다시 개인적인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절대 대체 불가능한 것’이면서도 ‘결별이 불가능한 존재’다. 아이들은 여전히 그들을 ‘가족’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은 어떤 사고가 지나간 후 남는 트라우마, 그들의 포기한 꿈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아이를 그런 이유로 낳았던가? 이 파국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 자신의 잘못일까. 사생활을 중시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노동과 생산 관계를 침대에서까지 강요하는 현대 사회의 폭력 때문인가.

최근 페미니즘을 반대한다는 뜻을 밝히고 한 테러 집단으로 이적한 소년이 있다. 소년에게 단지 페미니즘의 의미를 모른다거나 한국 사회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의외로 불평등하다는 얄궂은 비판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야말로 하나의 굴복이 아니던가. 소년의 행동은 어쩌면 이상과 현실의 간극,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폭력의 규범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사회적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인터넷에서 가장 쉬운 싸움은 남녀 간의 성별 싸움이다. 그 잠재적 이면에는 그들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은 사회 구조가 있다.

울리히와 엘리자베트, 두 사회학자 부부는 한 권의 책 안에서 굳이 하나의 의견으로 통합하려 하지도 않으며, 격렬한 논쟁을 벌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각 장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반박도 덧붙이는 말도 없다. 이는 그들이 함께 해 온 시간이 적다거나 그들의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서로가 결국 다른 의견을 지닌 한 명의 인간이라는 점을 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사랑은 어느 누군가에게 희생이나 가해를 강요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나가려 한다.


우리는 사랑일까
로미오와 줄리엣은 10대 중후반에 서로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고, 서로를 잊지 못해 죽었다. 과거에 사람들은 그 비극에 대해 눈물지었지만, 현대인들은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다. 과연 그들이 살아남았더라면 어떤 파국을 맞았을까? 오히려 그들이 환상에 빠진 채 죽은 것이야말로 해피엔딩이 아니었을까?

이성을 풀어 말하면, 다른 성별의 사람이다. 서로 가진 신체 조건과 도덕도 다르다. 손톱에 바른 매니큐어와 능숙하게 맨 넥타이를 황홀경에 빠진 눈빛으로 쳐다보고 그들은 서로 탐색한다. 탐색이 끝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서로에게 아직도 미지의 대륙, 알 수 없어 아름다운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서로가 결국 하나의 육체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뿐, 해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다름없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이로 인해 폭력적인 평등이 강요된다.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거나 일정한 계약을 맺을 것, 비즈니스에 기반하는 이상 어떤 환상이나 기대도 성립될 수 없다. 그들은 철저하게 타인이 된다. 만약 계약 조건을 어길 경우 그들은 ‘헤어진다.’ 결별에 대해 왜 그러냐고 캐묻는 연인 앞에서 합리적인 이유를 댄다는 건 ‘귀찮아진’ 그들을 떼어낼 수 있는 명확한 이유이자 그 자신 또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별을 선언한 사람과 통보를 받은 사람들 모두 ‘쿨해질 것’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무리 안전장치를 매고 뛰어내려봤자 추락은 추락이다.

‘썸’은 일종의 찔러보기라고 할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처럼, 관계를 시작하기 전, 이 관계가 과연 그가 예상하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인의 기반에는 결국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설령 그의 예상이 맞고 연인이 되더라도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불신이 있다. 밀당이라는 기술 또한 연인 관계의 견고성을 불신하는 공식에 불과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싸움에서 이기려 한다. 설령 그 싸움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포하고, 패자로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한다 해도 소용없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에 취하고, 사랑받는 자신을 사랑한다. 사랑은 양자가 필요한 것이다. 한 명만 하는 건 짝사랑일 뿐이다.

사랑이란 서로가 손을 잡는 것, 한 침대를 나누고 같이 아침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서로를 완전하게 소유하고, 어제 누구한테 메시지를 열심히 보냈는지 아는 것마저 사랑의 끝이 아니다. 상대방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기장을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인은 영원한 미지의 영역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과 함께 절망을 느낀다. 미지라고 해서 포기하거나 알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 또한 또 다른 포기의 형식일 뿐이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맹신하는 것은 하나의 후퇴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진보란 어쩌면 저자들이 말한 것처럼 틀린 것과 마주하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틀린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답의 존재가 상정된다.


마지막 밸런타인 데이
과거 중세인들이 사랑의 끝을 죽음이었다고 생각했다면, 현대인들은 사랑의 끝이 무성애자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종교와 같은 것이어서 철저한 믿음과 어리석음을 전제로 한다. 사람들은 똑똑해지기를 원하지, 어리석어지고 싶지 않아 한다. 그들은 절대로 누군가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고 실패 없이 살고자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던지는 사랑은 존경받는 한편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것이 된다. 무언가를 극복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관객처럼 가만히 박수를 보내거나 조롱을 보내야 성이 풀린다.

이제 우리는 손수 만든 케익이나 꽃, 편지 대신 우리가 준 선물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기 원한다. 전자의 경우 너무 순진해 빠졌거나 우롱의 행위로 해석될 뿐이다. 성욕마저도 감소한다. 끊임없이 전화하고 전화받고, 일하거나 공부해야 하는 삶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양극단에 위치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의 먼 존재로 우상화되고 있다. 소설에만 존재한다고 믿으면서도 몇 번이고 현실이라 믿고, 그로 인해 배신당하고 또 회의에 잠기기를 번복한다. 카라마조프 형제 중 이반은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지만, 정작 그만이 악마를 본다.

사회 구조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비즈니스적 관계다. 그러나 아이에게 똑같은 생을 대물림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행동은 그들의 예상 밖을 벗어난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서 부모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했고, 그로 인해 현대 사회에서 노동 시장으로 내몰려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원하는 가족은 끊임없이 자본적 폭력으로 회귀하는 하나의 공장이었다. 이러한 거부는 어쩌면 아직 남아 있는 사랑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여성과 남성을 불문한 거부는 그들의 소망과 사회 구조에 대한 반대를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사회학자인 부부의 시선에 따라 지극히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회귀될 수 있을지언정-아도르노의 말에 반박하며 개인은 소멸할 수 없으며, 철저한 개인주의야말로 새로운 자유의 획득과 새로운 관계의 태동을 알리는, 진정한 존중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옹호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온전한 사랑의 포기보다야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초콜릿이 가격과 어떤 상술에 넘어가는 어리석음, 일방적인 항복으로 읽히지 않고 순수한 감정으로 읽히기를 바라는 희망처럼.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어떻게 고르셨어요? ‘그 남자 그 여자’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단번에 떠오를 책은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주제를 받았을 때 막막했어요. ‘그 남자 그 여자’라는 노래 제목처럼, 왠지 연애소설에 통달해야만 이 주제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전 원래 문학 쪽으로 서평을 주로 써왔고, 그래서 막막하기만 했죠.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남자와 그 여자라는-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두 사람은 연인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철천지원수가 될 수도 있죠. 그 남자와 그 여자 사이에 가능한, 수많은 관계를 상상하다 보니 남녀 관계에 관한 책을 리뷰해 보고 싶었어요. 이런 책 중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책으로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있죠. 하지만 이 책에는 현대 사회에는 좀 적용이 불가능한 이론들이 몇 있었어요.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예전에 벡 부부의 공동저술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생각했던 책이었어요. 사실 처음 읽었을 때, 부부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공동 저술’이 가능할지 궁금했어요. 그리고 분쟁 없이 서로의 영역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 호기심도 있었고요. 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이 책은 남녀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변주해 나가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어요. 제가 선택한 책마다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보통은 여성이나 남성 중 한쪽에게 ‘참으라’는 결론을 내리는 책들이 많아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결국 ‘사랑’을 일종의 게임, 승리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느낀다고 지적하죠. 그래서 더 인상 깊었어요.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들뿐 아니라 남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도 읽어보면 좋은 책일 것 같아요. 그리고 관계의 변화는 곧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하죠. 그래서 리뷰를 써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는 말은 가벼운 장난에 가까운 소리입니다. 그런데 실용서가 아닌 문학에서 경험하는 사랑의 감정은 장난으로 넘기기엔 진지하고 깊죠. 소설을 즐겨 읽는 Telmailing 님은 문학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다스려 본 적 있으신가요?

실연을 당했을 때는 문학이 도움되죠. 사랑을 시작할 때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실용성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지만요. 사랑을 시작할 때 모든 행복과 불행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아요. 문학을 통해 지나치게 감상이 깊어질 수 있죠. ‘감상적’이라는 말은 예민해지고 섬세해진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이기주의적인 나르시시즘이 될 확률이 높아요. 이기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충고를 읽지 못해요. 반면 실연을 당했을 때, 모든 문이 자신 앞에서 닫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문학은 그 반대로 담담하게 애당초 그들을 위해 저절로 열리는 문은 없다고 말해주죠. 그리고 작가가 인물을 서술할 때, 인물의 행동이나 감정을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물은 실연당한 자신처럼 허점이 있고, 상처를 받았고, 복수를 하거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안달이 나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저 또한 그랬어요.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거죠.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과 이유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 버거의 『결혼을 향하여』라는 소설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건강한 남자와 죽음을 앞둔 여자가 서로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에 이르는 흔한 러브스토리지만, 서로가 사랑에 빠지고 죽음을 극복해 결혼을 이루는 과정의 서술은 ‘사랑 때문에’라고 핑계를 대는 대신에 솔직하고 담담하게 진행됩니다. 담론 연구가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분석을 추구한다면, 소설은 현실 너머에서 가능한 희망을 탐색하는 시도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책을 읽은 다음에는 그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Telmailing'님은?

글을 쓰고 읽을 때마다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현재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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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 밤이 오면 글을 쓸 것이다



이주동 | 『카프카 평전』 | 소나무 | 2012


나는 삶에 어떠한 확신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별들의 풍경은 나를 꿈꾸게 한다.

For my part I know nothing with any certainty, but the sight of the stars makes me dream.
- Vincent Willem van Gogh

카프카의 『소송』을 처음 읽었을 때, 참고 다 보는 게 힘들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운 헛소리가 나열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전 서울 고서점가를 나돌던 카프카 책의 뒷면에는 “이것도 문학이냐?”, "이런 X새끼를 내가 읽다니!" 라는 욕과 낙서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기괴하고 이상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작품 안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굉장한 게 숨어 있다고 믿었다. 밀란 쿤데라를 포함한 수많은 훌륭한 작가가 극찬한 작품이 별 게 아닐 리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반복해서 읽었고, 마침내 카프카가 표현하려 했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글 맨 위에 옮겨 놓은 네덜란드 화가 반 고흐의 말은 카프카를 이해하는 데 좋은 암시가 된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심상은 고독, 소외, 불안 같은 것들이다. 삶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 빠질 수 밖에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별들의 풍경이 있기에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시인은 시를 쓴다. 카프카도 외롭지만 아름다움을 믿었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고흐와 카프카의 공통점은 또 있다. 생전에 전혀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흐의 유명 작품인 < 별이 빛나는 밤 >은 현재 천억 원이 넘는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고흐 생전에 그의 작품은 팔린 것도 몇 개 없었을 뿐 더러, 팔려도 당시 가치로 이 백 만원 남짓했다고 한다. 카프카도 비슷한데 장편 소설 『실종자』의 첫 장인 「화부」가 단편 소설로 출간되어 폰타네 문학상을 받은 것 외에는 평단의 평가가 없다시피 했다. 그가 현재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모두 친구 막스 브로트가 사후에 출판한 유고로 인한 것이다. 카프카는 후두 결핵으로 죽기 전에 유작들을 모두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글을 그렇게 열심히 썼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카프카가 작품을 쓴 목적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의미 자체로 글쓰기를 생각했던 것 같다. 카프카는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 다니며 밤늦은 새벽 시간에 글을 썼다. 이 시간의 경험은 신비할 정도여서, 때때로 자신이 쓴 구절에 스스로 감동한 나머지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한밤중에 옆 방에서 자고 있는 부모가 깰까 두려워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서 울었다.

『카프카 평전』 같은 책을 통해 이런 배경을 알고 작품을 읽으니 글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그가 적은 글은 문장과 논리 그대로 느끼는 게 아니라는 것, 평범한 삶의 감각을 뛰어넘게 해주는 매개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프카는 문학이 줄 수 있는 아주 새롭고 특수한 미학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그게 많은 위대한 작가들이 카프카의 작품을 열렬히 좋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CamomileForever'님은?

책과 꽃과 풍경을 좋아하는 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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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의 위로하는 마음

 



위화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문학동네 | 2012


오늘날 중국은 놀라울 정도로 급성장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발전을 거듭하면서 이제는 미국과 나란히 힘을 겨루는 나라가 되었다. 전 세계의 명품들은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그들은 세계로 여행을 다닌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관광객이 줄어들면 큰 타격을 입을 정도로 중국의 영향력은 커졌다.

하지만 억만장자와 백만장자가 넘쳐도 중국의 다른 한쪽에서는 빈민 인구가 1억 명에 달한다. 대외적 이미지에 빠진 중국은 힘든 가난 속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지 않는다. 위화는 중국인의 진정한 비극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빈곤과 기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빈곤과 기아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이 책은 중국에서는 금지되어 대만에서 출판되었다. 중국 지식인들이 보편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문제에 관하여 작가가 거론했기 때문이다. 1989년 베이징 대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동시에 관료의 부패와 전횡에 반대했다. 하지만 곧 중국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했고 그 후 어느 매체에서도 이 사건은 사라졌다. 인터넷에서도 6월 4일은 금지된 날짜가 되었다.

위화는 유년시절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거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그리고 천안문 사태를 겪으면서 오늘날의 중국이 되기까지, 그의 경험을 토대로 10가지 단어를 선택해서 이야기한다. 즉 10개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중국을 입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 책이 몰랐던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책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던 때에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반혁명분자가 되었다. 가정은 파탄이 나고 모든 가정에서 책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책을 찾아 헤매고, 거리에는 대자보가 붙고, 수많은 사형수가 총살되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하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 책이 넘쳐나고 개발 명문으로 불도저가 강제로 집을 무너트린다. 사람들은 돈만 쫓아다닌다. 물질이 결핍된 시대에서 낭비가 넘치는 시대로, 정치 지상의 시대에서 금전 제일의 시대로, 본능이 억압된 시대에서 욕망이 넘쳐나는 시대로. 극과 극으로 바뀌었다.

위화는 이렇게 10개의 단어로 중국을 살피고 무조건 개발과 돈만 보고 달리는 지금, 환상의 이면에 진정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어디 이것이 중국뿐이겠는가? 우리나라 현실과도 겹치는, 지금 세상의 모습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 책은 특히 후기에서 여운이 길게 남는다. 직업을 국가에서 배정할 때 위화는 1978년 치과의사가 되었다. 치아를 뽑는 일 외에도 매년 여름이면 노동자들과 아이에게 예방주사를 놓았다. 당시에 물자가 부족하다 보니 주삿바늘을 재사용했다. 매번 주사기를 사용해서 바늘 끝이 구부러져 팔뚝에 바늘을 꽂는 것도 힘이 들었다. 주사기를 뺄 때는 작은 살점이 바늘에 딸려 올라오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극심한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지만 위화에게 그들의 고통은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유치원에 가서 예방주사를 놓을 때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살이 연한 아이들은 바늘에 달려 나오는 살점의 크기가 컸고 피도 많이 났다. 유치원이 온통 아이들의 고통으로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 뒤 달리 손을 쓸 수 없었던 위화는 일과가 끝나면 숫돌에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뾰족하게 갈기 시작했다.

그는 왜 울부짖던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 전에 노동자의 고통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회상할 때면 마음이 괴로웠다. 주사를 놓기 전에 먼저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자신의 팔에 찔러보았더라면 노동자들이 극심한 통증을 못 이기고 신음하는 그 고통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느낌이 내 뼛속 깊이 새겨졌고, 그 뒤로 내 글쓰기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353쪽)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화의 말이다. 이 말처럼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되어 글쓰기를 한다는 위화의 글이야말로 진정 빛보다 멀리 간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자두줄기'님은?

꿈, 희망, 행복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이 세 가지를 가지기 위해서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끄적거리고, 그리고,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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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내 심장을 쏴 봐

 

 

 



정유정 | 『내 심장을 쏴라』 | 은행나무 | 2009



세계문학상 수상작은 1회부터 꾸준히 읽어오고 있다. 세계문학상은 다른 문학상과는 다른 뚜렷한 개별성이 있다. 텍스트의 가독성과 재미를 중시한다. 한국판 나오키상(直木賞)이라 할 수 있다. 세계문학상은 읽기 쉽고 몰입도가 높은 대중적인 소설이 꾸준히 선정됐다. 도발적인 소재와 개성 있는 문체, 빠른 속도감과 흡입력 있는 서사를 갖춘 작품이 세계문학상의 표적이 된다.

1회 수상작인 김별아의 『미실』은 여태까지 생각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보수적인 한국사회에 '비독점적 다자연애'를 질문함으로써 꽤 충격적인 도발을 시도했다. 신경진의 『슬롯』은 도박을 소재로 자본주의의 바다를 헤엄치는 인간의 정체성을 흥미롭게 그려냈다. 백영옥의 『스타일』은 신세대 한국여성의 진화된 원형을 익살스럽게 담아냈다. 잘 읽히면서 도발적이고 신선한 점이 세계문학상 수상작의 공통적 분모다.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내 심장을 쏴라』는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대중에게 자리매김한 소설가 정유정의 장편소설이다. 『내 심장을 쏴라』는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재미있지만 보다 '문학적'이다. 요컨대 재미와 무게를 함께 지녔다. 최근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내 심장을 쏴라』가 다시 조명되고 있다.

이 소설은 폐쇄된 정신병원에서 만난 두 남자의 이야기다. 둘은 서로를 알아가며 각자의 삶에서 열정을 얻는다. 가위만 보면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1인칭 화자 이수명, 그와 같은 날 정신병원에 입원한 시력장애인 유승민. 둘의 첫 만남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첫 만남의 데면데면함부터 친밀한 우정으로 변하기까지의 과정이 생기 있게 담겼다.

수명과 승민은 각자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수명이 내면으로 자신을 축소한다면, 승민은 외면을 향한 방향에 집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수명과 승민은 모두 과거의 비밀을 가슴에 품고 지낸다. 정유정 작가는 두 인물의 트라우마와 그것에 함몰되어 일상이 뭉개지는 현실의 긴장감을 잘 그려냈다. 소설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과거에 봉착되어 있던 수명과 승민의 내밀한 비밀이 밝혀진다.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고백으로 깨달아졌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내 심장을 쏴라』의 서사는 느리다. 몰입하기엔 미지근하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 후반에 이르게 되면 여태까지 소급되어 응축된 이야기가 한꺼번에 터지면서 독자의 가독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소설의 말미, 주인공 수명이 오랫동안 가슴 깊숙한 곳에 봉인해 두었던 삶의 참된 진실을 인식하고 용기를 표출하는 장면, 그 순간은, 이 소설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한 울림이자 카타르시스다.

『내 심장을 쏴라』의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그것은 바로 '자아'와 '자유'다. 폐쇄된 정신병동이라는 외면의 벽을 탈출하려는 몸부림은 자아를 제대로 인식하기를 원하는 내면의 열정에 닿아있다. 두 인물의 과거의 아픔과 이에 구속된 일그러진 현재상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아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못 두었을 때를 그대로 은유한다. 자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은 빠진 채 비본질에 대한 집념과 고집만이 반복될 뿐이다. 자유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 방식은 자아의 역동과는 거리가 먼 외적 환경의 파괴, 또는 내적 울림과의 단절에 불과하다.

두 인물의 자유 성취와 자아 성찰에 대한 공전(空轉) 행태는 승민이 병원을 탈출하여 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활공하는 바로 그 순간, 앎과 행복의 실현으로 반전된다. 승민은 끝내 죽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소설의 마지막 수명이 정신병원을 퇴원하는 장면과 연결된다. 죽은 승민은 수명에게 질문한다. 너는 누구냐고. '새' 아니면 '비행기'냐고. 이에 대한 수명의 답은 단호하고 명확하다.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라는 것.

한 사람의 자유는 타자의 간섭이나 외부의 구속으로 조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생 또한 타자가 아닌 자아의 추동, 즉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생(生)의 강렬한 욕망은 항시 자유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내 인생을 '나'로서 사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이 타협할 수 없는 절대 명제 앞에서 삶은 때때로 외부를 의식하고 타자에 주눅들며 방황한다. 진정한 자유의 가치는 내가 내 삶의 주어로서 존재하며 약동할 때 빛을 낸다. 내 실존은 누구도 욕망하지 못한다. 이 말이 진리라면, 외부를 향해 가슴을 열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내 심장을 쏴 봐.

굉장히 잘 쓴 소설이다. 서사를 풀어가는 능숙함과 재치있는 입담이 돋보인다. 순간순간에 감동과 재미가 녹아 있다. 정교하고 정제된 묘사와 독자의 호흡을 쥐었다 놨다 하는 작가의 내공이 훌륭하다. 이런 소설에 박수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내적 자유와 자아의 고찰에 번민하는 이들에게 이 한 권의 소설이 위로가 되길 바란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다윗의서재'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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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 젊은이의 음지

 

 



파트릭 모디아노 |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 문학동네 | 2014


파리에 두 번 갔다. 여느 여행자처럼 두 번 모두 수박 겉핥기 식의 여행이었다. 두 번째 파리에 갔을 때는 한 번 가본 곳이라고 기시감이 들어 더 편안했다. 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읽으면서 파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생각에 작가가 들려주는 파리의 이모저모를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내게는 오데옹 사거리, 브레트빌 대로 그리고 뇌이 시청 같은 낯선 지명보다 여전히 홍대의 미로 같은 골목길이 그리고 종로의 피맛골이 더 친근한 걸 보면 말이다.

먼저 이 책이 내가 읽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첫 번째 책이라는 점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재작년 수상자였던 앨리스 먼로의 책도 서너 권 사두고는 아예 읽어볼 궁리도 하지 않았다. 모옌의 책도 마찬가지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책은 왠지 어려울 것 같다는 편견과 아집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읽지는 않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이런저런 책을 가지고 있다고 자위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최근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다 읽고 나서, 바로 옆에 있던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가 눈에 띄어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놀랍게도 단박에 다 읽어 버렸다.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하다. 모쪼록 이참에 노벨문학상은 어렵고 재미있지 않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다. 아, 그리고 160쪽가량의 짧은 분량이었다는 점도 속독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작가가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라고 명명한 카페 ‘르 콩데’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다. 르 콩데에서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한담을 나누며 우정을 쌓는다. 바로 그곳에서 첫 번째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조금은 이질적 존재로 다가온다. 문득 르 콩데가 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만 했을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화자 나는 그런 곳이야말로 정의할 수 없는 자력이 있는 장소라고 설명한다. 한편 치기 어린 젊은이들은 폭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패거리에 낄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에 합의하고 있었다.

‘나’가 소개하는 인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바로 본명을 알 수 없는 ‘루키’라는 여자다. 이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장’은 자신의 노트에다가 카페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시간, 인물을 사진사가 카메라로 작업 하듯 정교하게 적어 놓는다. 마치 영화 ‘스모크’에서 담뱃가게 주인 하비 케이틀이 매일 같이 똑같은 사진을 찍듯,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첫 번째 이야기 말미에 자신은 고등광산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운 듯 밝히며 다음 화자에게 배턴을 넘긴다.

이야기의 다음 화자는 좀 더 흥미롭다. 자신을 예술편집자라고 소개하는 사립탐정 피에르 케슬레. 그가 누군가를 추적하는 과정이 소설에 가미된 미스터리 효모를 들뛰게 만든다. 그가 찾는 사람은 바로 르 콩데 카페의 단골손님 루키다. 그녀의 처녀적 이름은 자클린 들랑크, 그리고 지금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장 피에르 슈로의 집 나온 부인이라는 사실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 탐정은 의뢰받은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클린의 도피 혹은 방황에 열중한다.

이제 드디어 이 소설의 실제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자클린 들랑크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볼 차례다. 그녀는 물랭루주에서 일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을 어쩔 수 없이 홀로 보내야 했다. 성격이 예민해지고 가슴이 들끓을 청소년기에 그녀는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야심한 시간에 돌아다니다 경찰의 보호를 받는 등 도피 행각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해골이란 별명을 가진 자네트 골이라는 여자와 만나 ‘눈’을 맞는 경험도 하게 된다. 도피 중 그녀가 자주 들렀던 서점의 주인이 그녀에게 건넨 상냥한 질문은 그녀를 매료시킨다. “그래, 당신의 행복을 찾으셨나요?”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해주는 서점 주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화자는 자클린의 친구 롤랑이다. 소설의 어디에선가 그는 자신이 전생에서부터 그녀를 알았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롤랑은 위대한 철학자의 ‘영원한 회귀’ 사상을 도입해 가며 고대 철학자가 줄기차게 주장한 고통의 경감과 쾌락의 증진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가치라는 결론에 방점을 찍는다.

뒤표지에 실린 ‘도망치는 순간’을 읽고 나는 미미여사의 ‘화차’가 떠올랐다. 놀랍다, 그저 바람나서 도망간 아내를 추적하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한 나의 지레짐작을 정통으로 박살 낸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장기로 삼은 ‘시간을 통한 기억의 탐색’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등장인물을 어렴풋이 엮은 개연성의 설계가 마음에 들었다.

영화 ‘라쇼몽’처럼 직접적인 교차 서술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를 무대로 활동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삶 속에서 도피와 방황을 반복하던 자클린이 특정한 시간에 좌초되어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는 고등광산학교 학생의 추측도 흥미롭다. 자클린을 찾아 나선 사립탐정 케슬레는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수준까지 도달한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젊음’은 삶에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로 단절되었거나, 방황 혹은 도피하는 이들만 알아볼 수 있는 비밀코드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출간된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들을 많이도 모아 두었다. 올해 을미년을 모디아노의 해로 삼아 천천히 읽어도 될 정도다. 바로 『팔월의 일요일들』도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이 소설에도 그의 유창한 구사 방식이 등장해서 반가웠다.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꾸준하게 구사하는 주제에 익숙해진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않은가.

 

오늘의 책을 리뷰한 '레삭매냐'님은?

책의 산에 도전하는 게으른 독서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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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빈방』 -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버거, 이브 버거 | 『아내의 빈방』 | 열화당 | 2014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오직 나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도 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도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누군가 사라지면 그 자리는 영원히 빈 공간이 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다. 그곳에서라도 그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말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떤 이는 그런 시간을 오래도록 지속한다. 누구도 그 시간을 방해할 수 없다. 충분한 애도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당신은 사 주 전에 죽었지. 어젯밤 처음으로 당신이 돌아왔다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없어진 자리에 당신의 존재감이 돌아왔다고나 할까. 베토벤의 「피아노를 위한 론도」 2번(작품번호 51)을 듣고 있던 중이었소. 구 분 남짓한 동안 당신은 그 ‘론도’였고, 그 ‘론도’가 당신이었지. 거기에는 당신의 밝음, 당신의 고집, 당신의 치켜 올라간 눈썹, 당신의 부드러움이 들어 있었다오. (10쪽)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존 버거의 글은 부드러운 햇살처럼 쏟아진다. 마치 그 햇살로 아내를 안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사십 년을 같이 산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분명 아내는 죽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곁에 존재한다.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을 때,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 때 함께 있다. 만질 수 없는 형체로, 볼 수 없는 형상으로, 대답이 없는 메아리로.

당신을 유심히 보면, 길을 찾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섬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오. 모자를 쓰거나 코트를 입은 모습, 머리를 만지는 모습, 문을 여는 모습, 돌아서서 나가는 모습. 당신은 길을 찾는 사람이오. (13쪽)

우리는 종종 잊는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해 잊는다.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생생했던 세포는 긴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져 꺼내지 않는 옛 이불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당신을 기억하는 일이 새삼 힘들다. 무엇을 좋아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예정된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존 버거는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로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 뒤돌아보고 있소. 그리고 당신이 그런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당신은 시간을 벗어난 곳에, 되돌아보거나 내다보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으니 말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31쪽)

존 버거와 그의 아내 베벌리 버거가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며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아내의 물건에 담긴 아내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자 노력했을 존 버거. 점점 사라지는 아내를 향한 눈빛은 얼마나 애틋했을까. 화수분 같았던 두 사람의 사랑은 잊힐 수 없다. 아들 이브 버거에게 전해졌을 사랑은 감히 그 크기를 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지속된다. 어쩌면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나밖에 없다는 말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당신이 살고 있다면 말이다.

엄마가 어디 계신지 모르기 때문에, 엄마의 몸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가요. 잠시 후면 저희가 고른 돌멩이가 엄마 무덤 위에 놓이겠죠. 흙과 풀 사이에 놓은 텐데, 그러면 아름다울 거라고 믿고, 또 그러기를 바라요. (35쪽)

애도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랑하는 방법이 그렇듯이. 아내의 빈방은 존 버거의 사랑으로 채워진다. 이 얇은 책에는 사랑이 전부 담기지 않는다. 부재 속에 존재하는 ‘당신’이라는 사랑을 살 뿐이다.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아내의 빈방』은 어떻게 읽게 되셨어요?

존 버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아내의 빈방』을 만났어요. 개인적으로 제게도 2014년은 죽음과 상실을 벗어날 수 없는 해였기에 더욱 마음이 닿았습니다.

● 오랫동안 서평을 써 온 선인장님에게 ‘서평’은 특정한 활동이 아니라 이미 일상의 일부 같아 보입니다. 서평은 처음에 어떤 계기로 쓰게 되셨어요?

그저 독후감으로 시작된 메모였습니다. 분명 읽었지만 모든 책을 소장할 수 없기에 나중에 다시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 필요하기도 했고요. 책에 대한 애정의 작은 표현이랄까요. 정작 지금은 좋은 책에 대해 쓰지 못하고 있네요.

● 평소 한국문학을 즐겨 읽으시죠. 『아내의 빈방』과 함께 읽으면 좋을 한국문학 작품도 추천해주시겠어요?

같은 주제라 할 수 없지만 이런 책들이 떠오릅니다. 김선우의 『물의 연인들』, 한강의 『검은 사슴』, 윤대녕의 『누가 걸어간다』, 서영은의 『꽃들은 어디로 갔나』, 박범신의 『외등』이요.

●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잡았는데 감기 때문에 쉽지 않네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선인장'님은?

그저 폭넓은 책읽기를 꿈꾸며 책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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