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디앤루니스'에 해당되는 글 212건

  1. 2015.03.02 『우스운 사랑들』 -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2. 2015.02.26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 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3. 2015.02.25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 삶은 어딜 가든 따라온다
  4. 2015.02.24 『사월의 미, 칠월의 솔』 - 한때는 내가 정말 사랑했던
  5. 2015.02.23 다시 시작해!
  6. 2015.02.23 김미경 『살아있는 뜨거움』
  7. 2015.02.23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 나 요즘 진짜 엉망이야
  8. 2015.02.17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너의 사랑 나의 사랑
  9. 2015.02.16 제철 빵
  10. 2015.02.16 『카프카 평전』 - 밤이 오면 글을 쓸 것이다

『우스운 사랑들』 -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밀란 쿤데라 | 『우스운 사랑들』 | 민음사 | 2013


우리가 위대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데,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또는 쇼팽과 조르주 상드 이들의 사랑에 왜 감동하는 것일까? 거세된 아벨라르 곁에서 충실하게 곁을 지켰던 엘로이즈와 정신적 관계를 추구했던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특별한 그 무엇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일까? 처음엔 달콤한 꿈처럼 느껴지던 감정들이 점점 더 건조한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푸석한 감정으로 바뀌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는 사랑에 관한 문구, 문장, 해석이 무수히 존재한다.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떠올릴 때면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이 먼저 떠오른다. 파스칼 키냐르는 "사랑할 때 연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그림자를 향해 몸을 돌리지만 서로 껴안으면서 그림자를 뭉개버린다."고 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나 그 감정의 토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인 것 같다. 사랑하는 이의 감정을 더 충실하게 알기 위해 상대방을 껴안고 감정이 포개어지는 순간, 그들 각자의 그림자는 형체가 없어져 누가 누구의 그림자인 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사랑의 아이러니'다.

밀란 쿤데라의 『우스운 사랑들』은 일곱 개의 단편집이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에 집착하고 사랑의 감정에 진실하지 못하기에 우스운 사랑이고, 굴욕적인 모습으로 삶이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누구도 웃지 않으리」에서는 스리보비체라는 교수가 주인공이다. 그는 자투레츠키라는 사람이 쓴 논문의 비평을 써주기로 약속하고 점차 미루는 과정에서 자신의 연인 클라라를 끌어들인다.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자 그는 클라라를 이용해 자신의 복잡한 현실을 피하려 한다. 자신에게 놓인 불리하고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클라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스리보비체는 클라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다. 클라라는 오히려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생각으로 스리보비체를 떠나려 한다. 스리보비체의 모습은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가느라 정작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대변한다. 제목처럼 그 누구도 웃을 수 없는 씁쓸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예측 불가능한 사랑의 이야기는 「에드바르트와 하느님」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자신이 욕망하는 감정을 겪고 난 후 뜨거웠던 사랑의 감정이 식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에드바르트는 여자 친구인 알리체의 육체를 욕망하지만 그녀는 크리스천으로 독실한 신자다. 알리체는 믿음이 없는 에드바르트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주겠다고 선언하면서 에드바르트는 거짓으로 하나님을 믿는 척해야 한다. 에드바르트는 교장과의 면담 이후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자신의 불온한 정신을 들키고, 교사 직책에 불안을 느끼게 되자 하나님을 믿는 척하는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몰입한다. 결국 에드바르트는 자신에게 의혹을 제기한 교장과의 갈등, 거짓으로 둘러싸여 불안의 요소를 만들어낸 모든 인간관계가 단조롭고 의미 없는 기호들이라고 생각한다. 알리체를 사랑했던 감정까지 혼란스러워지자 그는 진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에드바르트를 보면서 현대인들의 낯익은 모습을 보는 듯했다.

「영원한 욕망의 황금 사과」는 믿음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과도한 믿음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인생에서 함정이 될 수 있고, 배교자나 이교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히치 하이킹 게임」은 단순한 게임에서 시작되었던 서투른 사랑놀이가 죽음의 계약서와 같이 서로를 파멸시켜 간다는 내용이다. 순수했던 두 남녀의 단순한 게임은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해 쌓여지지만, 동시에 모방된 언어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읽고 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랑의 감정이 사람을 가장 나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랑의 폭력은 우리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하다. 세상에는 사랑만큼 위대한 것이 없고 또 사랑만큼 힘든 일도 없는 것 같다. 위대한 사랑에는 존재하고, 우리들의 사랑에는 없는 것이 상대방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보통 사람들의 사랑에 진실한 마음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표현은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감정과 연결돼 있다. 인간관계의 무대 위에 서다 보면, 때때로 눈이 가려진 채 연기를 하거나, 누군가가 무대의 배경과 장치를 바꿨는데도 모르고 계속 연기를 하다가 실수와 오해를 사기도 한다. 모든 감각과 감정에 집중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러한 실수와 오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실수와 오해가 없었다 해도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뿐 이기적인 감정은 늘 이타적인 마음을 이긴다. 상대방 본연의 색이 드러날 수 있도록, 또는 나와 상대방의 그림자가 뭉개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 어렵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는 순간, 자신의 언어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오색 무지개 색깔 같았던 사랑의 감정이 단일한 회색 그림자가 되는 것을 목격하고 만다. 그러한 상황들은 "우리는 모든 색깔을 다 보여줄 수 있지만 아무리 변화무쌍한 카멜레온도 흰색을 보여 줄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도르비이의 말처럼, 수많은 색 중에서 정작 흰색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대방이 가진 본연의 색깔을 가끔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뭉갠다. 자신의 색은 '언어'라는 화려함으로 치장하기 바쁘다. 마치 무수히 찍힌 점들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었단 '쇠라'의 그림처럼 가까이 가서야 어떤 색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사랑의 실체는 이와 비슷하다. 이론적인 현실 속에서 복잡하고도 미묘한 '사랑의 거리'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완전한 사랑은 적절한 거리의 침묵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muo'님은?

삶의 모든 흔적 때로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고 있지 않는 듯한 책들을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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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 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김형수 |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 아시아 | 2014


이 책의 서평을 쓰기 위해 30분이나 방황했다. 책 속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다시 읽어보며, 수첩에 손으로 꾹꾹 옮겨 썼다. 그리고 다시 읽으며 그 문장이 뿜어내는 많은 추억과 생각의 파편들을 곱씹고 보니 30분이 흘렀다.

“오늘 이야기는 프롤로그에 속하는데, 작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피력하는 자리라 여기시면 되겠습니다.”

이 책의 주제는 위의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책의 깊이나 가치는 제외하고, 그저 무슨 책인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30분이나 방황한 후의 내 가슴은, 이 책의 서평을 ‘글쓰기로만’ 쓰지 말자고 말한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선물’이란 단어가 머리를 꽉 채우고 있다.

“인간은 흔들리면서, 뼈아프게 후회하면서, 자기 성찰의 낯 뜨거운 시간을 견디면서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는 생각...”

“종소리는 아무런 글자도 싣고 오지 않아요. 그런데 울려오는 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과 마찰이 되면서 어떤 느낌을 안겨다 줍니다. (...) 시는 언어를 마치 피아노의 건반을 다루듯이 다룹니다. 건반이 배,고,파 하고 말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이 거기에서 오래 굶은 자의 슬픔을 전달받는 거예요."

뼈아프게 후회하기, 낯 뜨거운 자기 성찰의 시간, 그런 것들이 쌓여 우리의 삶이 조금씩 완성되어간다는 말들을 읽었다. 이 말들이 나의 마음과 마찰하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을 멈춘다.

“겉으로 보이는 숱한 현상들이 섬세한 사유의 ‘체’로 걸러지고 전형화의 대패질에 벗겨져 나가 마침내 속을 드러내게 된 논문과 문학작품으로 변했을 때에야 비로소 쉽고 명쾌하며 의미 깊게 다가오지요.”

2월의 첫날, 일기장을 펼쳤을 때 ‘선물’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나는 한 달을 또 선물 받았다. 1월은 너무 갑작스레 찾아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건 아닐까 후회하며 2월의 첫날을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1년이라고 하면 길게 느껴져 지루해지지만 1년을 다시 열두 달로 나누어 이렇게 한 달씩 선물 받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새롭다. 1월의 부족한 점을 만회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제와 같은 오늘이란 지루함, 권태로움도 사라진다. 몇 십 년째 반복되고 있는 2월 1일이지만, 위의 문장에서 말하듯, 나의 ‘사유의 체’로 걸러진 하루는 반복된 2월 1일이 아닌 특별한 ‘오늘’로 다가왔었다.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놀라운 측면은 글 쓰는 행위 안에 세계를 인식하는 기능이 숨어 있다는 겁니다. (...) 낡은 사회의 가장 구체적인 산물인 나 자신이 새로운 나로 태어나려면 글쓰기를 해야 하고, 이 글쓰기가 세계에 대한 인식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장차 위대한 작가가 될 꿈이 있거나 말거나, 적어도 전인교육을 실시하려면 학생들에게 글쓰기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글쓰기 열풍 시대라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글쓰기 관련 책도 많아졌고 블로거의 글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결국 내가 이렇게 나를 알고 싶고 글을 쓰며 마음을 헤아렸던 것이 알고 보니 나의 의지가 아니라 유행하는 옷을 좇아 입었던 것에 불과했구나, 라는 생각에 조금 기운이 빠지긴 했다. 나의 생각이라 믿었던 것이 어쩌면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가 주입한 남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거나 작가가 되는 것은 어렵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쓰기가 보상도 없고 출세도 보장 안 되는 죽음의 길이라고 썼다. 이 책의 저자도 ‘풀과 나무’에 빗대어, 문학의 길이 얼마나 더디고 먼지 말한다.

“봄에 싹이 돋을 때 풀과 나무는 떡잎 상태로 구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오뉴월이 되면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나무를 덮어버리지요. 그런데 가을이 되어서 찬바람이 불면 풀은 말라서 소멸하기 시작하고, 겨울이 오면 완전히 모습을 잃어서 이듬해 봄에는 무의 상태에서 다시 떡잎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그에 반해 나무는 풀보다 성장하는 바가 훨씬 더뎌 보이지만, 가을이 되고 겨울이 와도 존재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계속 움츠러들지만 자신의 몸에 나이테를 남겨서 이듬해 봄이면 전년도에 성장한 자리에서 다시 싹을 돋우지요. 이 때문에 풀은 숲이 되지 못하고 나무는 숲이 됩니다. 문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풀의 길을 가는 자는 소멸할 것이고 나무의 길을 가는 자들이 숲을 이룹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옳은지 두려울 때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위로의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일까. 이 겨울을 이겨내면 분명 그만큼 나는 성장해 있을 테니 불안해하지 말고 견디어 보자,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과거의 한 사람을 떠올렸다. 몇 번이나 좌절을 반복해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 나와 내 친구를 위해 편지를 써 주신 분이 계시다. 그분은 방송에서 ‘이겨낸’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나와 친구에게 전해주셨다. 그때 나는 마음을 선물 받았다.

“글을 쓰는 과정이 단지 생각을 글자로 베껴내는 과정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새로운 자기로 깨어나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서평을 쓰며 내가 오늘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게 된다. 이 서평을 쓰기 전의 나로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나로 깨어난 것 같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reella'님은?

책과 글을 사랑합니다. 책은 저의 친구이자 연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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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 삶은 어딜 가든 따라온다



마루야마 겐지 |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 바다 | 2014

미디어에서 조장한 농촌의 모습에 속아, 은퇴 후 아무 생각 없이 시골에 내려가 은퇴자금마저 다 쓰고, 빈민이 되어 도시로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매정한 대도시의 삶을 뒤로하고, 공기 좋고 물 좋고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는 인정 넘치는 이웃 사촌이 즐비한 곳이 농촌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미디어의 조장이 아니라면 과연 이러한 농촌의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을까? 실제로 농촌에 살던 많은 젊은이가 도시로 이동하는데, 과연 그들은 대도시 사람들이 귀농을 꿈꾸며 그토록 떠나고 싶어하는, 바로 그 대도시로 유입된 걸까? 이 질문에 대해 엄밀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결국 귀농을 해도 만족할만한 생활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마루야마 겐지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직설적으로 늘어놓는 사람인데, 이 책에서는 미디어에서 조장된 귀농과 농촌생활에 대한 환상을 깨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듯하다.


어렵게 돌려 말할 것도 없이 대도시처럼 수많은 인간이 익명성을 갖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사는 생활방식에 비해, 농촌의 경우 몇 세대에 걸쳐 같은 장소에서 모여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도시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 농촌 주민들은 마을 구성원들의 사생활에 서로 깊숙이 개입하는 삶을 살아오곤 했다. 그러니 미디어에서 조장한 인간미 넘치는 농촌생활의 실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대도시에서 생활했던 이들의 기준으로 봤을 경우, 터무니없는 사생활 침해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농촌에는 마을만의 무언의 생활규칙이 있다. 외지인이 암묵적인 규칙을 어길 경우,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한편 저자는 치안에 대해서도 논한다. 대도시의 경우 농촌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아주 좁은 지역에 인구가 밀집해서 살고 있기에 치안이라는 측면에서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지방의 경우 넓은 면적 대비 경찰의 수치는 대도시의 그것과 비교할 경우 현저하게 낮다. 결국 이는 치안 서비스의 질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서울특별시 중구의 치안 수준과 경기도 포천, 양주, 광주 같은 넓은 행정구역의 치안 수준이 과연 같을까. 단위 면적당 배정된 경찰의 수치는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되리라 본다.


마지막으로 건강에 대한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 대도시에는 다양한 종류의 의료기관을 비롯하여 종합병원 응급실이 존재한다. 하지만 시골은 반대되는 의료 환경을 지닌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 책의 주된 소재를 귀농으로 삼았지만, 본질적으로 인생의 무게는 무거울 수밖에 없으며 그 무게라는 것이 농촌으로 거처를 옮긴다고 해서 더 가벼워지는 건 아니라는 걸 독자들에게 격정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막연히 낙원이 존재하리라는 믿음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마주할 때 오히려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간명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이 마주하기 싫어하는 내용을 '귀농'이라는 소재로 풀어낸 마루야마 겐지! 그의 힘 있는 문체 때문이라도 열혈의 에너지가 필요한 이들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 여겨 추천하고 싶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청아'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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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 한때는 내가 정말 사랑했던


김연수 | 『사월의 미, 칠월의 솔』 | 문학동네 | 2013


대학 졸업반 시절에 만났던 남자친구는 문학을 사랑하는 '문청(문학청년)'이었다. 문학이라면 한국문학과 외국 문학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고, 문학 관련 잡지도 찾아 읽었다. 그는 신춘문예에 도전할까 고민할 정도로 문학을 좋아했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출판사에 취직하고 나는 다른 길을 택하면서 우린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요즘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맨 뒷장에서 이 책의 편집, 디자인, 마케팅을 누가 했는지 본다.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찾게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을 봤었다. 요즘은 통 못 봐서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다. 그토록 꿈꾸던 신춘문예에 도전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유학이라도 간 걸까.

김연수의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도 헤어진 연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벚꽃 새해」의 주인공은 성진과 정연이다. 예전에 선물한 시계를 돌려받고 싶다는 옛 여자친구 정연의 요구에 성진은 아연할 수밖에 없다. 헤어진 남자에게, 그것도 6년 전에 준 선물을 내놓으라는 정연의 요구가 황당하기도 했지만, 실은 그 시계를 전당포에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더 황당한 건, 고가의 명품인 줄 알았던 그 시계가 알고 보니 짝퉁이었던 것. 시계를 되찾기 위해 성진과 정연은 다시 만나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둘은 연인이었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내 마음을 울렸던 건 성진의 대사다.

"그게 그렇더라구. 어릴 때만 해도 인생이란 나만의 것만 남을 때까지 시간을 체로 거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른이 되고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더라. 막상 서른이 되고 보니 남는 게 하나도 없어. 다 남의 것이야. 내 건 하나도 없어." (29~30쪽)

둘이 사귈 때는 영화 속 여배우의 대사마저도 내 것 같았다는 정연의 말에 성진은 다 남의 것이고 내 건 하나도 없다고 자조한다. 정말 그렇다. 사랑할 때는 거리에 울려 퍼지는 온갖 사랑 노래가 다 내 이야기 같고, 이 사람이 내 것 같지만, 헤어지면 내 것도 네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품인 줄 알았던 사랑도 언젠가는 짝퉁만도 못한 싸구려로 전락하리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내 건 하나도 없'는 것만은 아니다. 성진이 언젠가 둘이 함께 갔던 휴양지 호텔방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의 모습을 아름답게 기억하듯이, 그 어떤 사진이나 영화 속 장면보다도 강렬하게 남아있는 연인의 모습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보물이다. 사랑이 끝나도, 그 사람을 더 이상 못 보게 되어도 기억만은 온전히 내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게 남아 있어서 인간은 아무리 이별이 슬퍼도 다시 사랑하고, 다시 사랑할 사람을 만나려 하는 것이 아닐까.

한때는 꿈 많은 대학생이었던 그 남자와 그 여자. 문학을 사랑하던 그 남자를 동경했던 그 여자는 이제 그를 동경하지도 않고 남자를 따르는 대신 택했던 길을 걷고 있지도 않다. 다만 그가 좋아했던 소설을 읽고, 그가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책을 읽는다. 가끔 그를 추억할 뿐이다. 때로는 그런 사람이 내 인생에 정말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 다시 사랑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남기고 간 '내 것' 덕분임이 분명하다. 그 덕분에 나는 책을 좋아하는 남자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다시 사랑할 때는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책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택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그는 나에게서 무엇을 '내 것'으로 취했을까?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블로그에 올리신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의 다른 서평을 읽어 보았습니다. 이 소설은 어쩔 수 없음의 정서를 그리고 있다는 말에 공감했습니다. 부재, 아쉬움, 무력하고도 귀한 감정이 담긴 책을 읽을 땐 그 책을 읽는 시간도 무시할 수 없겠죠. 단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하루 중 어느 시간에 읽어야 좋던가요?

저녁 퇴근길,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밤, 할 일 없는 주말 낮 등 여러 시간에 이 책을 읽었는데, 그중 가장 좋았던 시간은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친 밤이었습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이 대개 그렇지만, 이 책은 옛 애인, 돌아가신 부모님 등 과거의 인물을 회상하는 내용이 많아서 팍팍한 현실을 잊고 추억에 취하고 싶어지는 밤에 읽기 좋았습니다. 단편집이라서 한 편씩 읽고 잠을 자기에도 좋았고요.

● 이번 서평에는 쇼키치님 개인의 사연이 퍽 담겼습니다. 이 서평을 마친 후 기분이 어떠셨을지 궁금합니다.

청춘에 관한 글을 많이 쓴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20대 초, 중반의 일이 많이 떠오릅니다. 책에 실린 「벚꽃 새해」라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학 졸업 무렵 사귀었던 사람을 떠올렸고, 그 사람을 생각하며 서평을 썼는데요, 서평을 마치고 나서는 그 사람보다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리워 마음이 아팠습니다.

● 펜벗 앨범을 다시 열어 쇼키치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20대의 많은 시간을 독자와 서평 블로거로 보냈고, 30대는 '지은이'로 거듭나고 싶다고 하셨어요. 책을 써 볼 생각이라면, 어떻게 쓰실 건가요?

20대에 고시, 취업, 전직 등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하고 실패하며 힘든 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소설을 읽으며 기분을 전환하거나 경제, 경영, 자기계발 책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만약 책을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처럼 책을 통해 위로 받고 싶고 답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소개하는 책을 써보고 싶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요네하라 마리처럼 기발한 발상이 빛나는 인문 에세이를 써보고 싶어요.

● 4개월간 펜벗 1기로 활동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단순히 여쭤봐도 될까요- ‘펜벗’은 어떠셨어요?

비록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사이지만, 매달 같은 주제를 생각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서평을 공유했으니 이 또한 더없이 소중한 ‘벗’이 아닐까요. 그동안 다수의 서평단 활동에 참여해보았는데, 서로 같은 주제를 생각하고 공유하는 활동은 없었기에 펜벗 활동이 특별하고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펜벗 1기로 활동한 지난 4개월 동안 무척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쇼키치'님은?

블로그 ‘키치의 책다락’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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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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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 『살아있는 뜨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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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 나 요즘 진짜 엉망이야

 



제프 다이어 |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


여행 산문집이라는 말 때문에 손을 내밀었다. 여행서가 맞으나, 장소에 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는 말도 상당히 유혹적이었다.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는 장소를 이야기하지 않는 여행기다. 정말 그렇다. 작가가 어디론가 떠나기는 했으나 이 책에는 그곳에 관한 소개가 없다. 그는 작정하고 떠나지도 않았다. 일삼아 떠났을 뿐이고 마음이 내켜서 가방을 꾸렸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지리적 배경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몇 안 되는 배경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빼곡히 적혀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풍경이 이채로웠다. 이 책은 여행이라는 게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니라고,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것들이 모두 여행의 한 쪽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다. 파리에 가서 베르사유 궁전과 루브르 박물관만 보고 왔다면 그것은 파리에 가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여행을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없는 거라던 어떤 이의 말에 공감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하지만 ‘진짜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앎에도 그 목적이 있을 테지만, 짐작은 언제나 앎보다 재미있다. (39쪽)
사람들은 왜 여행을 하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51쪽)

저자 제프 다이어는 "이 책에 적은 일들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그중 몇몇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다."고 말한다. 분명 책을 읽다 보면 이게 진짜로 일어났던 일인지, 상상인지 헷갈린다. 신비로운 일이다. 그가 어디를 갔는지, 왜 갔는지는 묻고 싶지 않다. 그저 카메라 하나 둘러매고 가뿐하게 떠났을 것 같은 그의 여행길에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싶은 욕심이 난다.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던 곳에 다시 가본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좋았던 곳은 다시 가도 좋을까?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다시 가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바다에 가면 해파리에 쏘이거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멀찍이 수영하는 사람만 바라보고, 논두렁길을 걸으며 상대를 앞지르거나 넘어질까 서로를 잡아 주면서 나무에 관해 얘기하고, 성지에 가면 유적지가 뿜어내는 성스러움에 나를 동화시키려 애쓰고, 공놀이할 때는 온전히 공놀이에만 빠져든다거나. 사소한 일들이 여행이라는 이름표 밑에서 속살거린다. 캄보디아 프레룹 사원에서 콜라를 파는 소녀와 작가의 신경전은 정말 흥미로웠다. 별것 아닌 일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나는 옆에서 지켜봤던 것처럼 이상한 쾌감이 느껴졌다.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는 혼자만의 철저한 독백이다. 하지만 그 짧은 이야기에서 함께 여행을 느끼고 싶은 여운이 남는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아이비'님은?

책과 우리 문화유산을 사랑합니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소망합니다. 그곳에 머물던 이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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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너의 사랑 나의 사랑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새물결 | 1999


버뮤다 해변에서 에스키모 어 배우기
여자와 남자, 이성 연인 관계에 대해 다룬 책들은 두 부류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여성을 위로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라는 식의 조언들, 다른 하나는 남성들에게 좀처럼 알아듣기 힘든 여자들의 말을 일부 해석해 주는 지침서. 서로 다른 별에서 왔다고 해도 될 만큼 둘 사이의 틈은 깊고 넓어 보인다. 그러나 이 간극의 탄생에 대해 비단 어느 한쪽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남녀 사이에서만 이런 간극을 느낄 것인가. 어쩌면 이는 모든 개인에게 해당되는 간극이 아닐까. 단순히 같은 성별이라고 해서 조금 더 가깝게 느끼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이는 어쩌면 오래된 착각일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조금 더 효과적으로 고독해졌다. 그 커다란 고독 앞에서 사람들은 애써 가족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족의 체계는 생존을 강요하는 경쟁 사회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모든 주말 드라마는 비정한 사회에 대비된 가족애를 그린다. 어떤 짓을 저질러도 가족 사이이기 때문에 용서될 수 있고,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함께 있어서 행복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과연 가족은, 가장 작은 단위인 핵가족-남자와 여자-부터 흩어지기 쉬운데,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조부모와 부모, 아이들까지 이어진다면 더 안전할 수 있다고, 인원이 많은 대가족일수록 깨질 수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리잔이 하나만 있든 여러 개 놓여 있든 깨지는 건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 폭력의 도피처로 가족을 이루었더라도,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기란 쉽지 않다. 남자든 여자든 기회의 평등을 부르짖고 개개인의 삶을 지키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성역할에 맞추어 서로가 일부분을 희생한다는 것은 너무나 크고 어려운 선택으로 보인다. 여자에게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만큼 남자 또한 가족한테서 떨어져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여자는 유능한 커리어우먼과 나쁜 어머니라는 이름 사이에서 갈등한다. 외부의 시선만이 아니라 그들은 서로에게도 그러한 희생을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부는 가장 깔끔한 ‘이혼’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그 결혼을 하나의 실패로 만들고 또다시 개인적인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절대 대체 불가능한 것’이면서도 ‘결별이 불가능한 존재’다. 아이들은 여전히 그들을 ‘가족’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은 어떤 사고가 지나간 후 남는 트라우마, 그들의 포기한 꿈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아이를 그런 이유로 낳았던가? 이 파국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 자신의 잘못일까. 사생활을 중시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노동과 생산 관계를 침대에서까지 강요하는 현대 사회의 폭력 때문인가.

최근 페미니즘을 반대한다는 뜻을 밝히고 한 테러 집단으로 이적한 소년이 있다. 소년에게 단지 페미니즘의 의미를 모른다거나 한국 사회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의외로 불평등하다는 얄궂은 비판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야말로 하나의 굴복이 아니던가. 소년의 행동은 어쩌면 이상과 현실의 간극,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폭력의 규범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사회적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인터넷에서 가장 쉬운 싸움은 남녀 간의 성별 싸움이다. 그 잠재적 이면에는 그들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은 사회 구조가 있다.

울리히와 엘리자베트, 두 사회학자 부부는 한 권의 책 안에서 굳이 하나의 의견으로 통합하려 하지도 않으며, 격렬한 논쟁을 벌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각 장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반박도 덧붙이는 말도 없다. 이는 그들이 함께 해 온 시간이 적다거나 그들의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서로가 결국 다른 의견을 지닌 한 명의 인간이라는 점을 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사랑은 어느 누군가에게 희생이나 가해를 강요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나가려 한다.


우리는 사랑일까
로미오와 줄리엣은 10대 중후반에 서로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고, 서로를 잊지 못해 죽었다. 과거에 사람들은 그 비극에 대해 눈물지었지만, 현대인들은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다. 과연 그들이 살아남았더라면 어떤 파국을 맞았을까? 오히려 그들이 환상에 빠진 채 죽은 것이야말로 해피엔딩이 아니었을까?

이성을 풀어 말하면, 다른 성별의 사람이다. 서로 가진 신체 조건과 도덕도 다르다. 손톱에 바른 매니큐어와 능숙하게 맨 넥타이를 황홀경에 빠진 눈빛으로 쳐다보고 그들은 서로 탐색한다. 탐색이 끝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서로에게 아직도 미지의 대륙, 알 수 없어 아름다운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서로가 결국 하나의 육체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뿐, 해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다름없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이로 인해 폭력적인 평등이 강요된다.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거나 일정한 계약을 맺을 것, 비즈니스에 기반하는 이상 어떤 환상이나 기대도 성립될 수 없다. 그들은 철저하게 타인이 된다. 만약 계약 조건을 어길 경우 그들은 ‘헤어진다.’ 결별에 대해 왜 그러냐고 캐묻는 연인 앞에서 합리적인 이유를 댄다는 건 ‘귀찮아진’ 그들을 떼어낼 수 있는 명확한 이유이자 그 자신 또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별을 선언한 사람과 통보를 받은 사람들 모두 ‘쿨해질 것’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무리 안전장치를 매고 뛰어내려봤자 추락은 추락이다.

‘썸’은 일종의 찔러보기라고 할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처럼, 관계를 시작하기 전, 이 관계가 과연 그가 예상하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인의 기반에는 결국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설령 그의 예상이 맞고 연인이 되더라도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불신이 있다. 밀당이라는 기술 또한 연인 관계의 견고성을 불신하는 공식에 불과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싸움에서 이기려 한다. 설령 그 싸움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포하고, 패자로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한다 해도 소용없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에 취하고, 사랑받는 자신을 사랑한다. 사랑은 양자가 필요한 것이다. 한 명만 하는 건 짝사랑일 뿐이다.

사랑이란 서로가 손을 잡는 것, 한 침대를 나누고 같이 아침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서로를 완전하게 소유하고, 어제 누구한테 메시지를 열심히 보냈는지 아는 것마저 사랑의 끝이 아니다. 상대방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기장을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인은 영원한 미지의 영역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과 함께 절망을 느낀다. 미지라고 해서 포기하거나 알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 또한 또 다른 포기의 형식일 뿐이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맹신하는 것은 하나의 후퇴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진보란 어쩌면 저자들이 말한 것처럼 틀린 것과 마주하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틀린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답의 존재가 상정된다.


마지막 밸런타인 데이
과거 중세인들이 사랑의 끝을 죽음이었다고 생각했다면, 현대인들은 사랑의 끝이 무성애자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종교와 같은 것이어서 철저한 믿음과 어리석음을 전제로 한다. 사람들은 똑똑해지기를 원하지, 어리석어지고 싶지 않아 한다. 그들은 절대로 누군가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고 실패 없이 살고자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던지는 사랑은 존경받는 한편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것이 된다. 무언가를 극복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관객처럼 가만히 박수를 보내거나 조롱을 보내야 성이 풀린다.

이제 우리는 손수 만든 케익이나 꽃, 편지 대신 우리가 준 선물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기 원한다. 전자의 경우 너무 순진해 빠졌거나 우롱의 행위로 해석될 뿐이다. 성욕마저도 감소한다. 끊임없이 전화하고 전화받고, 일하거나 공부해야 하는 삶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양극단에 위치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의 먼 존재로 우상화되고 있다. 소설에만 존재한다고 믿으면서도 몇 번이고 현실이라 믿고, 그로 인해 배신당하고 또 회의에 잠기기를 번복한다. 카라마조프 형제 중 이반은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지만, 정작 그만이 악마를 본다.

사회 구조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비즈니스적 관계다. 그러나 아이에게 똑같은 생을 대물림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행동은 그들의 예상 밖을 벗어난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서 부모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했고, 그로 인해 현대 사회에서 노동 시장으로 내몰려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원하는 가족은 끊임없이 자본적 폭력으로 회귀하는 하나의 공장이었다. 이러한 거부는 어쩌면 아직 남아 있는 사랑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여성과 남성을 불문한 거부는 그들의 소망과 사회 구조에 대한 반대를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사회학자인 부부의 시선에 따라 지극히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회귀될 수 있을지언정-아도르노의 말에 반박하며 개인은 소멸할 수 없으며, 철저한 개인주의야말로 새로운 자유의 획득과 새로운 관계의 태동을 알리는, 진정한 존중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옹호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온전한 사랑의 포기보다야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초콜릿이 가격과 어떤 상술에 넘어가는 어리석음, 일방적인 항복으로 읽히지 않고 순수한 감정으로 읽히기를 바라는 희망처럼.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어떻게 고르셨어요? ‘그 남자 그 여자’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단번에 떠오를 책은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주제를 받았을 때 막막했어요. ‘그 남자 그 여자’라는 노래 제목처럼, 왠지 연애소설에 통달해야만 이 주제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전 원래 문학 쪽으로 서평을 주로 써왔고, 그래서 막막하기만 했죠.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남자와 그 여자라는-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두 사람은 연인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철천지원수가 될 수도 있죠. 그 남자와 그 여자 사이에 가능한, 수많은 관계를 상상하다 보니 남녀 관계에 관한 책을 리뷰해 보고 싶었어요. 이런 책 중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책으로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있죠. 하지만 이 책에는 현대 사회에는 좀 적용이 불가능한 이론들이 몇 있었어요.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예전에 벡 부부의 공동저술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생각했던 책이었어요. 사실 처음 읽었을 때, 부부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공동 저술’이 가능할지 궁금했어요. 그리고 분쟁 없이 서로의 영역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 호기심도 있었고요. 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이 책은 남녀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변주해 나가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어요. 제가 선택한 책마다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보통은 여성이나 남성 중 한쪽에게 ‘참으라’는 결론을 내리는 책들이 많아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결국 ‘사랑’을 일종의 게임, 승리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느낀다고 지적하죠. 그래서 더 인상 깊었어요.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들뿐 아니라 남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도 읽어보면 좋은 책일 것 같아요. 그리고 관계의 변화는 곧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하죠. 그래서 리뷰를 써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는 말은 가벼운 장난에 가까운 소리입니다. 그런데 실용서가 아닌 문학에서 경험하는 사랑의 감정은 장난으로 넘기기엔 진지하고 깊죠. 소설을 즐겨 읽는 Telmailing 님은 문학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다스려 본 적 있으신가요?

실연을 당했을 때는 문학이 도움되죠. 사랑을 시작할 때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실용성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지만요. 사랑을 시작할 때 모든 행복과 불행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아요. 문학을 통해 지나치게 감상이 깊어질 수 있죠. ‘감상적’이라는 말은 예민해지고 섬세해진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이기주의적인 나르시시즘이 될 확률이 높아요. 이기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충고를 읽지 못해요. 반면 실연을 당했을 때, 모든 문이 자신 앞에서 닫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문학은 그 반대로 담담하게 애당초 그들을 위해 저절로 열리는 문은 없다고 말해주죠. 그리고 작가가 인물을 서술할 때, 인물의 행동이나 감정을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물은 실연당한 자신처럼 허점이 있고, 상처를 받았고, 복수를 하거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안달이 나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저 또한 그랬어요.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거죠.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과 이유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 버거의 『결혼을 향하여』라는 소설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건강한 남자와 죽음을 앞둔 여자가 서로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에 이르는 흔한 러브스토리지만, 서로가 사랑에 빠지고 죽음을 극복해 결혼을 이루는 과정의 서술은 ‘사랑 때문에’라고 핑계를 대는 대신에 솔직하고 담담하게 진행됩니다. 담론 연구가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분석을 추구한다면, 소설은 현실 너머에서 가능한 희망을 탐색하는 시도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책을 읽은 다음에는 그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Telmailing'님은?

글을 쓰고 읽을 때마다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현재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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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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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 밤이 오면 글을 쓸 것이다



이주동 | 『카프카 평전』 | 소나무 | 2012


나는 삶에 어떠한 확신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별들의 풍경은 나를 꿈꾸게 한다.

For my part I know nothing with any certainty, but the sight of the stars makes me dream.
- Vincent Willem van Gogh

카프카의 『소송』을 처음 읽었을 때, 참고 다 보는 게 힘들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운 헛소리가 나열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전 서울 고서점가를 나돌던 카프카 책의 뒷면에는 “이것도 문학이냐?”, "이런 X새끼를 내가 읽다니!" 라는 욕과 낙서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기괴하고 이상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작품 안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굉장한 게 숨어 있다고 믿었다. 밀란 쿤데라를 포함한 수많은 훌륭한 작가가 극찬한 작품이 별 게 아닐 리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반복해서 읽었고, 마침내 카프카가 표현하려 했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글 맨 위에 옮겨 놓은 네덜란드 화가 반 고흐의 말은 카프카를 이해하는 데 좋은 암시가 된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심상은 고독, 소외, 불안 같은 것들이다. 삶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 빠질 수 밖에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별들의 풍경이 있기에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시인은 시를 쓴다. 카프카도 외롭지만 아름다움을 믿었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고흐와 카프카의 공통점은 또 있다. 생전에 전혀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흐의 유명 작품인 < 별이 빛나는 밤 >은 현재 천억 원이 넘는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고흐 생전에 그의 작품은 팔린 것도 몇 개 없었을 뿐 더러, 팔려도 당시 가치로 이 백 만원 남짓했다고 한다. 카프카도 비슷한데 장편 소설 『실종자』의 첫 장인 「화부」가 단편 소설로 출간되어 폰타네 문학상을 받은 것 외에는 평단의 평가가 없다시피 했다. 그가 현재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모두 친구 막스 브로트가 사후에 출판한 유고로 인한 것이다. 카프카는 후두 결핵으로 죽기 전에 유작들을 모두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글을 그렇게 열심히 썼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카프카가 작품을 쓴 목적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의미 자체로 글쓰기를 생각했던 것 같다. 카프카는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 다니며 밤늦은 새벽 시간에 글을 썼다. 이 시간의 경험은 신비할 정도여서, 때때로 자신이 쓴 구절에 스스로 감동한 나머지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한밤중에 옆 방에서 자고 있는 부모가 깰까 두려워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서 울었다.

『카프카 평전』 같은 책을 통해 이런 배경을 알고 작품을 읽으니 글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그가 적은 글은 문장과 논리 그대로 느끼는 게 아니라는 것, 평범한 삶의 감각을 뛰어넘게 해주는 매개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프카는 문학이 줄 수 있는 아주 새롭고 특수한 미학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그게 많은 위대한 작가들이 카프카의 작품을 열렬히 좋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CamomileForever'님은?

책과 꽃과 풍경을 좋아하는 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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