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해당되는 글 52건

  1. 2014.12.23 《고래》 - 천명관을 처음 만났다
  2. 2014.10.01 《게으른 삶》 - 나의 사랑은 느리지만
  3. 2014.01.24 [서점에서 만난 사람] 함께 살고싶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집 -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출간 기념 간담회
  4. 2014.01.13 《자기 앞의 생》 - 사랑으로 살아요
  5. 2014.01.10 《우주를 느끼는 시간》- 어린 시절의 두근거림을 위하여
  6. 2013.10.15 [요즘 뭐 읽니?]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
  7. 2013.09.24 [서점에서 만난 사람] 닫히지 않는 이야기의 문 -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소설가 에트가르 케레트
  8. 2012.07.31 [요즘 뭐 읽니?] 무라카미 하루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9. 2012.07.03 [요즘 뭐 읽니?]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10. 2012.06.08 [단편소설의 맛] 최제훈, <위험한 비유>

《고래》 - 천명관을 처음 만났다

 

 

천명관 | 《고래》 | 문학동네 | 2004

 

천명관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답니다. 꽤나 유명한 소설가인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이라는 말에서 오는 기대와 설렘보다는 오히려 밋밋하고 그저 그럴 것이라는 편견이 먼저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처음'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대개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한 짜릿한 설렘을 느끼게 마련인데 말이죠. '첫눈', '첫사랑', '첫키스' 등 처음으로 시작되는 이런 숱한 말들은 그 흔함과는 별개로 각별하고도 강렬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처음'이라는 말은 가장 보편적인 언어인 동시에 가장 개별적인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러한 개별성 때문인지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첫'경험은 항상 새롭고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워 듣게 됩니다. 어쩌면 '처음'은 가장 진부한 주제인 동시에 언제나 새로운 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기도 전에 느꼈던 한국 소설에 대한 편견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고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묘하게도 천명관의 소설 《고래》는 그가 쓴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군요.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그럴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은 기존의 한국 소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지요. 뭐랄까, '신선하다'고 하면 식상하고, 이게 과연 소설이라는 장르에 제대로 속하기나 할까 의심부터 드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파격의 연속이지요. 그는 형식 밖의 형식으로 자신만의 글(또는 소설)을 쓴 셈입니다. 

 

그의 이력이 궁금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국어국문학이나 문예창작과를 전공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내가 어느 시점에서 한국 소설과 멀어진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만 보였던 창작 분야에서마저 산업화의 영향은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소설이라는 특정 형식은 판에 박은 듯 일정하고 내용만 조금 달라진 수많은 소설이 쏟아졌던 거지요. 제 눈에는 그게 그거인 듯 보였고, 심지어 일정한 생산 설비에서 자동으로 뽑혀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내가 한국 소설에서 멀어졌던 게 아마 그때부터였던가 봅니다.

 

이따금 궁금하기는 했어요. 그럴 때면 어려서부터 눈에 익은 유명 작가의 작품에만 손이 가더군요. 그마저도 없으면 일본이나 서구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되었고요. 그러다가 최근 유행하는 한국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된 것도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천명관의 《고래》였습니다. 말하자면 《고래》는 나로 하여금 한국 소설과 재회하게 한 첫 소설인 셈입니다.

 

아, 천명관의 이력이 궁금했었다는 말을 해놓고 그에 대한 설명이 없었군요. 늘 이런 식입니다.  두서가 없지요. 다들 예상하겠지만 그가 이 세상에 《고래》를 내놓기 전 그의 (작가로서의) 이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가다판을 전전하다가 영화의 세계로 뛰어들었던 것이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말입니다. 그가 소설 같지 않은(그래서 더욱 놀라운) 소설 《고래》를 쓸 수 있었던 것도 틀에 박힌 교육을 받지 않았던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 《고래》는 긴 겨울 밤 시커먼 남정네들이 행랑에 모여 시답잖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을 때, 작가가 투명인간이 되어 그들 몰래 방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를테면 허풍과 현실이 한데 섞여 서로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음담패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그러면서도 한국 근대사가 교묘히 섞여들어간, 때로는 '가량맞다'와 같은 순 우리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그런 소설입니다. 설화나 전설, 신화가 아닐까 의심하는 순간 작가는 불쑥 '독자 여러분!'을 외치며 등장하기도 합니다.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말입니다. 그 말에 놀란 독자는 '아, 맞아.  이건 가상현실이지.'하며 안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군은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그는 자신이 다시 선출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정적들은 더욱 거세게 그를 압박해왔고 민심은 그를 떠난 지 오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영원히 집권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새로운 법률을 공포한 것이었다. 그것은 독재의 법칙이었다." (351쪽)

 

이런 터무니없는 소설이 어떻게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일까요?  그것이 비단 작가의 글솜씨나 소설로서의 파격에만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뻥과 허풍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살짝 비껴간 듯하면서도 결코 현실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그들의 말, 그들의 삶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덕과 법의 테두리 속에 존재하는 삶이 난데없는 뻥과 결합했을 때 우리가 받는 느낌은 비현실이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재미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로 합쳐 흐트러짐 없는 서사로 엮어낸 작가의 능력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은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그들만의 언어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구요.

 

아무튼 소설 《고래》는 기존의 소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것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소설의 태생이 그렇듯 뒷골목의 이야기를 일정한 형식에 담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발상은 작가 천명관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들이 뭐라 하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내려간 까닭에 독자는 규칙에서 해방된 듯한 자유를 느끼고 그의 뻔한 허풍에 웃음을 짓게도 됩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탈 없이 이야기가 꾸려지는 게 신기하지요?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 강제로 이끌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규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우리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듯 자유로운 소설에 무수히 많은 법칙이 등장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작가는 소설 중간중간에 말도 안 되는 법칙들을 갖다붙여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이 다큐가 아닌 예능으로 읽히도록 강제하는 듯합니다.  예컨대 '구라의 법칙', '권태의 법칙', '생식의 법칙', 아랫것들의 법칙', '구호의 법칙', '흥행업의 법칙', '논쟁의 법칙', '고용의 법칙', '사랑의 법칙' 등 법칙이란 법칙이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즈음에는 청산유수로 쏟아내는 그의 말솜씨에 세 여자가 모두 넋을 잃어 국이 졸아붙는지 밥이 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것은 구라의 법칙이었다." (140쪽)

 

사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별 의미도 없지만 천부적인 입담꾼 천명관의 손에서 펼쳐지는 글의 얼개는 국밥집 노파와 금복, 금복의 딸 춘희로 이어집니다. 읽는 독자에 따라 금복을 주인공으로 또는 그녀의 딸 춘희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소설 속 무대인 평대를 중심으로 이재에 밝은 금복은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부자가 됩니다. 그야말로 벼락부자가 된 셈이지요. 그것은 순전히 한을 품고 죽은 박색 노파의 재물을 손에 넣었기 때문인데 결국 금복은 그 죽은 노파로 인해 파국을 맞게 됩니다.  산골 출신의 한 소녀가 욕심을 제어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내달리는 모습입니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271쪽)

 

금복이 지었던 고래를 닮은 영화관은 그 상징성이 남다릅니다. 영화라는 가상현실, 그 덧없음은 우리가 욕심내는 어떤 것도 스크린의 그것처럼 허망한 것임을 말하는 듯합니다. 결국 금복은 영화관과 함께 불에 타 죽게 됩니다. 방화범으로 몰린 벙어리 춘희는 자신에 대한 변명도, 결백에 대해 주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매섭고 긴 옥살이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장한 육체 하나에 의지하여 간신히 버틸 뿐입니다. 순진하리만치 미련한 춘희, 남에게 해코지 할 줄 모르는 춘희도 결국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을 보면 이 소설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주제로 집약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301쪽)

 

천명관의 《고래》는 내가 그동안 줄곧 생각해왔던 한국 소설에 대한 이미지를 단박에 깨트린 작품이었습니다. 나는 어쩌면 천명관이라는 작가로 인해 한국 소설에 대해 기대와 흥미를 한동안 품고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첫눈에 대한 막연한 기대처럼 설레는 것일 테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12월의 서평 주제는 '처음'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각자의 '처음'을 책과 함께 떠올려 보세요.

'오늘의 처음'으로 생생히 떠오르길 바랍니다.

 

│ 펜벗 일문일답

 

《고래》로 인하여 그동안 가졌던 한국 소설에 대한 이미지가 깨졌다고 했어요. 기존에 갖고 있었던 한국 소설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려준다면요.

 

뭐랄까, 기발하다거나 독특하다고 느낄 만한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았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고요. 일단 그런 생각이 들면 마음에 드는 다른 소설을 찾아보려는 노력이나 수고 하는 것이 부질없다 생각하게 마련이죠. 다 그게 그거라는 편견이 자리 잡았다고 할까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한국 소설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개인적인 바람이나 한국 소설을 통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기존에 보지 못했던 창의적이고 독특한 소재를 다룬 파격적인 소설을 기대합니다. 예컨대 한국 소설은 빠르게 변하는 사회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뒤처진다는 느낌이 강했었죠. 저만 그렇게 느꼈을까요? 게다가 표현에서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순화하거나 두루뭉술 넘어가려는 모습이 많았거든요. 특히 성애의 장면이 그렇죠. 작가가 판단할 때 어떤 장면의 세밀한 묘사가 작품에 꼭 필요하다 느끼면서도 대충 넘어가는 것은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일부러 성적인 묘사를 많이 다룰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죠.

 

금복이 ‘고래’에게 강하게 매료되었던 것처럼, 꼼쥐1님에게도 지금껏 그토록 강력하게 매료되었던 대상이 있었는지요. 한 가지를 꼽는다면요.


저는 참 무미건조한 사람입니다. 딱히 어떤 대상에 애착을 갖는다거나 매료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실이나 이별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여 미리 방어막을 쳐왔다고 생각해요. 물론 어렸을 때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내 소유의 어떤 물건을 가져보지 못했던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요. 그런 까닭에 성인이 되어서도 물건에 대한 애착은 생기지 않더군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요즘 무슨 책을 읽으세요?


그동안 일부러 외면하거나 등한시했던 베스트 셀러 작품을 챙겨 읽고 있어요. ‘올해의 책’ 목록에 오른 작품을 위주로 보고 있죠. 책에도 어떤 유행이나 트렌드가 있어서 그것을 마냥 무시하며 내 나름의 독서를 고집한다는 것도 조금 우스워 보이거든요. 연말이면 대개 그랬던 것 같아요. 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못 읽고 지나쳤던 책이라던가 제 취향은 아니지만 독자에게 사랑받았던 작품을 주로 읽게 됩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꼼쥐1'님은?

책을 사랑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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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삶》 - 나의 사랑은 느리지만

 

 

이종산 | 《게으른 삶》 | 문학동네 | 2014

 

반복되는 일상에서 드물게 찾아오는 게으른 순간들. 나는 항상 그런 게으른 순간들을 사랑한다. 빨래를 널어놓고 한숨 돌리는 시간, 카페에 늘어져 차를 마시는 시간, 햇빛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시간, 소중한 사람과 따뜻한 포옹을 나누는 시간, 그런 순간들로 삶이 채워지기를 언제나 바라왔다. (150쪽, 작가의 말 중에서)

 

"게으른 시간 속에서 더 많이 사랑하기를 빈다."는 작가의 말에 이끌려 설레는 마음으로 《게으른 삶》을 읽기 시작했다. 낯선 타국, 골목에서 길 헤매는 시간을 즐기는 나는 작가 역시도 ‘진짜’ 이야기는 한발 물러나 있는 ‘그곳’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소설을 다 읽고도 한참 동안 감상을 쓸 수 없었다. 너구리를 닮은 겁 많은 여자아이와 참치 통조림을 가지고 다니는 담백한 남자아이의 연애 이야기라는데 이견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조하지도 않았다. 둘의 관계는 친구와 연인 사이 언저리에서 모호하게 이어지며, 그것을 연애라 하더라도 그 온도 자체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채 끝나버린다.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서슴없이 성관계와 연애 기술을 얘기하는 시대에 이토록 느리고도 흐릿한 관계라니.

 

너구리(나)는 오랫동안 참치를 짝사랑하면서도, 마음의 진로를 정하지 않는다. 마음에 대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굳이 끝장을 보지 않아도, ‘DHA가 풍부한 물고기가 좋다’는 너구리의 말에 ‘좋아하는 동물이 얼굴이 빨개지는 너구리로 바뀌었다’ 말할 줄 아는 참치가 곁에 있는 걸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언제나 함께 해왔고, 일상을 채우는 수많은 대화가 있으니 그것으로도 만족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누군가를 향하기 시작한 ‘마음’이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관성을 지니며, 결정적인 순간에 폭발하게 된다는 데 있다. 막막해져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 다독이던 너구리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거란 예감에 휩싸이고 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상처 받기 두려워 솔직해지지 않는다면, 누구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유일한 무언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구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애써 억눌러 왔던 마음은 그래서 점점 고개를 내민다. 케르베로스에게 잘해주는 참치를 향해 내뱉는 말이 실은 참치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인 것처럼. “잘해주지 마. 넌 주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잖아. 네가 가면 케르베로스는 기다릴 텐데 너는 돌아오지 않을 거잖아. 내가 틀려?” 기다리지 않겠다는 너구리의 말 역시, 사실은 끊임없이 떠나는 참치를 내내 기다렸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들린다.

 

참치는 여러 번 훌쩍 떠났다가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 당분간은 괜찮아. 돌아오면 그렇게 말했다. 참치는 오래 버티고 있었다.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침대 밑에 숨겨두고. 머리맡에 있는 여권을 들고 도망치듯 떠나지 않고. 깊은 밤과 이른 아침 사이의 시간에 전화를 걸어 다녀오겠다고 말하지 않고. 어쩌면 그래서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참치에게 내가 돌아와야 할 이유가 됐던 적이 있을까.

 

저 우산을 타고 참치가 내려온다면 물어봐야지. 그리고 내가 돌아와야 할 이유가 됐던 적이 있다고 대답하면 다음에도 그래달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냐고. 기껏 기다리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는 이런 생각. 한심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97쪽)

 

참치의 집에서 머무는 날에게 옹졸한 질투심을 느끼던 너구리의 짝사랑은 이제 종착지를 향해 달려간다. 희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리에서 뛰어내린 영수처럼, 너구리는 어떻게든 마음에 매듭을 지어보기로 한다.

 

나도 내기를 해볼까? 여기서 뛰어내리면 참치를 정말 그만 기다리는 거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난 더 이상 참치가 겁쟁이라고 무시하는 너구리가 아니고 날 한 번도 잡은 적 없는 그애를 기다리는 것도 그만두겠다. 고백하고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나도 끝내겠다. 나는 난간을 잡고 발을 올렸다. (100쪽)

 

실패가 두려워 회피하고, 귀찮아하고, 계속 미루기만 하면 무엇도 얻을 수 없다. 누구나 안다. 마음에 일종의 부담감과 책임감을 부여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남녀 관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마음과 자존심을 최우선으로 두는 방식의 연애가 얼마나 위태롭고 허약한지 실패한 지난 연애를 통해 배웠다. 그래서 함께 떠나자는 참치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남기를 택한 너구리의 결정이 안타까웠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장 너구리다운 결정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산한 새벽 거리를 떠돌다 참치를 생각한 너구리가 더 이상 막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화로운 시간 가운데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또렷한 순간을 자주 마주하기를. 연애의 끝이 그렇듯, 어떻게 끝맺음을 내야 할지 모르겠으니, 시작처럼 끝도 작가의 말로 마무리 한다.

 

“이 세계 혹은 진실은 언제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빛에 가려져 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곰자'님은?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김중혁 작가의 말처럼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는 생각으로, 일단 잘 듣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제가 마음으로 전해들은 무수한 이야기를 잘 엮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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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함께 살고싶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집 -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출간 기념 간담회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혜원
사진 제공 | 문학동네

 

같은 책이라도 전집(全集) 안에 들어가면, 새로워 보입니다. 책의 새로운 터전 같다고나 할까요? 위대한 문학전집이 세상에 나오면, 이 땅에 훌륭한 집 한 채가 지어진 것 마냥 우두커니 바라보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자꾸 보면 살고 싶어지는 것이 집입니다. 책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훌륭한 전집일수록 전부 다 모으고 싶죠. 그래서 전집은 ‘샀다’는 말보다 ‘장만했다’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세계문학전집과 한국고전문학전집을 출판한 문학동네에도 새집이 들어섰습니다. 하얗고 튼튼한 스무 권의 책들입니다. 김승옥의 단편 10편이 수록된 1권부터 2009년에 나온 박민규의 <카스테라>까지. 스무 권을 아우르고 있는 시대는 사실 모호합니다. 문학동네의 신형철 편집위원은 한국문학전집의 발간을 기념하며, 선정 기준을 밝혔습니다.

 

 

 

 “’문학성’입니다. 문학동네가 소설을 출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신뢰하는 기준은 ‘서사의 힘’입니다.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이야기가 밝혀서 보여줄 수 있는가.” 그리고 작품이 어느 정도 독자들과 소통했는지, 한 시대의 사회적 징후를 대표적으로 보여줬는지 하는 ‘문제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박완서를 읽고 자랐고, 모두가 박완서를 읽으며 세월을 났다.” (400쪽)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의 세 번째 책, 박완서의 대표 중단편선 <대범한 밥상>에 쓰인 문학평론가 차미령의 해설입니다. 세월을 함께한 책을 전집으로 다시 보는 기분은 어떨까요?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은 2014년에 나온 ‘새 책’이기도 합니다. 이 전집을 계기로 누군가는 한국문학 입문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을 통해 ‘한국문학이 이런 거구나.’라고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세대의 한국문학 독자, 한국문학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 속에 정착되도록 하는 게 문학 출판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종연 편집위원의 바람이 문학동네가 한국문학전집을 출간하는 중요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선으로 발표된 스무 권 외에 앞으로 전집에 입주 예정인 이웃도 궁금해집니다.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문학동네 편집위원들은 자신감 있게 입을 모았습니다. “전집을 만든다는 것이 기존에는 정서를 확정 짓는 대단히 권위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문학동네는 좀 더 동시대 독자들과 호흡할 여지를 많이 남기고자 합니다. 조금 더 유연하게. 어떤 작품은 전집으로 묶기엔 조금 낯설 수 있어요. 하지만 동시대의 작품 중 앞으로 어떤 것이 한국문학전집에 포함될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는 맨 처음 기준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모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문학동네의 자신감 표현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한국문학전집을 장식하는 표지에는 한강 사진이 있습니다. 낯선 풍경의 한강을 아름답게 찍는 이대원의 사진입니다. 문학동네가 기록할 한국문학전집의 역사가 한강의 물결을 따라 굳세게 흘러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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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 사랑으로 살아요

 

에밀 아자르 |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 2009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12-13쪽)

 

생(生)은 가차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진 누구라도 그 생의 조건에 관해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생은 종종 그 자체로 부당한 것이 되곤 한다. 나로선 어쩌지 못할 현실이 눈앞에 놓여있고 그 결과들 안에서 스스로의 책임을 찾지 못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오롯한 몫으로 남았을 때,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이생과 불화하는 불행한 자기(自己)만을 토해낸다.

 

나는 불행했기 때문에 다른 곳, 아주 먼 곳, 그래서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버리고 싶었다. (33쪽)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채운 인생들이 그렇다. ‘모모’가 우리라고 부르는 이들, 편견과 차별, 멸시의 대상으로, 그러므로 삶은 늘 낯선 것일 수밖에 없는 이방인으로서, 프랑스 멜빌에 모여 사는 가난한 유태인과 아랍인, 흑인들의 삶이 그렇다. “몸으로 벌어먹고 사는 여자들”과 그녀들의 비“위생”이 낳고 생의 밥벌이가 떨어뜨려 놓은 아이들의 나날이 또한 그렇다. (14쪽)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174쪽)

 

그곳에 그들이 살고 있다고 알아주는 이 없다면, 그렇게 아프면 다가와 돌봐주고 기꺼이 따뜻한 품을 내어줄 누군가마저 없다면, 다만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태어남이 곧 상처인 삶들이 있다. 사람으로, 사랑으로 그 상처를 어루만져야만 그제야 생의 비밀에 조금쯤 다가갈 수 있는 이들이, 그 안에서 숨겨져 있던 기쁨을 찾아 흉터처럼 몸에 새긴 채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이 있다.

 

그렇기에 《자기 앞의 생》에는 아무리 “복통과 발작을 일으”켜도 “끝내 엄마는 오지 않”는 모모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강제수용” 되었다 끝내 병들어 죽어간 로자 아줌마의 관계가, 그 사이를 잇는 사랑이, 그에게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일러준 하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리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살 게 된 아이의 이야기가 부당한 생 대신 아름다운 결말로서 주어져 있다. (15, 307쪽)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보고 싶다.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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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느끼는 시간》- 어린 시절의 두근거림을 위하여

 

티모시 페리스 |《우주를 느끼는 시간》| 문학동네 | 2013

 

전리층에는 구멍이 많이 나 있기 때문에 큰 라디오 방송국에서 송출한 음악 방송이 모두 다 지상으로 반사되진 않는다. 그중 일부는 구멍을 통해 우주 공간으로 빠져나가 별을 향해 날아간다. 우리가 1950년대에 들었던 블루스 선율 중 일부는 지금도 우주 공간에서 빛의 속도로 저 먼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48-49쪽)

 

잠깐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자.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타는 것을 꿈꿨었고, 밤하늘의 별자리들을 외우며 수십 년 만에 찾아오는 혜성이나 별똥별을 보기 위해 밤을 샜었다. 아름다운 별들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천체 망원경은 모든 아이들이 바라던 선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밤하늘의 아름다움에 두근거려 하는 우리는 더 이상 없다. 

 

그건 아마 대기 오염과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의 불빛으로 인해 하늘이 흐려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입시나 취업과 같이 먹고 살기 바쁜 일상들로 인해 발밑만 쳐다보느라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일 이런 현실에 아쉬움을 느낀다면 우주를 느끼는 시간은 좋은 대안이다. 이 책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어떤 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먼저 이 책은 천문학 교양서적이 갖춰야할 미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태양에서부터 출발하여 태양계의 여러 행성들을 거쳐 은하계 너머, 일반인의 인식을 넘어서는 먼 곳까지 천천히 유영해 나가면서도 저자는 독자의 손을 절대 놓지 않는다. 즉 우리가 매일 보는 태양과 달의 흥미로운 측면에서부터 태양계의 여러 행성들의 신비로움, 그리고 저 먼 우주에 대한 최신 관측 결과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일반 독자들이 어려워하거나 지루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경험을 곁들인 친절한 설명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 책을 천천히 읽어나가고 있노라면 마치 박식한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우주 여행하는 기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각 장의 사이사이에 간주처럼 삽입된 아마추어 천문가들의 이야기는 이 책의 백미이다. 저자는 다양한 아마추어 천문인들을 찾아가 그들이 어떤 식으로 하늘에 빠져들었는지, 어떤 장비로 무엇을 탐구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 그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러한 인터뷰를 통해 저자는 천문학이 여타 다른 과학 분야들처럼 비싼 장비들을 활용할 수 있는 전문 과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동참할 수 있는 분야라고 독자들을 격려한다. 

 

당장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러면 아마 우리도 데이비드 레비처럼 새로운 혜성을 발견할 수도 있고, 잭 뉴턴처럼 자신의 사진이 <뉴스위크>에 실릴 수도 있으며, 돈 파커의 경우처럼 전문가들이 우리의 도움을 받아 데이터를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도 아마추어 천문인 데이비드 아이커가 구상 성단을 처음 보고 느꼈던 감정을 공유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갑자기 꽁꽁 감춰진 비밀을 알게 된 양 흥분에 휩싸여 돌아왔다. 내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주변의 세계 역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거리를 걷거나 신발을 신거나 슈퍼마켓에서 청량음료를 살 때에도 이전과는 뭔가 크게 달라진 것을 느꼈다. 과거와 달리 나는 파란 하늘 저 너머에 보이지 않는 별과 세계가 수많이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알고 있다. 그러니 느끼는 것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 마음속에 우주 전체가 들어앉은 것이다.(355-366쪽)

 

저자는 500 페이지 내내 아름다운 문장으로 우리에게 우주를 ‘느끼’게 해준다. 혹시 예전의 두근거림을 잃어버렸다고 생각된다면, 시간 내어 이 책 우주를 느끼는 시간을 읽어보길 권한다. 책을 읽고 나면 “책을 읽는 동안 멈춰 있던 내 가슴이 다시 뛰는 소리를 듣는다.”는 뒷 표지의 추천사가 전혀 허언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린 시절처럼 조금씩 두근거리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우주 공간에서 빛의 속도로 퍼져나가는 블루스 선율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etnunc'님은?
자유로운 백수를 꿈꾸며 알바로 연명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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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 읽니?]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

 

 

박완서 | 《그리움을 위하여》 | 문학동네 | 2013

 

어떻게 나이 들고 있는 걸까. 뭉텅, 하고 한꺼번에 인생의 시간이 떨어져나간 듯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지금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건지를 따져 묻는 불안한 스스로와 마주하곤 하고요. 허투루 흐르는 세월 없다고도 하고, 그러면 흘려보낸 세월만큼 무언가는 분명 남겨져 있어야 할 텐데요. 어쩐지 그 말이 저에게만큼은 해당되지 않는 것 같은 거죠. 그도 그럴 게, 작게는 어제와 오늘 사이, 크게는 작년과 올해 사이에 변화라고 부를 만한 것이 과연 있었나 싶거든요. 눈에 띄게 늘어난 나잇살 빼고,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어 봐도 헛일이기가 다반사고요. 

 

그래, 지난 시간들을 빠짐없이 건너오며 나는 내 삶의 무엇을 더하고 덜하였나, 그리하여 오늘에 남은 것은 무엇이고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나, 소득 없는 질문만 메아리처럼 반복하기 일쑤입니다. 그마저도 지치고 짜증스러워지면 당장에 마음 편해질 구석 찾아 소망으로 완성된 먼 훗날의 나로 냅다 도망쳐버리고요. 그렇게 먼 훗날의 나를 두고, 된 사람이라 부를 만한 이모저모의 덕목을 갖다 붙여놓습니다. 존경할 만한 어른의 형상을 만드는 거죠. 그런데 오늘, 이《그리움을 위하여》를 읽다가 그 어른이 박완서 선생님과 같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단편소설에서 감지된 사람과 삶과 세상에 대한 시선이 갖가지 인생을 두루 품는 큰 사람, 어른다운 어른의 모습으로 이어졌거든요. 

 

“선생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면 모든 게 다 문학이 되었다. 그 손으로 선생은 지난 사십 년 간 역사와 풍속과 이간을 장악해왔다. 그 책들을 읽으며 우리는 살아온 날들을 부끄러워했고 살아갈 날들 앞에 겸허해졌다. 선생이 남긴 수십 권의 책들은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공유 자산으로 남아 우리들 마음공부의 교본이 될 것이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물론 뭐, 해가 가고 나이 들수록 온통 싫은 것만 많아지는 통에 성 내는 일도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도 늘고 있는 저로선 언감생심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판단이 앞서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곳에 지향을 두고 살고 또 살다보면 지금보다는 쬐끔, 더 나은 사람이 돼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한편, 지금의 저와 먼 훗날의 제가 선생님의 저 소설들 안으로 슬며시 들어가 앉아, 그래, 이 또한 삶이고 그런대로 괜찮은 거다, 조용히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릴 것 없이 살았음으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44쪽, 〈그리움을 위하여〉중에서)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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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닫히지 않는 이야기의 문 -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소설가 에트가르 케레트

 

 

취재·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주변에 하나쯤은 이야기를 참 맛갈나게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똑같은 사건과 줄거리일지라도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라면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해지고 쫀득쫀득해집니다. 살을 더하거나 빼고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다음은, 그 다음은? 하고 성마르게 이야기를 재촉할 수밖에 없는데요. 이런 이야기꾼에게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려, 강도처럼 이야기를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이야기 하나 해봐.” 라며 권총으로 위협하고 윽박지르면서 말이죠. 

 

“평소처럼 하면 되잖아.” 수염은 투덜대며 권총의 공이치기를 당긴다. “이야기를 하느냐, 두 눈 사이에 총알이 박히느냐야.”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수염은 농담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11쪽,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중에서)

 

‘나’가 시작한 그 이야기가 궁금하시다고요? 그렇다니까요. 바로 그거거든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에 담긴 모든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다음은, 그 다음은?’이라는 마음의 소리를 반복하게 만들고, 그렇게 기발하고 통통 튀는 상상력으로 현실 안에서 초현실을 꺼내고, 초현실 안에서 현실이 떠오르게 하는 재주가 바로, 낯선 나라 이스라엘에서 건너온 작가 ‘에트가르 케레트’의 매력이라는 거죠. 그의 이야기,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반디| 작품은 그것의 태생적 배경, 즉 작품이 쓰인 시기의 역사적 상황, 작가의 성장 환경 등을 지니게 됩니다. 작가님의 작품 또한 이스라엘의 현대사라는 배경과 연관해 독해되곤 하는데요. 2013년, 한국 현대사의 자장 안에 있는 독자들에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로 묶인 작가님의 “주관적인 이야기”가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다가가길 바라시는지요?

 

에트가르 케레트| 지리적으로 멀리 사는 독자들이 최고인 것 같아요.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나라에서 살고 있는 저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 분들이 소설에서 발견하시거든요. 저는 독자들한테 이스라엘의 어떤 면을 가르치고 싶은 게 아니라, 스토리를 같이 나누고 공감하고 싶을 뿐입니다.

 

반디 | 표제작인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작가의 집에 괴한들이 들이닥쳐 이야기를 해 보라며 종용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첫 번째 순서로 하여 나머지 각각의 소설들이 배치된 점이 흥미롭습니다. 꼭 ‘천일야화’ 같기도 하고요. 다른 점이라면 책에 실린 이 소설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개별의 이야기라는 것이겠죠. 그 중에서도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이 이야기들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모든 이야기들을 시작하게 한 작가님의 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이 책이 쓰여진 때는 개인적으로 제 삶에서 매우 특별한 시기였습니다. 소설을 쓰는 사이에 결혼도 하고, 담보대출로 아파트도 얻고, 아이도 생겼거든요. 이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글을 쓰는 새로운 방식을 찾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써나갈 이야기가 과연 독자들에게 충분히 다가갈 지를 확신하는 데에도 시간이 조금 걸렸고요. 

 

표제작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계기가 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인물이 처한 환경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 인물의 복잡미묘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거든요. 말하자면, 객관적인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객관적인 사건일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니까요. 동일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트라우마로 남는 반면, 어떤 사람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살게 되는 것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삶에서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사건을 통해 주인공이 어떤 강렬한 감정을 느꼈느냐에 더 주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글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보다 아파트를 파는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삶이 훨씬 흥미로울 수도 있고요.  

 

제목인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은유합니다. 이 변화가 인물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고요. 예컨대, 잘 살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제 삶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누구인지는 몰라요. 그저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또 다른 삶이 펼쳐지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제가 부모가 되면서 다른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한 변화가 이 책에도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반디| 그런가 하면,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는 이야기 자체가 지닌 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누군가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될 테니까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를 읽으며 무엇보다 강하게 남은 인상 또한 그것이었는데요. 직접 이야기를 만들고 쓰시는 작가님께서도 이 이야기의 힘을 느끼신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은 일화가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사실 저는 작가로서 책을 출판하기 전부터 이야기에 힘이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어렸을 때의 일인데요. 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주먹으로 남자를 때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몰랐지만 저는 그 상황에 대한 저만의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얼굴을 맞은 남자가 여자의 이복동생이었는데 어머니가 죽고 화가 나서 때린 거라는 식으로 맥락을 만들면서요.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폭력을 중화시켰던 경험이죠.

 

 

반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단편들에선 일상이 재기발랄하게 묘사되는 상황에서도 삶의 비의가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삶이란 땀을 흘리는 것, 삶이란 지랄맞게 잊을 수 없는 아픔”(190쪽, <치핵>)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요. 하지만 인물들은 이런 삶일지라도 거부하지 않고 희망에 좀 더 가까이 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픔을 “살아 있는 느낌”(58쪽, <아침을 건강하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보이고요. 아픔 자체인 현실에서 문학의 역할,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사람들은 보통 기쁨과 고통, 두 가지로 감정을 구분하곤 하는데, 저는 뭔가를 느끼는 상태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로 구분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놀이공원을 갔다가 그곳을 나서면서, 누군가는 기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 감정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의 시간으로 아무것도 느낀 게 없다면 티켓을 낭비한 게 되겠고요. 물론 저 또한 삶에서 기쁨을 느끼는 편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떤 일로부터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제 삶 전체를 고통이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에서 기쁨만을 따로 분리해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아들한테 늘 하는 이야기가 ‘네가 원하지 않는 음식은 먹을 필요가 없지만 항상 모든 것을 맛보도록 하라’는 겁니다. 음식의 다양한 맛을 느끼듯, 삶이 가진 다양성을 충분히 활용하라는 의미죠.

 

반디| 많은 단편들에서 ‘거짓말’이 나오는데요. 기본적으로 허구인 소설 속에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내는 인물이나 그 거짓말로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가 등장하는 순간, 독자의 입장에선 허구인 이야기와 거짓말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야기와 거짓말에 대해, 작가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저에게 있어 소설(fiction)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이야기(story) 혹은 거짓말을 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거짓말이 있는데요. 어떤 상황을 모면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이 있는가 하면, 동정이나 연민 같은 인간적 감정이 작용해 타인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도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면, 누군가에게 그 삶은 지금보다 조금 더 쉬워질 수 있지만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에게는 삶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살면서 거짓말을 하지만 의도는 거의 선한 것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허구인 이야기는거짓말로 점철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제가 가장 진실해질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제가 쓰는 이야기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때 거짓말과 진실,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경계를 두기보다는 그 뒤에 있는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선한지 악한지에 대해 더 중점을 두는 편이고요.

 

반디| 개인적으로 <거짓말 나라>나 <문예 창작> 같은 경우는 결말에 이르러 아쉬울 만큼 더 보고 싶은 소설이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이어질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는데요. 그만큼 이야기 내에 또 다른 이야기가 가지를 치는 식으로 쓰인 것이 꽤 있습니다. 특히 이것을 아주 짧은 단편 소설 안에서 시도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아무래도 단편소설은 형식상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기에 한계가 있을 텐데, 그럼에도 단편소설 쓰기를 선호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개인적으로 ‘선호’한다는 말은 쓰고 싶지 않아요. 저도 기꺼이 장편소설을 쓸 용의가 있긴 합니다. 출판업자도 좋아하고, 제 은행잔고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웃음) 하지만 단편소설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제가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작가인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 스스로가 결정한다고 느끼는데요. 예컨대, 어떤 문을 향해 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 문이 제 앞에서 닫히면서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있는 이야기가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르는 거죠. 이렇듯 저는, 소설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느낌을 갖는 게 독자들에게는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쓰기-읽기가 작가와 독자의 지성이 만나는 관계라고 본다면, 독자 나름대로 다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스스로 생각해보는 게 엄격한 틀에서 쓰여진 이야기를 접하는 것보다 좋을 테니까요.

 

반디|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떤 방식으로든 진실에 다가가는 작업이라면,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독자가 글로 쓰인 소설을 경유해 작가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매우 친밀해질 수 있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제가 타인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면 사람들은 그 경험을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처럼(작가님께서 실제로도 이 말씀을 하실 때 통역해주시는 여성 분의 얼굴에 본인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 들이미셨더랬습니다^^) 독자들 또한 자신만의 상황이나 감정을 갖고 책을 읽을 겁니다. 그래서 같은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독자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고요. 예를 들어, 제가 쓴 한 편의 이야기를 두 명의 감독이 각각 로맨스와 호러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같은 이야기인데도 로맨스 영화를 만든 감독은 흥미롭고 재미있게 느꼈고, 호러 영화를 만든 감독은 무서웠다고 해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진실은 외부에서 보는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라 독자들 각자가 자기 삶과 관련해 질문을 이끌어내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진실인 거죠. 

 

반디| 소설집 안에는 작가님의 번뜩이는 상상력이 가득합니다. 평소에도 상상이나 공상을 많이 하실 것 같은데요. 불시에 찾아든 어떤 상상이 한 편의 소설로 완성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작가님만의 작업 방식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소설 쓰실 때의 습관이라든지, 작업하시는 공간의 분위기 같은 것도 궁금하고요.

 

에트가르 케레트| 저는 항상 다른 것들에 대해서 상상합니다. 시간이 될 때마다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기도 하고요.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하는 생각들이요. 어릴 때도 공상이 많은 편이었는데, 제가 공상한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불편해하거나 당황스러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은행을 턴다든지,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다든지 하는 공상들은 점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게 되고, 제 사적인 감정으로만 남게 되었죠.

 

글쓰기 규칙 같은 걸 따로 정해 놓지는 않습니다.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글을 쓰려면 저 혼자만의 장소가 필요합니다. 아들이나 아내가 있으면 글쓰기에 집중하기 힘들어서요. 장소만 있다면 그곳이 깔끔한 곳인지 지저분한 곳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더운 나라다 보니 속옷 차림으로 쓸 때도 있고, 소설을 쓰면서 관련된 것들을 큰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한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예전에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외부 지원금을 받고 작가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창밖에 숲이 보이고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는데요. 한 번은 그곳에 초대된 친구가 저한테 묻더라고요. ‘네가 글쓰기를 할 때 창밖의 아름다운 숲은 보지 않고 변기를 쳐다보더라. 왜 그랬니?’ 그 질문을 받고 제가 ‘의식적으로 그런 건 아닌데 글을 쓸 때는 물리적인 실제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와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글을 안 쓸 때는 저도 아름다운 경관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물리적인 장소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반디|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뜨겁고 민감한 곳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래서 타국의 사람들에겐 이스라엘의 문학작품보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이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것도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작가님께 어떤 의미일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이스라엘이 분쟁과 갈등이 많은 지역이긴 하지만, 살기에는 나쁘지 않은 곳이고 글쓰기에는 더없이 좋은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으로 이야기는 갈등관계와 다양성에 기반을 두고 쓰여지는데, 이스라엘만큼 갈등관계가 많은 곳도 없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사람에게 이스라엘은 천국과도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가끔 상상을 하게 되는데, 공항에서 여권 검사를 할 때 좋은 이야깃거리가 있는지를 보고 통과를 시켜주는 겁니다. (웃음)

 

반디| 살만 루슈디, 아모스 오즈, 조너선 사프란 포어, 얀 마텔 등 동시대 각국의 작가들에게 호평을 받으셨습니다. 작가님께도 한 사람의 독자로서 호평을 보내고 싶은 작가가 있을 텐데요. 동시대에 주목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면, 해당 작품과 그 이유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동시대 유대계 작가들과 매우 인상적인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마이클 샤본’ 등인데요.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정체성입니다.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작가들에게서는 이와 같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는데, 저의 경우는 오히려 외국에 사는 유대계 작가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반디 | 정체성의 문제를 말씀해주셨는데요. 자국 내 작가들이 느끼는 정체성과 이주한 작가들-디아스포라-이 다른 나라에서 고민하는 정체성은 그 본질에 있어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정체성 문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질문을 항상 하게 되니까요. 만약 내가 유대계 미국인이나 유대계 프랑스인이라면 어느 쪽 정체성에 더 가까운지, 자신을 규정하는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학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주제를 쓰게 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죠. 이스라엘인이 곧 유대인이니까요. 그래서 이스라엘 문학에서는 개인적인 정체성 문제보다 집단적인 이슈, 어떤 것이 국가에 이해득실을 가져오는지를 고민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심리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더 가까이 느끼는데요. 굳이 정체성을 구분하자면 제 자신이 이스라엘인이라기보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더 강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어떤 그룹에 속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어떤 측면에서 나와 맞지 않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동질감을 느끼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디|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감정을 중요시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체성 문제에 대한 작가적 관심이 국가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어진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대개의 사람들이 국적에 따른 정체성을 당연시하지만, 제가 쓰는 이야기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국적이 본질적으로 내재적으로 설정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늑대는 그저 한 마리의 늑대로 살아갈 뿐, 자기가 어떤 군락에 속해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사실상 국가라는 형태가 역사에 등장한 지는 얼마 안 됐고, 그 전까지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부족 형태로 살았잖아요. 이 국가라는 개념을 아파트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파트에 사는 세입자들이 공용 구역 청소를 얼마나 자주 하고, 침입자로부터 어떻게 사람들을 보호할 지 다같이 고민하는 것처럼, 국적을 선택하는 일도 같은 식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유대인은 꼭 이스라엘계가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이 국가와 연관된 자기 정체성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제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대해 감정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그들의 문화가 개별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코스모폴리탄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고요.

 

반면에 이스라엘처럼 국적을 중요시 여기는 나라에 사는 것은 심리적으로 부담이 됩니다. 제가 ‘텔아비브’의 작은 동네에서 살았는데요. 여섯 살 때 축구 토너먼트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게 태어나 처음 보는 축구경기였는데, 저희 동네 팀과 다른 동네 팀이 겨루는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보다 보니 다른 동네 팀이 신사적인 태도로 경기를 더 잘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쪽을 응원했는데, 선생님이 왜 다른 쪽을 응원하느냐고 해서 반발심을 느꼈었습니다.

 

또 제게는 형 한 명과 누나 한 명이 있는데, 형은 무정부주의자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건국이 정당화될 수 없고, 그래서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소수인종으로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누나는 신앙심이 굉장히 깊어서 종교지도자가 곧 정치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열한 명의 아이와 열 명의 손자를 갖고 있는 분이죠. 그런데 이렇게 형제 자매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 형제 자매는 모두 친절하고 따뜻하고 똑똑한 사람들이니까요. 오히려 제가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제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탈세를 하기도 하니까요. 말하자면, 사람을 볼 때 개인을 바라보지,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반디| 소설뿐 아니라 영화도 연출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작가님의 상상을 구현하는 데 있어, 소설과 영화 각각의 매력이 무엇인가요? 

 

에트가르 케레트| 영화의 매력은 여러 사람이 협업한다는 데 있습니다. 애초에 제가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 것인데, 글쓰기 자체는 작가가 혼자서 해야 하는 외로운 작업이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연극이나 영화에 관심이 생기고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저는 다른 사람과 일하면서 느끼는 연대감을 원했고, 그런 측면에서 영화가 큰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일하는 사람들과 연대감을 갖을 수 있저는 일하는 사람들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일하기를 선호하는데,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과 일하고 싶습니다. 

 

반디|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만큼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한국의 소설이나 영화, 혹은 그 밖의 문화를 접해보셨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부끄럽게도 한국에 대해 거의 모른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책을 읽은 적은 없지만, 굉장히 훌륭하고 유명한 한국영화 제작자들이 만든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호기심도 생기고 한국문화에 대해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껴져 앞으로 한국에 대해 더 배워볼 생각입니다.

 

에트가르 케레트(Etgar Keret)

 

이스라엘 젊은 세대의 가장 큰 지지를 받는 단편의 귀재이자 <뉴욕 타임스>로부터 '천재'라는 찬사를, 살만 루슈디, 아모스 오즈, 얀 마텔, 조너선 사프란 푸어 등 동료 작가들의 극찬을 받은 동시대 가장 독창적인 작가. 1967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1992년 소설집 《파이프》로 데뷔했다. 두번째 소설집 《미싱 키신저》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후 정체성과 사랑에 대한 고뇌, 고독감 등을 초현실적으로 그려낸 단편들을 발표해 카프카에 비견되었다. 《신이 되고 싶었던 버스 운전사》를 비롯해 《냉장고 위의 소녀》《네 편의 이야기》 등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여러 소설집이 35개국 3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여덟번째 소설집으로 기발하고 독창적인 스타일이 무르익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스라엘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2012년 미국에서 여섯번째로 번역 출간되어 그해 아마존 '올해의 책'에 선정된 것은 물론, 전 세계 22개국에 판권이 팔리는 등 세계적인 작가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밖에도 몇 권의 만화책을 공동 집필하고 어린이책을 썼으며 본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다른 예술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어 몇몇 단편이 그래픽 노블 《시차증》《가미카제 피자집》으로 묶여 나왔고, <리스트 커터스―어떤 사랑 이야기>의 원작인 중편소설 〈크넬러의 행복한 캠프 생활자들〉을 비롯해 40여 편의 작품이 영화화되었다. 그 자신도 영화에 조예가 깊어 아내와 공동 연출한 <젤리피시>가 2007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고 지금까지 영화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스라엘 출판협회에서 수여하는 플래티넘 상, 총리상 문학 부분, 문화부장관상 영화 부분을 수상했고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훈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미란다 줄라이가 수상하기도 한 국제적 권위의 단편문학상 프랭크 오코너 국제 단편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현재 네게브의 벤구리온 대학교와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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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 읽니?] 무라카미 하루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 문학동네 | 2012

 

나른한 오후, 의식은 자꾸 아래로 아래로만 가라앉습니다. 그 끝은 당연히,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직무태만 상태. 표면적으로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긴장의 끈을 놓고 늘어진 육체를 의자에 겨우 걸치고 있는 상태. 감은 두 눈을 뜨려고 애써 보지만 어느새 정신 차리고 나면 또 다시 같은 상태. 의식이 깨어난 찰나, 잽싸게 그 틈을 치고 들어온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이라봤자, 에어컨 팡팡 터지는 쿨~한 방구석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사지를 제멋대로 뻗은 채 낮잠이나 실컷 자는 헛된 꿈꾸는 그런 상태. 써진 것과 써야 할 것 사이를 오고가며, 이처럼 단순하고 저질스러운 말장난으로밖에 하루키를 불러내지 못하는 그.그..런 상태.

 

“제 꿈은 쌍둥이 여자친구를 갖는 것입니다. 쌍둥이 자매 둘 다 제 여자친구인 것―이것은 십년 동안 품어온 제 꿈입니다. 

 쌍둥이 여자가 이런 글을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 난 잘 모르겠다. 어쩌면 불쾌해할지도 모른다. 말이 되는 소리야, 하고 버럭 화를 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이건 그저 제 꿈일 뿐이에요. 꿈이란 대개 불합리하며 일상의 규제를 넘어선 것이죠. 그러니 ‘이건 그저 무라카미 하루키의 꿈이야’ 하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읽어주십시오.”

 

무라카미 하루키의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중 서두입니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하루키의 백일몽을 읽으며 제 머릿속은 자꾸만 ‘불합리하며 일상의 규제를 넘어선 것’으로 채워지고 있네요. 그러나 저는 하루키가 아니고, 여기는 사무실이며, 지금은 근무시간이므로, 어서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사장님 이하 ~장님들께서 너그럽게 이해하고 읽어주진 않으시겠지요.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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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 읽니?]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 《바람의 그림자》 | 문학동네 | 2012

 

“도서관 하나가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한 권의 책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아는 우리 파수꾼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손에 닿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우리가 서점에서 책들을 사고팔긴 하지만 사실 책들은 주인이 없는 거란다. 지금은 우리뿐이지만, 여기서 네가 보는 한 권 한 권의 책이 누군가에겐 최고의 친구였어.” (16쪽)

 

사람들은 ‘이곳’을 ‘잊힌 책들의 묘지’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다니엘 셈페레는 바로셀로나의 산타 아나 가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함께 그곳을 가게 되고요.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잊힌 책들의 묘지’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을 이야기해줍니다. ‘이곳’에서 본 것을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는 것과 처음 이곳에 온 사람은 한 권의 책을 선택해 입양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다니엘은 운명처럼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됩니다. 작가의 이름도, 책 제목도 생소한 훌리안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

 

책을 펼치자마자 『바람의 그림자』에 매료된 다니엘은 작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의 다른 책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조금씩 작가에 대한 정보를 알아갈수록 훌리안 카락스와 관계된 무성한 소문과 수수께끼만을 거듭 만나게 되죠. 한 권의 책 속에 또 한 권의 책, 하나의 이야기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점점 더 미로와도 같은 소설 속 세계로 빠져들게 됩니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다니엘과 같은 입장이 되어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요.

 

훌리안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가 그렇듯,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를 읽으며, “독서의 즐거움, 영혼을 향해 열린 공간들을 탐험하는 즐거움, 허구의 이야기와 언어가 지닌 신비로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상상력에 자신을 내맡기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말이죠.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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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의 맛] 최제훈, <위험한 비유>

단편소설 분량을 아시는 분! 통상적으로 200자 원고지 80∼100매 안팎입니다. 감이 잘 안 오실 텐데요. A4(글자 크기 10일 때)는 빡빡하게 쓴다고 치면 10~12매에 해당합니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자면 한 시간도 안 걸리는데 수치로 환산하면 결코 짧지 않습니다. 그러니 쓰는 입장에서는 어떻겠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 한 가지도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것이 단편소설이라는 형식입니다. 그렇지만 장편 못지않은 단편을 써내는 것이 소설가라는 사람이죠. 이 형식은 그들에게 한계일까요, 아니면 가능성일까요?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최제훈은 “소설의 정의나 역할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런 짐을 소설에 미리 지우기보다 자유롭게 풀어놓고 그 가능성을 마음껏 따라가보고 싶다.”라며 소감을 밝힌 바 있는데요. 한 마디로 “나에게 소설은 가능성이다!”라고 답하는 것 같죠. 이 말이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역시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밖에요.

 

나는 당신이다. (166쪽)

 

당신은 나다. (184쪽)

 

《문학동네 2012년 봄호》중에서

 

처음과 마지막이 완벽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가 열고 ‘당신’이 닫는 이야기는 대체 무엇일까요. 단 두 개의 문장만으로는 <위험한 비유>가 도대체 어떤 맛인지 ‘예측 불가’입니다. 그래요. 이 소설은 ‘예측 불가’ 자체입니다.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계속해서 이어지는데요. 인물, 시공간, 사건들이 매번 완전히 달라집니다. 정작 이야기보다 그 자체의 무한한 속성을 체험하게 된다고 할까요. 파편 같은 소설을 아우르는 것은 ‘나’와 ‘당신’의 대구입니다. 저에게는 ‘소설’과 ‘작가’ 혹은 ‘작가’와 ‘소설’을 이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가지 의미로 규정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정의나 역할에 연연하는 세상에는 위험한 비유겠죠. 하지만 뭔 상관? 이야기를 탐하는 이들에게는 곧 매혹적인 초대장인 걸요.

 

《문학동네 2012년 봄호》는 자전소설인 <위험한 비유>와 함께 작가초상 <소설가 J의 작명법>을 싣고 있습니다. 소설가 정이현이 쓴 것으로 최제훈과 동문수학한 시절이 있다고 합니다. 합평모임 중 자신의 소설에 쏟아지는 비판에 “누나, 근데 말이에요. 왜 꼭 다 똑같이 써야 하죠?”라고 되묻던 한 청년을, 정이현은 회고합니다. “그의 물음표가 내 후두부를 어떤 충격으로 강타했는지 고백할 기회가 없었다. 소설은 ‘다 똑같이’ 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저마다의 무엇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거다.”라고 이어지는 다음 문장에서 저는 잠시 그녀가 되어 봅니다. 그 시절부터 현재까지, 또 앞으로도 최제훈의 물음표는 두루두루 전이될 것 같습니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 최제훈
1973년 서울 출생. 2007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 장편소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 있다.

 

* 현재까지 발표 작품
《퀴르발 남작의 성》 | 문학과지성사 | 2010
《일곱 개의 고양이 눈》 | 자음과모음 | 2011
<위험한 비유> | 《문학동네 2012년 봄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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