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5.02.11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 젊은이의 음지
  2. 2015.01.15 《백 년 동안의 고독》 - 고독하기 좋은 시대
  3. 2014.10.30 《나는 고 마티아 파스칼이오》 - 나 정말 너무 살고 싶었는데
  4. 2014.10.14 바라건대
  5. 2013.10.21 [반디 행사 수첩] 2013 노벨문학상 수상자 '앨리스 먼로'
  6. 2012.10.15 [반디 행사 수첩] 2012 노벨문학상 영예의 수상자 모옌
  7. 2012.09.26 [에디터의 북카트] 희진의 9월 26일 북카트
  8. 2012.08.02 《끝과 시작》 - 온 삶을 애도하는 시(詩)
  9. 2012.03.09 《16인의 반란자들》 - 순응하지 않는 지성, 열린 사유의 고귀함을 읽는다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 젊은이의 음지

 

 



파트릭 모디아노 |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 문학동네 | 2014


파리에 두 번 갔다. 여느 여행자처럼 두 번 모두 수박 겉핥기 식의 여행이었다. 두 번째 파리에 갔을 때는 한 번 가본 곳이라고 기시감이 들어 더 편안했다. 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읽으면서 파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생각에 작가가 들려주는 파리의 이모저모를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내게는 오데옹 사거리, 브레트빌 대로 그리고 뇌이 시청 같은 낯선 지명보다 여전히 홍대의 미로 같은 골목길이 그리고 종로의 피맛골이 더 친근한 걸 보면 말이다.

먼저 이 책이 내가 읽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첫 번째 책이라는 점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재작년 수상자였던 앨리스 먼로의 책도 서너 권 사두고는 아예 읽어볼 궁리도 하지 않았다. 모옌의 책도 마찬가지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책은 왠지 어려울 것 같다는 편견과 아집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읽지는 않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이런저런 책을 가지고 있다고 자위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최근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다 읽고 나서, 바로 옆에 있던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가 눈에 띄어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놀랍게도 단박에 다 읽어 버렸다.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하다. 모쪼록 이참에 노벨문학상은 어렵고 재미있지 않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다. 아, 그리고 160쪽가량의 짧은 분량이었다는 점도 속독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작가가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라고 명명한 카페 ‘르 콩데’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다. 르 콩데에서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한담을 나누며 우정을 쌓는다. 바로 그곳에서 첫 번째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조금은 이질적 존재로 다가온다. 문득 르 콩데가 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만 했을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화자 나는 그런 곳이야말로 정의할 수 없는 자력이 있는 장소라고 설명한다. 한편 치기 어린 젊은이들은 폭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패거리에 낄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에 합의하고 있었다.

‘나’가 소개하는 인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바로 본명을 알 수 없는 ‘루키’라는 여자다. 이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장’은 자신의 노트에다가 카페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시간, 인물을 사진사가 카메라로 작업 하듯 정교하게 적어 놓는다. 마치 영화 ‘스모크’에서 담뱃가게 주인 하비 케이틀이 매일 같이 똑같은 사진을 찍듯,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첫 번째 이야기 말미에 자신은 고등광산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운 듯 밝히며 다음 화자에게 배턴을 넘긴다.

이야기의 다음 화자는 좀 더 흥미롭다. 자신을 예술편집자라고 소개하는 사립탐정 피에르 케슬레. 그가 누군가를 추적하는 과정이 소설에 가미된 미스터리 효모를 들뛰게 만든다. 그가 찾는 사람은 바로 르 콩데 카페의 단골손님 루키다. 그녀의 처녀적 이름은 자클린 들랑크, 그리고 지금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장 피에르 슈로의 집 나온 부인이라는 사실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 탐정은 의뢰받은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클린의 도피 혹은 방황에 열중한다.

이제 드디어 이 소설의 실제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자클린 들랑크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볼 차례다. 그녀는 물랭루주에서 일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을 어쩔 수 없이 홀로 보내야 했다. 성격이 예민해지고 가슴이 들끓을 청소년기에 그녀는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야심한 시간에 돌아다니다 경찰의 보호를 받는 등 도피 행각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해골이란 별명을 가진 자네트 골이라는 여자와 만나 ‘눈’을 맞는 경험도 하게 된다. 도피 중 그녀가 자주 들렀던 서점의 주인이 그녀에게 건넨 상냥한 질문은 그녀를 매료시킨다. “그래, 당신의 행복을 찾으셨나요?”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해주는 서점 주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화자는 자클린의 친구 롤랑이다. 소설의 어디에선가 그는 자신이 전생에서부터 그녀를 알았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롤랑은 위대한 철학자의 ‘영원한 회귀’ 사상을 도입해 가며 고대 철학자가 줄기차게 주장한 고통의 경감과 쾌락의 증진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가치라는 결론에 방점을 찍는다.

뒤표지에 실린 ‘도망치는 순간’을 읽고 나는 미미여사의 ‘화차’가 떠올랐다. 놀랍다, 그저 바람나서 도망간 아내를 추적하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한 나의 지레짐작을 정통으로 박살 낸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장기로 삼은 ‘시간을 통한 기억의 탐색’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등장인물을 어렴풋이 엮은 개연성의 설계가 마음에 들었다.

영화 ‘라쇼몽’처럼 직접적인 교차 서술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를 무대로 활동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삶 속에서 도피와 방황을 반복하던 자클린이 특정한 시간에 좌초되어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는 고등광산학교 학생의 추측도 흥미롭다. 자클린을 찾아 나선 사립탐정 케슬레는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수준까지 도달한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젊음’은 삶에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로 단절되었거나, 방황 혹은 도피하는 이들만 알아볼 수 있는 비밀코드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출간된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들을 많이도 모아 두었다. 올해 을미년을 모디아노의 해로 삼아 천천히 읽어도 될 정도다. 바로 『팔월의 일요일들』도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이 소설에도 그의 유창한 구사 방식이 등장해서 반가웠다.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꾸준하게 구사하는 주제에 익숙해진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않은가.

 

오늘의 책을 리뷰한 '레삭매냐'님은?

책의 산에 도전하는 게으른 독서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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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동안의 고독》 - 고독하기 좋은 시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백 년 동안의 고독》 | 문학사상 | 2005


'부엔디아'란 '좋은 시대'라는 의미이다. 맬키아데스는 알았겠지만, 처음부터 그 단어가 반어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가 마콘도 마을을 세웠을 때만 해도 말 그대로 좋은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절은 오래 가지 않는다.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은 이름과 함께 선조의 어리석음과 타락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불면증에 걸려 신의 존재마저 망각하고, 전쟁으로 서로를 죽이는 만행을 벌인다.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의 흐름을 "개가 꼬리를 무는 듯한 구조"라고 일컫는다. 사실 그것은 당연하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도대체 시간보다 자연스럽고 잔인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맬키아데스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이 기록은 연대기다. 무엇에 관한 연대기인가? 부엔디아 집안의 연대기라 해도 무방하고, 마콘도 마을의 연대기라 해도 무방하며, 콜롬비아, 나아가 이 세상의 연대기라 해도 무방하다.

외부의 간섭이 없었던 평화로운 마콘도 마을에 집시가 찾아온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신비한 물건과 과학을 선사한다. 사람들이 정착하고 마을의 규모가 커지자, 정부에서 이 마을에 군수를 파견한다. 마콘도 마을에는 성당이 지어진다. 어느새 이 마을은 도시로 발전했고, 기차가 들어온다. 마콘도 마을에 바나나 농장이 건설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외부의 자본에 의해 착취당한다. 그들이 파업 투쟁을 벌이자, 군대가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시체를 바다에 던진다. 그 후 4년간의 장마가 찾아오고, 장마가 끝나자 모든 문물이 마콘도 마을에서 사라졌다. 얼마 뒤, 부엔디아 집안의 마지막 사람이 개미에게 잡아먹히자 회오리바람과 함께 마콘도 마을은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었으리라. 죽음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만, 고독은 이름을 통해 유전된다. 고독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죽지 않고 가문을 유지했다면 오로지 고통과 슬픔만 존재했을 것이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최선을 다했다.

《백 년 동안의 고독》과 만날 때는 언제나 의심을 품고 독서에 임해야 한다. 이 소설은 '마술적 리얼리즘(또는 마술적 사실주의)'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법이야말로 소설의 정의다. 소설이란 사실에 마술(상상)을 교묘하게 집어넣은 것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소설이라는 구름 속에 놓인 사실에 허구를 섞어놓은 수법이다. 그리고 역사서 또는 연대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백 년 동안의 고독》에 허구를 집어넣는 일은 아주 수월하다. 연대기에 적힌 일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비판 없이 그 사실을 수용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도 부엔디아 집안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아버지가 행했던 악한 일보다 더 악한 일을 하며, 좀벌레가 들끓는 방 안에서 다시 깨뜨릴 황금 물고기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속에 숨어 있는 거짓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에겐 진위를 구별할 수단도 없으며, 그 증거도 없다. 왜냐하면 이 책은 소설이니까! 작가에게 따져보자. 흙과 석회를 먹고 사는 인간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200년이나 살아 있는 사람이 창세기 이후 존재했습니까? 개미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현실에서 있을 수 있습니까? 작가는 대답한다. 소설이잖아요! 당신들은 진실과 거짓도 구별하지 못합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아직 소설이 필요한 이유다.

책꽂이에 G.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밀란 쿤데라

고독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외로움이다. 흔히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고독의 역설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많을수록 개인의 고독은 깊어진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이 20명뿐이었던 시절에 마콘도 마을 사람들은 필요할 때마다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갔다. 부엔디아 집안 역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가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며 소통했다. 그러나 마콘도 마을이 커지면서 상호 교류는 사라지고 집단과 집단 간 투쟁이 쉬지 않고 일어났다. 부엔디아 집안 역시, 우르슬라를 제외하고 누구도 자신의 자식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17명의 자식을 낳아놓고, 그들을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아니다. 굳이 소설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고독의 역설은 바로 우리 삶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우리의 상황은 마콘도 마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전반에 고독의 역설이 존재하니까. SNS 기능이 활성화되고,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개인의 고독감은 더 심해진다. 왜냐하면 내 옆에 앉아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니라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으로 나에게 말 거는 사람과 손가락으로 대화하지 않은가? 손가락 대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마술적 리얼리즘, 현실 속의 허구가 아닌가? 어쩌면 가브리엘 마르케스야말로 맬키아데스일지도 모른다. 그의 양피지 문서는 이미 세상에 공개되었지만, 누구도 그의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곧 우리요, 곧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이다.

맬키아데스, 아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는 이제 유령이 되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가족은 어떤가? 반드시 우르슬라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지는 않겠다. 다만 밤나무 아래에만 머물지 말아 달라. 누군가는 죽음 이후에도 자식과 대화하고, 자식에게 돈이 아닌 유산을 전해준다. 오늘날 부모의 책임을 떠올려라. 자식 역시 공경을 기억하라. 만약 가족이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어김없이 고독이 찾아올 것이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식까지, 그리고 그 자식까지, 100년이 아니라 대물림되어, 영원히. 부디 고독의 역설을 깨뜨려다오. 나의 예언을 거짓으로 만들어다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오.


오늘의 책을 리뷰한 '고전의숲'님은?

옛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고 싶어 고전을 읽지만 ‘뜻’을 알지 못하여 헤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에 임하는, 긍정적인 남자. 현대에 나온 책들도 많이 보니 고전에만 파묻혀 있다고 오해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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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 마티아 파스칼이오》 - 나 정말 너무 살고 싶었는데

 

 

루이지 피란델로 | 《나는 고 마티아 파스칼이오》 | 문학과지성사 | 2010

 

"나는" 이라는 실존재에다 자신의 이름에 고(故)를 붙여 부존재를 병치시킨 형용모순적인 책 제목에 강하게 이끌려 책을 펼쳤다.과연 작가의 상상력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경이로운 의문이 들었다.

 

고향을 떠나 있던 내가, 저수지에서 투신자살로 추정, 시신이 발견됐다 하고, 아내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될 사람에 의한 신원 확인으로 나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것을 계기로 세상의 모든 일들로부터 해방이 된 듯 자유를 만끽하며 살다가 곧 그 자신은 이 세상에 아무 실체도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끝내 자신의 실존을 찾아 허위 죽음으로부터 회귀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슬픈 현실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그는 용모와 이름을 바꾸고 세상의 모든 책임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운 생활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일말의 회귀 가능성도 없이, 삶에서 영원히 쫓겨났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렇게도 자유를 원했지만, 오히려 자유를 얻은 자는 어느 불쌍한 익사자의 주검을 제 남편으로 몬 자신의 아내였다.

 

결국 그는 자유를 포기하고 원래 이름이었던 마티아 파스칼을 찾기 위해 또 한 번의 죽음을 감행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미 재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고 있는 아내까지 포기하고 혼자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가 바라는 건 오직 이 세상에서 내 신분증을 갖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그 하나일 뿐이었으니.

 

망자의 무덤에 참배하면서 "당신은 누굽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고(故) 마티아 파스칼이오"

 

저자 루이지 피란델로는 자신의 문학론을 담아 '상상력의 치밀함에 대한 주의'라는 글을 썼다. 그는 자신의 소설과 희곡에 대한 비평가와 관객들의 비판에 반박했다.

 

"삶의 부조리들은 있을 법한 일들로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니까요. 반대로 예술의 부조리들은 진실로 보이기 위해 있을 법한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 있을 법하다는 것은, 더는 부조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그는 소설을 소설 자체로 받아들이길 바랄 뿐 휴머니티라는 이름으로 현실과 결부하여 평가하고 재단하는 비평가들을 극도로 경계한다. 저자의 명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내용에 대한 논란과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걸작이었다.

 

익명성이 주는 자유로움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지만 한 번쯤은 그런 일탈을 꿈꾸어 봄 직하지 않은가?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잊고 있던 또 하나의 진실을 깨우치니 문득 슬프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낙화'님은?

책을 읽으며 책 속에서 삶의 참 뜻을 찾고자 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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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사진 출처: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

 

 

바라건대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노벨상 선정 소식이 들리곤 합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습니다. 화학, 물리, 평화, 의학, 경제, 문학까지 각 분야에 걸쳐 수상자를 선정합니다. 분야별 수상자가 알려질 때마다 개인의 영광은 물론 국가의 위상이 드높아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마치 로켓 발사를 준비하듯 거대한 ‘카운트다운’ 장치가 작동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전 세계인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말이죠.

8일 기준, 생리의학상과 물리학상의 수상자가 발표되었고 이제 남은 4개 분야의 수상자 발표만을 앞두고 있습니다. 기대하는 문학상 수상자는 9일(현지 시간) 발표합니다. “이상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분께 수여하라.” 알프레드 노벨은 유언을 통해 문학상의 의의를 짚어주었습니다. ‘기여’라 하면 비단 위대한 한 작품을 뜻하기보다 한 명의 작가가 쓴 작품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실 역대 문학상 수상자 목록을 살펴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릴지 모르겠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 베르그송, 독일 태생의 역사가 몸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20세기 이 전만 해도 ‘literature’ 가 더 광범위하게 해석된 탓입니다. 이때까지는 쓰는 행위 전체를 포함했기에 아름다운 문체와 사상이 담긴 글로써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문학가’에 한정하여 수상하는 것은 20세기 중반부터이고요.

문학상을 발표할 때쯤이면 늘 거론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오른 고은 시인입니다. 고은 시인이 등단한 지 50여 년, 첫 시집인《피안감성》이후,《시여 날아가라》《네 눈동자 》등 지금껏 펴낸 시집만 150여 권에 달하지요. 현재 고은 시인의 작품은 그리스와 아프리카를 비롯해 20여 개국에서 번역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쩍새가 온몸으로 우는 동안


별들도 온몸으로 빛나고 있다


이런 세상에 내가 버젓이 누워 잠을 청한다


(고은,《순간의 꽃》中, 문학동네, 2014)

때마침 문학상이 발표되는 9일은 한글날입니다. 1446년 훈민정음 반포 이후, 올해 한글날은 568돌을 맞이하였습니다. 한글 덕분에, 이처럼 빛나는 ‘시’ 또한 우리에게 날아들 수 있었던 것이겠죠. 9일,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만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수상보다 시인과 시에 더 깊은 관심을 쏟아보면 어떨까요. ‘한글날’이라는 값진 날, 시 한 편을 읊는 것만으로도 나름 문학의, 또는 한글의 의미를 짚어볼 수 있을 테니까요. 노벨의 유언처럼 문학의 ‘이상적인 방향’이란 것 말인데요. 거창하게 말고, 개인에게 있어 아주 소소하게 적용해 보렵니다. 피폐한 현대인의 삶에 위대한 시가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연관도서

 

    

 

|Editor_김민경

mins@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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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 행사 수첩] 2013 노벨문학상 수상자 '앨리스 먼로'

 

 

[2013 노벨문학상 수상자 '앨리스  먼로'의 도서 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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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 행사 수첩] 2012 노벨문학상 영예의 수상자 모옌

 

 

[반디앤루니스 2012 노벨문학상 수상작 기획전 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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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의 북카트] 희진의 9월 26일 북카트

살아서는 한 마디 말조차 글의 효력을 갖고, 죽어서는 미완의 글마저 오래 말해집니다. 누구의 이야기일까요? 바로 소설가입니다. 그들은 언어를 다룹니다. 말이든 글이든, ‘나’에게서 ‘너’에게로 가려하는 것이 언어의 운명, 그러니까 소설가의 운명일 테지요. 운명이라. 다소 거창하게 들리겠지만요. 실제로 몇몇 소설가의 스케일이 좀 거창한 걸요. 국경을 넘나들고, 상상을 넘나들고, 생사를 넘나들 정도니까요. 이쯤 되면 그들의 내밀한 속마음이 궁금해집니다.

 

 

오르한 파묵 | 《소설과 소설가》 | 민음사 | 2012

 

노벨문학상. 그야말로 전세계 최고의 스케일을 자랑하는 문학상이죠. 오르한 파묵은 2006년 수상자입니다. 1952년생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중에서는 젊은 축에 든다지요. 소설가로서 한창때임을 증명하듯 《내 이름은 빨강》, 《새로운 인생》, 《검은 책》, 《순수 박물관》, 《고요한 집》, 《하얀 성》,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등 국내에도 다수의 작품들을 선보였는데요. 저는 이 중에 단 한 권만을 읽었을 뿐인데 그만 이 작가의 애독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머지는 아직 다 읽지 못했고, 결심만 했어요, 결심만.) 어떤 책을 좋아하면, 그 작가를 좋아하게 되고, 그 작가에 대해 알고 싶어지는 법.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이라는 이 책, 《소설과 소설가》가 그래서 참 반갑습니다.

 

 

박완서 | 《세상에 예쁜 것》 | 마음산책 | 2012

 

여기 또 한 명의 소설가, 故 박완서 선생님이 있습니다. 《세상에 예쁜 것》은 그분의 새로운 산문집입니다. 아니 어떻게? 생전 노트북과 책상 서랍에 보관해둔 미발표 유고를 선생님의 맏딸이 발견했다고 해요. “나를 달구었던 것은 창작욕이 아니라 증오였다. 복수심과 증오는 세월의 다둑거림으로 위무받을 수 있을 뿐, 섣불리 표현되어선 안 된다는 걸 차차 알게 되었다. 상상력은 사랑이지 증오가 아니기 때문이다. (…) 증오가 연민으로, 복수심이 참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비로소 소설을 쓸 수 있었다.”(22쪽)와 같은 문장을 엿보며 고인이 된 선생님이 다시금 제 안에 살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역시나, 반갑습니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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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 온 삶을 애도하는 시(詩)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끝과 시작》 | 문학과지성사 | 2007

 

시를 읽게 되는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시인이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죽었을 때. “사실상 모든 시에는/‘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사실상 모든 시에는>)라는 시의 한 구절이 말하듯 전자의 경우에 시는 ‘순간’이 분명하다. 또한 우리에게도 주어진 ‘순간’이다. 시인과 같은 시간을 나눠 가졌다는 삶의 동질감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시인과 나 사이 시간의 연대가 끝난다. 우리가 여전히 ‘순간’이라는 미망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시인은 죽음으로써 살아 있(었)음을 증명해내고 말았기 때문. 그때부터 시는 삶에 현존하기보다 죽음을 뒷받침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서 자살의 전조를 찾듯이. 《입 속의 검은 잎》을 요절한 시인의 그림자로 받아들이듯이. 살아 있는 나는 시인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밖에 치환하지 못한다.

 

 

이토록 편협한 독자에게도 두 번의 기회가 있었으니, 그 시인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다. 그녀는 여든 넘어서도 시를 쓰며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합니다.”(<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문>)라고 말하는 시인이자 2012년 2월 1일 여든여덟 살의 나이로 타계한 고인이다. 생전과 사후에 각각 그녀의 시를 읽은 나는 시선집 《끝과 시작》 앞에서 삶과 죽음 모두를 떠올린다. “모차르트 음악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한 사유 속에서 뜨겁게 폭발하는 무엇을 겸비했다.”라고 스웨덴 한림원이 그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며 일렀듯 이 책에 수록된 170편의 시를 모차르트니 뭐니 하며 한 마디로 아우를 자신은 없다. 다만 내가 읽은 시 한 편 <극장 문을 나서며>를 꺼내어 본다.

 

새하얀 화폭 위로 깜빡이며 명멸하는 꿈
달에서 떨어져나온 파편과도 같은 두 시간.
그리운 멜로디에 실린 옛사랑이 있고,
머나먼 방랑으로부터의 행복한 귀환이 있다.

 

동화가 끝난 세상에는 검푸른 멍과 희뿌연 안개.
숙련되지 않은 어설픈 표정과 배역들만 난무할 뿐.
군인은 레지스탕스의 비애를 노래하고,
소녀는 고달픈 삶의 애환을 연주한다.

 

나 그대들에게 돌아가련다, 현실의 세계로,
어둡고, 다사다난한 운명의 소용돌이로-
문간에서 서성이는 외팔이 소년과
공허한 눈빛의 소녀가 있는 그곳으로.

 

1945년 작으로, 이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한 세기를 넘길 때까지 시를 써 왔다. 그녀의 주된 화두는 “현실의 세계”였다. “외팔이 소년”이나 “공허한 눈빛의 소녀”와 같이 현실 속을 살아가는, 말하자면 죽어가는 존재들을 마주했다. 이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순간’이었다. 2012년 2월 1일까지. 나는 한 시인의 죽음 이전에 극장 밖 온 삶을 애도하고자 한다. 그것이 독자의 일이다. 《끝과 시작》과 같은 시편을 남긴 것이 시인의 일이었듯이. 이로써 시인과 나 사이 시간의 연대는 끝났지만 시와 나 사이의 교감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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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순응하지 않는 지성, 열린 사유의 고귀함을 읽는다

 
사비아옌 | 《16인의 반란자들》 | 스테이지팩토리 | 2011

 

우리는 어느새 자신을 에워싼 것들의 작용에 젖어들고 순응해버리고 만다. 이 순응은 어쩜 무관심이고 무감각일 것이다. 타자, 세상에 대한 외면, 자기 연민에만 집착하다 보니 삶은 극히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파편화되어 고독해진다. 그리곤 저마다 자기 밖에 있는 모든 것을 탓하거나 변하지 않는 세상에 삿대질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 ‘16인의 반란자’라고 명명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세상 보기가 있다. 그들의 글쓰기가 의미하는 바를 통해 이들이 결코 자기 안위와 순응에만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협소한 자기내부와 지역에 머문 사람들이 아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회를, 세상을 보는 데 주의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을 구현하고, 나르시시즘을 경계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상이 닫힌 시스템에 박제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지속적으로 나의 이데아들을 새롭게 하고 있어요.”라는 ‘도리스 레싱’의 말은 이러한 깨어있음의 다른 표현일 게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이 이들에게 어떤 권위를 수식해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대다수는 칠순, 팔순의 노인들이고, 심지어 근년에 작고한 이들도 있으니 역사성을 지닌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현명한 나이잖소? ”라고 취재진에 반문하는‘주제 사라마구’에게서 인류와 세상을 향해 격렬하게 열려진 지혜를 읽을 수 있고, 이게 이유가 될 수 있겠다. 그들의‘글쓰기’가 소명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들, 바로 그것이 이들의 목소리를 한 자리에 모으게 한 어떤 필연이 아니었을까?

 

그들에게 글쓰기는 무엇이었을까?

 

‘임레 케르테스’은 가슴에 별표를 새기고 아우슈비츠로, 부헨발트의 수용소로 끌려가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유대인이었음을 알았다고 고백한다. 이와 함께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 그래서 스스로 처단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가 써야 할 소설이 없었다면 자신 또한 그렇게 했을 거라는 얘기를 통해 쓰기의 숭고함, 그 필연성을 고스란히 담게 된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생명의 고통을 나누고 위로하기 위해서였음이다. 미국의 인종주의에 천착했던 ‘토니 모리슨’의 “한 번도 역사책에 나오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존재성을 돌려주기 위해서”였다는 말에서는 어떤 뭉쳐진 시원의 응어리가 눈을 뜨는 체험도 한다. 글의 위력은 이처럼 지대하다.

 

대중예술로서의 연극을 위해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는‘다리오 포’, 그는 권력에 대항하며 사람들이 두려움을 잊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또한 소수의 부패한 군사통치자들의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고 인민의 삶을 위해서 행동하는 작가‘월레 소잉카’와, 정치권력과 동시대의 압박에 저항하고 인간의 의미를 깨우기 위해 쓰는‘가오싱 젠’처럼,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한 사람을 향해있는  그들의 글 세계를 볼 수도 있다.

 

한편 ‘네오 폴’이나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와 같이 인간의 모험, 삶의 풍요성, 인생의 무한한 풍요로움을 표현하고 알려주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를 끝없이 말해주는 연민과 위로의 아름다움도 있다. 이들의 위대함은 그들의 작품에 투사된 인류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에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을 위해 저항하고 반란하고 자극하는 글쓰기, 이보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작업이 또 있을까?

 

16인, 그들의 얘기

 

이 책의 첫 장을 시작하는 건 ‘주제 사라마구’다. 우리에겐 ≪눈 먼 자들의 도시≫로 잘 알려진, 그러나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수도원 비망록≫에 더 잘 드러나 있는 작가,‘주제 사라마구’. 그의 일상과 신념, 작품세계의 흔쾌한 이야기들처럼 책 속 작가들의 말은 그들의 소설과, 희곡, 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깊이 있는 관점을 제공해준다. “이 세상의 문제가 잉여보다는 균형있는 재분배에 의해 해결될 걸로 믿”는다는,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작가의 스스럼없는 이념의 주장, 그러나 “나는 약속하되 거기(작품)에 어떤 희망도 심지 않아요.”라며, 메시아적 자세를 취하는 작가로서의 오만을 경계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에 대해서는 유사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실제로 예술이 세상을 구원하지 못했고, 예술가는 내적인 세계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현하는 존재”임을 설명하는‘가오싱 젠’이나 “나는 항상 서명자보다 음모자였소.”라며, 은밀한 외교관으로서 자신을 표현한 ‘가브레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나의 신성은 나른 모른다.’ 예요.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도 사후에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잖아요.”라고 말하는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얘기는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글 쓰는 이의 자세, 문학의 예술로서의 존재성에 대한 귀중한 사유를 엿보는 기쁨이 있다.

 

한편 ≪양철북≫의 작가‘귄터 그라스’가 그의 회고록 출간 이후 겪었던 진솔한 고통,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외면하고 그때마다 다른 쪽을 쳐다봤던 젊은 시절의 멍청함과 그에 대한 미안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번민을 이겨내는 데 ‘로렌스 스턴’의 고전 <트리스트럼 샌디>를 읽고 치유되었음을 말하는 소설가에게서 진정함과 관용의 미덕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게 된다. 특히, 가까운 이웃나라의 수상자임에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경원시했던 ‘오에 겐자부로’의 극우민족주의에 맞서고 민주주의 대척점인 천황의 권능을 거부한 일화와 “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소리 지르지 않는” 그 고통의 처절함을 반영하고자 작가가 된 셈이라는 유머에서 내 무지와 그에 대한 관심을 비로소 지니게 되는 경망한 수확도 얻게 된다.

 

그들의 작품 얘기, 그리고...

 

책은‘데릭 윌콧’등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작가의 집이나 작업실, 그들의 산책길, 작품 속의 거리들을 동행하면서 이루어지고 있어 그네들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직간접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작가로부터 직접 듣게 되는 기 출간 작품들, 혹은 미발표 된 시(詩)를 감상하는 호사도 누릴 수 있으며, 문호들의 ‘손’, 바로 그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킨 거장들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며 숙연함 마저 느끼게 되는 감동이 있다.

 

“사내는 계집애를 사랑하는데, 계집애는 사랑이 아니라는 데...”, “아, 얼마나 힘들던지!” 하면서 들려주는 ‘오르한 파묵’의 소설,≪순수 박물관≫에 대한 얘기는 소설 속 사랑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런가 하면 ‘도리스 레싱’은 ≪황금노트≫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 “이데아만 언급하거나 터무니없는 해석만 내놓더군요.” 하면서 “외롭지 않기 위해서 함께 살기를 원하는 두 종류의 인간일 뿐”이라고 남자와 여자에 대한 독특한 정의를 내놓기도 한다.

 

무엇보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미발표 시, <주의력 결핍> 은 내게 시에 대한 또 다른 발견의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녀의 시적 솔직함에 매료되었다고 해야 할까? 팔순의 노 시인이 말하는 단순함, 간결함, 직접성의 충격은 신선한 깨달음, 아마 그 이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제 난 우주에서 못되게 굴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고 지냈다.
그저 일상적인 움직임이었다.
마치 내가 했어야 했던 유일한 것처럼.”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구요? 공간에서 보는 거예요.” 아! 이 멋진 답변, 인간의 삶을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하기 위한 16인의 반란자들, 이 인류 지성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스며있는, 말들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과즙조차 놓치기 아까워 아주 조금씩 책장을 넘기기까지 했다. 읽었지만 기억이 흐려진 작품들, 아직 접하지 않은 이들의 작품들을 읽게 된다면 훨씬 친근하게 문장에 다가서고 그들의 사유에 녹아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들과 동시대에 호흡하는 우리는 그들에게 실로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만 같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필리아'님은?
세상의 위협이나 추함에서 격리되어 책에 몰입하는 순간은 제겐 커다란 위안이고, 평온의 시간이 된답니다. 그리고 자기격려와 스스로를 고무하는 데 독서만큼 유익한 수단이 없다는 것은 이젠 거의 꺾을 수 없는 신념이 되어버린 책 읽는 바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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