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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12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느지막한 사랑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느지막한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민음사 | 2005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첫문장이다. 어쩌면 불쾌할지 모를 이런 말들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해석하진 말아 주길. 소설의 미덕은 소설 안에서 확인해주길. 주인공은 평생 돈을 지불하지 않는 사랑은 해 본 적 없는 90세 노인. 그는 90세 생일 선물로 14세 어린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날 밤, 그는 소녀가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현듯 첫사랑을 시작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랑은, 근 1세기 동안 홀로 견뎌온 사람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사랑은, 반세기 넘게 지켜온 문체를 버리게 만들었고, 열정에 대한 들뜬 칼럼을 쓸 수 있게 만들었고, 욕망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죽음을 코앞에 둔 90세에, 그는 비로소 삶을 예찬하는 사람이 되었다. 삶이여, 영원하여라.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 받았던 것이다."


삶은 90세라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노화와 죽음이 우리 삶에 주어진 절대적인 결말일지라도, 반드시 허무를 담보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마르케스 특유의 낙천적인 힘은, 이제는 낡아 버린 말들 -사랑, 열정, 삶 등- 을 찬란하게 복귀시킨다. 그는 사랑을 믿고, 열정을 간직하고, 삶을 예찬한다.

이미 공언된 사실이지만, 마르케스는 믿을 만한 작가다. 이 책이 《백 년 동안의 고독》만큼 '내 인생의 책'이 돼주진 못 했지만 사랑에 관한 소설로 충분히 아름답고 충실하고 생생한 소설이었다.


설정 자체가 파격적인 만큼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이 사랑이 90세 '여성'과 14세 '소년'의 사랑이라면, 어떨까. 젊은 여성의 육체를 생명력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문학에서 무척 흔한 일이지만 남녀를 역전시키면 여지없이 낯설어진다. 의도치 않아도 사회적, 문화적 맥락이 전복된다.


혹은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랑이 세상에 드러난다면, 90세 노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가 살아온 삶이 어떠했든 간에, 그는 주책 맞고 망령든 노인네가 될 수밖에 없다) 몇 살 차이뿐일 지라도 범죄가 성립된다. 그들 사이에 자연스러운 흐름과 유려한 결이 존재했다 할지라도, 원래 사랑은 나이와 몸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 알지라도.

반드시 법이 없어야 인간의 자유가 실현된다고 생각진 않는다. 미성년자를 보호하는 법의 취지 역시 공감하고 동의한다. 다만, 그것이 전부라고 말해버린다면 삶의 많은 부분이 증발될 것이라는 불안감. 삶의 근거로 법을 내밀기는 싫은. 소설의 미덕은 이런 지점에 있다.


또 하나. 사랑에는 나이가 소용 없다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은 상대방의 나이와 무관할 순 있되, 나의 나이와는 무관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 삶의 맥락 속에서 사랑을 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사하라'님은?

끝없는 잡념의 화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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