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음반/책, check, 책'에 해당되는 글 507건

  1. 2014.11.03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 - 또 보자
  2. 2014.09.23 《변신》 - 준이치의 일기
  3. 2014.09.15 《백과사전》 - 이것은 노동이 아니다
  4. 2014.09.01 《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 1, 2》 - 부부가 사는 법
  5. 2014.08.19 《책방 주인》 - 찾는 책 없습니다
  6. 2014.08.05 ≪마술 라디오≫ - 시작은 거창하였으나 끝은 미약하리라
  7. 2014.07.29 《섬》 - 누구나의 섬
  8. 2014.07.22 《몰락하는 자》 - 슬픈 열정
  9. 2014.07.07 《여행일기 - 알베르 카뮈 전집 17》 - 일기를 썼다
  10. 2014.06.25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 - 노인을 위한 시간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 - 또 보자

 

 

 

고규홍 |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 | 휴머니스트 | 2014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면 꼭 하는 일이 있다. 솔숲(http://www.solsup.com) 주인이기도 한 나무칼럼리스트 고규홍의 편지를 읽는 것이다. 며칠 전, 나무 편지에 새 책 출간 소식이 전해졌다.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라는 책이 그것도 봄?여름을 묶어 한 권, 가을?겨울로 한 권. 이렇게 두 권이나 큼직하게 제작돼 나온다는 소식이다. 충남 태안에 위치한 천리포 수목원에는 1만 5000종류가 넘는 식물이 살고 있다. 저자 고규홍은 15년간 벗한 천리포 수목원의 식물을 월별로 묶어 조심스럽지만 성의를 다하여 소개한다. 저자의 자세가 꼭 나무처럼 올곧아 보인다. 책이 나온다고 적힌 그날 편지에선 초록이 더욱 빛났다.

 

 

고규홍이 고르는 낱말들은 대체로 생경하다. 다른 곳에서는 식물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을 말들이 책에서는 나무와 꽃을 비옥한 땅처럼 보듬는다. 나는 낯설어서 마음에 든 단어의 뜻을 찾아 수첩에 옮겨 적었다. ‘수굿이’는 ‘고개를 조금 숙인 듯이’, ‘흥분이 꽤 가라앉은 듯이’, ‘꽤 다소곳이’라는 뜻이다. 고규홍은 ‘수굿이’를 가져와 나무를 이렇게 대한다. “수굿이 찾아가 한 떨기의 풀꽃을 더 바라보고, 한 그루의 나무를 더 살갑게 어루만졌다.”(5쪽) ‘톺다’는 말은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는 뜻이다. 고규홍은 나무의 정체를 알려면 꼼꼼히 ‘톱아’보라고 편지나 칼럼에서 자주 말한다. 뛰어난 글 솜씨는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의 재주이기도 하겠으나, 나무와 꽃에게 가장 알맞은 말을 심어주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을지 짐작된다. 식물의 정확한 명칭, 종(種)까지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때면, 좋아하는 것 앞에선 집요함마저 근사해 보인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으로 그에게 다가가 ‘잊히지 않는 하나의 몸짓’으로 남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그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가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에게 가장 알맞춤한 이름을 찾아서 불러주는 일, 그것은 그에게 다가서는 첫걸음이다. (189쪽)

 

나는 얼마 전 책상 위에 작고 튼튼한 나무 하나를 들였다. 성한 식물을 사놓고 그대로 유지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아무 말 않되 물끄러미 바라보며 식물을 대하려 해도 잘 안 된다. 이름을 아는 꽃과 나무 앞에선 조금이라도 아는 티를 꼭 내고야 만다. 파인애플을 닮은 걸 보아 소철과의 한 종 같으나 살 때 이름을 묻는다는 걸 깜박했다. “더디게 자라니까 물은 조금만 줘.”라는 말만 기억난다. 이름을 부를 수 있기 전까지 ‘수굿이’ 지켜볼 수밖에. 매일 말없는 인사만 건넨다. 내일 또 보자고.

 

식물은 결코 서두르는 사람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여유를 갖고 오래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깊어가는 가을의 어느 날, 꽃 지고 돌아보는 이 없어 쓸쓸해질 꽃무릇 한 번쯤 더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59쪽)

 

| Editor_ 정혜원

hyewonjung@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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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 준이치의 일기

 

히가시노 게이고 | 《변신》 | 창해 | 2005

 

가상의 일기내 이름은 나루세 준이치이다. 나는 나를 잃었다. 잃어간다. 그리고 곧 사라질지 모른다. 이제 와 누구를 원망하는 게 무슨 소용 있을까. 그렇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머릿속이 하얘진다. 두통이 조금 잠잠해졌다. 내 안의 그가 잠시 활동을 멈춘 시간이리라. 완전히 내가 없어지기 전, 일기를 쓰기로 한 건 잘한 일 같다.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을 때, ‘나’에 대해 기록하는 일. 그것이 나루세 준이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수 있으니.

 

세계 최초의 뇌 이식 수술 성공. 언젠가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났다. 가만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대상이 나였으니까. 나는 결코 수술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랬겠지. 총알이 머리를 관통한 직후 정신을 잃은 상태로 병원에 실려 왔으니. 의사들은 그들끼리 고민했다고 한다. 나를 두고. 뇌 이식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뇌에 꼭 들어맞는 10만 분의 1에 해당하는 또 다른 이의 뇌를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해. 방금 막 죽어 들어온 이의 머리를 열고 온기가 가시지 않은 ‘적합한 뇌’를 구할 수 있는지.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리고 운명처럼 내게 딱 맞는 뇌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의학계의 큰 획을 그을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확신에 가득 찬 채 내 머리를 열어 재꼈겠지. 수술용 칼을 쥔 박사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더럽고 추악하다. 얼룩진 욕망과 성공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겠지. 너희가 저지른 오만방자함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가. 역겹다.

 

의사의 거짓말은 그리 오래가지 못 했다. 그들은 내게 치명적인 두 개의 거짓말을 했고, 들켰다. 하나는 뇌를 기증한 '도너'에 대한 것. 나머지 하나는 수술이 성공적이라는 것. 수술의 실패와 성공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 대상인 내가 변화했으니까.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네 목숨줄도 건재하진 못 했을 거다. 그 어떤 변명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나루세 준이치이다. 분명 ‘나’라는 한 사람이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 어떤 이에게 ‘나’란, 상품 가치가 있는 실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 이하도 이상도 아닌 연구 대상일 뿐이었다. 피라미드 최상위를 차지하는, 그자들은 어떠했나. 거대한 힘을 가진 자들에게 나는 실험 대상 그 자체도 못될 것이다. ‘불량품’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값을 지불한 물건’ 정도일까. 나를 배신한 그 여자, 사랑을 위장해 내게 접근했던 그녀도 결국 나를 감시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

 

상관없다. 그들이 어떻든, 분명한건 내 안에 작은 불씨로나마 나루세 준이치의 인격이 살아있는 한. 나는 나이다. 내게 이식된 뇌. 그 주인에게 점령당해 내 육신도 그의 것이 되고, 내 정신도 그가 차지한다면,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이 나루세 준이치의 삶이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내 삶을 지속한다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울부짓는 어느 동물의 소음이 시끄러워 대가리를 잘라버리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예전의 나루세 준이치라면. 그토록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나는 이제 없다. 뇌세포 속, 살아 있는 도너의 ‘정신’은 어떤 것보다 치명적이다. 더 이상 나는 생의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 메구미를 진심으로 껴안지 못하고 거짓으로 웃음을 날리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 언제 또 그의 정신이 나를 지배할지 모르겠다. 두렵다. 끝내고 싶다. 내가 나일 때.

 

소설의 주인공, 그의 이름은 나루세 준이치이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그’에게 이입되어 가상의 일기를 작성해본다. ‘그’가 되어 심정을 헤아리고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책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다. ‘도너’에 대한 발상 때문이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그리 많지도, 배경이 무수히 많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소설은 오직 나루세 준이치의 뇌 이식을 전후로 인간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춘다. 문득 소설을 읽으며, 박사가 준이치에게 던졌던 질문을 내게 던져 본다.

 

‘준이치의 인격이 변한 건, 도너의 영향일까. 준이치 안에 내제하였던, 절대로 밖으로 꺼낼 일 없었던 밑바닥의 것이었을까.’라는 그 의문. 만약 준이치에게 내제했던 것이라 전제한다면, 나의 저 밑바닥에 봉인된 것은 무엇일까. ‘내게도 누군가의 뇌를 이식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 선택권이 내게 있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자문자답해본다. 주인공이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이 ‘존엄성’과 ‘인격’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존엄사’까지 확장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늦은 저녁 단막극 한 편을 본 기분이다. 때마침 소설의 내용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드라마가 제작. 방영 중이란다. 소설의 분위기와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영상으로 어떻게 구현됐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소설의 여운을 달랠 수 있을까.

 

“그건 죽는다는 거야. 살아 있다는 건 단지 숨을 쉰다든지, 심장이 움직인다는 게 아니야. 뇌파가 나오는 것도 아니지. 그건 발자국을 남긴다는 거야. 자기 뒤에 있는 발자국을 보고, 자기가 만든 것이라고 똑똑히 아는 거라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에 내가 남긴 발자국을 보아도 도저히 내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 20년 이상 살아왔던 나루세 준이치는 이미 어디에도 없다고!” (300쪽)

(...)

 

“새로운……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까? 이 세상엔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
“다시 태어나는 것과 조금씩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달라.” (301쪽)

 

Editor_김민경
mins@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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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 이것은 노동이 아니다

 

 

드니 디드로 | 《백과사전》 | 도서출판b | 2014 

 

 

1746년경 프랑스 문인 드니 디드로는 《백과사전 Encyclop?die》 출판 사업에 착수한다. 1751년, 백과사전 첫 번째 권이 출간되었다. 1년 뒤에 나온 제2권은 배포되지 못했다. 탄압이 심했던 시대, 계몽주의 성향이 짙었던 《백과사전》은 오랜 시간 난항을 겪었다. 1765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지 못한 책들이 모두 발간되고, 마침내 《백과사전》은 완성되었다.

 

《백과사전》은 세기의 위대한 작업이다. 드니 디드로는 《백과사전》 작업에 평생을 바쳤다. “방대한 사전을 편찬하는 데 사소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조금만 소홀해도 엄청난 결과가 뒤따른다”(115쪽) 라는 디드로의 말에서 그의 《백과사전》 작업은 노동도 아니고, 열정만 갖고는 될 일도 아니라는 걸 알겠다. 그에게 《백과사전》은 짊어질 생활이자 삶의 고집스러운 자세로 보인다.

 

《백과사전》은 인간과 자연에 흩어져 있는 만물을 모았다. 양식과 이성에 꼭 들어맞는 주관만을 고집했고, 그러한 주관성이 아니라면, 철저히 배제했다. 《백과사전》은 이 모든 과격한 방식에 동참한 동료가 있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여 새로운 단어가 생기듯 그들은 스스로 처음 나타나는 역사가 되었다. 그들은 다양한 직업과 산업을 기술하기 위해 기계의 작동부터 직접 연구했다. 진실되고 정확해야 했다.

 

우리의 《백과사전》은 다른 모든 저작보다 우월하다. 분량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협회가 만들었든, 한 사람이 만들었든 수많은 새로운 것이 실려 있어서, [그 점을] 불필요하게 다른 데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을 잘 뽑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능했던 결과이다. (126쪽)

 

이 책은 《백과사전》 5권에 실린 ‘백과사전’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 디드로는 이 항목에서 사전의 본질을 짚는다. 사전의 가능성, 목적, 항목의 배치 방법, 인쇄의 역할, 사전이 취할 어조까지. 가리켜 언급하는 항목들은 곧 백과사전이 담아낸 장구한 세월이다. 디드로는 《백과사전》이 받아낸, 받을 찬사를 경계한다. 우리가 굉장한 작업을 시작했으니 이제 됐고, 인간과 자연에는 언제나 여지가 있기에 우리를 대신하여 다음을 잘 부탁한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수학자 달랑베르는 디드로와 함께 《백과사전》의 편집 책임을 졌다. 달랑베르는 《백과사전》에 “인간의 주요 능력을 빠짐없이 구분하려고 했”고, “이 구분에 따라 작업했다.”(85쪽) 《백과사전》의 학문은 인간의 기억, 상상, 이성에 따라 분류된다. 역사가 ‘기억’으로, 철학과 과학이 ‘이성’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모호하지 않고, 사물의 객관성을 중요시하고, 확신이 생겼기에 멈춘 《백과사전》이지만, 그들마저 ‘인간’이라는 항목을 서술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인간은 출발점이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이 귀결해야 하는 유일한 항”(85쪽) 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다만, 자연을 이기려 드는 인간이 있기에 지금 그 말은 어설프고 안타깝게 들린다. 그들이 백과사전에서 설명한 ‘인간’은 인간의 우월함을 뽐내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겸손의 일면일 것이다. 세상에는 굳이 알아야 할 것과 몰랐으면 좋았을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누구보다 깊이 알고, 우려를 거듭 견뎌냈을 디드로의 숙고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동일한 사물이 동일한 것이었음을 확신하기 위해, 그리고 정말 다른 것처럼 보였던 사물이 사실은 다른 것이 아니었음을 확신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해야 했는지 알았다. (116쪽)

 

|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원

(hyewonjung@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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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 1, 2》 - 부부가 사는 법

 

 

 

마스다 미리 | 《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 1, 2》 | 애니북스 | 2013

 

"서로 보고 싶은 책 고르고 30분 뒤에 여기서 만나자."

"그래!"

 

모처럼 만의 서점 데이트. 주말이라 꽤 붐비던 서점에서, 우리는 각자 책을 고르고 둘러볼 시간을 갖는다. 30분 뒤. 남편이 골라온 책을 보고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살까 말까?' 한참이나 들었다 놨다 고민하던 그 책이 남편 손에 꼭 쥐어진 것이다 맘에 드는 걸 발견했다는 듯 내게 건넨 그 책. 바로《치에코씨의 소소한 행복》이다.

 

당시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마스다 미리는 이미 꽤 알려진 작가였다. 작가는 잔잔하면서 담백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부담이 없고 재촉하지 않아 천천히 글을 읽어 내리기에 그만이다. 특유의 가늘고 정감있는 펜 터치를 좋아하는 이도 많아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나 역시도 책을 읽고 《내누나》《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등 그녀의 다른 작품을 눈여겨보는, 팬이 되어 버렸다.

 

책 속에는 제목에서 언급된 치에코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치에코와 남편 사쿠짱의 아주 소소한 일상을 단편처럼 엮어 완성했다. 어느 기업의 비서로 일하는 치에코와 구두 수선 가게를 운영하는 사쿠짱. 그들은 이제 결혼 11년 차 부부이다.

 

 

둘은 퇴근하고 함께 만나 마트에 가고

카트 안에 식료품을 담으며,

때론 맛있는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맛보거나

 

 

집에 와 하루 동안의 일을 얘기하면서

소소하게 일상을 가꿔 나간다.

 

기승전결이나 희로애락 같은 건 애초부터 없다. 책은 지극히 평온한 부부의 일상을 다룬다. 굳이 행복하다.”를 연발하지 않아도 이들 부부의 일상에는 자연스레 풍족함이 스며들었다. 다소 단조로울 수 있는 전개가 결코 지루하지 않은 까닭은 기혼인 탓도 있을테다. 상황마다 우리의 경우를 덧대는 작업은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사쿠짱을 통해 남편의 모습을, 치에코를 통해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마냥 가볍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 부부의 모습을 되돌아보게끔 하고, 책장을 덮은 뒤 함께 사는 그 혹은 그녀를 더욱 보듬는 힘을 갖게 하기에 그렇다. 한 장면을 두고 서로 속마음을 나레이션처럼 적어 놓은 부분을 보며 때론 맞아!’를 외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그때 그랬겠구나싶어 괜스레 애잔함을 느껴볼 수도 있다.

 

가끔 누군가 내게 묻는다.

"신혼이 몇 년까지예요?"

"어, 글쎄...?"

 

"신혼은 정확히 결혼 후 2년까지입니다."라는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좋으련만. 질문을 받으면 덜컥 답하기가 참 애매하다. 이런 마음이 들 때는 있겠지. 조금씩 같이 사는 게 익숙해지는 느낌이 들 때. 평범한 듯한 일상이 반복된다고 느껴져 재미난 일을 찾게 될 때. 내 경우, 결혼 1년 차 이제 함께 사는 게 익숙하다 싶어질 때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익숙한 편안함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질 때다. 이참에 치에코와 사쿠짱의 모습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부부의 일상’. 그 소소한 하루만큼 값진 것이 없다.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하루하루가 곧 더없이 소중하다고 책은 말하는 것 같다.

 

글이 많지 않기에 속도를 내면 단숨에 읽기 십상이다. 단번에 훑어 버리기 아쉬워 침대맡에 두고 조금씩 읽는 시간이 소중하다.  단 몇 개의 에피소드이지만 이를 통해 내 삶의 풍족함도 더불어 느껴본다. 알콩달콩 11년을 신혼처럼 보내는, 이 부부가 사는 방식이 참 마음에 든다함께 사는 그도 엇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믿으며. '우리'의 소소한 일상도 이 부부처럼 탐스럽게 영글어가길 소망해 본다.

 

                 컨텐츠팀 에디터 김민경

mins@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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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주인》 - 찾는 책 없습니다

 

 

레지 드 사 모레이라 | 《책방 주인》 | 예담 | 2014 

 

반디앤루니스는 도시의 많고 많은 서점 중 하나다. 여기에는 누구나 좋아하는 어여쁜 책도 있고, 꼭 나만 좋아할 것 같은 책도 있다. 좋아해 보려 해도 도저히 안되는 책도 있다. 서점에서 파는 모든 책의 주인은 아니지만, 나는 왠지 책을 대할 때 책임감이 들어서 쓰레기 같은 책은 꼭꼭 숨기고 진흙 속의 진주 같은 책을 앞장세운다. 나 좋으라고 그런다. 책을 좋아해서 책과 가깝게 지내는 일을 하고 있다. 서점에는 속보 기사처럼 신간이 쏟아진다. 신간 목록 중에는 포장이 제법 잘 된 쓰레기도 있다. 쓰레기를 아주 잘도 만들어내는 거짓 생산자에게 진주 같은 책이 지지 않으려면 나는 쓰레기와 진주를 꼭 구별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책을 담백하게 권할 수 있을까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책방 주인은 쓰레기 같은 책은 절대 팔지 않았다.
 "쓰레기 같다는 건 누가 결정하죠?"
가끔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개중에는 대뜸 자신을 납득시켜보라고 고집을 부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주인은 그였다.
책방 주인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책방 주인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그 도시에 많고 많은 다른 서점으로 가든가, 직접 책방을 차려서 쓰레기 같은 책들을 실컷 사고팔면 될 터였다. 책방 주인은 왜 자신이 굳이 그런 일을 떠맡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쓰레기 같은 책이 싫었다.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하니 책방에 손님들이 뜸하지, 라고 말하는 건 좀 입빠른 소리일 게다. (21쪽)
 
책방 주인은 쓰레기 같은 책은 팔지 않는다고 확실히 못을 박기 위해 읽어본 책만 팔았다. 좋은 책을 잘 권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읽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책을 읽지 않을 때도 읽을 책을 찾았다. 그렇지만, 현실의 대형 서점에는 속도가 중요하다. 빨라야 손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출판도 마찬가지다. 신간 도서 중에는 더러 나올 준비가 미처 되지 못한 것 같은 책도 있다. 책이야 말을 못하니 안쓰럽고 말지만, 문제는 빠른 속도에도 신속하게 응답하는 독자들의 서평이다. '반디앤루니스에는 리뷰가 많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오늘의 책'을 통해 좋은 책을 나누려고 서평을 찾다 보면, 서평다운 서평을 찾기 힘들다. 서평은 신간의 홍보 수단으로 변질됐다. 서평단의 결론은 '사용해 보니 좋네요'다. 서평이 아니라 상품평이다. 심한 경우, 서평단에게는 깊이 독서할 시간도 없었던 것 같다.

 

책방 주인은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뜯어내 봉투에 담아 그의 가족들에게 보냈다. 가족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페이지는 각각 달랐다. 편지에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책방 주인이 '좋은 책을 권하는 방법’일까?  그러고보니 좋은 책은 홍보에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꾸준히 잘 팔린다. 자발적인 서평도 곁들여진다. 애초부터 책은 속도에 호응하지 못하는 사물이 아니었던가. 상품평이 많은 책은 홍보가 많이 된 책이지, 다 좋은 책은 아니다. 반디앤루니스에는 상품평이 많이 없다.

 

|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원

(hyewonjung@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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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라디오≫ - 시작은 거창하였으나 끝은 미약하리라

 

정혜윤 | ≪마술 라디오≫ | 한겨레출판 | 2014 

 

베어맨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마지막 잎새를 그려 놓았을까. 마지막 잎새 그림 하나로 삶의 의지를 찾는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나 비합리적인 것 아닐까?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지막 잎새일 수 있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서 뭔가 바뀔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몽상가적인 상상에 불과한 것인가? (226쪽)

 

책에서 읽은 대로 살려는 사람을 만났다. 이렇게나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 있다고 결국 믿는 사람. 그 방법을 책에서 찾고, 책에서 찾은 얘기를 세상에 당연히 필요한 얘기로 만드는 사람. 몇 번의 강연에서 보았던 정혜윤의 모습이 그랬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지막 잎새가 돼야 하는 거 아니겠느냐며, 그녀는 마땅한 생각과 진지한 고민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강연을 듣고 나면 나는 늘 마음이 들떴다. 하고 싶었던 것들,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거기 있던 청중이 같은 생각을 했을까. 모두 그녀의 '마지막 인간'이 된 듯했다.

 

최근 며칠 동안 나는 라디오를 켜듯 습관적으로 ≪마술 라디오≫를 읽었다.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오면 무슨 책을 읽어볼까 고민도 없이 그냥 ≪마술 라디오≫를 꺼냈다. 이야기 한 편을 다 읽으면 점심시간이 자연스레 끝나 있었다. 다음 날에는 그다음 편을 읽었다. 매일 ≪마술 라디오≫에 기록된 사람들의 고백을 읽어 갔다. 곧 한 권이 끝났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해야 할까?

 

실은 읽는 내내 생각이 다른 곳으로 샜다. 한 사람의 사연에 내 사연을 자꾸 덧대느라 글은 제대로 읽히지도 않았다. 다시 읽기로 했다. 라디오에서 나왔던 노래가 좋아 그 곡을 반복하여 듣는 것처럼 ≪마술 라디오≫에서 특별히 좋았던 얘기만 골라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또 다른 생각만 했다. 좀 허무한데, 괜찮다. 나는 한 곡을 들은 것이 아니라 다른 얘기를 하다가 처음 하던 얘기로 다시 돌아오는 '아무튼'의 변주곡을 들은 거다.

 

창대히 끝나지 않은 비효율이 차라리 마음에 든다. 그래, 모든 이야기가 요점일지도 모르겠다. ≪마술 라디오≫가 애초부터 효율을 추구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는다. ≪마술 라디오≫는 맥락에 맞지 않아 하지 못했던 이야기, 편집되어 방송에 나가지 못한 사연, 방송 후에 PD 정혜윤이 새로 알게 된 이야기다. 이야기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서로 멋대로 섞이면서 조금은 혼돈스럽게 의미가 명료하지 않은 채 쌓여 있었"(39쪽)다. 내 머릿속에서도 수많은 '말'들이 이루지 못한 일과 이룬 일 사이를 오갔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말은 항상 이루지 못한 일에 남아서 떠돌지 않던가.

 

"엄니가 보리를 말리려고 마당에 널어놓고 나가면서 나보고 이따 걷으라고 했어. 내가 노느라고 그만 까맣게 잊어버린 거야. 그런데 비가 와버렸어. 반은 이미 닭이 먹어버렸고 나머지 반은 비를 실컷 맞았어. 나는 엄니한테 혼날 게 무서워서 보리를 걷어다가 꽁꽁 잘 싸서 광에 숨겨놨어. 엄니도 그날은 바빠서 보리를 잘 걷었냐고 안 물어봤어. 그다음 날인가 보리를 찾았어. 나는 이젠 보리가 잘 말랐겠지 생각하고 꺼내 왔어. 이게 웬일이야? 밤새 보리에 싹이 나버린 거야. 나는 언니한테 맞을까 봐 엉엉 울었는데 엄니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그냥 피식 웃고 말대. 그때 엄니가 무슨 말인가 했는데 그게 기억이 안 나. 아주 중요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날 듯 안 난단 말이야. 분명히 나도 아는 말이거든. 노인 대학에서 뭘 쓰고 그리라는데 그게 그렇게 생각나. 엄니 만나면 '엄니 그때 뭐라고 했어요?'라고 제일 먼저 물어볼 것 같아." (212~213쪽, 마술 라디오 9 '잘 듣는 할머니')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할 거라고? 끝'만' 잘하면 된다고 알려줄 거라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다. 시작은 거창하나 끝이 미약하였더라도 끝과 시작 사이에 실현되지 못한 약속을 기억할 것.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다시 갈망하기를.


 

|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원

hyewonjung@bnl.co.kr

 

 

※ ≪마술 라디오≫에 단편적으로 언급됐던 책이다. 매우 많은 책이 낱낱의 진행을 가로막았다. 덕분에 시선이 길어졌고, 생각이 깊어졌다. (▷ 연관 시리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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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 누구나의 섬

 

장 그르니에 / 김화영 옮김 | 《섬》 | 민음사 | 2008 

 

책을 손에 쥔 뒤에도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섬. 어떤 미사 어구도 없는 짤막한 제목이 말할 수 없는 무게감을 전한 탓이다. 책을 쓴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 장그르니에이다. (카뮈의 스승으로 알려진) ‘왜, 섬일까?’ ‘무슨 섬일까?’ 책장을 들추기 전 한참을 생각하게 한 대목이다. 책을 덮은 후에도 이 부분에 대한 여지를 남긴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에 이 책은 상당히 회화적이다. 작가는 서정적이다. 책을 접할 무렵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이 있었다. 멘델스존의 ‘무언가’ 그 중 베네치아의 곤돌라송. 나직하고 깊게 깔리는 피아노 선율은 <섬>을 감도는 회화적인 느낌을 대변하는 듯하다. 작가가 곤돌라 대신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스르는, 깊은 사색에 잠기는 풍경을 그려본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나는 자신이 밤의 어둠 속에서 어떤 나룻배를 타고 있다는 상상을 해보곤 하는 것이다. 방향을 가늠할 표적 하나 없었다. 길을 잃은 채, 어떨 도리가 없이 길을 잃은 채, 눈에 보이는 별 하나 없었다. (본문 29쪽)

 

첫 번째 이야기 순서의 ‘공의 매혹’에서 작가는 위와 같이 고백했다. 덧붙여 “이러한 몽상이 결코 씁쓸하지 않았다. 그 몽상을 마음 편하게 펼쳐가고 있다. 아주 달콤한 기분으로 몽상을 즐겼다.”라고 서술한다. 공의 매혹은 장그르니에가 ‘생’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관점을 조망하게 한다. ‘프롤로그’와 같은 인상이다. 작가가 수많은 시간과 세월을 할애해 이르게 된 정신적 ‘고요의 단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다시 섬의 본질로 돌아와, 섬은 개개인의 ‘인간’을 뜻할 수도 ‘인간의 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 isole>-섬의 어원 자체가 그렇지 않는가? 섬, 혹은 <혼자뿐인> 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일 뿐인> 인간들. (본문 124쪽)

 

그 섬 안에는 다양한 개념이 존재한다. 종교, 시간, 의식, 문명, 자연, 동물… 장그르니에는 자신의 시선으로 이것들로 구성된 ‘섬’을 둘러본다. 공의 매혹, 고양이 물루, 케르겔렌 군도, 행운의 섬들, 부활의 섬… 등 책을 가르는 8개의 구성은 이러한 개념에 대한 작가의 고찰을 담아낸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바라본 그 ‘섬’ 또한 지극히 ‘한 사람’(장그르니에)이 바라본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철학자란 인간이 '인간'이기에 느끼는 감정을 인식하고, 인간 관점으로 세계에 대한 고찰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 하면, 그는 너무나 훌륭히 철학자로서의 의무를 이 책을 통해 다한 것일 테다.

 

작가는 자신이 바라본 ‘모든 것’에 대해 세심히 관찰하고 몰입한다. 그 시간을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 물루 또한 오랫동안 하나의 객체로서 관찰했다. 고양이를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고 생각을 전진시켜 나간 점 또한 흥미롭다. 애정하던 고양이는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작가는 고양이의 사소한 움직임을 의식이 없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행위로 인식. 의식하지 않은 행위의 자유로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에 대해 동경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는 어떠한 경우라도 정신(의식)의 지배를 받는 인간에 비해 ‘고양이 종족’은 의식이라는 것의 영향을 받지 않아,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보인 까닭이기도 하다. 의식하는 모든 것에 또 다른 의식. 작가는 이것이 인간을(혹은 자신을) 얽매이게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어떤 절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일체의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할 때, 그러기 위한 모범으로써 한 마리의 동물보다 더 나은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흔히 감정이란 <인간적인 것>일 뿐 동물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본문 61쪽)

 

책 전반에 걸쳐 장그르니에의 ‘세계관’은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전제로 한다. 도입 부분에서도 인간은 바다의 모래와 같은 존재라 밝히기도 했다.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을 맛보았던 시기라고 해서 가장 추억에 남거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 짧은 황홀과 정열의 순간들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이라 할지라도 ?아니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 ? 인생 행로의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찍힌 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이어서 어떤 상태를 이루지 못한다. (본문 101쪽)

 

면면히 들여다보면 이 책은 그에 대해 알아가는 단편적인 이야기의 연속이다. 글을 읽으며 작가를 추측하게 되고, 책 장을 넘길 때마다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느낌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무게감은 이내 가벼워지고, 유쾌한 것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인생은 어찌 보면 섬을 찾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내면을 이해하고, 나를 찾는 과정이 아닐까. 초반의 정체를 알 수 없던 섬은 말미에 이르러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성질을 보이는데, 의식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경지, 도피하고 싶은 곳, 내면이 그토록 원하는 경지로 해석하게 한다.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독자마다 다양한 해석을 하게 할 것이다. 누군가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책 전체에서 섬이 의미하는 것. 작가의 섬과 나의 섬을 찾아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렵기도 하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책 <섬>. 작가의 방대한 생각을 담아낸 집성체이기에. 결과 그 자체이기에 작가와 같은 이해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쉽게 납득하지 못하거나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독서를 하는 시간보다 책을 읽은 뒤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는 점에서 이 책은 중요성을 갖는다. 나의 것과 비교하고 추론하는 데 더 많은 고민과 시간을 할애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 다음 남는 것은, <섬>에서 다룬 그 어떤 무거움보다 인간이기에 할 수 있었던 고민과 번뇌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섬>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모든 것은 부분적으로만 정확하다. (본문 89쪽)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예기치 않은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저 살아남아 잇는 것 뿐이다. (본문 106쪽)

 

 

컨텐츠팀 에디터 김민경

(mins@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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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 슬픈 열정

 

 

토마스 베른하르트 | 《몰락하는 자》 | 문학동네 | 2011

 

지금은 아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밤마다 뛰던 적이 있었다. 그때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자주 들었다. ‘아리아’는 맥박이 빨라지기 전 몸풀기용 음악으로 좋았다. 《몰락하는 자》를 펼치면서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틀어 놓았다. 소설에서 계속 언급되던 그 곡이다.

 

《몰락하는 자》의 ‘나’는 두 명의 친구, 베르트하이머와 글렌 굴드를 거듭 생각한다. ‘나’는 생각을 하다가 끝에 꼭 ‘난 생각했다.’라고 생각을 맺어 버린다. 빈틈이 없던 중간 맺음에 비해 소설의 끝은 느슨하다. “아직 뚜껑이 열려 있는 베르트하이머의 레코드 플레이어에 얹혀 있던 글렌의 < 골트레브크 변주곡 >을 틀었다.”《몰락하는 자》의 마지막 문장이다.

 

《몰락하는 자》의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고, 영화 < Shame >을 보았다. < Shame >에도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나온다. ‘아리아’와 함께 유유히 흐르던 브랜든 설리반(마이클 패스밴더)이 이 영화에서 ‘몰락하는 자’다. 그는 성 중독자다.

 

소설에서 베르트하이머는 이상이라고 심어둔 예술에 결코 닿을 수 없어 불행으로 치닫는다. 그는 늘 쪽지를 곁에 두고 무언가를 적었다. 혼자서는 쪽지가 든 상자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리고 모조리 불태웠다. 그렇게 흔적을 없애는 행위를 마치면, 베르트하이머는 집으로 손님들을 불러 모아 쉬지 않고 바흐와 헨델을 연주했다. 손님들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는 사이 베르트하이머는 “끔찍할 정도로 조율이 안 된 악기”를 가져다 쓰레기에 어울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이상적인 예술은 글렌 굴드였다. 그러나 글렌 굴드는 몇 소절 연주만으로 베르트하이머를 ‘몰락하는 자’로 만들었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이 늘 얘기했던 바로 그 몰락하는 자였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베르트하이머는 아주 전형적인 막다른 골목형 인간이었고,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다른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어, (…) 그 친구 같은 사람들이 가진 선택의 폭이란 여기 막다른 골목이냐 저기 막다른 골목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게 고작이고 그런 막다른 골목 메커니즘에서 결코 헤어나오지 못하지,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139쪽)

 

< Shame >에서 브랜든 설리반은 자기만의 생활에 열중한다. 그 일을 하려고 타인을 만나는 반면, 마찬가지로 그 일을 하느라 누구도 잘 만나지 못한다. 베르트하이머는 자기만의 예술관에, 설리반은 자신의 성생활에 모두 격렬하고 몹시 열정적이다. 열정은 오직 날 위한 것이지, 주변과 타협이 없다. 자위하고 공허하게 남을 뿐이다.

 

베르트하이머는 불행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끌렸는데, 그 사람들에게 끌렸다기보다는 그들의 불행에 이끌렸던 셈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불행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는 불행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한테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65쪽)

 

불행에 지독하게 익숙했던 베르트하이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그의 죽음을 축복하고 싶었다. 불행은 끝났으니까. 오랜만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면서 숨차게 뛰고 싶었다. 막다른 길이 없는 곳에서.

 

-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원 (hyewonjung@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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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기 - 알베르 카뮈 전집 17》 - 일기를 썼다

 

 

알베르카뮈 | 《여행일기 - 알베르 카뮈 전집 17》 | 책세상 | 2005

 

도서관에 갔다. 카뮈의 《여행일기》를 말한다는 걸 사서에게 카뮈의 “여름일기”를 달라고 했다. 잘못 말했다는 걸 금세 알았지만, 재빠르게 고치진 않았다. 잘못된 책 제목이 묘하게 어울려서 조금 웃었다. 그런데 《여행일기》의 남아메리카 편은 카뮈가 여름에 쓴 일기니까 여름일기라고 불러도 되려나. 좋을 대로 생각하려다가 《여행일기》의 첫 번째 일지, 미국 편이 여름과는 너무 안 어울려서 억지를 관뒀다. 나는 1946년 미국의 서늘한 봄을 그대로 맞았다.

 

1946년 3월, 어느 날의 월요일. 날씨를 보니 “바람이 잔다.”(27쪽) 카뮈는 커다란 선상 위에 있다. 그는 미국 여행의 여러 날들을 배 안에서 보냈다. 무리 속에 있지만, 언제나 멀찌감치 떨어진 모습이다. 당시 카뮈는 유명한 기자였지만, 명성이 확보되지 못한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최대한 피했고, 혼자 젖어버린 우산처럼 관찰자의 입장을 유지했다. 기꺼이 혼자가 됐다. 그는 매일 밤마다 그날 있었던 일과를 사건 위주로 썼다. 다만, 바다를 바라볼 때만 유일하게 그는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갑판 위에 서서 바다를 가르는 굵은 별들을 바라보며, 그 별들의 자취를 좇았다.

 

구상해 놓은 소설의 첫머리를 쓰듯 그는 이렇게 적는다.
“어떤 한 사내가 사업상의 여행 중에 별다른 생각 없이 어떤 자연 그대로인 고장의 외따로 떨어진 여인숙에 든다. 그런데 거기서 그 자연의 침묵, 아무 치장 없는 소박한 방,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 등이 그로 하여금 영원히 이곳에 머물며 과거의 자기 삶이었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그리하여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별하지 말고 지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46쪽)
미국 여행에서 카뮈는 바다에 던져진 침묵의 무게만큼 버티고 있었다.

 

두 번째 여행의 시작은 1949년 6월 여름, 남아메리카다. 카뮈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페스트》를 출간하고, 인기 작가 반열에 올라선 상태였지만, 그는 그 모든 걸 불편해했다. 고열에 시달리면서 몸과 마음은 허약해져 있었다. “내가 두려워하던 법석의 시작이다.”(74쪽)라고 말하듯 그가 버텼던 침묵의 무게도 브라질의 기운에, 특유의 우글거림에 무너졌다. 춤을 추다가 남아메리카 여행은 기분 좋게 꼬꾸라지기도, 우수에 젖은 채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하는 날들이었다.

 

과거에 내가 일생 동안 고집스럽게 거절했던 것을 여기서는 다 받아들이고 있다. 마치 내가 원하지 않았던 이 여행을 하면서 미리부터 모든 것에 다 동의한 것처럼. (114쪽)

 

카뮈의 여행일기는 1949년 8월 31일, 비행기 안에서 막을 내렸다. 지친 몸 상태 그대로. 고통의 한계는 없어 보였다. 카뮈는 비행기를 가리켜 금속관이라고 불렀다. 일기의 끝은 여름이지만, 냉랭한 기운이 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던 날, 마침 소나기가 내렸다. 오전부터 우기가 가득했지만, 나는 차마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 비에 젖어 책이 조금 눅눅해졌다. 꼭 바다에 뜬 섬 같았다.

 

-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원 (hyewonjung@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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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 - 노인을 위한 시간

 

대니얼 클라인 |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 | 책읽는수요일 | 2013

 

저자 대니얼 클라인은 39년생. 한국 나이로 올해 76세를 맞은 철학 저술가이다. 그는 노인이라 불리는 게 어디 하나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책 날개에 박힌 그의 모습은 백발이 성성하고 어깨가 살짝 굽었다. 사진 속 그의 손에는 커피 한잔이 들렸다. 뒤로는 노천카페의 파란색 탁자와 색색의 집들이 배경을 이룬다. 책을 읽은 후라면 쉽사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이 그리스 이드라 섬의 그가 자주 찾던 카페라는 것쯤을.

 

 

이제 일흔다섯 살 먹은 노인이 된 나는 이 인생의 단계를 가장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나는 이곳 노인들이 사는 방법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노년기를 유난히 흡족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드라 섬 노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철학 서적을 한 보따리 챙겨 들고 대서양을 건너왔다. (11쪽)

 

그는 70대의 어느 날. 철학 서적을 한 보따리 챙겨 들고 그리스의 이드라 섬으로 향한다. 인공 치아 시술, 주름 제거 수술 등으로 ‘나이듦’을 역행하는 풍조에 공감하지 못한 탓이 크다. 여행을 통해 알고자 했던 대목은 ‘노인다운 노인이 어떤 것인지’, ‘노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다.

 

이야기는 짤막한 주제 속, 나이듦에 대한 저자의 성찰을 토대로 이어나간다. 철학자인 작가의 생각을 엿보는 것도 재미지만 그의 여행을 통해 과거의 철학자와 재회하는 것도 독서의 흥미를 더한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세네카가 수 세기 전 나이듦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지 열거하는데, 독자는 그들의 생각을 끄집어내고 헤아려보는 작업을 할 수 있다.

 

운이 좋은 사람은 젊은이가 아니라 일생을 잘 살아온 늙은이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는 신념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고 운수에 끌려 방황하지만, 늙은이는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느긋하게 행복을 즐긴다. -에피쿠로스 (27쪽)

 

남아있는 삶을 제대로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에피쿠로스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삶의 질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은 자본의 유혹에 스스로 속박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에피쿠로스는 진정한 행복이란 삶은 콩 한그릇, 요구르트 소스 한 스푼처럼 싸게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려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노후에 박탈감을 느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에피쿠로스는 충고한다. 단순한 즐거움을 찾으라고. 소박한 즐거움은 값도 저렴할 뿐만 아니라 늙은 육체에 부담도 주지 않는다. (32쪽)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에피쿠로스 사상에 깊이 공감한다. 식당 차양 아래서 한가로이 《행복의 기술, 에피쿠로스의 교훈》을 읽는 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누구와 함께 식사할 것인가,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자유, 일상사와 정치에서 벗어난 삶… 소제목을 따라 책장을 넘기다 보면,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값지게 느껴진다.

 

퇴직 후 운신의 폭이 좁아진 노인에게, 망망대해 같은 노년기를 앞둔 이에게 이 책은 꽤 쏠쏠한 위안을 줄 것이다. 작가는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에게 일상을 즐겁게 영위하는 방법을 논하자며 천천히 말을 건다. 그는 노년기를 그저 인생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한 단계로 바라보고,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이 그 시간을 제대로 즐기길 바라는 듯하다.

 

작가에 따르면, 그리스 이드라 섬의 생활은 정치 상황이 어떻든 안단테(andante) 속도를 유지한단다. 안단테! 저자가 그토록 갈구했던 물음(노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해답으로 이 단어가 제격 아닐까. 원말은 이탈리아어 andare(걷다)의 현재분사이며, 걸음걸이 빠르기로 '느리게'를 뜻하는 말. 어쩌면 저자는 일찌감치 해답을 제시했는지 모른다. 철학자처럼 느리게 나이 드는 법이란 제목에서 말이다.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느리게’와 ‘나이드는 법’ 사이에는 ‘현재를 즐기며’라는 문구를 추가하면 되겠다.

 

사실 그가 나이듦에 대한 정확한 답을 제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독자가 그와 함께 고민하고, 답을 얻는 과정을 함께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현재를 직시하고 노년의 의미를 짚어 볼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 큰 수확이 아닐까.


노년기에 흡족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불가해한 문제를 풀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시도가 아닐까. (261쪽)

 

여행을 마친 뒤, 작가는 여느 날처럼 아내와 한가로운 생활을 즐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아내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기에 이르는데. "이제 노인답게 살고 싶은데, 허락해주겠소?” 하고 묻는 것이다. "나도 모르겠소. 당신은 내가 젊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거든." 아내는 이내 “당신 질문에서 벌써 노인네 티가 난다.”며 노인답게 살고 싶은 작가의 간청을 들어준다.

 

나의 경우, 책을 반 정도 읽다 아버지께 건네었다. 70을 넘어선 아버지가 먼저 보면 좋겠다 싶어서다.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길 바라며. 아버지께 책이 어떻게 전해질까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얼마 뒤 내게 전해진 문자 메시지는 “고맙다, 내 딸!” 두 번이나 읽으셨단다. 시간차를 두고 가족 모임에서 만난 아버지는 습관처럼 해 오던 염색을 그만두었다. “안 어울려요!”(70세에 흑발이 더 어색한것을) 라는 딸과 아내의 볼멘소리에 개의치 않고 백발 성성한 머리. 이게 좋다. 편하다 하신다.

 

책 후반부의 “이제 노인답게 살고 싶은데, 허락해주겠소?”라는 부분은 가족 모임 이후에서야 읽은 대목이다. 그러니 이제 알 것 같다. 작가 대니얼 클라인이 아내에게 '노인의 시간'을 허락 받았듯, 아버지 또한 가족에게 허락을 바란 것이겠지. 나도 그만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들어가겠노라고.

 

-컨텐츠팀 에디터 김민경 (mins@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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