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디 살롱/서점에서 만난 사람'에 해당되는 글 105건

  1. 2015.01.16 [서점에서 만난 사람] 젊음의 뒤안길에서 - 손아람
  2. 2014.11.18 [서점에서 만난 사람] 여행을 이해하는 방식 - 다카하시 아유무
  3. 2014.09.26 [서점에서 만난 사람] 원색 그림의 본색 - 그림 동화 작가, 로저 멜로
  4. 2014.08.07 [서점에서 만난 사람] ☆ 별의 별 이야기 - 천문학자 이명현
  5. 2014.07.01 [서점에서 만난 사람] 말하자면 좋은 사람 - 소설가 정이현
  6. 2014.04.21 [서점에서 만난 사람] 문장 노동자의 올해 농사 - 시인 장석주
  7. 2014.03.03 [서점에서 만난 사람] 고전의 틈새에서 빚은 책들을 제안합니다 - 문학 총서 '제안들'의 편집자 김뉘연
  8. 2014.01.24 [서점에서 만난 사람] 함께 살고싶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집 -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출간 기념 간담회
  9. 2014.01.16 [서점에서 만난 사람] 첫 인사 - 컨텐츠팀 정혜원
  10. 2013.12.12 [서점에서 만난 사람] 그 말에 닿고 싶은 마음 - 《부다페스트》의 옮긴이 루시드폴

[서점에서 만난 사람] 젊음의 뒤안길에서 - 손아람



아름다움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왜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아름다움을 좇는가?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고,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우주는 질적 대칭과 양적 비대칭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빛과 어둠. 질서와 무질서. 의미와 무의미. 아름다움과 추함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선호하는 것들이 아름다워졌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구멍이 있다. 우리가 왜 무언가를 선호하게 되는지를 다시 설명해야만 한다. 그냥 이렇게 반대로 말하는 쪽이 훨씬 편하다. (《디 마이너스》, 500쪽)



1997년과 2007년 사이에도 한국에 학생운동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때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잘 알지 못한다. 《디 마이너스》의 저자 손아람은 1997년 12월부터 2007년 12월까지를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른다. 이 책에는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간절하게 바라고 맹렬하게 달려들었던 ‘잃어버린 10년’이 담겨있다. 《디 마이너스》는 소설이다. 그리고 후대의 역사애호가가 반드시 지켜봐야 할 ‘현재사’이기도 하다.


Editor_정혜원 | Photo_Goro


프로필_손아람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는 용산참사의 법정 내용을 다룬 소설 《소수의견》,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너는 나다: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공저) 가 있다. 한겨레 월간지 《나들》의 인터뷰어로도 활동했다.



 



Q. ‘디 마이너스’는 수업에서 낙제를 모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의 점수예요. 제목이 왜 F가 아니라 D-일까 생각했어요. 겨우 빌어서 얻어낸 최악의 점수이자 최후의 방어선이죠. 꼭 2000년대 당시 사회에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세상에 매긴 점수 같다고나 할까요.

사실 F와 D-는 성취도로 봤을 땐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F는 너무 명백한 멸종이에요. 도태에 가까운 점수죠. D-는 명목상 살아 붙어 있는 점수이고요. 이 소설 속 운동권 인물들이 세상을 바꾸려고 싸우는 영역도 그렇죠. F와 D-의 경계. 2000년대 당시 많은 노동자의 삶도 이미 바닥까지 쳤는데, 자기들은 살아있고,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한다고 믿고 싶어 하죠.



Q. 소설에선 그 당시 있었던 사건들이 자세히 언급돼요.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 또한 사소하지만 매우 구체적이고요. 《디 마이너스》를 쓰면서 친구와 지인의 경험을 많이 참고했다고 들었어요.

소설에 쓰인 인물들도 대부분 실제 모델이 있어요. 저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활동 반경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보다 가까이서 많은 것을 보고 겪었어요. 운동권이냐, 운동권이 아니냐는 사실 조직 논리로 결정되는 것이죠.



Q. 책에 담긴 여러 사건,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가 사소하지만 매우 구체적이에요.

소설에 고유명사를 많이 쓰는 편이에요. 세계와의 거리를 최소화해 놓으려고.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뒤섞어 놓는 것은 제가 고집하고 있는 전략 중 하나고요. 소설에 쓰인 인물들도 대부분 실제 모델이 있어요. 저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활동 반경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보다 가까이서 많은 것을 보고 겪었어요. 운동권이냐, 운동권이 아니냐는 사실 조직 논리로 결정되는 것이죠.



Q. 오래전부터 그때의 광경을 글로 쓰겠다고 생각하셨어요?

네. 다른 작가들이 쉽게 쓸 수 없는 제 자산 같은 것을 하나 쓰고 싶었어요. 전 그걸 쓸 수 있는 위치에서 목격하고 경험했어요. 어렴풋이 다들 학생운동에 대해 알고 있지만, 내부를 들여다볼 기회가 없단 말이에요. 단지 유희적인 차원에서 쓰기에는 중요한 것들을 담고 있고. 그래서 고민하다 이것저것 다른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시기가 왔던 것 같아요. 저번 장편 소설을 쓰고 나서 소설보다 언론 쪽 일을 많이 했는데, 다른 쪽에서 몸담았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계관이 확장되는 경험을 했어요. 이제는 부끄럽지 않게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학생운동 이야기만을 가지고 소설을 한다 했을 때 굉장한 치기라든가 편향된 글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어요. 한 세계를 온전하게 그려낼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이 별로 없었고요.



Q. 자신 있게 쓴 이 소설에는 세계를 고스란히 담았다고 생각하세요?

다 담겼다고 말할 순 없죠. 그런데 가치 있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담은 부분에 대해선 만족해요. 학생운동에 직접 몸담았거나 관심이 컸던 사람들이 대부분 현재 좌파라고 불리는 분들이에요. 그들 개개인에게 어떤 역사가 있는지 보여주는 소설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지점에선 뜻있는 시도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Q. 《디 마이너스》에서도 인물들은 각각 다른 정파를 이루어요. 같은 좌파여도 방법과 방향이 달라서 갈리죠. 하지만,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까운 친구가 어떻게 했는지, 이러한 관계에 따라 결정적으로 움직여요.

당사자들에게 물으면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정파라는 것도 제가 느끼기에는 인간적인 부분에 많이 좌우돼요. 물론 그들 스스로는 끊임없이 논리적인 사고, 정치적인 사고를 하지만, 사실 인간적인 중력 같은데 끌려가는 것들이 굉장히 무시하기 어렵거든요.



Q. 《디 마이너스》에 나오는 인물 중 자신은 누구와 가장 가까워요? 주어진 형편은 소설에서도 미학을 전공한 주인공 태의와 가장 가까워 보이지만, 각각의 인물들에게 조금씩 걸쳐 있는 것 같아요. 취하면 랩인지 노래인지 시를 읊는 고학번 현승 선배, 세상의 삐딱한 현상을 절대 못 참고 책임지려 하는 미주. 작가인 당신의 모습이 조금씩 보여요.

태의에 가깝긴 하죠. 스스로 매우 흔들리는 인물이잖아요. 확신도 없고. 저도 그래요. 친구들이 대부분 학생 운동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저는 그 조직논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지금 작가로서도 마찬가지예요. 깊숙이 들어가면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높아요. 큰 틀의 운동을 위해 양보하는 것도 필요한데,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Q. 저울질하다가 스스로 합리적이지 못하게 될까 봐 불안한가요?

그렇다기보다 전 예술가와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성향인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조직논리로 움직이는 운동에 이따금 합리해도 지속적으로 그 조직과 함께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지금도 작가로서 굉장히 정치적인 글을 쓰는 편이지만, 특정한 진영 안에 들어가 있진 않죠.



Q. 《디 마이너스》에는 《소수의견》에 연속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해요.

이후에도 한 작품 정도는 매우 정치적인 작품을 쓰고 싶어요. 《디 마이너스》를 통해서 젊은 시절 성장했던 사람들이 《소수의견》이라는 커다란 변곡점을 맞고 그 이후, 또 다른 대목의 어떤 지점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결말을 한번 내고 싶어요.



Q. “너희가 만들고자 꿈꿨던 세상에서 살게 되기를.” 이 말이 많이 나와요.

이 책은 제 친구들, 제 젊음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헌정하는 의미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꿈꿨던 세계와 그들의 꿈에 바친다는 느낌으로 썼고요. 재미있는 게 이 소설은 같은 장소에서 시작과 끝이 났어요. 우연히 어떤 술집에서 진우의 모델이 된 친구를 만나서 옛날 이야기도 나누고, 옛날 사진도 보고 그랬는데요, ‘아, 이들과 이러던 시절이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 오늘부터 우리 이야기를 써 보겠어.’하고 시작했어요. 그들 대부분이 상처를 간직했지만, 지금은 평범하게 살고 있어요. 그런데 80년대 영광된 싸움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죠. 운동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서 이들이 어떤 꿈을 꾸고, 싸웠고, 어떻게 세상에 스며들어 갔는지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내 젊음이기도 하고요. 소설을 끝낸 날,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그 친구를 다시 만났어요. 이야기하다 보니까 이 술집이 그 술집인 거예요.



Q. 작가로서 세상에 책임을 느끼세요?

글을 쓰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꼭 해야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 난 작가가 됐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여전히 뚜렷하게 보이진 않아도 제가 무언가 강렬한 책을 읽었을 때 당장 내가 혁명적으로 바뀌진 않지만, 그 세계에 대한 시각이 매우 강하게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그렇게 수많은 책을 통해 경험이 쌓였을 때 한 인간이 달라지고, 그런 인간들이 모여서 곧 사회가 달라지는 거 아닐까요? 전 그 일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항상 잘 쓴 글 이상을 쓰고 싶어요. 위험한 글에 가까운 느낌.



Q. 글로 세상을 흔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지,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은 별로 없었던 것처럼 보이네요.

첫 번째 소설을 쓸 때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이 없었던 만큼 세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끼칠 무언가를 내야겠다는 욕심도 없었어요. 아까 얘기했던 고민은 작가가 된 이후부터 시작했죠. 이게 직업이 됐단 말이에요. 학생 시절에는 시험공부를 하거나 놀다가도 가끔 재미있는 글 하나를 쓰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직업이 된 순간부터 거기서 더 이상 만족이 되지 않는 거예요. 나는 좀 더 큰 걸 바라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더 큰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택했을 거야, 생각하게 됐죠.



Q. 언젠가 페이스북에 이런 말을 쓰셨어요. “나는 세계가 지성적인 곳이기를 열렬하게 희망한다. 지성적인 윤리와 지성적인 사악함과 지성적인 구조논리와 지성적인 저항.” 지성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까요? 배워야 얻는 건 아니잖아요.

성찰에 가까운 느낌인 것 같아요. 스스로를 바라볼 때도 공정하게 보려고 하는 노력들. 그런 것들을 저는 굉장히 중요하게 보는데 늘 누구에게나 어려운 부분인 것 같아요. 늘 정교하게 입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사람도 어느 지점에서 자기가 얽혀 있을 때는 매우 비겁해지는 모습을 많이 봐요.



Q. 존경하는 인물상이 있어요?

네. 인물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전 영화 ‘포레스트 검프 (Forrest Gump, 1994)’의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 너무나 똑똑하면서 유약한 종(種)의 사람들은 제 주변에 아주 많아요. 그런 사람들의 한계를 많이 봐 오면서 실망도 컸고. 포레스트 검프는 강인하지만 바보예요. (소설 속) 진우도 어떻게 보면 포레스트 검프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보 같지만, 초월적인 힘이 있어서 주변을 감동시켜요. 세계가 바뀔 여지를 만들어가는 인물. 그게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매우 존경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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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여행을 이해하는 방식 - 다카하시 아유무

 

 

 

정처 없이 떠나길 주저하지 않는 남자가 있다. 이상과 현실? 굳이 구분하지 않는단다. <러브 앤 프리>로 청년들의 마음을 불 쏘시던 그가 이번엔 좀 더 짜릿한 이야기를 들고 나타났다. 가족 모두가 함께한 세계 일주 여행기를 들려준단다. 2008년, 캠핑카 몰고 무작정 떠났던 그 여행은 2013년이 돼서야 종지부를 찍었다. 새 책 <패밀리집시>에는 종횡무진이던 그 여행의 소소한 기억들이 녹아들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유로운 남자' 다카하시 아유무. 그가 조금 부럽다. 궁금해진다.

 

"안녕하세요 다카하시 아유무씨. 이렇게나마 인사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몇 가지 응답으로 인해 <패밀리집시> 책에 담지 못한, 다카하시 아유무의 안부와 궁극적인 메시지를 한국의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메일을 드립니다."

 

라는 메시지를 그에게 건넨 지 어언 3개월. 당시 금방이라도 답변을 전해 받을 줄 알았건만 일은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고…. 급기야 인터뷰를 요청했던 사실도 회신을 기다리는 일도 까맣게 잊힐 즈음. 어느날 아침 출판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다카하시 아유무씨가 한국에 오기로 했답니다.” 기다리다 돌부처가 되기 직전, 단비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는 나는 그길로 폴더 깊숙이 숨겨 놓은 질문지를 출력해 그에게로 달려갔다. 마치 꼭 만나야 할 사람을, 원래부터 오늘 만나기로 한 것처럼.

 

“반갑습니다, 아유무상!”

 

Editor_김민경 |Photo_다카하시 아유무

 

 

프로필_다카하시 아유무

작가이자 자유인. 197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26세에 결혼을 했고, 결혼식 3일 후 아내와 둘이서 세계일주에 나섰다. 2년여 동안 남극에서북극까지 세계 수십 개국을 방랑한 끝에 귀국한 그는 2000년 12월오키나와로 이주. 동료들과 함께 카페 바&해변의 여관 '비치록하스'를 열었으며, 출판 펙토리 'A-Works', 전 세계에 음식점을 개장하자는 'Play Earth'를 운영하는 등 다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08년에는 결혼 10주년을 기념하여 가족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으며 여행을 마친 후 현재 하와이로 이주해 살고 있다. 저서로는 <러브 앤 프리><패밀리집시><인생의 지도> <어드벤처 라이프> 등이 있다. 작가의 공식 웹사이트 www.ayumu.ch

 

 

Q. 여행을 마치고 현재 하와이에 머물고 계시잖아요. 잠깐 거치는 ‘여행지’로서가 아닌, 실제 그곳에 집을 마련하고 거주하며 느끼는 하와이는 어떤가요. 애써 ‘여행자’로서의 마음을 유지하려고 하는지, 혹은 그곳 ‘주민’으로서 하와이를 바라보게 되는지.

 

원래 한 군데 오래 머물며 생활하는 듯한 느낌으로 하는 여행을 좋아해요. 특히 ‘패밀리 집시’는 가족 전체가 함께했던 여행이었는데, 여행한다라고 의식하기보다 가족 전체가 좋아하는 곳에서 한 번쯤 살아본다는 마음으로 임했죠. 여행자일 때는 현지에서 그 사람들을 만나고 끝나는 관계인데 반해, 생활하게 되면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 사이 혹은 동료가 되기도 해요. 크게 변화는 없지만 주변 관계에 대한 부분이 ‘여행’과 ‘생활’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Q. 흔히 사람들은 하와이에 ‘알로하 마인드’가 존재한다고 말해요. 실제로도 공감하는 부분인가요?

 

이전에 오키나와에서 8년 정도 산 적이 있어요. 재미있는 건, 하와이와 오키나와가 많이 닮아있다는 거예요. 알로하 마인드처럼, 그곳 사람들 모두 ‘작은 일에 서로 신경 쓰지 말고 웃으면서 잘 해나가 보자.’라는 마음가짐이 짙게 깔렸죠. 하와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재해가 실제 빈번했던 곳이라, 큰일이 있을 때에도 나만 생각하지 않고 서로 도우면서 하자라는 생각이 강해요. 물론 사람마다 각자 정의하는 ‘알로하 마인드’가 있겠지만 제 생각에 알로하 마인드란? 웃으면서 함께 잘 해나가는 것이죠.


 

 

photo by_ayumu

 

 

Q. 요즘의 일상은 어떠한가요. 매일이 다르겠지만, 문득 그곳에서의 소소한 일상과 시간 쓰임이 궁금합니다.

 

 

 

photo by_ayumu

 

 

우선 아침 6시에 일어나요. 오전 중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해변에 나가서 돌고래와 함께 수영을 하죠. 집 앞에 해변이 3개 정도 있는데, 거의 매일 아침 70%에 가까운 확률로 돌고래가 찾아옵니다. 해변 입구까지 오는 바람에 바로 앞에서 돌고래를 볼 수 있죠. 전 세계에서 이러한 생활이 가능한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전 중에 돌고래가 나오면 돌고래와 수영을 하고, 안 나오면 낚시를 하거나 서핑, 혹은 패들 보트를 탄다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요.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집으로 영어 선생님을 초대합니다. 가족 4명이 모두 영어 회화를 공부하고 있어요. 남은 시간 동안에는 책을 쓰기도 하면서 저만의 일을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빼놓을 수 없어요. 제게는 소라와 우미 두 명의 아이가 있는데, 직접 그 아이들을 가르친답니다. 제가 잘 못 하는 수학이나 영어를 가르치는 건 아니에요. 어떻게 해야 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려 해요. 경계하는 건 꼭 이런 인생을 살라고 이야기하진 않아요. 저 또한 여러 사람의 인생을 듣고 또 보면서 그중 하나를 제가 선택한 것이기에, “이런 인생도 있어.”하고 그 많은 인생을 들려주고 보여주려고 하죠. 그렇게 해가 지면 저녁을 먹고, 일하고 자는 ‘패턴’이에요.

 

 

Q. 책 얘기를 해 볼게요. <패밀리집시>를 먼저 읽고 <러브 앤 프리>를 읽었어요. 두 책을 통해 다카하시 아유무씨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어요. <패밀리집시>의 글을 통해 느낀 점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해졌다고 할까요? 글도 더 담백해졌고, 심리적으로도 그렇게 느껴져요. <러브 앤 프리>에서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다면, <패밀리집시>에서는 중심이 ‘내 안’이라기보다 ‘자연’ 그 자체에 맞춰졌다는 느낌이었죠. 변화가 느껴지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읽는 사람의 심리상태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요. 방금 말씀해 주신 부분에 더 많이 공감한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중심은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제 책은 독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것 같아요. 어느 시기에 어떤 마음일 때 책을 읽었는지에 따라 공감하는 게 모두 다를 거예요. 예를 들면 <패밀리집시>의 경우 미혼인 독자가 읽었을 때와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독자가 읽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까요. 물론 그것이 좋다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요.

 

 

Q. 책 뒷부분에 아내가 쓴 편지글이 눈에 띄어요. 남편과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글 말이에요. 사실 본문의 내용으로만 보아서는 물리적인 힘듦이 드러나진 않잖아요. 아내가 쓴 글을 보고야 알 수 있었죠. “이번 여행은 정말로 매일 힘들었을 거야.”라는 글귀도 와 닿았고요. 가장으로서 이번 여행을 하며 가장 주안을 둔 점은 무엇인가요. 또 여행 중, 개인적으로 힘든 점이 있었다면.

 

일단 기본적으로 가족 여행뿐 아니라 늘 여행할 때마다 생각하는 게 있어요. 굳이 무엇인가 얻어야 한다고 생각 하지 않아요. 간혹 세계 일주를 하는 분 중에는, 엄청난 여행을 했으니까 주변에 대단한 걸 얘기해야 하고, 스스로 변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의 경우 근본적으로는 그 여행을 끝마치고 집에 왔을 때 ‘아 이번 여행이 즐거웠어.’ 하면 그걸로 끝이죠. 이번에도 출발 전부터, 여행이 끝났을 때 “즐거웠다.”라고 가족들과 얘기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요.

 

한 가지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이번 여행은 온종일 캠핑카로 이동하다 보니 운전이 가장 큰일이었죠. 제가 운전을 굉장히 못 한답니다. (웃음) 만약 친구와 함께 갔다면 번갈아가면서 운전했을텐데 가족들과의 여행이라 아무도 운전을 대신해 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몇 만km를 혼자 운전해야 했죠. 나중에는 운전하면서 들을 새로운 노래가 없더라고요. 음악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듣는 편인데, 일본 밴드인 블루하트 음악과  로큰롤이 그 긴 운전길을 달래주었어요.

 

     

 

 

Q. 책을 쓸 때 보통 어떤 방식으로 집필하나요.

 

제목을 먼저 정하고 ‘이제부터 쓰자!’ 생각하진 않아요. 그때마다 느끼는 것을 수시로 적곤 하는데, 나중에 이것들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요. 평소에 생각했던 걸 모은 뒤 ‘자, 이제 이것들의 제목을 뭐로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편이죠. <러브 앤 프리>를 처음 펴냈을 때에는 사람들이 제 책을 많이 읽고 사랑해주던 시기가 아니었어요. <패밀리집시> 같은 경우 <러브 앤 프리>를 출간하고 10년 정도 지난 다음 쓴 책인데, 팬들이 생긴 후 쓴 책이라 어쩌면 멋을 부리면서 쓴 부분이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웃음)

 

 

Q. 새 책의 제목을 패밀리집시라 정했는데요. 다카하시 아유무에게 집시란 어떤 의미인가요.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가고 싶은 곳에서 기한 없이 생활해 보는 게 아닐까요. 저는 갈 곳을 미리 정해놓고 계획을 세워 움직이지 않아요. “자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생각하는 게 당연한 삶이 되도록 생활해 왔죠. 아내도 결혼 전에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4~5년 동안 전 세계를 캠핑카로 여행하다 보니 이렇게 집시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얘기하더군요.

 

그래서 솔직히 얘기하면, 이 집시 생활의 끝이 하와이가 아니에요. 언제가 살아보고 싶은 곳이 생기면 또 다시 터를 옮기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16살이 되면, 독립시킨 다음 다시 한 번 아내와 떠나고 싶어요. 신혼여행하며 쓴 책이 <러브 앤 프리>였고, 결혼 10주년을 기념해서 한 여행이 ‘패밀리 집시’였다면, 아이들의 양육이 끝나는 시점에 다시 한 번 기억에 남을만한 여행을 하고 싶어요.

 

 

Q. 아이들이 아빠처럼 세계를 여행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다면요. 적극 지지할 건가요.

 

아이들에게 항상 말해요.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뭐든지 하면 되지 않느냐고요. 그게 무엇이든지 상관없어요.

 

 

Q. 아주 본질적인 질문인데요. 다카하시 아유무씨가 궁극적으로 자유를 추구하고, 이를 실행하는 사람으로 성장한 데에는 어떠한 배경이 있을까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해 주세요. 무엇이 다카하시 아유무씨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해요.

 

뭔가 자유를 말하기에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어머니는 유치원 교사였죠. 부모님이 교사였기에 방학 때면 늘 함께 할 수 있었어요.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늘 제게 하던 말이 있었어요. “뭐든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만들어 봐.” 어머니께선 “오늘은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었니?”라고 물어보았고요. 그 시절의 저는 흥미로운 일을 꼭 만들어서 집에 가 그걸 들려드려야 할 것만 같았죠.

 

 

Q. 흔히 여행한 뒤에는 일종의 후유증 같은 게 남잖아요. 어떻게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나요. 괴리감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면?

 

오히려 저는 여행하는 중에 일본에 더 돌아가고 싶어져요. 평소 돌아갈 곳이 있기에 여행이 즐겁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그 여행도 즐거울 테지만 이상하게 도쿄 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 잘 갔다 왔다.’ 하면서 마음이 놓이고 안심이 돼요. 특별히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후유증은 없고요. 도착했을 때 여기서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또 여행을 마친 뒤면 토크 콘서트 등 바쁜 일상이 기다리기에 후유증을 느낄 새가 없어요. 때때로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요. 계속해서 여행 한다라고 느끼는 거죠.

 

 

Q.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체 계바라 책을 추천합니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 감독, 미아자키 하야오의 책도요. 미야자키 하야오는 영화와 영상이 명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그러한 작품들을 만들었는지 기술한 책도 출간되었어요.

 

               

 

 

Q. 지구 곳곳을 여행해 봤잖아요. 혹시 '지구' 이외에 다른 '행성'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는지요. 이를테면 우주여행 같은 것 말이죠.

 

굉장히 흥미 있습니다. 최근에 일본의 한 음료 회사에서 자사의 제품 광고를 위한 우주 여행을 제안한 적도 있었어요. 우주선 안에서 음료를 마시면서 그 안의 작은 창문으로 지구를 바라보는 콘티였죠. 저는 '우주에 가보고 싶다.' 단지 상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는지 조사를 한 적도 있어요. 구체적으로 비용이 어느 정도 드는지 알아봤는데 1,500만 엔을 내면 여행이 가능하다고 했죠.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놀라운 경험을 꼭 한번 해보고 싶어요.

 

 

Q. 아뮤무씨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이란 어떤 것인가요.

 

저는 굳이 '이게 인생이다.'라고 한 길을 정해놓지 않아요.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항상 '이 순간이 최고야.'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죠. 저는 인생이 여행과 같다고 생각해요. 완벽한 계획을 세워놓고 달성해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두리뭉실하게 큰 방향은 정해두되 자연스러운 흐름에 내맡기는 것이죠. 그럼 나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펼쳐질 확률도 높아져요. '내가 이런 것을 할 수 있었구나.' 상상하며 사는 게 즐거워요.

 

 

Q. 현실과 이상의 간극도 존재하지 않을까요.

 

기본적으로 저는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아요. 사실 그러한 발상이 제겐 없어요. 굳이 나누고 있지도 않고요. 물론 빚이 있을 수도 있는데, '내 이상은 높은데 이런 생활을 하고 있어.' 절망하기보다 빚을 갚을 수 있는 상황 안에서 '이상'을 꿈꾸며 살면 돼요. 저 또한 지금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고요.

 

 

Q. 누군가 '떠남'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면 어떤 조언을 하나요.

 

사실 그렇게 상담해 오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어느 정도 답을 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후배들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상담해 오면 반대로 똑같은 질문을 당사자에게 해요. 결국 본인에게 질문하면, 어떻게 하고 싶다 답을 얘기하죠.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하고 말해주죠. 한데 일정량 이상 술을 마시면 설교가 시작되요. (웃음)

 

Q. 끝으로 반디앤루니스 독자들에게 한 마디 남긴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로운 여행을! (愛する人と自由な人生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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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원색 그림의 본색 - 그림 동화 작가, 로저 멜로

 

 

 

어린이 책이라는

아주 강력한 수단이자 도구

 

지난 19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흥미로운 일러스트 전시의 막이 올랐다. 브라질 출신의 그림·동화 작가, 로저 멜로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린 것.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Hans Christian Andersen Award) 수상 직후, 그의 행보를 눈여겨보던 차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한낮 미술관을 찾았다.

Editor_김민경

 

 

2014 안데르센상 수상

로저 멜로. 국내에선 다소 낯선 이름일 수 있다. 타국에서는 어떨까. 그는 현재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주목받는 그림 작가 중 한 명이다. 아동문학계의 ‘작은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것은 올해 초 일이다. 수상 직후 로저멜로는 작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동문학계에서 ‘안데르센상’이 차지하는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상을 수여하는 협회 측은 수상자 선정에 만전을 기한다. 기본적으로 아동, 청소년 문학에 지속적으로 공헌해온 작가여야만 하며, 현재까지 작가가 완성한 모든 작품을 평가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여타의 상과는 '급'이 다른 셈이다. 어린이 책 작가에게는 생애 최고의 영예가 아닐 수 없다.  그와의 첫 만남. 늦었지만  짧은 축하 인사로 반가움을 표했다.

 

“수상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상을 수여하는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설립된 협회입니다. 설립자인 옐라 레프만은 어린이 책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이해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죠. 그의 생각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래서 이 상이 제게 더 의미있죠. 안데르센은 제가 본받고 싶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여행가이며 사상가이자 상상의 세계를 연구하는 작가로서,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멋진 작품을 선보였기 때문이죠.”

 

 

그림책을 탐험하다

로저 멜로가 지금껏 펴낸 책은 100여 권에 다란다. 그중 22권의 책은 직접 글을 썼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대부분 그림으로만 구성되었다. 페이지를 한가득 매웠던  그림들은 이번 전시를 빌어 ‘책’을 탈피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는 전시장 곳곳에 ‘하나의 작품’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전시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그림책이라 볼 수 있어요. ‘근대 미술’을 하는 이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요. 책과 전시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보다, 거대한 또 하나의 책 안으로 들어간다고 접근해 보면 좋겠어요."

애당초 그림이 책이란 틀을 벗어나게 됐다는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림을 ‘작은 책’이란 공간에서 꺼내어 더 '큰 책’(전시장)에 배치했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이를 통해 어린이들이 책 속을 맘껏 거닐고 만지며 ‘체감’하는 게 가능토록 하였다.

 

 

    

                (좌 - 마리아 테레사)                                        (우 - 피레네폴리스의 가면 축제)

 

 

                                                                                                                        

그림에 깃든 고유의 문화

그림을 면면히 살펴보면 작가가 브라질 출신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남미 특유의 원색적이고 강렬한 색은 작가에 의해 과감히 사용되어졌다. ‘푸름’을 표현할 때, 그는 어두울 정도로 짙고 선명한 파란색을, ‘붉음’을 표현할 때는 브라질의 날씨마냥 열기가 느껴지는 새빨간 색을 거칠게 펴 발랐다. 원색의 구성 요소들은 한 장의 그림 속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이러한 특성이 작가가 태어난 브라질의 문화와 맥을 같이 한다.

 

“브라질은 알다시피 다문화 국가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죠. ‘다름’ 그 자체는 요즘 브라질 문화 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죠. 다름이란 여러 모로 긍정적인 측면을 내포하는데, 인간 존재로서 우리를 한데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하나의 객체로서 우리를 좀 더 도전적으로 만들어 주지요.”

 

그림 속 녹아든 브라질의 전통 문화 요소를 찾아내는 일은 매우 흥미롭게 여겨진다. 이는 장소를 불문한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든 그림 책을 넘기며 브라질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타국의 문화를 접하기에 로저의 ‘그림 책’은 더없이 훌륭한 ‘매체’로써 기능한다.

 

 

 

(좌 - 일어나 일어나 소야)               (우 - 맹그로브 소년)

 

 

그들의 삶도 동화가 될 수 있다

그림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사실 작가는 인류의 꿈과 환상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만 외로움, 브라질의 문화 문제, 아동 노동 착취 등 사회적인 문제도 풀어낸다. 맹그로브 숲에서 노동 착취를 당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브라질의 주요 수출품인 ‘철’ 생산 공장에서 뜨거움을 견디며 일하는 어린이의 생활상 등이 그러하다.

 

“어린이 책이라는 것은 아주 강력한 수단이자 도구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브라질은 독재 정부 체제였습니다. 당시에는 어떠한 ‘금서’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문제가 됐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처형당하기도 했습니다. 책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구나. 어릴 때부터 생각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책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죠. 반대로 생각해 보면, 책이 무엇인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책은 일상이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야 만 합니다. 만약 열악한 가마터에서 노동하는 어린이들이 있다면, 맹그로브 숲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어린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일상도 그림책에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세상의 일부라든지 시민이라는 생각 자체를 갖지 못할 거예요. 아이들은 나의 인생은 동화 에서는 제외된 소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책을 통해 외치고 있었다. "여기 이 아이들도 세상의 일부랍니다." 로저 멜로는 어떠한 변화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부터 시작이라 전했다. 이같은 생각을 책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다면서. 그는 어려운 이야기를 그림을 통해 부드럽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렇다면 그림이 ‘텍스트’보다 유용한 점이 무엇일까. 그에게 물었다.

 

“책은 언제나 이미지와 글자의 통합체였습니다. 서술적 이미지와 글자가 어린이들의 상상력에 다가갈 방법이라 믿습니다. 책에는 언제나 그림이 있었고, 글자가 의미전달 수단으로 사용되기 이전부터 책이 필사되어 전해지기 이전 시대부터 그림은 존재했습니다."

 

그림이 ‘origin’ 한 것이란 말인가. 어찌 됐건 좋다. 그의 메시지를 어린 친구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면 된 것 아닌가. 더군다나 그림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림을 해석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보는 과정. 이러한 경험이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굴한다는 사실에 토를 달 여지가 없다. 끝으로 인터뷰 말미. 작가가 남긴 이야기 중 인상 깊었던 대목을 짚어 본다. 책과 기술의 대립에 대한 대화 중, 기술에 의해 사람들이 책을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오갈 쯤이다. 짧지만 강한 그의 답변이 마음에 스친다.

 

“사람들 모두 입 모아 말합니다. 책이 위기라고요. 하지만 이때에 우리는 책 얘기를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회인거죠. 기술이 마치 책과 경쟁하는 인식이요? 이것이 어찌보면, 사람들로 하여금 책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게 합니다. 이같은 현상은 책을 위해서도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닙니다.”

 

 

본색의 진화

원색 그림의 본색. ‘본디의 특색이나 정체’는 작가가 그토록 사랑하는 브라질일 수도, 소외된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관심. 혹은 피터 팬을 꿈꾸는 소년일지 모른다. 로저 멜로의 그림에 대해 본색을 규정하기에 아직은 그 시기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작가는 아직도 들려줄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본디 빛깔이나 생김새’는 진화를 거듭할 예정이다. 물감, 붓, 책에 의해 완전한 형체를 갖춰나가는 중이다. 이러한 일련의 단계를 로저 멜로는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즐기는 모습이다. 멋지지 않은가! 앞으로 그의 작품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기도 하다. 한낮 미술관에서 그와의 만남. 잠깐이었지만 작가와 그림과 책과 문화를 논하던 시간은 이내 유쾌함으로 각인되었다. 로저의 그림처럼 강렬하고 여운이 짙다.

 

 

 

작가의 새 책_《실 끝에 매달린 주앙》(나미북스)

 

 

최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로저 멜로의 책이 출간되었다. 《실 끝에 매달린 주앙》은 밤에 홀로 남아 잠을 자야 하는 어린이 ‘주앙’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불 속에서 혼자 밤을 보내는 주앙에게 이불은 온 세상만큼이나 크게 느껴지는데…. 작가는 어린 소년의 두려움을 경쾌하고 발랄한 상상으로 풀어냈다.

 

이불 속에서 발장난을 치자 지진이 일어나요! 하늘로 솟은 산등성이가 순식간에 산골짜기로 바뀌어요. 그러는 동안, 이불 위에 세워진 작은 마을에서는 지진에 대비할 방법을 찾아요. 거인 주앙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본문 중에서)

 

 

 

 Tip_ 로저멜로 한국전

동화의 마법에 홀리다!

읽기만 하던 책에서 벗어나 책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작가가 1996년부터 2011년까지 작업했던 그림책 원화 88점은 물론 한국전을 위해 작가가 특별 엄선한 30여 점의 원화 및 스케치. 아이디어북과 브라질 소품 등을 선보인다. 책 속 그림을 홀로그램으로 구현한 공간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장소: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기간: 2014년 9월 19일(금) ~ 2014년 10월 15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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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 별의 별 이야기 - 천문학자 이명현

 

 

 

 |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원


 

천문학자를 만난다고 했더니 모두들 걱정했습니다. 어떻게 잘 말할 수 있겠니, 하는 눈빛으로요. 저도 무척 의외였습니다. 우주가 재미있어졌거든요. 이렇게 말 해보면 어떨까요? 천문학자는 맞는데, 이명현은 문학에 관심이 많은 천문학자입니다. 《이명현의 별 헤는 밤》에는 별만 많은 것이 아니라 헤아리고 싶은 시(詩)도 많습니다. 무더운 여름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 별 하나에 시와 그리고 여기서 천문학자 이명현이 말하는 별의별 이야기를 헤아려 보는 것은 어떨지요. 열대야에는 달빛만이 시원합니다. 달빛을 쐬며, 시원하게 달 샤워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photo / goro

 

 

저도 선생님과 같은 쌍둥이자리예요.

 

아, 그런가요? 반갑습니다.

 

쌍둥이자리의 사람들은 태양이 쌍둥이자리에 없을 때 태어났다는 사실을 책에서 알았어요.

 

그런 별자리가 되게 많아요. 하늘은 우리 뜻대로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요. 거기에 규율을 만들어 대입시키니까 원하는 대로 안 되죠. 그러니까 그럴 수밖에 없고.

 

선생님도 별자리 운세를 보세요?

 

저는 보지 않는데, 학교 다닐 때 천문학 공부한다 그러면……. 질문은 엄청나게 받죠. 사람들이 제일 많이 물어보는 게 별자리, 별자리 운세, 날씨.

 

잘 얘기해 주셨어요?

 

사실 천문학자들은 그런 걸 전혀 몰라요. 그래서 날씨를 물어보면, 설명부터 해줘요. 그거는 기상학이고, 천문학은 별이야. 그리고 별자리 물어보면, 그건 아마추어들이 하는 거고, 우린 이렇게 하고, 운세도 아니, 그건 점성술사가 하는 거고……. 이런 식으로. 대학원 졸업할 무렵부턴가. 질문을 하도 많이 받으니까 뭘 구태여 또 그걸 그렇게 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그런 걸 통해서 교류하는 건데. 근데 별로 아는 건 없어요. 그래서 날씨도 제멋대로 얘기해요. 다행히도 1학년 때 기상학 과목이라는 걸 1년 동안 배워요. 얼추 해보면, 구름 만들어지는 원리도 알고, 바람이 어떻게 불지 대충 아니까……. 점성술도 전혀 모르지만, 대충 어떤 게 있다는 건 알죠. 날짜 구분해서 탄생 별자리랑 진짜 별자리랑 안 맞는 것도 1학년 때 알고요. 그런 거 갖고 이 사람 대충 보고 말을 만들어요. 하하 그럼 막 용하다 그러고.

 

하하하

 

그렇게 하고 나중에 분위기 좋아지면 그냥 대충 했다고 고백하죠. 

 

무슨 별자리를 가장 좋아하세요?

 

돌고래 자리라는 게 있어요. 저뿐 아니라 아마추어 천문학 하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별자리일 거예요. 은하수가 흐르고 견우랑 직녀가 흩어져 있으면, 요 은하수 바로 바깥에 별이 하나 둘 셋 넷 한 여섯 개쯤 이렇게 로우(ρ) 표시처럼 돼 있어요. 마치 돌고래가 뛰어드는 것처럼요. 이게 되게 어두운 별이라 서울에서는 거의 안 보이고요, 어쩌다 한 개 보여도 이게 돌고래자리인지 모르죠. 파주나 저쪽 강원도 어두운 데 가면 이게 잘 보이거든요? 이게 예쁘기도 되게 예뻐요. 나라마다 여러 전설이 있는데, 보편적인 전설이 사랑의 메신저예요.

 

돌고래가요?

 

네.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난관에 닥쳤을 때 돌고래가 사이를 막 왔다 갔다 하면서 소식을 전해준다는 전설이 많아요. 그래서 돌고래자리는 프러포즈 할 때 많이 써먹어요. 전설에 자기 얘기 보태서 하고. 보여주려면 같이 어두운 데로 가야 하고…….

 

와, 경험담이에요?

 

저는 직접 써먹어 본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시도는 했는데, 날씨가 흐렸어요. 계속 보고 있으면 되게 아스라하게 예쁘기도 해서 혼자 가서 본 적은 있는데, 얘기해 주려고 가서는 성공하지 못했어요.

 

돌고래자리는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초등학교 때 아마추어 천문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과학 잡지 같은 데서 보고 하나하나 알게 되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동아리에 가입했어요. 동아리 가입할 무렵에는 별자리 다 외웠죠. 다 찾아보고 책에서 본 거 밤마다 맞춰 보고. 그때는 제가 김포공항 가는 변두리에 살았는데, 서울에서 돌고래자리도 보였어요. 은하수도 다 보고. 봄철만 되면 보이는 왕관자리라고 있어요. 그것도 돌고래자리처럼 어두워요. 그런 것도 눈에 잘 보이고. 그 무렵에 다 알았죠.

 

스티븐 호킹이 어렸을 때 부모님 몰래 샀던 전기 열차세트가 그의 인생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면, 선생님의 1차 변곡점은 언제가 될까요?

 

딱 그 무렵인데요,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기 전에 아폴로 11호가 달에 내렸거든요? 사실 그 무렵에 달을 알기 전에 금성을 먼저 봤어요. 동네에서 애들하고 놀다 보면, 혼자 맨 끝에 남아요. 끝에 남는 그룹이에요. 거의 어두워질 때 하늘을 보면 서쪽에 별이 떠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다가 나중에 2, 3학년 돼서 알게 됐어요. 맨날 보면서 뭔지도 모르지만, 밝게 빛난다, 이런 막연한 느낌이 있었어요. 그 무렵에 아폴로 11호가 내린 거예요. 그때부터 달에 관심을 갖고. 저기 달에는 누가 우리를 보고 있겠나? 이런 생각도 들고. 생각해 보면, 그때가 진짜 큰 변곡점이었어요.

 

꿈에서도 별이 많이 나오나요?

 

어릴 때는 그럴 때가 있었죠. 아마 기억이 왜곡된 걸 수도 있어요. 그때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으니까. 별도 그렇기도 하지만, 천문대.

 

천문대에 가는 꿈이요?

 

네. 갔던 곳이나 가보지 못했는데, 맨날 가고 싶었던 천문대들 있잖아요. 그런 데가 나타나기도 하고.

 

이 책에서도 로스앤젤레스의 그리피스 천문대처럼 서울에도 시민천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서울에 생긴다면 어디가 좋을까요?

 

서울에도 몇 군데가 있는데, 대부분 교육 목적으로 만들어졌어요. 마음 편하게 가서 차 한잔 마시고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그런 곳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개인적인 욕심은 남산 타워 있는 데 하면 좋겠어요. 게다가 서울은 낮은 산이 여기저기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천문대가 있을 만한 곳은 꽤 있죠. 올림픽 공원 있는 쪽, 아차산. 그런 데 있으면 되게 좋을 것 같아요.

 

 

"천문대는 별만 보는 곳이 아니랍니다. 절망한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 잡아두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천문대 앞에 이런 문구를 새겨 두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해봤다. (134쪽, '천문대')

 

영화 < HER > 보셨어요?

 

보진 못했는데, 얘기를 하도 많이 들었어요

 

인공지능형 운영체제인 OS와 인간의 사랑이야기인데, 어느 날, 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를 가진 OS가 이런 말을 해요. 우리는 우주라는 한이불을 덮고 있는 물질이라고. 서로 다른 걸 얘기하기 전에 같은 걸 얘기해 보자 그래요.

 

좋다. 천문학자들은 ‘별 먼지’라는 말을 많이 써요. 화학적으로 다 연결된 물질이라는 얘기 많이 하거든요. 그런 유대감을 갖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면 적대감을 갖기 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과 연민을 갖게 되고, 배려를 하게 되니까.

 

칼 세이건이 인간은 ‘생각하는 별 먼지’라고 했는데, 하필 찌꺼기예요. 먼지. 선생님은 우주 공부를 하시면서 인간이 별 먼지라고 인식했을 때 허무하지 않았나요?

 

그렇죠. 우주가 시간도 길고 공간도 큰데, 우주에서 찍은 지구 사진 같은 거 보면, 점 하나잖아요. 그 속에 우리가 다 들어있는 거고. 그런 거 보면, 엄청나게 경이로우면서도 허무함이 같이 오죠.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별이 일생을 사면서 만들어진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거고. 이런 거 생각하면, 굉장히 허무할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옛날에 만들어진 게 지금까지 이렇게 끊이지 않고 이어 와서 우연의 산물로 기적처럼 만들어진 사람끼리 만나고. 그러니까 우리는 우주의 전체 역할을 머금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슬프면서도 아련히 기쁜 느낌? < 로미오와 줄리엣 >에 나오나, sweet sorrow라는 말 있잖아요. 스윗소로우라는 그룹도 있고. 스윗하면서 소로우 한 거죠. 달콤하면서도 슬픈.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아주 허무하면서도 한편으로 기쁘고.

 

이별을 인정하는군요.

 

그 부분이 과학이 종교랑 나뉘는 것 같아요. 종교는 절대적인 존재나 영혼이 사는 영생을 상정하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의지하고. 그런데 과학자들의 작업은 유한한 걸 인정하는 거예요.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그러면 영생을 얻는 게 아니라 사라져 버리는 거니까 허무하죠. 허무하지만, 이 순간이 있기 위해 수많은 우연이 겹쳤으니까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찬란한지, 그러니까 이 순간을 보람 있고 즐겁게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돼요.

 

그런데 옛날에 만들어진 우연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하더라도, 내가 겪어보지 않은 과거를 좋아하긴 힘들 것 같아요.

 

사실 천문학에서 다루는 별빛은 백억 년 전 과거에 있어요. 스케일도 항상 크고 긴 시간을 다루잖아요. 그러면 일상의 것들이 하찮아지거나 그럴 수도 있는데, 역으로 이게 당장 내일이 끝일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이제 우리는 모든 우연들이 잘 겹쳐서 지금 이 순간에 탁 만난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죠. 계속되는 우연의 산물들이니까. 그러면 끝을 보는 거예요.

 

과거가 아니라 나중을 생각하시는군요.

 

네. 죽음이라는 끝을 먼저 상정하고, 거기서부터 거꾸로 이 생활을 보는 습관이 길러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이 끝이라는 게 내일이 될 수도 있고, 10년 후가 될 수도 있잖아요. 항상 그 끝을 봐야죠. 그러니까 매 순간이 나에게는 마지막 순간이더라고요. 그렇게 되니까 일상생활이 가치 없어지고 이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너무 절실한 순간이 되는 거죠.

 

우주를 바라보면, 끝과 시작이 다 막연하게 느껴져요.

 

뭐 요즘에는 말로 표현하지만, 막연한 느낌으로 있는 거죠. 그런 식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 감독의 영화 《Her》, 2013

 

 

책에서 우주의 70%를 구성한다는 암흑에너지의 존재에 대해 알았어요.

 

암흑에너지가 되게 많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렇지만 암흑에너지를 알기 전까지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건 나머지 30%잖아요.

 

네. 우주가 있는데, 옛날엔 눈에 보이는 물질들이 전부 다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연구를 해보니까 그거 갖고는 설명이 안 되는 게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암흑물질’이라는 것을 가정했는데, 그중에 일부를 발견했어요. 어쨌든 물질 덩어리인 거예요. 그런데 또 그거 갖고도 설명이 안 되는 뭔가가 있는 거예요. 굉장히. 그래서 그걸 그냥 암흑에너지라고 이름 붙였고. 그런데 아직 아무도 실체를 몰라요. 얘가 갖는 특성은 알아요. 뭐든지 물질이 있으면 질량이 있으니까 끌어 잡아당기는 힘이 있는데, 관측을 해보니까 얘는 일종의 반중력처럼 밀어내는 힘. 그런 속성을 가진 뭔가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뭔지 정체를 아직 모르는 거죠.

 

정체를 모르지만, 저는 암흑에너지가 우주를 그만큼이나 많이 구성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제가 미미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던 우주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되나 막막했어요.

 

점점 막막해지죠. 제가 1학년 때 배우던 교과서 내용 중에 아주 기본적인 좌표 빼고는 지금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됐어요. 그때는 암흑에너지라는 단어조차도 없었고. 그렇게 막 바뀌는 거죠. 천문학 교과서는 너무 자주 바뀌어서 새로운 말들이 많아요.

 

그럼 미지의 존재가 충격이라기보다 항상 바뀔 가능성을 열어 놨기 때문에 또 그냥 연구해야 할 대상이 나왔구나 싶으셨던 거예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1998년부터 공식적으로 천문학회에서 암흑에너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거든요? 이전까지는 뭐 간헐적으로 암흑에너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언노운(unknown) 에너지라고도 불렀어요. 여러 개로 불러서 그런 속성이 있는 ‘무엇’이라고 알았어요. 아, 그런 소리 하는 사람도 있구나, 이런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때 딱 발견이 되면서 거의 모든 천문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 거거든요. 바뀔 가능성을 항상 생각하지 하죠. 근데 그런 사건이 터지면, 재빠르게 옮겨 가는 건 잘하죠.

 

어떻게 그게 될까요?

 

과학자들은 항상 뭘 버릴 준비가 돼 있는 거예요. 지금 진리라고 믿는 이론이 있으면 그 이론에 충실해요. 충실하다가 이거에 잘 안 맞는 증거들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이걸 그냥 버려요. 그래서 과학 철학 하시는 분들이 ‘개종’하는 거에 많이 비유해요. 과학자들은 항상 자기가 하는 것을 진리라고 믿지만, 언제든지 이게 깨질 수 있다는 걸 동시에 믿고 있어요. 그리고 항상 의심을 해요. 이것을 훨씬 월등히 대체하는 이론이나 관측도가 나오면, 이거는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 버리고 새로운 연구를 하는 거죠.

 

‘어둠이 아직’이라는 시가 생각나요. 책에도 쓰셨죠. "어둠을 두려워하거나 지레 어둠 찬가를 부르지는 말자. 사실 우리들의 일상에 영향을 주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하찮은 것들일 테니까.”

 

조금 더 객관적일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과학을 하기도 하고, 그런 선택 효과도 있고, 또 과학을 하면서 훈련이 돼요. 자기가 아는 걸 항상 의심하는 자세. 눈에 뭐가 보이더라도 와, 정말 대단해, 이럴 수도 있지만, 이게 지금 우연히 잠깐 보이는 걸까, 계속 이게 나타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품게 돼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어떤 건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그거는 그냥 거품일 수 있고, 하찮긴 한 거지만, 사실은 그게 어떤 것들의 증표일 수도 있고.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하찮은 것을 좀 더 보게 돼요. 사람들이 막 몰려가는 것에는 에이, 그럴 리가, 하고. 우선 직관이 굉장히 중요하고요. 직관적으로 ‘아, 이럴 것 같아.’하고 그다음부터 ‘그럴까?’하고 생각해 보는 게 맞거든요. 근데 직관은 사실 하찮은 것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인슈타인도 ‘내가 빛의 속도로 달리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이 궁금증이 고등학교 때부터 생긴 거예요. 근데 물리학이나 수학을 잘 모르니까 그걸 어떻게 풀 방법이 없지. 그걸 알기 위해서 공부를 계속 하거든요. 근데 그건 누구나 던질 수 있는 하찮은 질문이잖아요. 빛이랑 같이 달리면 옆이 어떻게 보일까, 이 의문에서 시작해 빛에 대해 탐구 하다가 상대성 이론이 나왔고. 사소한 단서에서 뒤에 더 많이 숨어있는 세상을 찾아내는 게 과학자들의 할 일이죠. 거창하게 포장을 해 놔도 에이, 아닐 거야, 하고 포장을 뜯고 비판적으로 보는 자세. 지레 어둠 찬가를 부르지 말자는 것에 그런 의미들이 담겨 있어요. 보는 것과 안 보는 것이 서로 반대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맥락이에요.

 

더 다가가기 위한 집요함.

 

그런 거죠. 때로는 강박적이고. 몰두하다 보면, 생각이 곧 단순해져요. 다른 생각은 다 가지 쳐내고 ‘왜 그럴까?’ 여기에만 몰두해요. 그러다 보면 사실 엉뚱한 행동도 하게 돼요. 뭐 1년 내내 집요하면, 사람이 생활을 못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얼마나 다행인가

눈에 보이는 별들이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 물질이

별들을 온통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둠을 뜯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별은 어둠의 문을 여는 손잡이

별은 어둠의 망토에 달린 단추

별은 어둠의 거미줄에 맺힌 밤이슬

별은 어둠의 상자에 새겨진 문양

별은 어둠의 웅덩이에 떠 있는 이파리

별은 어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입술

 

별들이 반짝이는 동안에도

눈꺼풀이 깜박이는 동안에도

어둠의 지느러미는 우리 곁을 스쳐 가지만

우리는 어둠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지

 

뜨거운 어둠은 빠르게

차가운 어둠은 느리게 흘러간다지만

우리는 어둠의 온도와 속도도 느낄 수 없지

 

알 수 없기에 두렵고 달콤한 어둠,

아, 얼마나 다행인가

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은

 

― 나희덕, '어둠이 아직'

 

올해 초에 < 감자별2013QR3 >을 열심히 봤어요.

 

예전에 강연하는데, 김병욱 PD님이랑 다른 작가님 한 여섯 명이 오셨어요. 소행성이 지구에 잡혀서 오래 있을 가능성이 사실 희박하거든요? 그분들은 조금이라도 확신을 얻고 싶었던 거예요.

 

감자별 뒤에 붙은 숫자조차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더라고요.

 

그렇죠. 그것도 녹록하게 발견 안 될 걸로 해서.

 

노준혁(여진구)도 혜성처럼 노 씨 집안에 나타났죠. 알고 보니 준혁이도 이름이 원래 홍혜성이었어요. 책에서도 혜성을 쉽게 설명하셨는데, 감자별의 결말 때문인지 “태양 주위를 무사히 돌고 난 혜성 중 일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우주의 방랑자가 된다.”는 말이 유독 슬프게 들렸어요.

 

그런 것 같아요. 아까 경이로움과 허무함을 얘기했죠? 또 한가지, 유한함. 고정된 것이 아니라 뭔가가 계속 변해가니까. 결국, 이별에 대한 얘기잖아요. 그런 것들을 자연이 얘기해 주는 거니까 기본적으로 좀 슬프죠. 혜성도 자기 길을 가야 하니까.

 

홍혜성도 그렇고, < 별에서 온 그대 >의 도민준도 그렇고, 오늘날 대중매체에서 다루는 외계인은 ‘인간’과 다름없이 그려져요. E.T 같은 모습이 아니라.

 

외계인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쭉 보면, 처음에는 파충류 모양으로 나오다가 색깔도 변해요. 푸른색에서 약간 회색으로. 외계인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과정이죠.

 

우리는 왜 외계 생명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확률이에요. 지구 같은 게 너무 많으니까. 지구랑 비슷한 행성이 전 우주 한 천억 개의 별 중에 수십 개밖에 안 된다면, 외계 생명체가 있을 확률도 별로 없는데, 최근에 관측한 결과를 보면, 지구와 같은 환경, 크기, 질량이 비슷한 행성이 500억 개 정도 추산돼요. 천억 개의 별 중 500억 개 정도.

 

그 행성에는 사람과 비슷한 생명체가 있겠다고 예상하는 것이죠?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낮으니까. 없으면 이상하다고 또 생각이 바뀌겠죠. 1992년 무렵에 태양계 바깥 행성의 산화가 처음 발견됐어요. 1995년에 또 하나가 발견되고. 지금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몇천 개 정도 돼요. 하늘을 요만큼만 관측해서 발견한 게 수천 개인데, 하늘 전체 넓이를 곱하면, 오억 개, 오백억 개 정도가 돼요. 물론 오차가 심하겠지만. 해봤는데, 너무 많으니까 이제는 자신감을 가질 만한 개연성이 높아졌어요. 없을 수도 있죠. 조건이 미미하게만 틀려도 생명이 발견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근데 일단 조건이 맞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희망적인 소식이에요. 오히려 없으면 또 굉장히 재미있는 질문이죠. 화성에 우리 같은 지적 생명체는 없지만, 원소가 조합된 것들, 생명체의 재료가 되는 것들, 박테리아나 미생물 이런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2018년에 보내는 탐사선이 있는데, 걔가 땅을 파는 로봇을 데리고 가요. 땅을 파면, 땅속에 진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거기에는 미생물과 박테리아가 있을 거라고 지금 기대하고 있어요. 그걸 발견해서 지구 생명체 DNA와 비교하고. 그러면 얼마나 비슷한지 혹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고. 그리고 화성이랑 비교해서 추론을 필 수도 있죠. 하나보다 몇 개가 발견되면, 믿을 거리가 더 생기는 거잖아요.

 

 

 

△ 《감자별 2013QR3》

 

 

1977년에 칼 세이건은 보이저 1호에 골든 레코드를 실어 보냈죠. 만약 뭔가를 보낸다면, 거기에 무엇을 담고 싶으세요?

 

이미지를 담는다면, 바깥에서 본 지구를 담고 싶어요. 골든 레코드에도 달에서 본 지구 사진이 있지만, 지금은 화성에서 찍은 지구 사진이나 보이저호 자신이 명왕성 궤도 근처로 가면서 찍은 지구 사진도 있거든요. 골든 레코드는 70년대의 지구를 대표하는 것들이니까.

 

외계인이 봤을 때 좀 더 관심을 가질만한 걸로요?

 

네. 우리가 밖에서도 우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여주고 싶어요. 지구 자체에 대한 성찰도 좋지만, 우리가 지구를 벗어난 곳에서도 지구를 성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혹시라도 보이저호가 다른 외계인들에게 발견됐을 무렵에는 우리는 이미 멸종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우리 다음 세대라고 상상할 수 있는 지적생명체는 인공지능 OS나 사이보그 이런 걸 텐데, 그들에 대한 정보도 보강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이 아니라 다음을 생각하시는군요. 후손들이 이해할 우주에 대하여.

 

네, 그렇죠. 보이저호가 5억 년~6억 년 정도 버틸 수 있어요. 근데 그때까지 인류가 생존할지는 굉장히 의심스러워요. 지구 자체만 보더라도 한 3만 년 정도면, 빙하기가 와요. 그러면 적도 쪽으로 몰려가야 살아요. 거기서는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 되거든요. 그러면 그쪽으로 이주하지 못한 문명은 멸종해요. 한고비를 어쨌든 3만 년 내로 맞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되게 회의감이 들어요. 보이저호 같은 데 남아있는 것들은 결국 우리의 단면이고, 유서 같은 거잖아요. 그럼 살아남은 우리의 후손들과 외계인의 조우가 있게 된다면, 그들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비전들을 담아놓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부질없을 수도 있어요.

 

무언가를 기필코 남기려고 했던 자세가 부끄러워지네요.

 

77년부터 삼십몇 년의 세월이 있지만, 거기에 인류의 모습 대부분을 아주 잘 담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미래에 관한 부분은 좀 약했다고 생각해요.

 

어떤 물건에 담아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당시에도 엄청나게 고민하다가 레코드 판으로 한 거예요.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오래갈 수 있는 걸로. 바늘은 전자기기가 없어도 되니까. 전자기기가 들어가면 배터리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장치도 있어야 하고, 이러니까 이제 복잡해지는 거죠. 고민이 많이 되는데, 아직도 뾰족한 답은 없어요. 77년 당시에도 정말 고민에 고민을 더해서 내놓았는데, 아직도 유효한 거죠.

 

 

 

 

△ 보이저 탐사선에 실린 레코드 《Voyager Golden Record》 (사진 출처: ⓒ NASA)

 

 

별도 얘기하고, 외계인도 얘기했는데, 달 얘기를 못했네요. 선생님은 누군가에게 달 같은 사람인가요?

 

스타를 별에 빗대어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초신성이 폭발하는 것처럼 강렬하고, 어떤 사람들은 쌍성처럼 항상 둘이 붙어 다닌다거나. 그때 달이 생각났어요. 달처럼 항상 조력하는 뛰어난 조연들. 그래서 이 글도 쓰면서 그럼 나는 누구의 달일까, 그 생각 많이 했어요. 그리고 새삼스럽게 저한테는 달 같은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도 느꼈어요.

 

별보다 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그러기도 하고. 이건 취향의 문제인데요, 저는 어떤 것들이 모이기 시작할 때 생기는 권력을 되게 싫어했어요. 그래서 그런 걸 안 만들려고 되게 노력했어요. 이건 되게 극단적인 건데, 학교 다니면서 반장 안 하려고 막 빼잖아요? 그럼 그걸 겸손으로 알고 막 찍어줘요.

 

그래도 안 하셨나요?

 

그래도 안 한 적도 있어요. 반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되는 것들이 싫었어요. 제가 나서서 제 주위에 무언가가 형성되어 가는 것에 대한 강박감이 들어요.
 
인간 사회에 호기심이 별로 없는 편인가요?

 

관심이랑 태도가 생기게 되는 거죠. 이 순간을 행복하고 즐겁게 사람들이랑 나누면서 지내고 싶은 거예요. 소박한 소망인데, 주변에서 그걸 방해하는 것들이 생겨요. 학교 다닐 때는 혼자 그냥 결석해버린다거나 친구들 선동해서 소극적인 저항도 했는데, 커서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가 생기는 거예요. 기본적으로는 내가 즐겁고 유한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 아주 이기적인 욕망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자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은 거예요. 그게 다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나는 서로 별 적대감 없이 사회에 살고 싶은데, 그게 그렇지 못해요. 그렇다면, 이 사회의 모순을 바꾸는 데 내가 일조를 해야 그게 결국 내가 유한한 삶을 즐겁게 사는 방법인 거예요. 그래서 자꾸만 소외 받은 사람이나 소수자 쪽에 동감하는 눈길이 가요. 그걸 누군가 악착같이 막으려고 행동하면, 나는 그거에 반하는 행동 대열에 서게 되는 거죠.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맞는 태도와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 같아요.

 

 

살다 보면 달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격렬한 어떤 사연을 공유한 사람.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사랑을 했던 그 사랑을 가슴속에 묻고 떠나갔던 여전히 그리운 사람. 끝없는 배려를 해주는 사람. 한 쪽 면만 보여주지만 그것이 나를 위한 동조 과정의 결과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사람. 나 자신의 모습을 반사하듯 내게 보여주는 사람. 그러면서 늘 옆에 있는 사람. 하지만 멀리 떨어져서 지켜만 보는 사람. 보름달처럼 나를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어둠 속에서 환한 그림자를 만들어서 나를 춤추게 하는 사람. (160쪽, '당신은 누구의 달입니까')

 

보이저 1호가 실패를 겪는 과정에 대해 쓰면서 선생님은 과학자의 투명성을 강조하셨죠. 근데 이 투명성이라는 게 정치와 언론에 투영했을 때 ‘억압’이 되고 ‘강요’로 바뀌어요. 이런 세상에서 과학자가 정말 할 수 있는 건 뭘까요?

 

지금 오히려 과학자의 역할이 대두된다고 생각해요. 과학자로 훈련받거나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우리가 견지한다면, 마땅히 상식적인 결론을 내리게 될 텐데, 지금 그렇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과학자 집단이 목소리를 좀 내야 돼요. 과학적 인식론이 세상에 퍼져야 상식을 회복하는 능력으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은 합리성 회복이거든요.

 

내가 속한 집단이나 오직 나 중심에서 주위를 바라보면, 오류가 생기는 경우도 많은데, 그렇다면 지구 중심에서 우주를 생각하는 건 맞는 걸까요?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인간을 중심으로 두고 과학이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떻게 녹아있는가, 이걸 무시할 수 없어요. 그런 걸 자꾸 자각하고. 우주를 얘기할 때 지구 중심,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치 덜떨어진 것이라든가 모자란 것이라든가 계몽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과학자가 있다면, 그건 큰 오산이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오만한 자세죠. 자기 자신도 하나의 인간인데. 당연히 우리는 지구 중심, 인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제가 조금 더 원하는 건 범위를 넓혔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나만 알다가도 내 가족을 알면, 자기 정체성의 범위가 넓어지잖아요. 공동체라든가. 그러면 내 이익만 생각했던 게 내 가족의 이익이 되고, 이게 마을이 되면, 마을의 이익이 되고. 그러다 보면 지구 전체의 이익이 돼요. 그런 식으로 인식의 범위를 넓힐 필요는 있죠. 넓힌다고 해서 인간 중심을 벗어나는 건 아니죠. 넓히면서 사람끼리 어떻게 잘 살까, 하는 문제로 귀결되잖아요. 결국 자기 얘기를 진솔하게 계속 하다 보면, 공감대가 넓어지는 거지. 자기를 드러내는 게 조금은 어색한 작업이잖아요. 근데 그런 걸 드러내면, 남들이 공감대로 들어오니까.

 

좀 어설프더라도.

 

네. 시간이 지나면 어설픈 것도 다시 다른 상태로 바뀔 수도 있는 거고.

 

 

이명현

과학저술가/천문학박사. 초등학생 때부터 아마추어 천문가 활동을 시작하여 네덜란드 흐로닝언 대학교에서 전파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티코리아 조직위원회에서 전파망원경을 이용해 우주로부터 오는 인공 전파를 포착해 외계 지적생명체의 존재를 찾고 있으며, 우주와 외계생명체에 대한 강연과 교육을 통해 대중과 정보를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역서로는 『문더스트』(2008- 공역), 『우주 생명 이야기』(2005), 『스페이스』(2002),  등 다수가 있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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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말하자면 좋은 사람 - 소설가 정이현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김민경

 

서점에서 만난 사람 여섯 번째 주인공은 소설가 정이현입니다. 페이퍼 제목을 쓸 때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정이현 앞에 수식어를 어떻게 붙일까. 작가라 적으려다 소설가로 적어봅니다. 왠지 소설가라는 단어가 주는 신비로움이랄까. 단어가 갖는 묘한 느낌이 정이현이라는 예쁘장한 이름 앞에 붙으니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합니다. 그에 반해 말하자면 좋은 사람이란 긴 수식은 한 번에 갖다 붙였는데요. 얼마 전, 그녀가 내놓은 신작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녀를 만나 본 건 지난달 막을 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입니다. 도서전에서 마련한 ‘저자와의 대화’란 코너를 통해서였죠. 이 날의 진행은 시인 신혜정님이 맡았습니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대담 형식의 행사가 끝난 후 그녀에 대한 인상이랄까요. 누군가 그녀에 관해 묻는다면 책 제목을 그대로 읊을 것 같아요. “음-(말하자면) 좋은 사람.”이라고요.
크지 않지만 조근조근 나직하게 말하는 어투에서, 청량감 섞인 목소리에서, 마이크를 가슴 중앙에 대고 두 손으로 조심히 감싸 말하는 모습에서…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소설가의 얼굴과 말을 통해 짐짓 그녀가 좋은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말과 표정만큼 그 사람을 그대로 내 비추는 것은 없잖아요. 미처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그 날의 말을 옮겨 봅니다.

 

 

 

 

새 책 《말하자면 좋은 사람》이 나왔어요. 어떤 책인가요.


이 책은 정식 단편 소설집은 아니에요. 이른바 짧은 소설을 모은 것이죠. 한국에서 단편 소설은 보통 원고지 80~100매 정도 드는데 《말하자면 좋은 사람》은 편당 원고지 20~30매 분량으로 모두 11편의 소설을 모아 엮은 거예요.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등단은 2002년에 했어요. 등단이라는 제도는 한국과 일본에만 있다고 알려졌죠. 우리나라만 등단이라는 제도를 통과하면 소설가란 이름을 붙여줘요. 소설가로 데뷔한 것이 2002년도이니, 이제 횟수로 12년째인데요. 그때부터 조금씩 썼던 짧은 소설들이 6~7편 정도 있었어요. 2년에 한 번씩 제게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쓰게 된 작품들이고요. 지난 겨울부터 인터넷에 올린 소설들이 모여 5편이 되었고 그것들이 합쳐져서 11편이 모이고, 소설이 나오게 됐어요.

 

책 속 삽화가 눈에 띄어요.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는지.


삽화를 그린 분은 젊은 작가예요. 백두리 작가의 작품이죠. 엄격하게 말하면, 《말하자면 좋은 사람》은 저 혼자만의 작품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는 사람과 그림 그리는 사람이 일종의 콜라보 형식으로 완성한 작업물이에요. 제 글을 읽고, 그림 작가가 그림을 입혔어요. 한 작품당 꽤 여러 컷이 실렸고요. 저만의 아이디어는 아니고, 새 책의 출판사인 마음산책에서 이러한 시리즈를 계속 기획해왔어요. 글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그림 그리는 분도 독자를 직접 만날 기회가 흔치 않은데, 양쪽에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아일랜드백두리                                                                               시티투어버스백두리

 

 

소재의 폭이 다양한데, 소설의 소재는 어디에서 얻는 편인가요.


소재의 아이디어는 그때마다 달라요. 언제, 어떤 순간에 얻었다. 한마디로 말하기 쉽지 않죠. 《말하자면 좋은 사람》 11편도 각기 다르고요. 간혹 제가 실제로 겪은 일이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그대로 들어가기 보다 다른 사건으로 변화하거나 내 안의 상상으로 만든 여러 가지 일들과 버무려져요. 결과물을 보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탄생하곤 해요.

 

보통은 작품 속의 한 제목이 책 전체 제목으로 들어가는데. 새 책의 제목은 어떤 의미인지.


정식 단편 소설집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중에서 제목을 뽑아야지 생각하진 않았어요. 책으로 묶으려 결심한 이후 머릿속에 있었던 제목은 ‘우리가 잠시 혼자였던 순간’이었어요. ‘우리’라는 말 자체가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의미잖아요. 우리는 누군가와 같이 있는 순간조차 철저하게 혼자인 것 같아요. 저는 가끔 극장에서 그런 생각을 해요. 친한 사람과 영화를 보자 약속하고 극장에 갔지만,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철저하게 저 혼자거든요. 2시간 후 밖에 나와서 ‘이 영화 좋았다.’라고 말했을 때, ‘좋았다’는 감상은 그 사람과 내게 전혀 다른 이야기 일수도 있는 거잖아요. 평소 그런 생각을 잘해서 그런지, ‘우리라는 말과 ‘혼자’, ‘순간’ 이런 것들이 같이 들어간 제목을 짓고 싶었어요. 저 혼자만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라 출판사와 제목 회의도 여러 번 했고요. 그러다 말하자면 좋은 사람이 나왔어요. 오랜 생각 끝에 지은 제목은 아닌데, 번개처럼 떠올라 ‘아! 이거 좋겠다’하고 확정한 제목이에요.

 

이 책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혔으면 하나요.


‘말하자면 좋은 사람’과 보내는 오후 2 30분의 티타임 같았으면 좋겠어요. 길고 긴 만남보다, 오후 2 30분에 잠깐 만나서 짧게는 30분 혹은 1시간 같이한 후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며 돌아설 때, 더 행복한 때가 있잖아요. ‘말하자면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짧은 시간같은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말하자면 좋은 사람이 아닌 사람은 없잖아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야?”하고 물었을 때 “말하자면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하긴 쉽지 않죠. 모든 사람은 말하자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 말은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좋은 시작의 첫 마중인 것 같아요.

 

책 속 작가의 말에서 보면, 본인을 식당에서 혼자 밥 잘 먹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작가는 누군가의 일상을 관찰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정이현이 생각하는 작가. 그리고 소설가의 삶이란?


어떤 걸까요.(웃음) 훔쳐보는 사람이라고 하면 다른 작가에게 미안하고요. 관찰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타인들을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살짝 반걸음 떨어진 곳에서 관찰하는 사람이요. 젊은 작가인 저는 타인을 관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같이 흔들리면서 가는 사람이기도 해요. 같이 가고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자 해요. 그것이 소설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지하철 차창에 내 모습이 비칠 때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여요. 그럴 때면 같은 지하철, 같은 칸에 함께 한 그들의 삶을 상상하게 돼요. 서로 말은 않지만, 알지 못하는 타인이지만 같은 방향을 향해요. 만약 그 지하철 안에서 사건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모두 똑같은 목격자가 될 수 있어요. 한순간 뿔뿔이 흩어지지만 그 순간 같이 있다는 것이 경이로워요.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원래 소설가 지망생은 아니었어요.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이었어요. 꽤 늦은 나이에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는데 그때만 해도 소설가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어느 날 시를 써서 선생님께 보여드리니 제가 쓴 시 비슷한 것에다 ‘시보다 산문에 훨씬 재능이 많은 것처럼 보임’이란 평을 달아주었어요. 소설 창작 수업에서는 소설 비슷한 것을 썼더니 칭찬을 받았어요. 저는 유난히 귀가 얇은 사람이에요.(웃음) 그래서 소설로 혼자 극적인 전환을 하고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처음 쓴 소설 비슷한 것이 짧은 소설인데 고통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어요. 어떤 결혼한 여자가 결혼 생활이 권태로워서인지 온몸 여기저기가 아픈 거예요. 눈이 아파서 안과 가면 이상이 없고, 돌아서서 귀가 아파 병원에 가도 아무 이상이 없고. 결국 맨 마지막에 발가락 끝까지 아픈데 어떻게 하지 고민하면서 끝을 맺어요. 선생님은 고통이라는 제목을 보고 적절하지 않은 제목인 것 같다고 했어요. 고통보다는 통증이 어떠냐고. 저는 그때까지 고통과 통증이 구별되지 않은 세계에 살고 있었어요. 소설의 세계에서는 고통과 통증과 타이레놀 한 알이 각각 다른 세계예요. 그런 것에 눈을 뜨고 문학을, 특히 소설에 매력을 느꼈죠.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제 작품 중에 《달콤한 나의 도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아요. 첫 번째 소설이《낭만적 사랑과 사회》《달콤한 나의 도시》가 두 번째죠. 그다음《오늘의 거짓말》《너는 모른다》로 이어지는데요. 어머니들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어디 있느냐 말하죠. 저는 꼭 그 말이 정답은 아닌 것 같아요. 어느 때는 새끼, 어느 때는 엄지가 아프기도 한데요. 작품을 자식이라 한다면, 애착이 가는 작품은 곧 아프기도 한 작품이에요. 두 가지 마음이 겹쳐요.《너는 모른다》라는 작품은《달콤한 나의 도시》이후 나온 두 번째 장편이에요. 이전 작품의 밝고, 도시적인 어떤 것을 기대한 분들은 읽고 나서 ‘이렇게 어둡고 칙칙하다니.’란 반응을 보이기도 했어요. 힘들게 썼던 작품이고, 연제 중에 개인적인 사건이 있기도 했고. 꼭 한 작품만 말하라면 그 작품이 떠올라요. 오늘 문학동네 부스에 가보니《너는 모른다》를 쌓아 놓고 팔더라고요. 저 혼자 웃으며 ‘재고 정리하려고 쌓아놓았나?’ 싶었어요.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자식의 민얼굴을 만난 느낌이라 마음이 이상했어요.

 

소설 쓸 때,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인가요.


가장 힘들 때는 당연히 글이 안 써질 때예요. 더는 한 줄을 쓸 수 없을 것 같을 때. 그런데 그 이유를 내가 명확하게 알고 있을 때죠. 그건 앞이 잘못되어서 그래요. 문장이 잘못된 게 아니라 앞의 플롯이 잘못되어서 뒤를 쓸 수 없을 때예요. 앞을 다 버려야 한다는 명확한 확신이 드는 순간. 그럴 때 단편이면 다 버려요. 장편일 때는 1,000매 짜리를 썼는데 650매에서 그런 확신이 든다면, 650매를 전부 버릴 순 없어요. 6개월이고 1년이고 써온 시간을 버리는 거니까요. 그럴 때 타협을 하는 순간이 있어요. 조금 바꾼다든지 그 상태로 일주일 정도 덮어 놓고 다시 열어 봐요. 그럼 ‘그때 길을 잘못 든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네?’ 고맙게도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힘들고 아픈 순간, 소설을 덮고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편집자에게 오는 전화를 안 받고 문자로 죄송하다 하기도 하고요.(웃음)

 

같이 흔들리면서 가는 사람이라 언급했잖아요. 요즘 사회적으로 관심 두는 이슈가 있다면요.


일단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깜짝깜짝 놀라요. 그러면서 참혹하고 참담하게 좀 더 예민하게 느끼고 있는 초여름인 것 같아요. 봄은 많이 힘들었어요. 저만이 아니라 다들 그걸 보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것이 사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넘어야 할 문제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아플 수도, 힘들 수도 있구나.’라는 걸 가장 첨예하게 느꼈던 봄. 그래서 이번 봄이 더 기억에 남아요. 개인적으로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있지 않아요. 거의 소설을 써와서, 근황을 말할 때 대부분 소설을 쓴다 말했는데요. 지금은 진공상태처럼, 살짝 들려있는 느낌? 멍한 느낌? 그렇게 살고 있어요. 단편을 하나 쓸 게 있지만 아직 시작 전이에요. 다음 이야기를 뭘 할까 조용히 찾는 중이에요. 개인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팟캐스트 진행을 하는 거예요. 글과 살짝 다른 곳에서, 글 비슷한 곳에서 책 읽다 보면 조금 더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까, 언젠가 좋은 소설을 쓰지 않을까 생각하며 열중하고 있어요.

 

이 자리에 소설을 쓰려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작가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일단 소설가가 되겠다는 분들께는 고맙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을 동시에 하고 싶어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작업이에요. 작가들끼리 있으면 요즘 소설을 쓰려는 젊은 친구들이 많이 있다 얘기해요. 왜 그럴까 얘기하다 “실상을 몰라서 그래” 얘기하기도 해요. 사실 정말 쉬운 일은 아니라서 빨리 “환영합니다. 얼른 들어오세요.”라고 말하기에 선배 입장에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어느 선배 소설가가 말하길, 지금 문학 하려는 사람들은 난파선에 함께 올라타려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쳤어요. 그렇지만 난파선을 구하려고 올라타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잖아요. 미안하지만 결국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한편으로 소설 쓰는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책을 안 읽는 것 같아요. 또 한 번 더 놀란 것이 젊은 소설가의 소설만 읽는 거였죠. 저도 문창과 다닐 때 그랬던 것 같아요. 어리석고 바보 같았던 경험이라고 저 혼자 생각하곤 해요. 그때 더 다양한 독서를 하지 못한 것이 속상하죠. 꼭 문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문,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으면 해요. 사실 책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나가서 놀았으면 해요. 작은 세계에만 국한되어서 있지 말고요. 요즘은 더 그런 것 같아요.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커뮤니티 같은 작은 곳에서만 모여서 작업하는 것보다 여행도 많이 하고, 좌충우돌 허튼짓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한다면 그것들이 언젠가는 소설 속으로 들어와서 소설을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솔직히 말씀 드리면 아무 계획이 없어요. 작가가 나와서 이런 얘기를 하다니요.(웃음) 계획이 있다고 말하기에는 책이 나온 지 2달밖에 안되었어요. 가장 가까운 출간 계획은 이르면 내년 가을일 것 같아요. 정식 단편집이고요. 《오늘의 거짓말》이후, 7~8년 만에 나오는 단편집이에요. 아마 가을, 늦으면 후년 봄쯤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가급적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기고자 했습니다. 그래야 작가에 대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온전히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이날 마지막 순서로 독자에게 직접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요. 1 때부터 소설을 썼다는 스무 살 어느 소녀는 소설 쓰는 게 힘들어졌다. 정신적인 나태에서 온 문제인지 고민이라며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소녀에게 작가는 다독이듯 말해줍니다.

…(중략) 어쩌면 좋은 작가가 되는 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는지. ‘좋은’이라는 말은 역시 주관적인 말이겠죠. 스스로 행복한 사람인지가 제일 중요할 것 같아요.

먼저 소설가의 길을 들어선 선배로서, 이미 소녀의 나이를 지나온 이로써 전한 이야기일 텐데요. 이것이 그녀의 지향점이라 생각하기에 말 속에 온기가 느껴집니다. 단지 작가라는 직업에 한정된 말은 아니기에, 저 또한 어느 ‘직업인’이자 ‘직장인’으로서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해 봅니다.

말하자면 좋은 사람, 서점에서 만난 사람, 소설가 정이현의 이야기였습니다.

 

정이현

서울에 첫눈이 내리던 날 태어났다. 눈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은 비구름이 몰려간 직후의 하늘, 해 있는 오후에 마시는 맥주의 첫 모금, 대개의 첫 시집. 싫어하는 것은 상처 주기를 목적으로 던져지는 질문, 가지로 만든 요리, 안경. 두려워하는 것은 속수무책의 순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받은 2002년부터 문예지에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말하자면 좋은 사람>,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산문집 <풍선> <작별> 등을 펴냈다. 이효석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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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문장 노동자의 올해 농사 - 시인 장석주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원

 

“책들이 제 내면의 텃밭에 사유의 씨앗들을 파종하는 것이죠.” 장석주는 독서를 농사에 비유하고, 책 읽는 즐거움을 파종 후 거둬들인 ‘이삭’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실제로도 시골에서 조그만 밭을 가꾸며 생활합니다.

 

장석주를 아는 사람들은 새벽에 일어나 묵묵히 책을 읽고 쓰는 그를 가리켜 ‘문장 노동자’라고 합니다. 침묵과 무(無)에 다다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른은 청춘을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혼자가 된 노인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장석주이기 때문에 묻고 싶었던 질문들입니다.

 

침묵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고, 많은 말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침묵으로 일군 텃밭에 올해는 어떤 이삭이 쌓일지 그도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1986년에 쓰신 산문집 《내 스무 살 푸른 영혼》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욕심 없이, 무(無)에 대한 한 편의 아름다운 글을 써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내 애초의 결심의 실패와 좌절의 흔적일 뿐이다.” 그리고 이번 산문집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검을 어디에서 구할까》서문에서도 변한 건 없습니다. “말을 줄이고 줄여서 침묵에 닿고자 했던 내 의도가 이루어졌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8쪽, 서문 중에서) 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동안 정말로 많은 책을 내셨는데, ‘무(無)’와 침묵에 다다르는 일은 여전히 실패했어요.

 

장석주 | 마흔 해 째 글을 쓰며 70여 권의 책을 썼는데요. 결국, 이것들은 궁극의 목적지가 아니라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정(道程)이란 생각이 듭니다. 궁극의 목적지는 ‘침묵’이나 ‘무’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요. 아마도 선불교의 책들을 읽고 선사들에 대해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갖게 된 생각이겠지요. 어렸을 때 최인훈 선생의 책을 읽으며 그토록 많은 책들을 읽는 것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을 이유를 찾기 위함이다, 라는 구절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저 역시 이렇게 많은 말들을 쓰는 것은 결국 무와 침묵에 이르기 위함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침묵’과 ‘무’에 다다르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면 안 될 꿈일까요?

 

장석주 | 제겐 말이나 문자를 쓰는 자가 갖는 멀미 같은 게 있어요. 사람이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이것들 역시 무나 침묵에 견줄 때 그 불완전성이 두드러지거든요. 최근에 읽은 존 그레이의 《동물들의 침묵》에서 “동물에게는 침묵이 자연적인 휴식의 상태이지만 인간에게는 내면의 소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동물은 타고 난 권리로 침묵을 즐기지만 사람은 내면의 소동에서 벗어나고 구원을 받으려고 침묵을 추구한다는 것이지요.

 

만약 ‘침묵’과 ‘무’에 관해 쓰기를 성공했다면, 그 책은 시인 장석주가 세상에 내놓을 마지막 저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석주 | 그렇죠. ‘침묵’과 ‘무’에 대한 궁극의 책을 쓸 수만 있다면, 그 순간 더 아무 글도 쓰지 않고 살 것입니다.

 

그때까지 침묵을 경청하는 시도는 계속 하시는 거죠?

 

장석주 | 제 삶은 ‘침묵’과 ‘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것에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침묵’을 경청하는 것은 지혜로운 삶을 위한 불가결한 조건입니다.

 

‘문장 노동자’, ‘독서광’, ‘다작(多作).’ 이름 앞에 일종의 ‘호(號)’처럼 붙는 말들이 당신이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줘요.

 

장석주 | ‘다작(多作) 한다’라는 말에는 결국 많이 쓰기 위해 ‘질’을 희생하는 게 아니냐 하는 의심과 질책이 희미하게 깔려 있습니다. 저는 굳이 ‘질’을 추구한 적도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애써 ‘양’을 추구한 적도 없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서 몇 자씩 적어나갑니다. 그게 모여서 책이 되는 것이지요.

 

책을 쓴다는 건 이제 ‘의식’이 아니라 부지런한 생활에 잘 맞는 ‘습관’이 된 건가요?

 

장석주 | 네, ‘습관’이고, 더 나아가 존재 안의 결핍들을 채우기 위한 생명의 자연스러운 ‘리듬’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항상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해가 뜨기 전까지는 삽살개와 함께 산책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데도 당신의 글에선 밤의 어둠과 고독을 사랑하는 마음이 함께 읽혀요. 잠이 많이 없는 편이신가요?

 

장석주 | 잠이 많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충분히 자지 않으면 종일 몸이 쳐져요. 그래서 잠은 늘 충분히 자려고 노력합니다. 일찍 잠자리에 드니까 자연스럽게 새벽 일찍 눈이 떠집니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생활이 생체 리듬에 맞아요.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의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전엔 일하고, 오후 서너 시쯤에는 만사를 제쳐 놓고 반드시 산책을 나갑니다.

 

독서에 관하여 쓰신 문장이 기억나요. “인류 문명의 발전이라는 거창한 소명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한 두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즐거운 까닭.”(50쪽, '독서' 중에서) 쉬지 않고 책을 쓰는 까닭도 '즐겁기' 때문일까요?

 

장석주 | 책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불이(不二)의 세계지요.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떤 글도 쓰지 않았겠지요. 날마다 책을 구해 읽으니, 그것들이 제 안에서 융합을 이루며 글의 촉매 역할을 합니다. 책들이 제 내면의 텃밭에 사유의 씨앗들을 파종하는 것이지요. 책을 읽는 일이 즐겁다고 했지만, 책을 읽고 있는 순간에 그런 즐거움을 느끼는 일은 희귀한 사례입니다. 대개의 즐거움은 추후의 이삭들이지요. 쓰는 것은 즐겁다기보다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쓰는 것의 즐거움 역시 그것을 끝낸 추후의 사태입니다.

 

당신의 문장에 ‘계절’이 담길 땐 그 문장들이 예뻐서 밑줄을 꼭 그었습니다.

“밤 중에서도 겨울밤이 고독과 침묵을 가장 많이 기른다.”(97쪽, ‘벼룩 씨, 당신의 밤도 길겠지?’ 중에서) 라는 문장이나, “봄은 겨울 속에서 꾸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105쪽, ‘오는 봄이 가는 봄이다’ 중에서) 라는 문장, "봄이 오면 모든 금지를 금지하자. 봄이 오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115쪽,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검을 어디에서 구할까' 중에서) 같은 문장들이요. 단순한 질문이지만,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세요?

 

장석주 | 젊었을 때는 여름을 좋아했어요. 여름에는 의욕이 솟구치고, 곳곳에 활력이 넘치잖아요. 여름 아침, 작열하는 햇빛, 울울창창한 숲, 토마토, 수박, 바다, 수영…… 따위 여름에 속한 것들을 정말 좋아했어요.

 

지금은요?

 

장석주 | 이젠 잔잔하고 조용한 봄이 좋습니다. 모란과 작약의 꽃대가 올라올 때, 봄밤 먼 숲에서 소쩍새 울 때. 정말 좋습니다.

 

어렸을 땐 화가의 삶을 꿈꾸셨었죠?

 

장석주 | 네, 중학교 때 미술부에서 활동을 했어요. 파스텔이나 수채화 물감을 갖고 그림을 그렸어요. 제법 잘 그린다는 칭찬도 들었고요. 그런 습관이 20대 초반까지 이어져 유화도 꽤 그렸지요. 그 그림들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림은 늘 가보지 않은 길과 같이 아련한 세계입니다.

 

요즘도 그림을 그리세요?

 

장석주 | 안성에 내려와서도 화가들을 벗으로 사귀며 그의 공방에서 목판화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먹을 갖고 하는 수묵화를 배우고 싶어요.

 

누군가는 표면이라고 우길 테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이 아니라 심층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심층을 머금은 표면이다. 저 내면 깊은 곳에 산다는 자아라는 짐승이 자주 출현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내 얼굴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발명되는 내 자아다. 우리는 이 표면-심층으로 뻔뻔함을 견디거나 수치심으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평생을 산다. (121쪽, '얼굴' 전문)

 

모든 시간은 과거다. 다가오는 모든 찰나들은 시간에 대한 부정이다. (...) 시간은 그것의 안쪽으로 침투하지 못하고 바깥으로 밀려 나간다. 찰나-나는 항상 시간의 외부로만 존재한다. 오로지 존재들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광대놀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찰나의 시간을 버거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버거워하는 것은 단지 탄생과 죽음, 광대놀음뿐이다. 왜냐하면 찰나들이 곧 존재의 소진이기 때문이다.

 

(137쪽, '시간' 중에서)

 

'얼굴', '이마', '눈', '코'... ... '시간'까지 < 얼굴을 읽다 >에 수록된 글을 다 읽고, 당신의 사진을 찾아봤어요. 젊은 시인의 뜨겁고 치열했던 얼굴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넉넉한 미소가 더해집니다. 지금의 당신 얼굴이 좋으시지요?

 

장석주 | 네, 젊었을 때보다 지금의 삶이 더 좋은 것처럼, 젊었을 때의 얼굴보다 지금의 얼굴이 더 좋습니다. 주름도 많아지고, 눈에 총기도 옅어졌지만, 이게 제 얼굴이니까요.

 

《아들아 서른에는 노자를 만나라》에서 노년에 관하여 이런 글을 쓰셨어요. “이 애비도 행복한 노년은 ‘생각과 명상, 은둔과 무집착’에서 일궈질 거라 믿고 그렇게 따르고자 한다.”라고. 노년이 되는 것 역시 무와 침묵에 이르는 과정이네요.

 

장석주 | 더 나이가 들면, 노자가 그랬듯이, 샐린저가 그랬듯이, 은둔하고, 침묵하며 살고 싶어요. 그때쯤 제가 세상에 내놓은 책들의 설익음이나 거?을 되돌아보면, 더는 쓰지 않거나, 쓰더라도 세상에 내놓지 않겠지요. 대신에 좋은 책과 음악을 벗 삼고, 물과 숲과 산을 이웃 삼아 살고 싶습니다.

 

“청춘이 상류라면 나는 인생의 하류에 와 있다.”(59쪽, '나는 당신의 활이다' 중에서)고 쓰셨는데, '넓고 깊게 흐르는 상류’의 어른은 '얕고 급하게 흐르는 하류의 청춘’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요?

 

장석주 | 제 꿈은 제 삶이 노경(老境)에 들었을 때, 말로 충고하거나 조언을 하는 대신에 제 삶 자체가 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한 권의 ‘지혜의 책’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에요. 잘 산 ‘노인’들은 그 자체로 삶에 대한 풍부한 경륜을 담은 한 권의 훌륭한 ‘지혜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신이 청춘을 바쳤던 거리, ‘종로2가’는 다시 변해가고 있습니다. 1985년, 당신이 보았던 ‘발랄하게 놀고 있는 젊음’을 이제는 종로2가에서 찾아볼 수 없어요. 오히려 지금의 종로2가는 가정과 사회에서 내몰린 노인의 거리가 되었습니다. 종로2가를 자주 다니는 저도 노인의 삶이란 대체 뭘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가족이 없고, ‘혼자’가 된 노인들은 스스로 뭘 할 수 있을까요?

 

장석주 | 오늘날 ‘노인’이 된다는 것은 최하층의 열등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노동력을 잃고 존엄도 잃은 채 하나의 ‘잉여’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인류의 비극입니다. 그 때문에 늙는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생명의 존엄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오래 살고 싶지는 않아요. 인간은 태어날 때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만, 노경의 삶에도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노인이 되어서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생물학적 필요와 사회적 필요를 스스로의 힘으로 구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아버지는 목수라는 멋진 직업을 가졌으나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은 없었다. 그게 아버지의 불행이다. 파란만장, 평범, 자잘한 고난으로 점철된 아버지의 인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장례를 치르고 안성으로 내려왔을 때 수도가 동파되어 냉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자야 했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기로 온몸이 떨려 이빨이 부딪쳤다. (200쪽, '시시하고 하찮은 자술 연보' 중에서)

 

시골로 내려온 뒤 살뜰한 소규모 영농인으로 변신한 노모는 알궁댕이로 시든 풀밭에서 뒹구는 누런 호박들을 거두고 수수를 털어 볕에 말려 겨울 채비를 벌써 끝내셨다. 부엌에서 노모는 간고등어를 굽고 그 비릿내와 함께 청국장을 한 상에 올린다. (56쪽, '청국장' 중에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안성에 있었던 일에 관해 쓰신 걸 읽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도연명이 "죽음이 뭐 대수로우랴, 산과 언덕에 내 육신을 합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장석주 |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을 요양병원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요양병원 중환자실의 풍경이 너무 끔찍해서 충격을 받았어요. 마치 지옥도(地獄圖)와 같았습니다.

 

시골에서 함께 생활했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장석주 | 어머니는 그냥 평범하신 노인이셨어요. 소심하신 편이라 잔걱정이 많고, 다 큰 자식의 일에도 습관적으로 간섭하시길 좋아했지요. 다행인 것은 시골에 와서 작은 텃밭을 일구며 뭘 심고 거두는 일에서 큰 보람을 찾으신 것이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모든 사진을 엄마 사진처럼 보고, 모든 글에 애도를 담았던 롤랑 바르트의 태도에도 공감하시나요?

 

장석주 |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감동적으로 읽었지만, 한편으로 어머니의 상실과 부재에 대해 자주 울음을 터뜨리는 것에는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저에겐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동양적인 의식이 체화되어 있기 때문인지,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나 최근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도 비교적 담담했습니다.

 

《도마뱀은...》의 제일 마지막 글에서 책을 버리라고 하셨죠. 책에서 배운 것들에 매이지 않는 자유의 기쁨을 지적하면서요. 언젠가 독서를 끊는 것도 생각해보시나요?

 

장석주 | 아직은 책이 좋습니다. 지금도 매달 책값을 엄청나게 지출하고 있지만 책을 사는데 들이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아요. 몇 년 뒤에 제주도로 내려가 살 생각인데요. 제주도에 ‘여행자도서관’ 같은 걸 하나 만들까 구상하고 있어요. 제주도의 호젓한 곳에 집을 짓고 삽살개나 한 마리 키우면서 종일 책을 읽고 늦은 오후에는 바닷가로 산책 나가는 것을 상상만 해도 좋습니다. 아마 그렇게 게으른 삶을 즐기기 위해서는 한 10년쯤은 정말 미친 듯이 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2014년의 첫봄이 시작됐습니다. 올해 농사 계획은 세우셨나요?

 

장석주 | 노모가 마치 영농후계자처럼 열심히 텃밭을 일구시고 소규모 농사를 지으셔서 그동안 갖가지 채소류나 호박, 콩, 옥수수, 깨 따위를 자급자족 할 수 있었는데, 노모가 돌아가신 뒤 막막해졌습니다. 올해 농사는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면 다 남의 손을 빌어야 할  딱한 처지입니다.

 

장석주


시인, 문장 노동자, 독서광. 논산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랐다. 날마다 책을 읽고 산책하는 걸 인생의 큰 보람으로 삼는 사람이다. 1975년 《월간 문학》 신인상 공모에 시,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했다. 시집 《오랫동안》과 《몽해항로》를 포함해 책을 여럿 썼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에서 열다섯 해 동안 편집자로 일했다. 그 뒤 전업 작가로 살며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명지전문대 등에서 강의했다.

 

2007년에서 2010년까지 국악방송에서 <문화 사랑방>에 이어 <행복한 문학>의 진행자로 활동했다. 《소설 : 장석주의 소설창작 특강》(2002년 출판인회의 ‘이달의 책’), 《풍경의 탄생》(2005년 문예진흥원 우수문학도서), 《붉디붉은 호랑이》(2005년 문화예술위 우수문학도서), 《들뢰즈, 카프카, 김훈》(2006년 문화부 우수학술도서), 《장소의 탄생》(2007년 예술원 창작기금 수혜 및 문화부 우수교양도서), 《절벽》(2008년 문화예술위 창작기금 수혜 및 우수문학도서), 《이상과 모던뽀이들》(2011년 문화예술위 우수문학도서), 《마흔의 서재》(2013년 문화부 우수교양도서), 《동물원과 유토피아》(2013년 문화예술위 우수문학도서) 등 다수의 저서를 발간했다. 지금은 안성에서 책을 읽고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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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고전의 틈새에서 빚은 책들을 제안합니다 - 문학 총서 '제안들'의 편집자 김뉘연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원

 

 영화 <대부>에서 돈 콜리오네를 연기한 말론 브랜도가 자주 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하지.” 입니다. 콜리오네의 제안을 받은 자들은 모두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여기 낯설지만, 매혹적인 결을 품은 세 가지 ‘제안들’이 있습니다. 워크룸 프레스에서 나온 문학 총서 ‘제안들’ 얘기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꿈》을 제안받았다면, “잠을 자지는 못할 겁니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꿈을 꾸게 되겠지요.”(《꿈》, 62쪽) 조르주 바타유와 함께 ‘시의 증오’를 버텨보는 건 어떨는지요. “오로지 증오만이 진정한 시에 도달”(《불가능》, 14쪽)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세 번째 제안은 살인사건에서 미덕을 발견한 토마스 드 퀸시입니다. 그가 예찬한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을 예술로 ‘감상’해야 할지, 벌벌 떨며 ‘감수’해야 할지는 지켜봐야겠습니다.

 

‘제안들’은 한 편집자가 책장 깊숙이 꽂아 두고 싶은 책들에서 출발했습니다. 편집자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선택이었죠. 편집자는 이제 “단단하고 당당하게” 제안합니다. 마땅히 소개되어야 함에도 한국어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았던 책들, 국내 문학 출판의 흐름을 비켜 서 있던 작품들을 전면에 들고.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할지도 모릅니다.

 

  

 

2014년 1월 31일에 ‘제안들’의 초판 1쇄가 발행됐으니, 책이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요, 책을 처음 받아보았을 때 소감이 어떠셨나요?

 

김뉘연 | 단단하고 당당해 보였습니다.

 

손에 쥐고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야무지단 생각이 듭니다. 주로 디자인과 미술 기반의 책을 출판했던 워크룸 프레스에서 문학 총서가 나와 놀랍고도 기대가 큽니다. 처음 ‘제안들’을 기획하게 된 계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김뉘연 | 2013년 1월 워크룸 프레스에 합류해 기획안을 한두 차례 제출했다가, 문득 이 단행본들을 총서로 묶어 출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 출판 기반이 없는 출판사로서 자리를 잡으려면 총서라는 틀이 적당할 듯했고, 또한 총서라는 틀 안에서 단독으로는 출간하기 어려운 숨은 책들을 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총서 출간을 제안했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제안들’을 구성하고 있는 목록에는 편집자의 독서가 많이 반영되었을 것 같아요. ‘제안들’의 목록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나요?


김뉘연 | 평소 관심이 있었던 이들의 목록을 적은 후 그 뒤를 쫓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출간 순서대로 적자면) 토머스 드 퀸시, 페르난두 페소아, 로베르트 무질, 그리고 장 주네가 그 이름들입니다.
 

 

 

먼저 드 퀸시는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속 ‘이 책에 대하여’에서 간접적으로 밝혔듯) 아폴리네르의 시에서 발견해 알던 이름으로, 국내에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펭귄클래식코리아)과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시공사)이 출간되었을 때 반가워한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작가의 저작들을 훑다 보니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이라는 엄청난 제목의 글을 발견하게 됐고, 이 글과 더불어 드 퀸시가 죽음에 대해 쓴 글들을 모두 모아 출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현재의 결과물은 글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는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한편 페르난두 페소아의 경우 2012년 봄 까치에서 출간되었던 《불안의 책》을 즐겨 읽었고, 글을 쓸 때 자주 인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발췌본입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불안의 책》의 완전한 판본이 올해 안에, 출판사 두 곳에서 출간된다고 합니다. 제 경우 여러 이름 아래 글을 쓴 페소아의 특성을 살려 각 이명이 쓴 글들로 구성된 페소아 산문집을 펴내고 싶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번역가 김한민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이후 김한민 씨는 포르투갈에 머물며 페소아를 연구하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로베르트 무질은, 독자로서 《특성 없는 남자》가 완역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량상 워크룸 프레스에서 이 작품을 펴내기에는 버거웠습니다. 또 다른 무질의 작품을 찾다가 무질 연구자로부터 《생전 유고》를 추천받았고, 이어 짧은 에세이 ‘어리석음에 대하여’를 발견했습니다. 《생전 유고》의 경우 무질에 관한 논문을 찾아보니 일부 번역되어 있어 읽어보았고, <어리석음에 대하여>의 경우 개인적으로 애호하는 프랑스 출판사 알리아에서 출간된 판본으로 접했습니다. 일단은 제목에 매료된 점이 크긴 합니다. ‘생전 유고’는 물론이거니와 ‘어리석음에 대하여’라는 제목은 《우신예찬》 내지 《바보배》를 연상케 했습니다.

 

 

 

어쨌든 무질 연구자로부터 역시 무질을 전공하되 아직 번역서를 내지 않으신 신지영 선생님을 추천받아 만나게 됐고, 이 작품들의 번역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신지영 선생님이 마침 《생전 유고》를 일부 번역해두신 상태였고,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갔습니다.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경우, 동유럽 작가에 대한 관심에서 번역가 정보라와 만났다가, 이야기가 곰브로비치로 흘러갔습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곰브로비치의 소설들에 매혹되었던 터였는데, 여기에 곰브로비치야말로 부조리극의 원조이며 현지에서 무대에 올랐던 극을 보며 낄낄댔었다는 번역가의 추천이 더해져 추진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장 주네는, 워낙 좋아하는 작가였습니다. 시 ‘사형수’의 경우 솔 출판사의 세계시인선에서 발췌 번역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시를 노래로 접했습니다. 여러 프랑스 가수들이 이 시를 가사 삼아 노래한 바 있습니다(제가 가지고 있는 최근 앨범은 에티엔느 다호와 잔 모로가 부른 버전입니다). 절판된 책을 헌책방에서 구해 번역을 가사와 비교해 보다가, 완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됐습니다. 더불어 장 주네의 작품 중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작품들도 검토했습니다. 그런데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시 ‘사형수’와 함께 묶어 펴낸 산문 ‘곡예사’를 읽고, 매혹되었습니다.

 

또한, ‘제안들’의 목록 중 일부는 제가 특정 출판사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기고가 겸 편집자로 활동하던 2012년 여름 기획한 잡지 《버수스(versus)》(갤러리 팩토리 발행)에 기대고 있습니다. 당시 《버수스》 5호의 주제는 ‘번역’이었습니다. 기획에 참여한 아홉 분의 번역가들은 자신이 번역하고픈 글들을 직접 택해 옮겼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정상 수록되지 못했던 것이 바로 번역가 배수아가 택했던 프란츠 카프카의 《꿈》, 번역가 성귀수가 택했던 조르주 바타유의 《불가능》이었습니다. 또한 이 잡지에서 번역가 엄지영이 소개한 작가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는 그의 다른 작품을 총서에 포함하게 됐습니다.

 

  

 

이 밖에도 아끼는 작가들이 있지만, 이 총서가 아무리 개인적인 선택에 기반한다 해도, 좋아한다고 해서 무조건 펴내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숨은 판본, 또한 마땅히 번역되어야 하는 판본들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 해도 다른 출판사에서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있다면 피했습니다. 이미 바람직한 방향으로 출간되고 있는 상황에 개인적인 마음을 앞세워 경쟁적으로 끼어들지는 않으려 합니다. 현재 관건은 작가와 작가, 작품과 작품의 유기적인 연결입니다. 총서를 하나로 조망하면서 이후의 타이틀들을 확정하려 합니다.

 

‘제안들’은 ‘한국의 세계문학전집 시장’이라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번역가와 편집자 모두 최대한 자유로워 보고자 고민한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뉘연 | 이 총서를 기획하고 편집함에 있어 전권(全權)에 가까운 권리를 누렸습니다.

 

끝내 자유롭지 못했던 점도 있다면요?

 

김뉘연 | 물론 예산에 대한 상의는 함께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지만, 이는 워크룸 프레스 운영 전반에 걸린 문제이므로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자유롭지 못했던 부분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편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기준’이 있었을 것 같아요.

 

김뉘연 | 번역에 결정적인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총서에서 좋지 않은 번역을 말끔한 교정으로 무마해 펴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덧붙여 책의 구성에 대해 말하자면, 「작가에 대하여」에 뒤이어 「이 책에 대하여」를 본문 앞에 실었습니다. 「이 책에 대하여」는 기본적으로는 이 타이틀이 어떠한 위상의 책인지를 알리는 글이지만, 또한 이 책이 어떠한 경위로 출간되게 되었는지 알리기도 합니다. 편집자로서 이 글을 쓰고 싣게 되어 의미가 큽니다.

 

‘제안들’은 ‘제안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한 권의 책 안에서 가능한 모든 실험을 하는 듯합니다. 이를테면 ‘제안들’의 번역 후기는 책마다 다른 변주 형식을 갖고 있죠. 그러한 편집 방식 또한 탁월한 실험으로 보입니다.

 

김뉘연 | ‘제안들’ 번역 후기는 번역의 부산물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띤 글을 한 편의 글로서 독립적으로 다루고자 함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1권인 카프카의 《꿈》 속 「옮긴이의 글」로 ‘꿈’에 관한 배수아 작가의 단편소설(‘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을 실었고, 나머지 책들에도 각기 다른 형식의 번역 후기를 실었습니다.

 

‘제안들’ 각 권을 채우고 있는 색깔도 재미있게 다가옵니다.

 

김뉘연 | 각 권의 색을 다르게 가자는 기조를 정한 것은 이 책을 만든 김형진 디자이너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각 권의 색을 정한 데에는 느슨하나마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제안들’의 편집자로서 김형진 디자이너에게 꼭 전달하고 싶었던 사항은 어떤 것이었나요?

 

김뉘연 | 책 디자인 과정에서 편집자로서 일관되게 바랐던 것은, 디자인이 총서의 뉘앙스를 잘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를 잘 전달할 수 없다면 차라리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결과적으로 책이 당당한 모습을 갖춰 기쁩니다.

 

‘제안들’을 향한 독자의 질문과 반응도 많이 접하셨을 텐데요, 피드백을 받고, 다음에 나올 ‘제안들’에 반영해 보고 싶은 점이 있으신가요?

 

김뉘연 | 주변의 번역가들이 이 총서에 어울릴 만한 타이틀들을 여럿 추천해 주셨습니다.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실천하지 못했지만, 편집 과정 중에 꼭 시도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으신가요?

 

김뉘연 | 편집 과정 중 시도해보고 싶었던 것은 편집자의 해설입니다. 즉 연구자 입장에서 심도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만, 일단 그러한 해설을 쓰기에는 능력이 부족했고, 또한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쨌든 언젠가 각 책들에 대한 보다 길고 흥미로운 글들을 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2010년 한 해 동안 출판사 열린책들의 편집자로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로베르토 볼라뇨와 조르주 심농을 심도 있게 소개하셨습니다. 독특하게도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는 4인의 번역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자신의 영역을 고수한 채 늘 새로운 편집 방식을 모색하시는 것 같아 보기 좋았습니다. 편집자로 일하시면서 얻게 된 철학이 있을까요?

 

김뉘연 | 먼저 명확히 밝히자면, 로베르토 볼라뇨의 경우 버즈북(홍보용 책자)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에 이어 《칠레의 밤》, 《부적》, 《먼 별》, 《전화》까지 편집했고, 조르주 심농의 경우 버즈북 《조르주 심농―매그레 반장, 삶을 수사하다》를 기획하고 편집했습니다. 매그레 시리즈 중 1~4권은 론칭 준비 후 2교까지 진행했으나 마무리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볼라뇨와 심농은 제가 입사할 때 이미 기획되어 있었고, 번역 계약도 거의 완료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2011년부터 출간된 타이틀들은 다른 편집자가 편집한 것들입니다. 다만 제가 이 두 작가에 대해 힘쓴 점이 있다면 버즈북을 만들고, 선집의 틀을 구상하고, 각 번역가들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나누려 한 점일 것입니다. 볼라뇨 단편집 《전화》가 출간되었을 때는 번역가와 오랜 시간에 걸쳐 볼라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정리해 편집자 노트를 썼고, 심농 번역가 네 분과는 약 1년간 비공식 온라인 카페를 운영하며 그곳에서 용어 등 번역 관련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또한 이들과의 대담을 진행한 후 심농 버즈북에 싣기도 했습니다. 이 버즈북의 경우 기존의 번역서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책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었기에 편집자의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계속 생각하게 되는 부분은, 편집이란 협업을 기반으로 한 혼자만의 작업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끝까지 타협하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을까요?

 

김뉘연 | 끝까지 타협하고 싶지 않은 부분은, 책임 편집자의 이름을 판권면에 기재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옳고 그름을 떠나 고집하고 싶습니다.

 

편집이 잘된 책이란 어떤 걸까요?

 

김뉘연 | 지킬 것을 지킨 책이 좋아 보입니다. 즉 우리가 ‘책’이라고 말할 때 떠올릴 법한 구조와 구성을 벗어나지 않은 책이 좋아 보입니다. 다분히 보수적인 생각일 수 있겠습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위대하다고 생각한 편집자가 있으신가요?

 

김뉘연 | 편집자의 경우, 위대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뉘 출판사의 발행인 제롬 랭동이 해온 선택들이 근사해 보입니다.


일전에 어느 글에서 “편집자의 삶에 들어섰다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부적》을 읽고 시인의 삶을 바라게 되었다.”고 적었던 내용을 기억합니다. 편집자라는 직업을 갖기 이전에 편집자의 삶을 살아보고 싶게 마음을 움직인 책이 있으셨나요?

 

김뉘연 | 쓰고 싶은 글이 담긴 책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집중해 읽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편집자로서 보다 면밀히 읽으며 앞으로 쓰려는 글의 방향을 가늠하는 동시에 이로써 생활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베케트의 책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원래 총서에 포함되었던 베케트의 소설들을 독립시켜 베케트 소설 및 평론 선집(9권)으로 구성했습니다. 올해 말 초기작 1~2권을 출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베케트의 편집자가 되어 매우 기쁩니다.


앞으로 출간될 ‘제안들’ 중에서 현재 어떤 책을 집중적으로 읽고 계시나요? 

 

김뉘연 | 3월 말 출간될 ‘제안들’ 4권, 나탈리 레제의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김예령 옮김)을 읽고 있습니다. 역시 베케트에 대한 관심에서 번역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출간하게 된 책입니다. 나탈리 레제가 프랑스의 문헌 연구자이자 탁월한 산문가라면, 국내에서는 김예령 선생님이 그러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안들’에 소개하지 않았지만, 읽으셨던 책 중 언젠가 꼭 번역되길 바라는 작가의 책은 무엇인가요?

 

김뉘연 | (다 읽지는 않았지만) 사뮈엘 베케트가 자신의 전기 작가로 지목했던 제임스 놀슨(James Knowlson)이 쓴 베케트 전기 《Damned to Fame》이 출간되기를 바랍니다. 판형이 작지 않고 판면이 빽빽한 데다 분량이 800쪽에 달해 어디에서건 선뜻 출간을 결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뜻있는 출판사에서 출간해준다면 좋겠고, 제가 번역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워크룸 문학 총서 ‘제안들’

 

1 프란츠 카프카 《꿈》, 배수아 옮김
2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성귀수 옮김
3 토머스 드 퀸시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유나영 옮김
4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김예령 옮김
5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 《무의 연속》, 엄지영 옮김
6 페르난두 페소아, 《산문집》, 김한민 옮김
7 앙리 보스코, 《이아생트》, 최애리 옮김
8 비톨트 곰브로비치,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정보라 옮김
9 로베르트 무질, 《생전 유고 / 어리석음에 대하여》, 신지영 옮김
10 장 주네, 《사형수 /곡예사》

 

총서 '제안들'은 서른 권을 웃도는 선 안에서 마무리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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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함께 살고싶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집 -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출간 기념 간담회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혜원
사진 제공 | 문학동네

 

같은 책이라도 전집(全集) 안에 들어가면, 새로워 보입니다. 책의 새로운 터전 같다고나 할까요? 위대한 문학전집이 세상에 나오면, 이 땅에 훌륭한 집 한 채가 지어진 것 마냥 우두커니 바라보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자꾸 보면 살고 싶어지는 것이 집입니다. 책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훌륭한 전집일수록 전부 다 모으고 싶죠. 그래서 전집은 ‘샀다’는 말보다 ‘장만했다’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세계문학전집과 한국고전문학전집을 출판한 문학동네에도 새집이 들어섰습니다. 하얗고 튼튼한 스무 권의 책들입니다. 김승옥의 단편 10편이 수록된 1권부터 2009년에 나온 박민규의 <카스테라>까지. 스무 권을 아우르고 있는 시대는 사실 모호합니다. 문학동네의 신형철 편집위원은 한국문학전집의 발간을 기념하며, 선정 기준을 밝혔습니다.

 

 

 

 “’문학성’입니다. 문학동네가 소설을 출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신뢰하는 기준은 ‘서사의 힘’입니다.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이야기가 밝혀서 보여줄 수 있는가.” 그리고 작품이 어느 정도 독자들과 소통했는지, 한 시대의 사회적 징후를 대표적으로 보여줬는지 하는 ‘문제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박완서를 읽고 자랐고, 모두가 박완서를 읽으며 세월을 났다.” (400쪽)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의 세 번째 책, 박완서의 대표 중단편선 <대범한 밥상>에 쓰인 문학평론가 차미령의 해설입니다. 세월을 함께한 책을 전집으로 다시 보는 기분은 어떨까요?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은 2014년에 나온 ‘새 책’이기도 합니다. 이 전집을 계기로 누군가는 한국문학 입문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을 통해 ‘한국문학이 이런 거구나.’라고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세대의 한국문학 독자, 한국문학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 속에 정착되도록 하는 게 문학 출판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종연 편집위원의 바람이 문학동네가 한국문학전집을 출간하는 중요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선으로 발표된 스무 권 외에 앞으로 전집에 입주 예정인 이웃도 궁금해집니다.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문학동네 편집위원들은 자신감 있게 입을 모았습니다. “전집을 만든다는 것이 기존에는 정서를 확정 짓는 대단히 권위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문학동네는 좀 더 동시대 독자들과 호흡할 여지를 많이 남기고자 합니다. 조금 더 유연하게. 어떤 작품은 전집으로 묶기엔 조금 낯설 수 있어요. 하지만 동시대의 작품 중 앞으로 어떤 것이 한국문학전집에 포함될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는 맨 처음 기준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모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문학동네의 자신감 표현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한국문학전집을 장식하는 표지에는 한강 사진이 있습니다. 낯선 풍경의 한강을 아름답게 찍는 이대원의 사진입니다. 문학동네가 기록할 한국문학전집의 역사가 한강의 물결을 따라 굳세게 흘러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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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첫 인사 - 컨텐츠팀 정혜원

 

안녕하세요. 반디앤루니스 인터넷 서점의 컨텐츠 에디터 정혜원이라고 합니다. 처음 출근하는 날, Sugar babe의 「Downtown」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왔습니다. 모든 게 처음인 날, 야마시타 타츠로의 시원시원한 목소리를 들으면, 오늘 하루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밝고 씩씩하게 해낼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가사 내용은 토요일 밤의 시내 풍경입니다. 그렇지만, 이른 아침 종로의 모습과도 묘하게 어울립니다.

 

'길거리엔 언제나 사람의 따뜻한 기운. 그런데도 밝은 이 거리. 언제나 멋 부리고 있어. 어두운 기분마저 곧바로 개여. 모두 들떠!' '들떠'까지 듣고 났더니, 눈이 맑아지더라고요. 힘찬 노래를 보약 삼아 첫 출근길에 힘을 실었습니다.

 

 

야마시타 타츠로 『Opus ~All Time Best 1975-2012~ (3CD)  

 

 

Sugar Babe 「Downtown」

 

서점에서 일하시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빅뱅의 태양이 한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어떤 것을 하고 싶다고 느꼈을 때 그 그림이 사진같이 와요." 저는 어떤 걸 하고 싶다고 느낄 때마다 머릿속에 책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게 서점일 수도 있고요. 특별한 계기는 없지만, 그리던 그림이 사진처럼 온 것 같아요.

 

서점에서 일해서 좋은 점은 뭔가요?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책이 있어서 좋습니다. 일하면서도 책과 계속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최근 나온 신간 중에 주목하시는 책이 있나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무라이스 잼잼》신간이 나왔습니다. 웹툰 시즌 5가 시작하면서 단행본이 동시에 나왔으니 기쁨은 두 배입니다. 책을 사면 부록으로 국수 달력을 준다고 합니다. (물론 한정판!) 조경규 작가는 《오무라이스 잼잼》을 연재하면서 이 작품은 평생 그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평생’이라는 약속에서 국수 면발을 떠올리니 참 잘 어울리네요. 조경규 작가의 《오무라이스 잼잼》이 국수처럼 길게 가길 기대하겠습니다.

 

 

 

'이 책만은 반드시!'라고 강력하게 추천할 만한 도서가 있다면요?

 

추천할 만한 책을 꼽을 땐 김승옥의 단편 <차나 한잔>을 언제나 말하고 싶습니다. 만화가인 주인공의 삶은 넉넉지 못합니다. 이웃집 여자가 뀐 방귀에도 샛벽이 흔들리는 집에서 주인공은 가난한 삶을 꾸려 갑니다. 가난이 첩첩산중인 가운데, 주인공은 해고까지 당합니다.

 

“이걸로써 내가 그 속에서 살아왔던 한 가지 우연이 끝장났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계단 위에 서서 사람과 자동차들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서 또 무엇을 붙들어야 한다. 오늘 중으로 무언가 확실한 걸 붙들어 둬야 한다. 어제와 오늘과 그리고 내일을 순조롭게 연속시켜 주는 것을 붙잡아 둬야 한다.”

 

만화가로 연명하던 삶마저 이제 접어야 하는 날, 주인공의 독백입니다. <차나 한 잔>은 한숨만 푹푹 쉬다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다음의 우연을 위해 거둬야 할 숨이기도 합니다.

 

'책 읽는 설렘'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읽고 싶던 책을 손에 쥐게 되면, 일단 심장이 뜁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이걸 다 읽어버리면 어쩌지, 하면서 읽는 속도도 부러 늦추고요.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땐 그 책들이 숙제처럼 다가와요. 저 자신이 숙제같아요.

 

요즘 뭐 읽고 계세요?

 

'현암사'에서 나온 나쓰메 소세키《풀베개》를 읽고 있습니다. 소세키의 강연과 평문이 담긴 책 《나의 개인주의》(책세상, 2004)를 읽고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소설 몇 개를 읽고 소세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풀베개》는 낯설었습니다. 그 낯섦이 좋아 계속 읽고 있습니다. 《풀베개》에선 다다미 딛는 소리가 납니다. 각각의 문장들은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붓질 같습니다. 문장 속 풍경들이 다 아득해서 왠지 밤에 읽게 되는 책입니다.

 

“거울 앞에 설 때만 자신의 머리가 하얗게 센 것을 한탄하는 이는 행복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손을 꼽아보고서야 5년의 세월이 바퀴 구르듯 빠르게 흘렀음을 깨닫는 할멈은 오히려 신선에 가까운 인간일 것이다.”

 

요즘 눈여겨 보고 있는 책은 뭔가요?

 

마찬가지로 현암사에서 앞으로 출시될 나쓰메 소세키의 전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풀베개》 다음으로 《태풍》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의 장편소설 중 가장 덜 읽힌 작품이라고 알려졌다는 점에서 궁금해집니다.

 

 

 

좋아하는 작가 있으세요?

 

이성복 시인을 알고 난 후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음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을 담아 시를 한번 옮겨 보겠습니다.

 

음악 /이성복

 

비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부끄럽지만, 어떤 글을 쓸 때 ‘누가 이 글을 볼까’ 생각하면, 이성복 선생님을 항상 염두에 둡니다. 아직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선생님을 생각하면 마음을 단정하게 됩니다.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마음에 두고 있는 책은 뭔가요?

 

'아직 주문하지 못한 책'입니다. 앙리로이(Henry Roy)의 사진집 《Out Of The Blue》와 출판사 '타셴'에서 나온 제인버킨과 세르주 갱스부르의 가족 앨범 《Jane & Serge. A Family Album》은 몇 번이고 다시 봐도 감동적입니다. 물론 인터넷으로만 봤습니다. 아름다운 이 책들을 빨리 마음 밖으로 끄집어내고 싶습니다.

 

 

 

    《Out Of The Blue》  《Jane & Serge. A Family Album》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지난겨울, 빌 캘러한(Bill Callahan)의 앨범 를 즐겨 들었습니다. 앨범에 수록된 「The sing」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오늘 내가 했던 유일한 말은 ’맥주‘ 그리고 ’땡큐(Thank you.)‘.” 앞으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유일한 말은 ’책‘과 ’감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 ’맥주‘도 함께라면 금상첨화겠네요. 감사합니다.

 

 

 

Bill Callahan 「The Sing」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원 (hyewonjung@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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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그 말에 닿고 싶은 마음 - 《부다페스트》의 옮긴이 루시드폴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제공 | 안테나뮤직

 

Chico Buarque. 한글로는 ‘시쿠 부아르키’라고 표기합니다. 그러나 저로선 저 문자를 포르투갈어로 어떻게 소리 내는지 알지 못합니다. 분명 우리말이 소리 나듯 시.쿠.부.아.르.키는 아닐 것 같은데 말이죠. 낯선 말이고, 낯선 사람입니다. 모국인 브라질에서 시쿠 부아르키는 대중음악계의 전설적 거장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이 높다고 하는데요.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저 그가 살고 있는 브라질이 그렇고, 그가 쓰는 말과 글이 그렇듯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란 사람 사이를 잇는 고마운 매개이기보다 그 사이를 찢고 가르는 야속한 “장벽”일 텐데요. 그러므로 나에게서 너를, 그리고 세계를 저만치로 떨어뜨려놓는, “오직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옮길 수 없는” 말 앞에서 우리는, 누가 하나 예외일 것 없이 고독한 “이방인”으로 서있을 겁니다. 아무리 낯설지라도 혹은 이리도 낯설기 때문에 더 간절히, 그 말에 닿기를, 그 안에서 사람이 보이길, 또 그 이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죠. 시쿠 부아르키의 소설 《부다페스트》를 우리말로 옮긴 루시드폴이 또한 그러했듯이.

 

누구나 책에 대한 고유의 기억을 갖게 되는데요. 독자로서 《부다페스트》를 처음 접했을 때를 회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소설을 읽게 되셨는지요?

 

루시드폴 |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2006년 아니면 7년이에요. 제가 스위스에 있을 때였죠. 그때 프랑스 리옹에 자주 왔다 갔다 할 일이 있었어요. 주로 기차로 가서 새벽 버스로 오는 편이었는데 2시간 반 정도 걸렸어요. 《부다페스트》는 그때 두 번 정도 읽었던 것 같아요. 원서도 리옹에서 샀던 걸로 기억하고요. 35유로인가, 되게 비쌌어요. (웃음)

 

제가 포르투갈어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원서로 보다가 막히면 영문판도 보고 하느라 시간이 좀 많이 걸렸던 것 같아요. 소설이 꼬여있고 어려워서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도 힘들었고요.

 

시쿠 부아르키의 소설은 《부다페스트》가 처음이신 건가요?

 

루시드폴 | 네. 《벤자민》은 조금 읽다가 놔버렸어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제가 소설책을 많이 읽는 편도 아니고 아무튼 외국어 책이잖아요. (일동 웃음) 머리가 너무 아프고 고생하는 기분이 드는 거죠. 못 읽겠더라고요.

 

《부다페스트》의 어떤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셨나요?

 

루시드폴 | ‘시쿠 부아르키’라는 사람의 책이라는 점이요. 거꾸로 이야기하면 시쿠 부아르키의 책이 아니었다면 전 매력을 못 느꼈을 것 같아요. 마음이 안 열렸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음악과 대략적인 인생, 공연하는 모습, 이런 것들을 제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편견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봐요.

 

시쿠 부아르키가 브라질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국민가수라고 하는데 아직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음악을 소개해주신다면요?

 

루시드폴 | 시쿠 부아르키가 아마 44년생일 거예요. 제가 그 세대의 뮤지션들을 보면서 하는 생각이, ‘한 나라의 문화가 확 꽃피는 시기라는 게 있나 보다’ 하는 거예요. 그건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굉장히 재능 있는 사람들이 동시대에 비슷비슷하게 나와서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건데, 그 시대에 질베르토 질(Gilberto Gil)이나 카이타누 벨로조(Caetano Veloso), 시쿠 부아르키(Chico Buarque), 갈 코스타(Gal Costa) 등 너무 많은 사람들이 출현을 한 거죠. 마침 브라질 정국도 굉장히 어수선했고 그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으면서 예술적으로 더 부흥하기도 했고요.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시쿠 부아르키도 보사노바의 영향을 받고 시작을 했다고 해요. 50년대 말, 60년대 이때 보사노바가 빵 하고 터지면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 비니키우스 데 모라레스(Vinicius de Moraes), 조앙 질베르토(Jo?o Gilberto), 이런 사람들이 거의 혁명을 일으켰어요. 보사노바라는 혁명을. 그걸 십대, 이십대 때 듣고 자랐던 카이타누 벨로조나 시쿠 부아르키 같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음악을 시작한 거죠. 하지만 가는 길은 많이 달랐어요.

 

보사노바가 한참 떴다가 슬슬 내리막길을 걸기 시작했을 때 일부 삼비스타들이 ‘저건 너무 뺀질뺀질한 음악이다, 중산층들이 적당히 기분 좋게 해변에서 커피 마시면서 듣기 좋은 음악이지 우리 사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류가 있었어요. 나라 레옹(Nara Le?o) 같은 사람도 그랬고. 이런 흐름에 강경하게 동조하는 입장이었던 게 카이타누 벨로조나 질베르토 질, 갈 코스타였는데 이들은 출신이 리우도 아니고 보통 바이아 쪽이었어요. 그리고 이들이 ‘우리, 센 음악 좀 해보자’ 하면서 트로피칼리스모(Tropicalismo, 열대주의)*로 확 움직여버려요. 반면에 시쿠 부아르키는 보사노바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그의 초반 음악부터 그 기본은 늘 삼바였고 그걸 배경으로 사람들 이야기를 계속 해왔거든요. 그래서 브라질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카이타누 벨로조의 최근 음반을 들어보면 굉장히 전위적인 락을 하고 있는데 시쿠 부아르키는 예전의 그 기조대로 삼바를 기본으로 한 음악들을 쭉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엠뻬베(MPB, 브라질 대중음악)의 범주에 있긴 하지만 장르적인 혁신이나 눈에 띄는 큰 변화보다는 그냥 자기자리에서 묵묵하게 음악을 해왔다는 거죠.

 

참고로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일부 호사가들에 따르면 이 뮤지션들이 브라질의 삼바학교랑 연계되어 있는데, 말이 학교지 거의 ‘파’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요. 시크 부아르키나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은 망게이라(manguira) 에스꼴라(escolar, 학교)랑 밀접하고요. 2월 달에 리우에서 삼바 축제를 할 때 열 몇 개 되는 삼바학교에서 해마다 테마를 정해 코스튬(costume)을 하고 노래를 만들어서 행진을 하거든요. 그걸로 우승팀을 가리는데 98년 테마가 시쿠 부아르키고 92년이 조빔이었어요. 조빔은 1등을 못했는데 시쿠 부아르키가 테마일 때-“시쿠 부아르키 데 망게이라(chico buarque da mangueira)”, 망게이라는 시쿠 부아르키다.-는 1등을 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거 봐라, 시쿠 부아르키를 더 좋아하지 않냐’ 말하기도 했대요. 지금도 브라질 여자들이 가장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자는 시쿠 부아르키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고요.

 

 

* 편집자 주: 60년대 말, 1968년 파리 학생 운동 주동자인 Daniel Cohn-Bendit, el Danny el Rojo. 그리고 Bob Dylan, Jimmi Hendrix, Janis Joplin, los Beatles, Santana ,los Rolling Stones이 브라질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기타와 banquitos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세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는 당시 외국에서 사용하던 악기를 사용해야 했다. 그로 인해 미국 등지의 영향을 받은 악기인 기타, 베이스, 전자 오르건, 드럼 등이 전해졌다. 열대주의는 바로 이러한 영향에 반응한 브라질 음악이다. 그 특징은 체계적 이론이 뒷받침된 퇴폐, 비형식, 좋지 못한 취향의 배제, 당시 관습에 대한 혁명 등이다. (자료 출처: 세르지오 바르보사 세라, ‘브라질 대중음악 개관: 기원에서부터 현재까지)

 

《부다페스트》를 만나기 전에 이미 음악가로서의 시쿠 부아르키를 좋아하신 건데요. 소설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보였을 수도 혹은 이제까지 알지 못하던 그 사람이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떠신가요?

 

루시드폴 | 소설이라는 게 이런 건가, 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소설에는 조예가 별로 없어서 한 소설을 이렇게 열심히 읽어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시쿠 부아르키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좋은 소설이라는 건 이런 건가’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워낙에 (비교해 볼만한 소설의) 샘플 수가 없으니까. (웃음) 그래서 저는 음악하는 사람으로서의 시쿠 부아르키와 글 쓰는 시쿠 부아르키가 조금 다르게 느껴져요.

 

‘시쿠 부아르키는 브라질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음악가이자 작가이다…….’ 이런 문장으로 옮긴이의 말을 시작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자신이 없다. 나는 그의 소설과 그의 음악을 좋아하고 심지어 어정쩡한 그의 삼바춤까지도 좋아하는 그의 팬이다. 그런데 그가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언어, 포르트갈어는 나의 모어가 아니기에 작품의 진수를 온전히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솔직히 난 자신이 없는 것이다.

 

(…) 마치 소설 속에 등장한 시인 코치시 페렌츠의 삼행시처럼, 이방인들은 그 ‘오직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옮길 수 없는’ 말의 장벽 앞에서 늘 속수무책이니까. (235-236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옮긴이의 말’에도 썼지만 내가 시쿠 부아르키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는 거예요.

 

예전에 브라질 친구들을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제가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하니까 어떤 음악하는 친구는 “시쿠 부아르키 가사 보고 공부해! 그러면 돼지 뭐.” 하고, 또 미국에서 만났던 어떤 아가씨는 “시쿠 부아르키 가사는 우리도 잘 몰라. 무슨 뜻인지.”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브라질에서) 검열이 심할 때는 말장난처럼 언어유희적으로 말을 바꿔서 교묘하게 검열을 피해 가사를 썼는데 나중에 그걸 조어 해보면 ‘닥쳐’ 이런 내용이 되기도 하니까 심지어 지금 세대의 리우 사람들은 그 가사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그 정도인데 저는 어쩌면 그냥 그 사람의 이미지, 미디어를 통해 짤막짤막하게 알게 된 것들 혹은 내가 해석한 가사 내용, 목소리, 음악, 이런 것들이 어중간하게 뭉쳐져서 ‘나는 시쿠 부아르키 팬’이라고 하나보다 생각이 드니까, 이제는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겠는 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은, 그런 상태예요.

 

이 책이 본인에게 위안이고 쉼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루시드폴 | 사실 저에게 《부다페스트》는 굉장히 복합적이에요. (위안이고 쉼이었던 반면에) 좌절이기도 하고요.

 

제가 다른 언어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이긴 한데 언어적으로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지는 물음표에요. 욕심은 많아서 중학교 때 중국어도 배우고 일본어도 배웠는데 실제로 말을 빨리빨리 습득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더 이상 다른 나라말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졌어요. 번역하면서 더요. 작년까지만 해도 일본어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듣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냥 놔버렸어요.

 

그러니까 글은 모르겠지만 말은 모어가 아니면, 내가 그 나라에서 평생을 완전히 섞여서 살지 않는 한 허무하게도 무의미하구나, 생각한 거죠. 관광 가서 몇 마디를 건네고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을 배운다는 건 정말 만만한 일이 아니구나, 하는 좌절 같은 게 있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모어가 아니면 그 말의 뜻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말을 몰라도 알아듣는 경우가 있는데요. ‘크리슈카’와의 첫만남에서 헝가리어를 모르는 ‘주제 코스타’가 그녀의 헝가리어를 알아듣는 것처럼요. ‘옮긴이의 말’에서는 이를 언어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인다는 말로 부연해주셨는데요. 언어를 초월한 그런 가능성에 대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 그런데, 마자르 말은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야, 그녀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문장이 완벽하게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포르투갈어, 아니면 영어, 아니면 심지어 루마니아어로 말한 걸까. 난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단 한 단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바로 그 헝가리어로 말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녀는 확실히 말했다. 마자르 말은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야. 어쩌면 그녀는 언어를 노래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이해는 못해도 귀로 주워들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나는 억양만으로 그녀가 하려는 말을 알아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음악을 좀 아니까 가사를 추측하는 일이 쉬웠는지도 모른다. (79-80쪽)

 

루시드폴 | 저는 아닌데 저희 어머니요. 한국 아줌마들, 대단하시잖아요. (일동 웃음). 참고로 저희 어머니는 경남 사천 분이시고 외국어를 하나도 못하세요. 스위스 살 때 낮에 저는 학교를 가고 어머니는 집에서 음식을 해놓고는 하셨는데, 언젠가 한번은 갓김치를 담아놓으신 거예요. 어떻게 된 거냐고 여쭤보니까 시장가서 사셨대요. 말 한 마디도 못하는데. (웃음) 그리고 가족끼리 프랑스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무화과나무가 막 열려있었어요. 저희 어머니가 무화과나무에 대한 로망이 약간 있으신 것 같아요. 제가 기억하기로 무화과가 귀한 거였거든요. 그런 게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까 어찌할 바를 모르시는 거예요. 저거 따야 하는데 하시면서요. 그런데 그쪽 사람들은 무화과가 흔해서 그런지 따지도 않고 그냥 놔두더라고요. 그걸 저희 어머니가 주인한테 어떻게 얘기를 하고 따오셔서는 옆집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계시더라고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다 통해요.

 

포르투갈어를 배우면서 《부다페스트》 원서를 번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언어를 배우면서 번역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루시드폴 | 포르투갈어를 너무 배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혼자 책 보고 문법 공부도 했는데 어휘 같은 게 부족함이 많았죠. 브라질까지 갈 수는 없으니까 포르투갈에 여행가서 말 조금 배우고, 스위스에도 포르투갈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그 사람들 만나면 통하든 안 통하든 얘기하고 그랬어요. 그런 열정이 활활 불타오를 때 덜컥 《부다페스트》 번역 계약을 했는데, 그 후에 생존권에 직결된 문제들이 너무 많았어요.

 

일단 논문 마무리해야 했고, 실험이 또 지지리도 안 됐거든요. (일동 웃음) 한국 와서는 음악하고 음반 내는 일로 정신없어서 번역은 계속 뒷전이었어요. 그 사이 편집 담당자가 여러 번 바뀌었고 심지어 한 분은 나가서 다른 출판사를 차렸고 거기서 제 소설책이 나왔죠. 문득문득 전화 오면 깜짝깜짝 놀라고 (일동 웃음) 항상 뭔가 마음에 짐처럼 있다가 ‘아,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작년에 좀 여유 있을 때 초벌 번역을 했다가 다시 ‘올해 더 이상은 미루면 안 되겠다’ 싶어, 많이 할 때는 하루에 열네 시간 정도 붙잡고 있었어요. 그렇게 거의 마무리될 무렵에 담당자한테 한 1년 만에 문자가 와서 ‘판권이 곧 마감된다고’ (일동 웃음) 너무 죄송하면서 그래도 할 말은 있는 상황이었던 거예요. 다행히. 그래서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다, 그랬죠. (일동 웃음)

 

우여곡절 끝에 번역을 마무리하셨고 이로써 《부다페스트》를 소개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게 되셨는데요. 한국어로 소설을 접하는 독자의 경우, 아무래도 원래의 글맛을 온전히 느끼기란 어려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글맛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다면 어떤 점에 집중해 읽으면 좋을까요?

 

루시드폴 | 잘은 모르지만 사실 우리나라에는 낭독문학이라는 게 그리 많지 않잖아요. 시도 그렇고, 듣는 문학은 거의 없고 주로 책을 통해 읽죠. 그런데 전체적으로 이 책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읽어주는 톤이거든요. 문장 상으로는 짤막짤막하게 단문 위주로 깔끔하게 쓰여 있고 글로서 본다면 쉼표도 많고 중문도 많아요. 그래서 번역할 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도 많았는데 누군가가 읽어주는 책이다, 라고 가정하고 ‘주제 코스타’라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면 어떨까, 그렇게 읽어보시면 어떨까 해요.

 

또 소설에 약간 환상적인 것들이 있어요. 현실과 판타지가 모호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 봤을 때랑 되게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동화이긴 하지만 미야자와 겐지의 책도 어디부터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판타지인지 좀 모호하잖아요.

 

소설 중간에 현실과 환상이 섞이기도 하고 특별히 대화에 따옴표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번역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루시드폴 | 너무 어려웠죠. 특히 포르투갈어는 주어가 많이 생략 되니까 동사로 유추를 해야 돼요. 그마저도 어떤 동사는 1인칭, 3인칭이 같이 움직이는 경우가 있어 쉽지 않았어요. 계속해서 많이 읽는 수밖에 없었죠.

 

포르투갈어로 쓰인 소설이긴 하지만 제목이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고 주인공인 ‘주제 코스타’는 우연히 하룻밤 묵게 된 호텔에서 뉴스에 나오는 헝가리어를 듣고 매혹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후에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어로 시를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하고요. 번역하시는 동안, 헝가리어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다시 텔레비전을 켰다. 화장을 짙게 한 금발 여자가 자정 뉴스에 다시 나왔다. (…) 그걸 보는 나의 양어깨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보이는 것들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 단어라도 알아들으려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단어? 나는 헝가리어 단어의 생김새나 구조나 형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단어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조차 구별하지 못하니 단어와 단어를 떼어놓을 수조차 없다. 마치 칼로 물 베는 일처럼 나에게 헝가리어는 단어로 구성된 말이 아니라 끊김 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말로 들렸다. 멀리 어둠 속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는 정지된 장면이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한 번 더 강조하는 듯했다. 이제 더 이상 비행기와 관련된 소식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뉴스를 전하는 말의 신비로움에 그 수수께끼의 빛이 바래버린 것이다. (11-12쪽)

 

루시드폴 | <부다페스트> 영화를 봤어요. 어렵게 구해서 봤는데 ‘코스타’가 처음 ‘크리슈카’를 만나는 장면의 영상이 굉장히 아름다웠어요. 코스타에게 크리슈카가 “마자르 말은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고 두 사람이 서점을 나와 호텔에 가기까지 씬이 쭉 이어지는데, 크리슈카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가면서 끊임없이 말을 해요. 지붕, 애기, 물방울…… 코스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따라가면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더듬더듬 따라하고요. 그 장면이 전 너무 인상적이었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헝가리어가 음성학적으로 되게 듣기 좋았어요. 책으로는 헝가리어를 들을 수가 없으니까 기회가 되면 이 영화도 같이 개봉해서, 여기 나오는 몇몇 말들, 문장들이 귀로는 이렇게 들리는구나, 독자들도 같이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플라자…… 플라자…… 플라자…… 요. 그리고 호텔로 가는 길에 나는 처음으로 소요학파 식으로 헝가리어 수업을 받았다. 거리, 인라인 스케이트, 물방울, 웅덩이, 밤, 피자 가게, 디스코클럽, 바, 회랑, 가게 진열장, 옷, 사진, 모서리, 시장, 사탕, 담배 가게, 비잔틴식 아치, 아르누보풍 발코니, 신고전주의풍 파사드, 동상, 광장, 현수교, 이끼 같은 초록빛, 가파른 길, 리셉션, 로비, 카페테리아, 생수, 그리고 크리슈카. (81쪽)

 

시쿠 부아르키가 의도적으로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헝가리어도 굉징히 독특한 언어잖아요. 슬라브계에 속하지도 않고, 일종의 고립어라고 볼 수 있으니까. 책에도 헝가리 바깥의 삶이란 없다, 라는 말이 나오고요.

 

소설의 이야기가 리우 데 자네이루와 부다페스트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진행되는데요. 리우 데 자네이루와 부다페스트, 각각이 나오는 장면을 번역할 때 장소에 대한 묘사라든가, 특별히 신경 쓰신 점이 있으신가요?

 

루시드폴 | 부다페스트에 있는 장면을 어떻게, 리우 데 자네이루에 있는 장면을 어떻게, 이런 생각은 없었고 소설에 나오는 장소들을 직접 가보고 싶었어요. 리우 데 자네이루의 해변 보타보고나 코파카바나가 계속 나오는데, 그곳을 가서 보고 조금 더 생생하게 느끼면서 번역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죠. 리우 데 자네이루가 너무 멀면 부다페스트라도. 플라자 호텔도 찾아가보고 지하철도 한 번 타보고 싶었고요. 그런데 플라자 호텔은 5년 전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대요. 이름이 바뀌었다고요. 암튼, 가상의 공간이라도 더듬어서 찾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때 음반 작업이랑 맞물리면서 못 갔죠. 그래서 조금 아쉬워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언어 감수성’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말의 뜻을 알기 때문에 좋은 것도 있지만 뜻은 모르고도 그 말의 울림 때문에 좋은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나라 말이든 혹시 유독 좋아하는 단어가 있으신가요?

 

루시드폴 | 한 글자 단어를 좋아해요. 쉼, 흠, 숨, 틀…… 저한테는 순 한글로 된 한 글자 한 음절의 말이 굉장히 임팩트 있게 느껴져요. 선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고요. 그래서 심지어는 5집 앨범을 구상할 때 앨범 타이틀 제목을 집, 모든 노래의 제목을 한 단어로 지을까 진지하게 생각했어요. 새, 움, 터 등 너무 많은 거예요. 이런 한 음절 우리말이 전 되게 좋아요.

 

그런가 하면 언어만큼이나 소설에서 중요하게 그려지는 게 ‘부다페스트’라는 장소입니다. 이 소설의 경우처럼, 음악이나 소설 작업 하시면서 장소 자체로부터 영감을 받기도 하시는지요.

 

루시드폴 | 저는 절대적이에요. 어디에 살고 있고, 어떤 집에 살고 있는지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 내가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차를 타고 무슨 음식을 먹는지 보다 더 중요한 게 환경이에요. 그래서 한국에 왔을 때도 이 동네(이 인터뷰의 장소이기도 했던 삼청동)에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게 우선은 좀 걸어 다닐 수 있고, 걸어 다녔을 땐 눈이 피로하지 않은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영감을 준다기보다는 그냥 제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그게 그대로 음악으로 연결되니까, 제게는 굉장히 중요하죠.

 

글을 쓰면서 음악을 하는 게 훨씬 편해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다페스트》를 번역하고 나서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거나 변화를 겪은 게 있으신가요?

 

루시드폴 |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도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작년에 소설책을 썼던 거, 그게 가장 큰 변화에요. 앞으로 또 소설을 쓰게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부다페스트》가 저한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도 생각하고요.

 

《부다페스트》 말고 따로 소개하고 싶은 시쿠 부아르키의 소설이 있으신가요?

 

루시드폴 | 없어요. (일동 웃음) 《부다페스트》가 끝이에요. 아마도. 글쎄요. 지금은 모르겠어요.

 

번역하시면서 많이 힘드셨다고 했는데 혹시 어떤 이유로든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 있다면 《부다페스트》처럼 다른 나라 말을 우리말로 옮겨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계획이 있으신가요?

 

루시드폴 | 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말은 포기했고 (웃음) 사어들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배울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예전에 산스크리트어를 한 3개월 배웠는데 그땐 학위 과정 중이라서 저도 너무 방만하게 공부했어요. 산스크리트어가 사어라고는 하지만 그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끼리는 모여서 세미나하고 토론할 때 실제로 말을 한다고도 해요. 또 라틴어도 5년 혹은 10년, 좀 길게 보고 공부해보고 싶어요. 사실 그 생각은 이미 몇 년 전에 했고 그래서 책도 사놓았어요. 번역하고 싶은 책도 있고요. 그런데 이건 평생의 일처럼, 언제 하게 될 지 또 얼마나 걸릴 지는 잘 모르겠어요.

 

소설을 많이 안 읽는다고는 하셨지만, 좋은 책을 받아들여서 번역을 하셨고 그 영향으로 소설을 쓰시기도 했는데요. 평소, 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이 따로 있으신가요?

 

루시드폴 | 작년에는 특히 신문 서평을 많이 읽었어요. 제가 모든 신문을 읽지는 않지만 집에서 보는 한겨레, 그리고 경향신문 서평도 좋아해요. 서평 보고 마음에 드는 책 있으면 메모해 놓았다가 서점가서 책 보고 결정해요. 그런데 10권 메모해 가면 1권 마음에 들랑말랑? 거의 10% 정도 남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해서 사고 싶은 책 있으면 사고 아니면 그냥 돌아오죠.

 

한 번에 한 권씩만 고르신다고 들었는데, 최근에 선택된 책은 뭔가요?

 

루시드폴| 좀 부끄럽지만 최근에는 책을 많이 못 읽었어요. 마지막에 산 책이 귀농 관련 책이었어요. 농촌에서 뭐 먹고 살지, 얘기하는 책. (웃음)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공항에 있는 서점에서 눈에 띄어 사서 읽었어요.

 

 

이번에 새 앨범하고 이 책 하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왔어요. 두 개 다 홍보하시느라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루시드폴 | 아니, 안 힘들어요. (일동 웃음) 저, 앨범 홍보 끝났어요. 이제. (일동 웃음)

 

그럼 올해 직접 쓰신 소설도 나오고 번역하신 소설도 나오고 앨범도 나온 거잖아요. 앞으로도 이 세 가지를 병행하실 계획이 있나요?

 

루시드폴 | 모르겠어요. 음악은 지금처럼 계속 할 텐데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하려고요.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시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요?

 

루시드폴 | (화들짝 놀라며) 소설이요? 쓰다가 접었어요. (일동 웃음) 지금 내년 계획을 머릿속에 세우고 있는데 변화가 굉장히 많을 것 같아요. 저의 신상의 변화, 그리고 제가 앞으로 음악을 하든 책을 쓰든, 방법상의 변화가 굉장히 많을 것 같아요.

 

책도 나오고 음반도 나왔으니 올해 계획하신 일들은 거의 다 이룬 셈인데 얼마 남지 않은 12월, 어떻게 보내실 계획인가요?

 

루시드폴 | 몸이 너무 안 좋아졌어요. 글 쓰는 분들은 계속 운동하고 관리를 하시던데, 제가 좀 심각하게 안 좋아졌어요. 목이랑 허리가. 살도 너무 많이 빠졌고요. 그래서 내년 봄 되기 전에 재활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잘 먹고 아무 생각 없이 운동하고 치료받아야겠다 싶어요. 내년 한 2월까지.

 

마지막으로 아직 《부다페스트》를 만나지 못한 독자 분들에게 추천사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루시드폴 | 사람이 웃긴 게요. 제 소설책 나왔을 땐 많이 사랑해주세요, 이런 거 못하겠더라고요. (일동 웃음) 그런데 이 책은 많이 팔렸으면 좋겠어요. 물론 저한테 인세가 더 들어오는 건 아니고요. (일동 웃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시쿠 부아르키라는 사람이 조금 더 알려졌으면 싶어요. 누군가 이 소설을 보고 재미있어 했다면 이 사람이 하는 음악은 어떨까, 찾아볼 수도 있잖아요. 그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 음악 좋네, 생각할 수 있고요. 음악 하는 사람 입장에서 아쉬운 게, 우리나라 음악시장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음악도 그렇지만 청자들이 듣는 음악도 북미 위주고요. 예전에 제가 월드뮤직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세상은 넓고 좋은 음악들은 너무 많거든요. 그런 면에서도 조금이라도 기여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루시드폴 

 

1975년 3월생. 음악인, 화학자. 1998년 인디밴드 미선이의 첫 앨범 'Drifting'으로 데뷔했다. 2001년 루시드폴 1집 을 시작으로 <오, 사랑>, <국경의 밤>, <레미제라블>, <아름다운 날들>, <꽃은 말이 없다.>까지 모두 6장의 정규 앨범을 냈다. 2008년에는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9년에는 미국 화학회지에 논문 「Micelles for delivery of nitric oxide」를 발표했다. 지은 책으로는 가사집 《물고기 마음》과 시인 마종기와의 서간집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소설집 《무국적 요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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