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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07 《사포》 - 아슬아슬하게 아찔하게

《사포》 - 아슬아슬하게 아찔하게

 

 

 

 

알퐁스 도데 | 《사포》 | 예문 | 2014

 

《사포》에는 사랑에 대한 풍부한 묘사와 그 앞에 웅크리고 발가벗겨진 인간의 모습이 있다. 장과 파니에게서 예상치 못했던 사랑의 숨은 그림자들을 발견한다.

‘연애’보다도 ‘사랑’은 그 깊이를 가늠하기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언제나 쉽게 달라져 버릴 것을 알고도, 늘 사랑에 대해 정의하고 싶어 하는 연유 또한 이 때문이 아닐까. 사랑이란 그것의 본질적 속성 위에 유연한 형체들을 지닌 모습으로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만 같다. 다양한 문학 작품 속의 새로운 주인공과 그들이 알려주는 모든 것을 통해, ‘사랑’의 정의를 하나씩 보태어 본다.

알퐁스 도데의 《사포》에 그려진, ‘파니’에 대한 ‘장’의 사랑 또한 그러하다. 사랑은 때때로 이유를 짚어낼 수 없는 따스한 분위기와 찰나에 다가와 환락 같은 안온함에 사뿐히 자리한다. 선택과 결정을 위한 움직임을 알아차잖기도 전, 순간의 얕은 변화에 자리를 쉽게 내어 주는 것이 사랑의 시작일 뿐일지도 모른다. 다만, 순수한 열병과 같은 감정의 휩쓸림만이, 경외심과 찬탄과 아름다움, 희생과 헌신, 그것들만이 ‘사랑’을 그리지는 않는다. 사랑이라는 슬하는 이리도 깊고 넓다. 알량한 허세 의식, 진흙탕 같은 질투, 우둔함, 나약함, 동정과 연민, 광포한 충동, 우유부단함 속에서도 사랑은 미약한 숨을 내뱉는다. ‘장’이 그것을 알려주었다.

프랑스 남부의 명망가 자제인 장은 외교관 시험 준비를 위해 파리에 있었다. 그는 무도회에서 15살 연상의 파니를 만난다. 고지식하고 엄격한 편이지만 순진하던 장은, 파니와의 관계가 집안과 자신의 미래보다 중하지 않고 마뜩잖음을 느끼면서도 파니의 지속적인 구애와 질긴 숙명과도 같은 끈에 의해 점차 그녀에게로 이끌린다. 장은 곧 파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신경 쓰며 그녀와 동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 난 사랑에 빠진 걸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렇지만 어쨌든 이처럼 나를 따스하게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사랑어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한 게 아닐까?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이러한 행복을 접어 두고 살아올 수 있었지··· ··· 타락이라든가 구속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얼마나 우스운 얘기야··· ··· 이 세상에서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이 여자 저 여자와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 한 여자의 사랑을 받으며 편안하게 지내는 지금의 생활을 더 불결하고 추하다고 할 수 없지··· ··· (본문 중에서)

그는 외무부의 연수 기간인 3년 동안만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면 될 거라고, 스스로 불안을 자위했다. 황홀감에 도취되어 신혼 같은 생활을 보내던 그때 의도치 않은 일들이 발생한다. 무도회를 주최했던 디셸레트와 유명한 조각가 카우달을 만나, 파리 사교계의 꽃으로 많은 예술가와 사랑을 거쳐 온 파니의 과거에 대해 듣게 된 것이다. 사랑의 경외심을 찬양하던 라구르너리 시의 사포가 파니였다니, 카우달이 조각한 브론즈 빛의 아름다운 사포가 파니였다니. 파리의 유명 예술가들의 뮤즈, 그녀가 '사포'였다. 그는 역겨움과 더러움을 느끼며 파니를 향한 경멸스러운 감정에 비틀거리면서도, 속마음에 생경한 목소리가 울린다.

생각이 이쯤 미치자 장은 당대의 프랑스를 뒤흔드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거쳐 간 여자를 자신도 한번 안아봤다는 우쭐함과 그 예술가들이 자기더러 미남이라고 불러 주었다는 데 대한 묘한 자부심이 어이없게도 마음 한구석을 차지해 가는 걸 느꼈다. 그의 나이 때에는 무엇이든 확실한 게 없으며 더군다나 세상에 대한 이해라든가 삶에 대해서 아직도 방황과 모색을 시도하는 때라 남들이 조금만 부추겨도 세상이 다 제 것인 양 믿는 법이다. (···) 장 역시 그랬다. 라구르너리가 아름다운 운율로 시를 적어 노래하고 카우달이 심혈을 기울여 대리석과 브론즈로 조각한 사포의 모습이 후광에 싸여 그의 머릿속에서 자꾸 커져만 갔다. (본문 중에서)

파니의 곳곳에 새겨졌을 지난 사랑의 방탕한 흔적들과 함께 파니의 출생과 집안에 관한 사실들이 연달아 베일을 벗는다. 감추어 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 후, 파니는 이전의 고귀함과 조심스러움을 버리고 장 앞에서 거침없고 난잡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그즈음 도착한 고향의 편지를 빌미로, 장은 파니와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끝낼 결심에 이른다.

혼란스러움과 질척거리는 사랑놀음에 진이 빠져버린 장은, 고향으로 돌아와 평온함과 순수함에 젖어든다. 결국 그는 파니에게 이별을 고한다. 얼마 가지 않아 전원생활의 고루함과 나른함에는 싫증이 났지만, 행간에 녹아나는 애정이 애무와도 같은 파니의 편지는 계속되었다. 궁금함과 기다림은 애틋한 마음과 그리움으로 색칠되어 가고. 장과 파니는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떨어져 있던 여백만큼의 새로움에도―새로움이 늘 그렇듯― 아주 짧은 행복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겨우 지켜보았을 따름이다. 짧았던 새로움이 퇴색되고 장은 다시 허물을 벗겨내 벗어나야 할 구실을 들먹였다.

남루해지던 생활이 이어지던 중 장은 급작스레 나타난 어린 소녀에게서 모든 것이 합당하고 정돈된 것만 같은 구원을 발견한다. 소녀는 좋은 집안의 자제였고 젊었으며 싱그러웠다. 그렇게 파니를 떨쳐 보냈음에도, 알 수 없는 잔영이 그의 온몸과 정신을 휘감았다.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채 혼자 사는 사람들 특유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허전하고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것은 끝나 버린 사랑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다는 갑자기 잃어버린 분신을 향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한솥밥을 먹고 잠자리를 같이하던 날들이 켜켜로 모여 보이지 않는 견고한 천이 한 올 한 올 짜지기 마련이며 그런 관계가 느닷없이 단절되었을 때 그 견고함은 고통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본문 중에서)

혼란과 방황의 시간을 꾸역꾸역 넘기며 새로운 소녀와의 그것이 사랑이자 행복이라고 다짐하던, 장은 그가 보냈던 편지들을 돌려받으러 파니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맞닥뜨린 파니의 옛사랑과 흐트러진 침대 시트에 장은 광포한 질투에 휩싸인다. 그날, 장은 파니를 떠나지 못했다. 그는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곧 제자리로 돌아와 버리는, 늪에 머물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는 영원히 장에게서 멀어지는 길을 택한다. 장은 저 멀리 사라지는 파니의 모습을 바라본다.

완전히 파멸해 버린 자신의 허망한 삶이 바위가 파도에 씻겨나가듯 그의 가슴속에서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아름다움과 경외심으로 점철된 열정만이 사랑은 아니다. ‘파니’를 향한 ‘장’의 사랑은 질척했고 갑갑했지만, 처절할 만큼 순수하고 원색적이기까지 했다. '사랑'의 또 하나의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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